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움직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쿠로코는 세수하러 숙였던 고개를 도로 들었다. 하지만 그곳에는 간밤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따져 묻고 싶어지는 머리 상태를 한 자기 얼굴이 있을 뿐이었다. 그 뒤로는 닫힌 욕실 문과 타일 벽, 벽에 걸린 수건 거치대와 걸려있는 수건. 움직일 만 한 건 아무것도 없다. 벌레라도 있는 건가 했지만 뒤돌아 벽과 바닥을 훑어봐도 움직이는 것은 역시 없었다. 아니, 애초에 그런 종류의 움직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굳이 따지자면 인기척 같은……. 유령? 이 시간에? 내가 유령이라면 좀 더 괜찮은 시간대를 고른다. 지금이 오전 11시 조금 안 됐으니까, 12시간 정도 후로.
거기까지 생각하고 쿠로코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뭔가를 잘못 본 거겠지. 혼자밖에 없는 욕실에서 거울 속에 누군가가 움직인 것 같았는데 확인해 봐도 아무것도 없었다니 너무 허무해서 어디 게시판에 올리지도 못할 이야기다. 물론 이런 허무한 이야기라도 “혼자 화장실 못 가면 네가 책임 질 거야?!”라며 눈물까지 글썽일 사람도 있지만. 쿠로코는 제 입 꼬리가 절로 올라가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찬물을 얼굴에 끼얹었다.
오랜만에 농구부 연습이 없는 일요일. 쿠로코는 휴일을 만끽하며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절대 아침이라고는 말하지 못할 시간에 눈을 떴다. 농구부 연습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농구부 동기들과도, 다시 사적으로도 가끔 얼굴을 보게 된 중학교 때의 친구들과도 오늘은 약속이 없다. 물론 카가미와도. 그런 의미에서는 정말로 오랜만에 손에 넣은 혼자만의 휴일이었다. 사람들과 만나서 농구를 하는 게 싫다는 건 절대로 아니지만 역시 가끔은 혼자 느긋하게 책을 읽는 휴일을 보내고 싶은 법이다.
오늘은 기필코 어제 산 책을 다 읽겠다고 결심하며 쿠로코는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방으로 도로 들어갔다. 찬물로 얼굴을 씻고 나자 맑아진 머리는 어젯밤에 결국 다 읽지 못하고 잠들어 버린 이야기의 뒷부분을 갈구하고 있었다. 배가 고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조금 있으면 점심때다. 지금 뭘 먹는 것보단 얌전히 어머니의 점심 식사를 기다리는 것이 나을 거라고 결론짓고 쿠로코는 그 때까지 독서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협탁에 두었던 책을 집어 들고 쿠로코는 스탠드가 있는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 책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은 쿠로코는 문고판 표지를, 그곳에 그려져 있는 빨간 머리 소녀를 보았다. 그리고 거의 반사적으로 이젠 빨간색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자신의 팀메이트를 떠올렸다.
어제, 좋아하는 시리즈의 신간을 살 생각에 들떠있는 자신에게 얼굴을 보자마자 “뭐 좋은 일 있냐?”라고 물은 것은 물론 카가미였다. 원래 표정 근육이 일을 잘 하지 않는 편인데다 미스디렉션 때문에라도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쿠로코다. 때문에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티가 나지 않았을 거라 자신했으나 카가미는 그런 쿠로코의 자신을 대번에 박살내었다. 그것도 “그냥 기뻐 보여서.”라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그럼에도 자신감이 사라진다든가, 좀 더 무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겠다는 생각 대신 묘한 기쁨과 쑥스러움이 밀려오는 이유를 쿠로코는 굳이 찾지 않았다.
교과서부터 시작해서 책이라는 물건은 잡지(그 중에서도 요리잡지와 농구잡지) 빼고는 보지도 않으면서, 서점에 가는 쿠로코 옆을 당연한 듯이 걸은 것도 카가미였다. 문득 중학교 때 아오미네와 함께 집에 가다가 서점에 들렀을 때 그가 먼저 가버린 일이 떠올랐으나, 카가미는 다른 사람이 보면 매우 압박감 있는 무표정으로 쿠로코의 뒤를 따라 서점으로 들어왔다. 마치 그게 당연한 일인 것처럼. 거기에 아무 말 않았지만 가슴 속이 묘하게 간지러웠던 이유도, 쿠로코는 애써 생각하지 않았다.
“무슨 내용인데? 그거.”
“카가미 군이 웬일인가요. 책에 관심을 다 보이고. 혹시 내일은 한겨울에 벚꽃이라도 만개하는 건가요?”
“너는 한 마디 걸러 한 번씩 날 바보 취급 안 하면 입에 가시가 돋치지? 엉?”
하며 쿠로코의 머리를 한 번 힘 줘 누른 왼손은 금방 도로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아프지도 않은 그 물리력 행사에 속으로 웃으며.
“그치만 카가미 군, 글자만 읽기 시작하면 꾸벅꾸벅 졸잖습니까. 거기다 현대국어 교과서도 똑바로 못 읽을 만큼 파멸적인 한자 실력으로 소설을 읽는 건 매우 힘들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조금은 늘었거든?!”
아주 조금은 말이죠. 하고 말없이 대꾸하고 쿠로코가 잠시 기다리자 삐친 듯한 표정으로 카가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그렇게 신나서 읽는 게 대체 뭔지 궁금해서 그런다. 그럼 안 되냐?”
“안 될 건 없습니다만…….”
———그건 마치 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말로 들리는데요.
라는 말은, 카가미에게도 스스로에게도 할 수 없어서 삼키고 대신 그가 물어본 책에 내용에 대하여 쿠로코는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굳이 따지자면 아동문학으로 분류되는 판타지 소설입니다. 표지의 이 소녀가 주인공이고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부류의 주인공입니다.”
“어떤데?”
어떠냐고 묻는다면…….
“밝고 긍정적인 사람입니다. 어려운 설명이 나오면 전혀 이해하질 못해서 같이 여행하는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기도 합니다만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따뜻한 사람이기도 하고요. 사랑보다 먹는 걸 더 밝혀서 로맨틱한 전개를 매번 망치기도 하지만 그것도 귀엽다고 할까. 전체적으로———”
마치
“———카가미 군 같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물어놓고 관심 없는 척 무표정하게, 그러면서도 고개를 끄덕이거나 하며 쿠로코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듣고 있었던 카가미의 동작은 그 순간 정지했다. 그리고 그것은 쿠로코 역시 마찬가지였다.
