이래서 글은 착지점을 생각해두고 뛰어내려야 합니다.
아니면 이렇게 됩니다(절레절레
……그렇게 부모의 원수를 보는 눈으로 볼 것까지야…….
카가미는 생각했으나 굳이 그것을 입에 담지는 않았다. 쿠로코랑 만난 지 약 10년. 아무리 둔하다는 소리를 듣는 카가미라도 어떤 말을 해도 되고 해선 안 되는지 정도는 안다. 거기다 지금 쿠로코의 눈빛을, 카가미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본 적이 있었다.
“아직 빌어먹을 초콜릿도 남아있는데 또 이런…….”
평소엔 들을 수 없는 낮은 목소리가, 역시 평소엔 들을 수 없는 꽤 험한 말을 입에 담았으나 카가미는 못 들은 척했다. 잘만 하면 쿠로코 혼자 몇 마디 험한 소리를 퍼붓는 정도로 끝날 수 있다. 아니, 물론 그걸로 그의 화가 잠재워진다는 것은 아니고 어떻게든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카가미의 필사적인 노력이 뒤따라야 하지만 어쨌든 직접적인 피해는 면할 수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카가미 군.”
그의 인내력은 한달 전 발렌타인 데이 때 바닥을 보인 모양이었다. 자신을 향한 어두운 눈동자와 낮은 목소리에 절로 등이 펴지는 것을 느끼며 카가미는 입장이 난처해지면 나오는 존댓말로 대답했다.
“네…….”
“혹시 이 중에 직접 받은 것도 있나요?”
“……어…… 저기…….”
“있나요?”
재차 묻는 말에 카가미는 뒤로 물러서려는 다리를 간신히 붙잡으며 끄덕였다. 쿠로코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으나 뒤로 뭔가가 보인다. 악한 기운 같은 게.
“어느 건가요?”
“제일 위에 있는 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쿠로코의 손에 힘이 들어가고, 마침 그의 손에 들려있던 박스가 매우 불온한 소리를 냈다. 카가미는 속으로 그것을 선물한 팬에게 짧은 사과를 읊었다. 이제 시작이겠지만.
답지 않을 만큼 난폭한 손길로 쿠로코는 카가미가 가져온 캐리어에서 화려하게 포장된 상자들을 하나씩 꺼내기 시작했다. 카가미는 초콜릿이라면 한 상자에 몇 만엔 씩 하는 고급 브랜드를 몇 개나 말할 수 있었지만 이렇게 비싼 사탕 브랜드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손에 들어올 줄도. 지금까지 팬에게 받은 것들 중에는 정말 기상천외한 것도 많았으니 거기에 비하면 충분히 상식선이긴 하지만…….
화이트데이에 좋아하는 농구선수에게 사탕 선물. 그렇게 특별하지도 않은 그 행위가, ‘좋아하는 농구선수의 애인’ 입장에서는 매우 거슬리는 모양이었다.
쿠로코가 상자를 하나하나 꺼내 어떤 브랜드인지 살피고, 편지가 있으면 이름을 확인하고(카가미는 차마 내 팬레터이니 보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안 찢기는 게 다행이었다.), 마치 연인에게나 보낼 것 같은 선물에 남자 이름이 쓰인 편지가 함께 나올 때마다 조용히 분노 게이지를 높이는 작업이 이어졌다. 오들오들 떨며 가만히 그를 지켜보던 카가미는 마지막 상자가 쿠로코의 손에서 벗어나는 순간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꽤 길어진 앞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는 표정. 일단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대체 이건 뭘 어떻게 해줘야 풀어지는 거지……?
“카가미 군. 이적 할 생각 없습니까?”
“헤…… 하? 이적? 갑자기 뭐…….”
“지금 소속팀에서 카가미 군을 이용하는 방식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네. 잘못되고말고요. 그야 카가미 군은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프로로 활동하게 되면 당연히 팬이 생기겠지요. 카가미 군이 이상형이라고 하는 여성팬이 생기는 것도 예상한 바였습니다. 그래서 발렌타인 데이 때도 참고 넘어간 거고요. 하지만, 이건 아니잖습니까!”
쾅 소리가 나게 쿠로코의 주먹이 바닥을 때렸고, 그 충격에 바로 옆에 쌓아둔 상자의 탑이 무너졌다. 거기엔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도 쿠로코의 팔이 바람소리라도 낼 것처럼 격하게 움직여서, 손가락으로 무너진 상자들을 가리키더니.