순간적으로 자기가 한 말을 되짚어본 쿠로코는 표정에는 드러나지 않았으나 아연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주인공. 남을 먼저 생각하는 따뜻한 사람. 먹는 것마저 귀여운…….
“아뇨, 이건,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어, 어…….”
대체 무슨 뜻이 아니라는 건지. 스스로에게 태클을 거는 쿠로코였으나 얼굴이 시뻘게진 카가미는 쿠로코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아는지 모르는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카가미 군 같이, 머리, 가…… 빨갛다는…… 그런 얘기를…….”
이게 무슨 헛소리야.
“어…… 응…… 머, 머리…….”
“네……. 머리…….”
바보처럼 ‘머리’라는 말을 복창하고서 얼굴이 새빨갛게 돼서는 눈도 못 마주치고 서있는 남자 고등학생 둘. 지금의 자신들이 얼마나 이상해 보일까 생각하고서 쿠로코는 당장이라도 수많은 책들 사이에 끼어 책장에 박히고 싶어졌으나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말없이 서로 바닥만 보고 있는 상황을 참지 못하고 쿠로코는 “그럼 전 계산하고 나갈 테니 카가미 군 먼저 나가 계십시오.”라고 답지 않을 만큼 빨리 말하고서 카가미의 대답도 듣지 않고 계산대로 향했다.
늘 그렇듯이 점원을 놀래게 만들고 서점 밖으로 나가자, 자동문 옆에 비켜서있는 카가미는 한겨울인데도 뺨에 손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제야 쿠로코는 서둘러 자신의 뺨에 손을 대보고, 카가미보다 혈액순환이 안 좋아서 그런지는 몰라도 그다지 뜨겁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그에게로 걸어갔다. 그 후로 별 의미 없는 대화(“샀냐?” / “네.”)를 한 번 나눈 후에 침묵이 이어졌으며, 헤어질 때 간신히 “다음 주에 뵙죠.”라는 인사를 건넸을 뿐이었다.
최근 카가미와 함께 있을 때는 거의 이런 식이었다. 아니, 쿠로코가 저런 실수-“카가미 군 같은 사람입니다.”-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기에 이렇게 서로 차마 눈도 못 마주치는 일이 매번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예전과는 다르게 묘하게 상기된 기분과 동시에 불편한 느낌이 남았다.
함께 농구를 하면서 마치 둘이 한 마음인 양 그와 호흡이 척척 맞아떨어질 때 기분이 고양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별로 농구를 하면서 연계 기술이 정확히 골로 이어진 것도 아닌데 카가미의 일거수일투족에 기분이 고양된다는 점에 있었다. 그가 자신에게 웃어주는 일이 늘어났다는 것을 느낄 때나 자신을 향한 서투른 배려를 실감할 때, 작게 중얼거린 말에도 놓치지 않고 대답해줄 때, 지나가는 소리로 먹고 싶다고 한 음식을 만들어줄 때, 당연한 것처럼 옆에서 걸을 때, ‘쿠로코’라고 이름을 부르는 매 순간마다. 그 때마다 쿠로코는 가슴 속이 묘하게 간질거리고, 목 뒤편에 누가 숨을 불어넣는 것 같고, 답지도 않게 크게 소리 지르며 뛰어다니고 싶기도 하고, 입을 꾹 다물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리고 싶기도 한 기묘한 충동에 휩싸이는 것이다.
하지만 충동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그 충동이 어떤 감정에서 비롯되는가에 있었다. 특정인-여기서는 카가미-이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혈액순환이 빨라지고 기분이 고양되는 감정. 말 그대로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이유. 쿠로코는 그것이 어떤 마음인지 모를 정도로 어리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그리고 동시에 카가미를 향하는 그 마음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어리지도, 어리석지도 않았다.
팀메이트다. 같은 학년의 같은 반인 동시에 팀메이트. 조금 더 말해보자면 파트너. 세이린의 에이스. 쿠로코 테츠야의 빛. 만약 누구랑 가장 친하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카가미라고 대답할 것이고, 하루 중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게 누구냐고 물어도 카가미의 이름이 나올 것이나, 그뿐이었다. 그뿐이어야 했다. 이런 감정을 향할 상대가 아니었다. 분명 카가미는 언동은 거칠지만 실은 상냥하고, 누구보다도 쿠로코를 봐주고, 쿠로코 스스로도 자신을 믿지 못할 때 흔들리지 않고 믿어주었지만 그래도,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때문에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양 뒤에는 언제나 불편함이 뒤따랐다. 그리고 하루빨리 이 이상한 고양도 그 뒤에 따라오는 불편함도 사라지기를 바라며 쿠로코는 몇 번이나 그런 감정이 아니라고 스스로에게 되뇌는 것이었다. 비록 살면서 여태껏 여자 친구 한 명 없었으나 분명히 자신의 연애대상은 여자뿐이라고. 그 증거로 친구들 사이에서 돌다가 어떻게 여기까지 오게 된 그렇고 그런 잡지들이 책장 뒤편에 몸을 숨기고 있었고, 사내애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음담패설에 솔선해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굳이 자리를 뜨지 않을 정도로는 흥미가 있었다. 모모이의 열렬한 대시에 반응하지 않는 것은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짝은 아오미네라고 죽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전혀, 하등의 문제도 없다. 쿠로코 테츠야는 노멀이다.
설사 카가미의 눈빛에서 자신과 같은 마음이 느껴진다고 해도, 어찌 해야 할지 쿠로코는 몰랐기에 그마저도 전부 없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카가미 역시 자신을 좋아한다고 해서, 그걸 어떡하란 말인가. 서로 좋아하니까 사귀기라도 하면 된다고? 남들처럼?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런 일은, 굉장히 이상한 일로 여겨졌다. 동성애에 대해 혐오라고 할 만큼 강렬한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설사 상대가 카가미라 해도 그건 마찬가지다. 그럴 리가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쿠로코는 지금의 관계에 만족하고 있었다. 서로를 믿으며 절차탁마하는 파트너이자 최고의 이해자. 충분하지 않은가. 친구라는 카테고리에서 이 이상 없을 정도가 아닌가. 그거면 충분하다.
……충분하다.
—————♪♬
갑작스럽게 울리기 시작한 노랫소리에 쿠로코는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돌렸다. 소리가 나는 곳은 침대 옆 협탁 위. 그리고 귀에 익숙한 이 멜로디는 분명 자신의 휴대폰 벨소리였다. 생각 중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리는 건 매우 심장에 안 좋은 일이라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협탁까지 걸어간 쿠로코는 휴대폰 화면에 표시되어있는 발신자 이름을 보고 뻗었던 손을 그대로 멈췄다.
「카가미 타이가」
이런 묘한 타이밍에 굳이 전화하지 않아도 될 텐데. 카가미가 자신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고 전화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툴툴거리며 쿠로코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카가미 군, 휴일에 웬일…….”
『쿠로코, 큰일났어!』
자신의 말을 끊고 쩌렁쩌렁 울리는 카가미의 다급한 목소리에 무언가 비상사태가 일어난 것을 감지하고 쿠로코는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하루 종일 붙어있는 반동인지 문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따로 전화하는 일은 잘 없는 카가미다. 그런데 카가미가 휴일에 전화를 건데다 첫마디가 ‘큰일 났어’라니. 심상치 않은 일임이 분명했다. 대체 무슨 일이…….
『네가 우리 집에 왔어!』
“………………네?”
바보 같이 되물은 자신에게 죄는 없을 거라고, 쿠로코는 자신했다.
문법이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내용이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전반적으로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가늠하기 힘든 카가미와의 통화내용은, 어쨌든 무언가 급박한 상황이니 당장 집으로 와달라는 것이었다. 솔직히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쿠로코는 반도 알아들을 수 없었으니 비상사태라는 것 하나만은 확실했고, 그는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것만으로도 쿠로코가 목도리도 제대로 두르지 않고서 집을 뛰쳐나갈 이유는 충분했다.
전철을 한 번 갈아타야 갈 수 있는 고급 주택가. 뛰어갈 수 있는 거의 모든 길을 전력질주로 달려 도착한 카가미의 맨션 정문 앞에서 쿠로코는 숨을 골랐다. 평소엔 카가미와 같이 오기 때문에 좀처럼 누를 일이 없는 인터폰을 누르고 기다리자 곧 “쿠로코?”라며 전자신호로 가공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리 비상사태라지만 누군지 확인도 안 하고 이름부터 부르다니, 이상한 사람이 쿠로코 맞다면서 들어오면 어쩌려고 이러는지. 나중에 한 소리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쿠로코는 대답하고, 곧이어 자동문이 다 열리기도 전에 그 안으로 몸을 집어넣었다.
곧장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마저 너무 느리게 느껴져서 신경질적으로 발끝을 바닥에 부딪치던 쿠로코는 이번에도 문이 채 다 열리기도 전에 무거운 상자 안으로 돌진했다. 곧장 닫힘 버튼을 누르고 위로. 인터폰으로 들은 카가미의 목소리는 전화 때보다는 조금 침착해진 것 같았으나 여전히 그에게서 좀처럼 보기 힘든 당혹감을 가득 담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초조함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달려 나가, 카가미 집 호수의 문을 두드렸다. 바로 옆에 있는 초인종의 존재는 안타깝게도 지금 쿠로코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카가미 군! 괜찮으신 건가요?! 대체 무슨 일…….”
계단식 맨션인 카가미의 앞집 주민이 휴일 아침의 소음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거란 생각조차 못하고 쿠로코는 주먹으로 쾅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두드렸다. 이윽고 발소리와 함께 도어락을 해제하는 경쾌한 전자음이 울리고, 문이 안에서 바깥으로 열리면서—————
“인터폰이 고장 난 것도 아닌데 문부터 두드리는 건 좀 그렇지 않아? ‘쿠로코 테츠야.’ 이쪽은 주말이라면서.”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이가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로 말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에…….”
“흠-. 이런 표정일 때 거울을 볼 일이 없어서 몰랐는데 꽤 바보 같구나.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
쿠로코의 동요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진지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한 소년은 마치 제 집 마냥 “멍청한 표정으로 멍청히 서있지 말고 일단 들어 와.”라며 몸을 비켰다. 너무 놀라 사고가 정지한 쿠로코가 반사적으로 그 말을 따르는 사이 소년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실로 향하더니 부엌 쪽을 향해.
“카가미 군. 네 ‘쿠로코’가 왔어.”
라며 말을 걸었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 식기를 뒤엎은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나고, “하?!”하고 익숙한 카가미의 목소리가 들린 후에—어째서인지 에이프런을 두르고 한 손에 식칼을 들고 있는 카가미가 달려 나왔다. 그는 아직도 현관에 서있는 쿠로코와 그 앞에 서있는 소년을 보고, 눈을 몇 번 깜빡이고, 빈손으로 눈을 한 번 비비고, 몇 번이나 두 사람을 번갈아 본 후에
“진짜 쿠로코가 둘이야…….”
라고 저도 모르게 말을 떨어뜨렸다. 그 말에 “그러니까 아까부터 그렇다고 말하잖아.”라고 무표정하게 대꾸하는 소년. 곧 그는 “그것보다 뭐 자르던 중 아니었어?”라는 말로 카가미를 부엌으로 돌려보내고서 다시 쿠로코 쪽을 돌아봤다.
“그만 멍 때리고 신발 벗고 들어오는 게 어때? 계속 거기 있으면 설명하고 싶어도 못 하잖아. 쿠로코 테츠야.”
잘은, 모르겠지만. 무슨 상황인지 여전히 이해가 안 가지만. 눈앞의, 자신과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교복을 입고 반말로 말하는 소년에게서 묘한 적대심을 쿠로코는 느꼈다. 그리고 저쪽에서 느껴지는 적대심 때문만은 아니지만 자신 역시 묘한 거부감이 차오르는 것도.
쿠로코는 저도 모르게 벌리고 있던 입을 겨우 다물고, 희미하게나마 미간을 찌푸렸다. 먼저 거실로 향하는 그를 잰걸음으로 따라잡은 쿠로코는, 소년이 당연한 듯이 거실의 소파에 앉기 직전에 그의 어깨를 붙잡아 몸을 돌렸다. 왠지 모르겠지만 카가미가 평소에 앉는, 그리고 이 집에 올 때마다 자신이 앉는 소파에 그가 앉는 것이, 겨우 그뿐인 행위가 너무나도 신경에 거슬렸다. 그리고.