“제가 본 것만 이만큼입니다! 카가미 군의 허벅지가 어쨌다느니 가슴이 좋다느니 꼭 한 번 만나고 싶다느니 늘 카가미 군만 생각하며 잠드…… 누구 허락을 받고 카가미 군 생각을 하면서 자요?! 찾아가서 자는 사이에 얼굴에 젖은 수건 올려도 됩니까?!”
“참아 쿠로코, 그러면 죽어!”
쿠로코라면 사람이 자고 있는 집에 들키지 않고 침입하는 것 정도는 가볍게 할 것 같아서 더 무섭다.
“심지어 이게 1진이라구요?! 벌써 이만큼인데?! 1진?! 지금 저랑 장난합니까? 지금 누구 도는 꼴 보고 싶어서 이러는 겁니까? 애초에 팀에서 카가미 군을 그렇게 이상하게 팔지만 않았어도 이런 게 오진 않았을 거 아닙니까!”
이상하게. 거기에 카가미는 반박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했다.
많은 고민 끝에 카가미는 일본 프로리그에 남았다. 농구를 하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꾸는 NBA라는 꿈을 그도 꾸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농구를 좋아하기 때문에 더욱, 일본에 남아 비인기 종목 취급을 당하는 농구를 끌어올려보자는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 말을 한 것이 쿠로코였고, 아오미네도 거기에 찬성하여 일본에 남기도 했고, 마침 프로 제의가 꽤 들어왔다는 것도 있었지만 가장 큰 것은 역시 농구를 인기 종목으로 만들자는 데에 카가미가 크게 동감했기 때문이다.
카가미가 첫 번째 팀으로 선택한 건 성적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역사만큼은 이럭저럭 있는 팀이었다. 꼴찌를 할 정도는 아니지만 상위권에 들 만큼은 아니고, 시즌을 대표할 만큼의 스타 선수도 없는 팀. 쉽게 말해서 가진 거라곤 ‘오래 됐다’라는 타이틀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시시하기 짝이 없는 팀이었다.
그리고 카가미는, 프로로 데뷔한 그 해에 아오미네가 소속된 팀과 맞붙어 양 팀의 경기 장면이 저녁 뉴스 시간에 나오도록 만들었다.
순조로워 보였다. 젊고 남자다운 매력이 흘러넘치는 동갑의 라이벌 선수. 화제성과 스타성만큼은 그 해 고교 야구에 비견될 정도였다. 취재 요청이 물밀듯이 들어왔고, 소속팀은 언론 노출도를 최우선으로 하여 카가미의 스케줄을 조정했다. 안타깝게도 세상은 카가미가 어떤 농구를 하는지에 별로 주목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일단 스타 선수로 얼굴만이라도 팔아두면 어떤 식으로든 팀에 이익이 된다. 높으신 분들은 그렇게 판단한 것 같았고, 아주 틀린 판단도 아니었다. 실제로 여성 관객이 꽤 늘었으니까. 문제는, 그 여성팬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찍은 광고의 컨셉이 다른 층에도 어필해 버리고 말았다는 데에 있었다.
“회, 회사도 이것까지는 예상 못했으니까 어쩔 수 없잖아…….”
남성팬이, 그것도 카가미에게 이상할 만큼 열을 올리는 남성팬이 늘어난 것이다. 처음에는 임펙트가 강해서 그렇지 실제 비율이나 절대수는 적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산이었다. 그들은 마치 서로 약속이라도 하고 화이트데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차라리 아예 성적인 발언이 팬레터에 쓰여 있으면 소속팀에 이야기를 했을 것이다. 혹은 스토커 피해라도 입었다면 아예 법적인 대응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팬레터들은 하나같이 카가미에 대해 이상하리만치 뜨거운,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롱이라고 단정하거나 스토킹이라고 하기엔 부족한 애정을 담아냈다. 카가미가 아예 연예인이었더라면 회사 쪽에서 철저하게 대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소속된 것은 스타 선수라는 게 있어본 적이 없었던 농구팀이다. 인기가 커진 만큼 폭주한 팬이 카가미에게 직접적인 위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경계심 정도는 있는 모양이었으나 이런 쪽으로 인기가 생길 거라는 건 생각조차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팬레터를 직접 보는 카가미와 쿠로코만 속이 탈뿐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게 어디 있습니까! 카가미 군은 그 팀에 소속된 선수라구요! 팀에서 관리해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닙니까! 편지에만 안 써있다 뿐이지 이 사람들이 카가미 군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와아, 하지마! 말하지 마!”