“누군가요, 당신.”
무엇보다 마치 자신의 복제 인간 같은 소년의 정체를 쿠로코는 아직 몰랐다.
“보면 몰라? 쿠로코 테츠야잖아.”
“쿠로코는 접니다.”
곧장 반론한 쿠로코의 말에 희미하게 웃으며 “아아. 오랜만에 듣는다, 그 대사.”라며 알 수 없는 소리를 하고서 소년은.
“‘이쪽’의 쿠로코는 너겠지. 나는 ‘저쪽’의 쿠로코야.”
라고 더더욱 알 수 없는 소리를 했다. 표정을 더 찌푸리는 쿠로코가 보이는지 안 보이는지 소년은 “음-.”라고 목 울리는 소리를 낸 후에.
“이 설명은 너무 평면적이었던 것 같으니까 좀 더 말해보자면, ‘이쪽’의 원형인 ‘저쪽’의 쿠로코—말하자면 네 오리지널이라고 할까.”
“무슨…….”
이쪽? 저쪽? 원형? 오리지널?
“그러니까 넌 지금 날 보고 네 클론이나 도플갱어가 아닐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 반대라는 얘기지.”
잘은 모르겠지만
“네가, 내 복제품이란 소리야. 쿠로코 테츠야.”
쿠로코는 오늘 처음 만난 자신과 똑같이 생긴 타인에게 복제품이란 소리를 듣고 화가 안 날 만큼 성인군자는 못 됐다.
쿠로코는 다른 이가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표정이 굳었다. 지금까지 ‘묘한’이라는 수식어 뒤에 위치했던 적개심과 거부감이 단번에 눈에 보이는 형태로 자리를 잡았다. 소년의 쿠로코를 향한 감정도, 쿠로코의 소년을 향한 감정도. 둘 다 곧장 멱살을 잡을 만큼 다혈질은 아니었기에 손은 모두 얌전히 다리 옆에 붙어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 굳게 주먹을 쥐고 있었다. 말 그대로 일촉즉발. 이 두 사람이 폭발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기에 더 불온한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쿠로코-.”
발바닥이 가볍게 바닥을 때리는 소리와 함께 불온한 공기하고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목소리가 조금 말을 길게 빼며 쿠로코를 불렀다. 쿠로코와 소년이 동시에 돌아본 방향, 부엌 쪽에서 카가미가 뒤집개를 들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사 두 사람이 동시에 고개를 돌릴 줄은 몰랐는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지은 카가미는 역시 지금 상황에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질문을 던졌다.
“밥 먹었냐?”
“……아직.”
“……아직입니다만.”
정확히 겹쳐지는 목소리. 동시에 서로를 향해 고개를 돌린 쿠로코와 소년은 자신과 똑같은 하늘색 눈동자를 마주하고서, 거의 똑같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던 카가미는 여전히 난감한 기색이 있는 표정으로 하지만 어딘가 사태를 내던지는 듯한 한 마디를 그들에게 건넸다.
“그럼 일단 밥 먹고 하자.”
그리고 그는 “배가 고프면 전쟁도 못 한다고 캡틴이 그랬으니까.”라며 다시 부엌 안쪽으로 사라졌다.
사람이 오면 식탁으로 용도가 변하는 거실의 커피테이블 위에 늘어선 음식들은, 언제나 그렇듯이 처음 본 사람으로 하여금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쿠로코와 똑같은 소년이 그러했다. “난해한 캐릭터성이네.”라고 한 마디 던진 후에 그는 젓가락을 들고, 반찬을 하나 집어 목으로 넘긴 후에야 “맛있어.”라고 감상을 말했다.
먼저 수저를 든 카가미와 소년을 따라 식사를 시작한 쿠로코였으나, 안타깝게도 식사에 집중하기에는 신경 쓰이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배가 안 고픈 건 아니었지만 일단 그것보다.
“카가미 군, 비상사태였던 거 아닌가요.”
“……비상사태잖아? 네가 둘인데.”
아니, 물론 그건 비상사태지만. 깜짝 놀랄 일이지만.
“처음에는 넌 줄 알고 그냥 문 열어줬는데, 제대로 얼굴 보니까 뭔가 쌔한 게…….”
“……당신은 그렇게 문을 아무한테나…….”
쿠로코는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끼며 깊이 한숨을 쉬었다. 아까 현관에서도 생각했던 일이 설마 이미 벌어졌을 줄이야. 그야 자신과 똑같은 얼굴과 목소리로 쿠로코니까 문을 열어달라고 하면 의심하는 게 더 힘든 일인 줄은 알지만, 얼굴을 보고 뭔가 이상한 걸 느낄 거면 좀 더 일찍 느끼면 좋았을 텐데.
“아무나 아니라니까. 너인 줄 알았다고.”
그런, 자신이 마치 카가미의 특별한 사람 같은 발언도 곤란하다.
“그런데 뭔가, 잘 보니까 분위기도 다르고…… 반말이고……. 누구냐고 했더니 쿠로코 테츠야라고 말은 하는데 아무리 봐도 네가 아닌 것 같고…….”
말하면서 카가미는 태연하게 식사를 하고 있는 소년 쪽을 보았다. 작은 입을 크게 벌리지도 않고 조금씩 입에 넣어 씹는 모습은, 역시 옆에 앉은 쿠로코와 똑 닮아 보였다. 쿠로코는 카가미의 시선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채고 조금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서 혹시 유령……이라든가 Doppelganger라든가, 뭐 그런 건 줄 알고…….”
해서, 그렇게 다급하게 쿠로코에게 전화를 했다고.
“거기다 넌 전화를 받지, 전화 받은 넌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아는 너지, 그런데 내 앞엔 이 녀석이 있고…….”
거기까지 말하고 카가미는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당시의 오싹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모양이었다. 그 말에 지금까지 식사하느라 말이 없던 소년이 고개를 들더니.
“아아, 갑자기 울어서 깜짝 놀랐어.”
“안 울었거든?!”
“울었잖아. 내가 유령인 줄 알고. 가까이 가니까 비명까지 질렀으면서. 뭐, 팔 붙잡고 유령 아니고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그쳤지만. 그 다음엔 쿠로코 테츠야 쌍둥이 동생이냐고 하질 않나.”
“내가 오리지널인데 너무하지 않아?”라면서 무표정으로 식사를 재개하는 소년이었으나, 쿠로코는 도저히 태연할 수가 없었다.
울어? 울었다고? 카가미가 이 녀석 앞에서? 그야 겁이 워낙 많은 사람이라 유령이 자기 앞에 있다고 생각하면 눈물 정도는 맺혀도 이상하지 않지만, 여름합숙 때처럼 기절하는 것보단 나을지도 모르지만, 이 녀석 앞에서? 쿠로코는 자신의 기분이 급격하게 바닥으로 꺼지는 것을 느꼈다. 카가미 눈물 정도는 별로 노력할 것도 없이 길을 가다 산책 중인 개가 가까이만 와도 볼 수 있지만, 그래도 기분이 나빴다. 자기가 곁에 없는 상황에서 옆의 자칭 ‘오리지널’에게 눈물을 보이다니.
“운 건 절대 아닌데! 어쨌든 살아있는 사람은 맞는 거 같고 근데 죽어도 자기는 쿠로코라고 하니까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일단 밥부터 차리기로 했어.”
“…….”
기승전밥이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돼서 밥을 차려야겠다는 결론이 나온 건가요, 카가미 군.”
“밥시간이잖아. 배도 고프고. 그리고 일단 요리 시작하면 요리 생각만 해야 되니까 딴 생각할 틈도 없고.”
마지막이 가장 큰 이유라면 납득할 것도 없지만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더 큰 이유로 느껴지는 건 아마 카가미가 족히 10인분은 될 것 같은 양을 말하면서 해치운다는 기예를 펼치고 있어서일 터다. 이미 식사를 끝낸 모양인 옆의 소년이 서커스라도 보는 표정으로 카가미의 식사 풍경을 구경하는 것을 흘끔 보고, 쿠로코는 식사를 재개했다.
식사가 끝난 후 카가미가 커피로 할지 홍차로 할지 물었을 때 동시에 ‘홍차’라고 대답한 두 사람은 다시 한 번 서로를 보고서 고개를 홱 돌렸다. 역시 그걸 난감한 표정으로 본 카가미가 “Okay.”라며 부엌으로 사라졌다 돌아왔을 땐 어째서인지 쿠로코와 소년 사이의 거리가 더 벌어져 있었으나, 카가미는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결국 누구인가요? 당신.”
“쿠로코 테츠야……라고 말해봤자 납득 안 할 테니까, 좋아. 처음부터 설명할게.”
그러면서 한 번 어깨를 으쓱하고서 소년은.
“‘쿠로코의 농구’라고, 알아?”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을 두 사람에게 던졌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입을 연 것은 물론 이름이 불린 쿠로코였다.
“제 농구가 왜요?”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뭐 그 의미도 맞긴 하지만. 정확히는 제목이야. 이야기 제목. ‘슬램덩크’는 알지?”
망설이면서도 끄덕이는 쿠로코와 달리 카가미는 전혀 짐작 가는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일본문화에 어두운 그를 위해 설명을 하는 것은 쿠로코 담당이다.
“조금 오래 된 만화 제목입니다. 농구 만화. 굉장히 인기가 있어서, 일본에서 농구라고 하면 바로 슬램덩크부터 나올 정도, 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 게 있어?”
농구라는 얘기에 바로 흥미가 생기는지 몸을 다 앞으로 하며 눈을 반짝이는 카가미였으나 쿠로코는 손짓으로 그를 제지했다. 농구의 바이블이라는 소리까지 듣는 명작을 한자는 물론이고 히라가나를 읽는 것마저 느린 카가미에게 낭독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으나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다.
“그 ‘슬램덩크’ 같은 거야. ‘쿠로코의 농구’라는 건.”
“죄송하지만 무슨 얘긴지 전혀…….”
“그럼 ‘쿠로코의 농구’라는 이야기가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누구라고 생각해?”
쿠로코의 말을 중간에 뚝 끊고서 소년은 다시 물었다.
“제목에 이름이 나올 정도니까 당연히 ‘쿠로코’ 아냐?”
“정답. 다시 말해, ‘쿠로코의 농구’라는 건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쿠로코’가 주인공인 농구 만화야.
바로 여기.”
그렇게 말하며 소년은, 거실 바닥을 가볍게 손가락 마디로 두드렸다. 콩콩 하는 소리가 침묵이 지배하는 집 안에 괜히 크게 울렸다.
“쿠로코 테츠야가 주인공인 이야기 속의 세상. 그게 바로 이곳이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지극히 태연하게, 아주 담담하게, 마치 해가 지면 밤이 온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하는 것처럼 소년은 이야기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말도 안 돼? 정말 그렇게 생각해?”
쿠로코의 말을 희미하게 웃으며-비웃으며 받아치고서.
“10년에 한 번 나온다는 농구의 천재들이 다섯 명이나 전부 같은 해에 태어나서, 심지어 전부 같은 중학교에 들어간다는 게 더 말이 안 되는 일이라고는 생각 안 해?”
그렇게 말한 소년은 카가미 쪽을 보더니 “아아, 카가미 군을 안 셌구나. 정확히는 여섯 명이네. 같은 중학교가 아니라 아쉽지만.”이라며 태연하게 정정했다.
“그 이후의 일은 더 드라마틱하지. 다른 천재들과는 다르게 재능 없는 식스맨이 강호고도 아닌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자신의 스타일을 가장 잘 살려줄 수 있는 에이스를 만나 팀플레이의 소중함을 잊어버린 기적의 세대를 쓰러뜨리고 우승한다———어디 소년지에나 있을 법한 전개 아냐?”
“어이!”
커피 테이블을 큰 소리가 나도록 때린 것은 카가미였다. 어느 샌가 지나가던 사람이 100이면 100, 저도 모르게 길을 비킬 만큼 험악한 인상으로 그는 쿠로코와 똑같이 앉은키도 자기보다 작은 소년을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야기인지 만화인지 뭔진 모르겠는데, 그런 걸로 우리의———세이린의 노력을 모욕하면 아무리 쿠로코라도 가만 안 둬.”
카가미의 말에 큰 눈을 몇 번 깜빡인 소년은 “무섭네, 카가미 군.”이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이 거슬린 카가미가 다시 입을 열려는 찰나.