카가미는 서둘러 큰소리를 냈으나 그게 쿠로코에게는 거슬린 모양이었다. 무표정을 유지하던 동안이 일그러지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아나 보네요?”
말하며 앉아있던 거실 바닥에서 일어서는 쿠로코에게 카가미는 이번에야말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그게 또 쿠로코 성질을 긁었다. 아아, 나 바보 멍청이.
“쿠로코, 저기, 그 사람들은 그냥 생각하는 것뿐이고, 진짜로 나랑 어떻게 하고 싶다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하고‘는’ 싶겠죠. 실행할 용기나 행동력이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지, 또 얼마나 늘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설득을 꾀했으나, 카가미의 언변 수준으로 쿠로코를 진정시킬 수 있을 리 없었다.
“카가미 군, 인터뷰에서 애인 관련 질문에 전부 노코멘트로 일관하고 있으니 뭘 어떻게 상상하고 있을지 아주 궁금하네요. 노멀인 카가미 군의 처음을 따먹는 상상을 하려나요. 아니면 자기들 편하게 게이인 카가미 군이 위에 올라타서 흔들어주길 바라려나요. 아아, 카가미 군한테 박히고 싶은 사람도 있겠군요.”
“쿠로코!”
참지 못하고 카가미는 크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쿠로코는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객관적인 예상이잖습니까.”라고 하는 쿠로코에게 카가미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리 그래도 어쨌든 팬에게 그런 말을 하지 말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카가미가 편지에서 묘한 오한을 느끼는 일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사실이지만, 그래도…….
“뭐, 카가미 군이 자기보다 머리 하나 작고 힘도 약한 별 볼일 없는 작가에게 박힌다는 생각은 못하겠지만요.”
몸에 비해 큰 쿠로코의 손이 카가미의 팔뚝을 잡았다. 아플 정도로 세게. 뿌리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뿌리치겠다는 생각은 들지도 않았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단 한번도.
뿌리치는 대신 카가미는 잡히지 않은 쪽 팔을 뻗어 쿠로코를 끌어안았다.
“알았어. 뭐든 다 해줄 테니까, 기분 풀어.”
“……카가미 군이 몸로비를…….”
“하?! 그런 거 아니…… 아아, 됐어! 그냥 그렇다고 쳐!”
품안의 쿠로코가 불만스러워 하는 게 느껴졌다.
“몸로비가 무슨 뜻인지는 알고 그렇다고 하는 건가요, 지금? 그럼 ‘빨리 테츠야한테 따먹히고 싶어요 넣어주세요’라고 해보세요."
“‘빨리 테츠야한테 따먹히고 싶어요 넣어주세요.’”
“……맘에 안 듭니다.”
자기가 시켜놓고서 왜 부끄러워하지 않느냐느니 정말 시킨다고 다 하냐느니 툴툴거린다. 해줘도 불만이야. 복잡한 인간이다. 아니, 단순하지만.
대충 불만 성토가 다 끝났는지 조용해진 쿠로코의 등을 카가미는 가볍게 두드렸다.
“기분 달랜다고 내가 뭐든 다 해주겠다고 하는 건 너뿐이야. 알잖아. 네가 시키는 거 아니면 내가 미쳤다고 그런 소릴…… 아-. 할지도 모르지만.”
“……뭐라구요……?”
팔을 붙잡고 몸을 떼어내더니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본다. 잡힌 부분에 멍이 들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카가미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네가 인질로 잡히면.”
놀라움. 이어서 쑥스러움을 포함한 화난 표정.
“제가 인질로 잡혀도 그런 소린 하지 마세요.”
“아니, 네 목숨이 난 더 중요한데…….”
“일생일대의 미스디렉션을 써서라도 자력으로 탈출할 테니 하지 마세요.”
“알았어.”
순순히 항복하자 쿠로코는 가만히 카가미를 보고 있다가, 그를 잡고 있던 팔을 끌어당겨 이번엔 자기 쪽에서 카가미를 안았다. 그리고 깊은 한숨.
“성질부려서 미안했습니다. 카가미 군에게 화난 게 아니에요.”
“알아.”
“하지만 이적 얘기는 끝나고 다시 하죠.”
아, 그건 포기 안 하는구나. 생각하면서 카가미는 이번엔 팔뚝이 아니라 제대로 손을 잡은 쿠로코가 침실로 앞장서는 것을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