“오해하지 마. 별로 그래서 이 세상이나 우리라는 존재에게 가치가 없다든가, 그런 얘기가 아니니까. 난 그렇게까지 자조적이진 않아.”
그렇게 말하고 소년은 지금까지 손을 대지 않고 있던 컵에 손을 뻗어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이 세상이 이야기 속 세상이고, 우리의 삶도 결국 이야기 전개고, 우리가 캐릭터라는 게 무슨 상관이야? 어쨌든 내가 태어나서면서부터 나의 현실은 이 세상뿐인데. 그리고 이야기든 뭐든 난 농구만 할 수 있으면 상관없어.”
딱 잘라 말하는 소년에게 김이 빠진 것은 오히려 카가미 쪽이었다. 저도 모르게 커피테이블을 쳤던 주먹에서 힘이 빠져, 그것은 도로 바닥에 떨어졌다.
“그리고, 뭐 나도 ‘바깥’ 일까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이게 이야기라는 건 우리의 이야기를 보는 사람이 있다는 거 아냐? 그럼 우리의 이야기에 즐거워하거나, 감동하는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테고 또 어쩌면 우리를 보고서 농구를 해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모르잖아. 그렇다면 우리가 실은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라고 해도 나름 괜찮지 않아?”
뭐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하지만 말이야. 그렇게 덧붙이며 소년은 다시 한 번 컵을 입에 댔다. 그리고 쿠로코와 카가미는, 설마 그런 소리를 듣게 될 줄은 몰랐기에 눈을 깜빡이며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물론 이 세계가 이야기 속 세상이니 하는 이상한 소리를 믿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저런 긍정적인 의견을 갖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쿠로코 테츠야’다운 의견일지도 몰랐다.
“농구바보답네…….”
“너도 별반 다를 거 없어 보이는데.”
카가미의 한 마디에 희미하게 웃으며 그렇게 대꾸하고서 소년은.
“일단 여기까지가 배경지식.”
“배경지식……?”
“배경지식 치고는 너무 길지 않나요.”
근본적으로 ‘배경지식’이라는 말을 이해 못하는 모양인 카가미를 무시하고 쿠로코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이 세상이 이야기 속 세상이라는 충격적인 발언이 ‘배경지식’에 불과하다니.
“지금부터 하는 얘기가 ‘쿠로코의 농구’의 존재보다 어떤 의미로 더 충격적이니까.”
소년은 그렇게 말해두고서 다시 한 번 이야기를 정리하듯이 헛기침을 했다.
“‘쿠로코의 농구’는 두 개 있어.”
전에 미도리마가 이런 소리 했던 거 같은데. 아카시가 어쩌고 하면서. 일단 자신의 두뇌 회전 속도로는 따라갈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만을 파악하고 카가미는 마음과 머리를 함께 비우고서 소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나는 지금도 말했듯이 ‘쿠로코 테츠야’가 카가미 군과 함께 기적의 세대를 쓰러뜨리는 쿠로코의 농구.”
말하면서 소년은 쿠로코와 카가미를 번갈아 보고.
“다른 하나는, 기적의 세대 중 한 명인 ‘쿠로코 테츠야’가 무명고 세이린에 입학해서 자신의 새로운 태양을 만나는 쿠로코의 농구.”
마지막으로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나는 후자의 주인공인 ‘쿠로코 테츠야’야. 너희의 세계가 시작되기 전에 시작돼서, 너희 세계가 시작되기 전에 끝나버린 세계의.”
그렇게 말하고, 그는 손을 도로 테이블 위의 컵으로 가져갔다. 길고 굳은살 박인, 농구를 하는 손가락이 컵의 입 부분을 슥 훑었다.
“시작되기 전에 끝났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요?”
“말 그대로야. 아까도 말했잖아? 넌 나의 복제품이라고. 내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다시 말해 네가 주인공인 이야기의 습작 같은 거야. 그래서 ‘기적의 세대’라는 설정은 있지만 밝혀진 건 나 한 사람뿐인데다 다른 네 사람은 나오지도 않고, 이야기 속에 나온 시합도 딱 한 시합밖에 없어. 그 시합에서 내 플레이스타일을 보여주고, 그걸 인정받고 끝. 그 뒷이야기는, 너희들에게로 이어지지.”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그가 손가락을 튕겨 컵을 쳤다. 영롱하지만은 않은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즉 나라는 ‘쿠로코 테츠야’에서 너라는 ‘쿠로코 테츠야’가 태어나고, 나의 ‘쿠로코의 농구’에서 너의 ‘쿠로코의 농구’가 태어났다는 거야. 내가 오리지널이라는 말, 이제 이해 가?”
이만큼 세세히 설명을 해줬으니 그야 이해가 가고도 남았으나 쿠로코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하던 이가 설명이 끝나 입을 다물어버린 거실에는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나머지 두 사람과 똑같이 입술을 떼지 않고 있던 쿠로코는 잠시 후 작게 숨을 내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일단 알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말을 믿을 만한 증거가 없습니다.”
“증거?”
그렇게 되물은 그는 “흐응-. 증거라…….”하고 한 번 천장을 본 후 고개를 다시 쿠로코 쪽으로 돌려서.
“그럼 묻겠는데, 내가 저쪽의 ‘쿠로코 테츠야’가 아니면 대체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그렇게 되물었다. 그의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힌 쿠로코가 다시 입을 여는 것보다 먼저.
“유령……은 아니고. 도플갱어? 실은 사정이 있어 지금까지 만나지 못한 쌍둥이 형? 아니면 얼굴이랑 이름이 똑같은 남?”
말할 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은 그는 여전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쿠로코를 보고서 접은 손가락을 폈다 접었다 해 보였다.
도플갱어는, 지금 그가 말한 이야기 속의 세상이 어쩌고 하는 얘기만큼이나 허무맹랑한 소리였다. 존재를 모르던 쌍둥이 형? 아침드라마도 아니고 그게 무슨. 얼굴과 이름이 똑같은 남……그런 사람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얼굴이 많이 닮았다거나 그냥 동명이인이라면 또 모를까.
쿠로코는 여전히 여유가 느껴지는 무표정으로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소년을 보았다. 하늘색 머리카락에 같은 색의 눈동자, 하얀 피부. 아직도 가끔 중학생으로 착각당하는 동안. 아까 서있을 때 눈높이도 똑같았다. 그리고 지퍼가 달린 가쿠란이라는 독특한 디자인의 세이린 남학생 교복. 손은, 공을 다루고 손바닥으로 그것을 쳐내기 위해 딱딱해진 자신과 같은 손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확실한 증거가 눈에 들어왔으나 그래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맞은편에 혼자 앉아있는 카가미를 보자 그도 쿠로코를 보고 있었는지 눈이 맞았다. ‘어떤가요?’라고 눈으로 묻자 시선을 옆의 소년에게로 옮긴 카가미가 눈을 몇 번 깜빡이고.
“거짓말 하는 걸로는, 안 보이는데.”
“그야 거짓말을 안 했으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소년-‘쿠로코’의 입가에는 분명히 희미하게나마 미소가 보였다. 자기 얼굴도 웃을 때 이렇게 보일까 생각하며 그것을 보고 있던 쿠로코는 어느 샌가 비어버린 그의 잔에 시선을 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당신이 다른 세계의 ‘쿠로코 테츠야’라는 건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럼 이쪽 세계에는 왜 오신 거죠?”
잠시 숨이 멈추고, 뱉는 소리가 쿠로코의 옆에서 들렸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의 ‘쿠로코의 농구’는 이쪽의 이야기에 비하면 굉장히 짧아. 입학하고 한 달도 지나지 않아서 끝나버리니까. 이야기가 짧다는 건, 그만큼 세계도 작다는 소리야. 등장인물도 별로 없고. 이름이 나온 제대로 나온 등장인물이 나를 포함해서 셋밖에 안 될 정도니까.”
잠시 후 “아아, 카시와기 주장은 성만 나오고 이름도 안 나왔지 참.”라고 한 마디 덧붙이고서.
“그런데 그렇게 작은 세계인 ‘쿠로코의 농구’ 위에 똑같은 제목의, 심지어 주인공을 비롯해 주요설정까지 똑같으면서 훨씬 큰 ‘쿠로코의 농구’라는 세계가 새로 생기면 전에 있던 세계는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
“……찌그러지나?”
대답한 것은 카가미였다. 아마 ‘위’라는 말에서 연상된 것이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세계 단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찌그러지다니. 파이도 아니고. 동시에 비슷한 생각을 한 쿠로코와 ‘쿠로코’는 똑같은 표정으로 잠시 카가미를 보다가, 정답을 가르쳐줘야 할 의무가 있는 쪽이 먼저 입을 열었다.
“흡수돼버려. 더 큰 쪽에.”
“그게, 무슨…….”
“팀메이트가 한 명 사라졌어. 같은 1학년에, 나와 같은 반인 애. 그런데,”
아무도 그걸 몰라.
“없어졌다는 걸 모르는 게 아니라, 애초에 그가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를 아무도 몰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고, 출석부에도 이름이 없어. 분명히 내 기억 속에도 있고, 내 핸드폰에 문자한 이력까지 다 남아있는데도. 그리고 그게 벌써 여섯 명 째야.”
그 말에 쿠로코와 카가미는 동시에 숨을 삼켰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른 세상에서 온 ‘쿠로코 테츠야’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상황에서 ‘말도 안 되는 일’을 논하는 것이야말로 아주 우스운 소리로 들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까지 지극히 담담하게-아주 가끔 희미하게 웃으면서 이야기하던 ‘쿠로코’의 표정이 그 진실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상실과 절망을 어떻게든 억누르려, 어떻게든 태연한 체 하려 애쓰는 표정. 그것은 저절로 두 사람의 반론을 막았다.
“정말로 정신이 나갈 것처럼 찾아 헤매서, 겨우 찾은 거야. 여기서. 사라진 사람들은 전부 다 이쪽에 와있어. 마치 처음부터 이쪽 세상에서 살았던 것처럼.”
“그럼 당신은, 이쪽으로 흡수된 당신 세계의 사람들을 데리러 온 건가요?”
쿠로코의 질문에 ‘쿠로코’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못 할 건 없지만, 해도 별 의미는 없어. 도로 우리 세계로 데려간다고 해서 ‘이쪽’보다 훨씬 작은 세계에 똑바로 다시 편입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리고 내가 일일이 데려가는 속도보다 이쪽 세계에 흡수되는 속도가 더 빠를 테니까.”
말을 마치고 카가미를 본 ‘쿠로코’는 그 표정을 보고 “그렇게 무서운 표정 지을 거 없어.”라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 말에 쿠로코가 카가미 쪽을 보자, 과연 그는 ‘무서운 표정’이라는 말이 걸맞은-인상 때문에 무서워 보이지만 걱정이 가득 담긴 표정을 하고서 ‘쿠로코’를 보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치민 감정을 쿠로코는 조용히 억눌렀다. 오해 받기 십상이지만 한 번 속에 들인 사람은 잘 챙기는 게 카가미다. 조금 지나치다고 해도 좋을 만큼. 그리고 남의 불행에 공감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감정이다. 특별할 것도 뭣도 없다. 그러니까 카가미가 ‘쿠로코’를 걱정하는 것은 별로 특별한 감정이 아니고…… 아니, 설사 특별한 감정이라고 해도 자신과는 상관없지만.
……상관, 없다.
“내가 ‘이쪽’에 온 건 근본적으로 내가 있던 세계가 흡수당하는 걸 막기 위해서니까.”
“……가능한 건가요? 그게.”
“모르지.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뭐, 추측에 추측을 거듭해서 실험해본 결과 ‘여기’까지 올 수 있었으니까 낙관적으로 보고 있어.”
“그래서, 뭘 할 건데?”
“우리 쪽 세계의 규모를 키울 거야.”
마치 별 거 아닌 일처럼 ‘쿠로코’의 입에서 나온 말에 쿠로코와 카가미는 오늘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벙찐 표정으로 그의 입만 바라봤다.
“우리 쪽 세계가 작아서 흡수당하고 있는 거라면, 이쪽하고 비슷할 만큼 규모를 키우면 더 이상 흡수당하진 않을 거 아냐. 이야기의 핵은 주인공인 나니까 내가 ‘인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영향을 끼칠 수 있거든. 그래서 음…… 말하자면, 연수 온 거라고 생각하면 돼.”
“연수?”
“유학 같은 거.”
카가미의 물음에 쿠로코보다 먼저 ‘쿠로코’가 설명했다. 때문에 설명하러 입을 열었던 쿠로코는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하고 도로 입술과 입술을 붙여야만 했다. 설명할 수고가 준 거다. 때문에 쿠로코가 이렇게 기분이 나빠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없어야 했다.
“쉽게 말해서, ‘이쪽’의 기적의 세대랑 그 팀메이트들을 알고 싶어. 다른 선수들이 더 있다면 더 좋고.”
그렇게 말하며 “부탁해도 될까?”라고 덧붙인 ‘쿠로코’의 눈은 분명히 맞은편의 카가미를 보고 있었다. 카가미는 눈을 몇 번 끔뻑이며 “아니, 난 상관없는데…….”라고 답지 않게 말끝을 흐리고서.
“그런 걸로 그, 세계의 규모라는 게 커지는 거냐?”
“요는 주인공인 ‘쿠로코 테츠야’가 인식하고 있냐, 아니냐의 차이니까. 내가 구체적인 존재로서 ‘이쪽’과 비슷한 수의 사람이나 장소를 알면 그게 우리 쪽에 반영될 거라고 생각해. 그러면 이쪽으로 일방적으로 흡수되는 일도 이제 없을 거라 생각하고.”
미간을 찌푸리고서 ‘쿠로코’의 설명을 들은 후 카가미는 “으음-.”하고 낮은 소리를 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나 “잘은 모르겠지만,”이라고 운을 띄운 후 그는.
“그래서 너희 쪽 세상이 이쪽에 안 먹힌다면, 알았어.”
쿠로코의 예상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답변을 내놓았다. 그라면 돕겠다고 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쿠로코 테츠야 역시 그렇게 매정한 인간은 아니다. ‘쿠로코’가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고 해도 같은 대답을 내놓았겠지. 하지만 그 대상이 카가미라는 것만으로도 어째서인지 가슴 속에는 불쾌한 느낌이 커져만 갔다.
“근데 아무리 방학 중이라도 기적의 세대랑 다는 못 만날 걸? 아카시랑 무라사키바라는 엄청 먼 학교 다니니까. 레귤러도, 3학년들은 벌써 다 은퇴했으니까 새 레귤러가 누군지는 우리도 모르고.”
“아아, 그건 괜찮아. 정말로 만나고 싶다는 게 아니니까. 알고 싶다는 거지. TV 옆에 쌓아둔 거, 전부 시합 영상이지? 그리고 책장에 있는 건 월간 농구. 그 정도만 보여주고 나머지는 얘기만 해주면 돼. 그거면 충분하니까.”
“그래? 아- 월간 농구, 나 이번 달 거 안 산 거 같은데…….”
말하면서 카가미는 몸을 일으켜 책장으로 향했고, 쿠로코의 옆에 앉아있던 ‘쿠로코’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굳이 가까이 갈 것도 없이 쿠로코는 책장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전부 알고 있었다. 약 1년 치의 월간 농구와 일식을 메인으로 한 요리 잡지 네다섯 권, 그리고 자신이 이따금 가져와 꽂아두고 안 갖고 간 문고판 소설들. 카가미와 농구와 쿠로코 테츠야. 그걸로 가득한 책장 앞에 카가미와 ‘쿠로코’가 나란히 서있는 것을 쿠로코는 식사에 후식까지 먹었는데도 뱃속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끼며 바라봤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은, 쿠로코에게 있어서 아까와는 정반대로 뱃속과 가슴이 열불로 들끓는 것 같은 시간이 되었다.
책장에 있던 월간 농구를 전부 뽑아서 커피 테이블로 돌아온 두 사람은 원래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리고 ‘쿠로코’가 월간 농구의 고교 농구 기사를 찾아 읽으며 카가미에게 질문을 하고 그가 답하는 식으로 몇 번 문답이 오갔다. 연초 호까지는 그 방법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IH 예선이 시작되면서 불거졌다. 중학교 때부터 화제의 중심이었던 기적의 세대를 메인으로 짜인 고교 농구 기사에 다른 학교 시합은 결과만 짧게 기재되는 것이 전부였고, 그것은 세이린도 예외가 아니었다. 때문에 필연적으로 상세한 시합 내용은 카가미가 설명하게 되었는데,
“그런데 그 때 쿠로코가…….”
“응?”
“아- 아니, 너 말고. 우리 쪽 쿠로코.”
“아아, 미안.”
———뭐가 ‘미안’입니까, 뭐가. 어디서 시치미인가요, 이 사람.
쿠로코는 카가미에게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옆자리의 ‘쿠로코’를 흘겨보았다. 벌써 세 번째 비슷한 대화가 둘 사이에 오간 것이다. 애초에 지금은 ‘이쪽’의 IH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문맥상 모든 ‘쿠로코’는 자신을 지칭하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걸 일일이 반응하면서…….
“쿠로코도 쿠로코고 너도 쿠로코니까 불편하다. 정신없어.”
“그러네. 아, 카가미 군이 괜찮다면 난 이름으로 불러도 돼. 이쪽 ‘쿠로코의 농구’의 ‘쿠로코’는 계속 쿠로코라고 부르고.”
“이름? ‘쿠로코’가 이름이잖아?”
“그건 성이고, 이름. 퍼스트 네임.”
“아아, 테츠야?”
——————————.
“응. 날 이름으로 부르면, 앞으로 ‘쿠로코’는 이쪽 쿠로코라고 알아들을 테니까.”
“OK.”
“……카가미 군, 저 잠시 화장실 좀.”
“응? 어. 아, 쿠로코. 너 홍차 더 마시냐?”
“아뇨, 괜찮습니다.”
“테츠야는?”
“부탁할게.”
등 뒤로 그런 대화를 들으며 이젠 위치를 물을 필요도 없이 향할 수 있는 카가미 집 화장실로 향한 쿠로코는, 문을 닫고 잠그기가 무섭게 손바닥으로 세게 벽을 쳤다.
———왜 제가 아니라 그쪽을 ‘테츠야’라고 부르는 겁니까!
할 수만 있다면 살면서 한 번도 내본 적 없는 큰 소리로 그런 말을 외치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불가능했기에 쿠로코는 애꿎은 화장실 벽타일만 때릴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쿠로코 테츠야’인데 한 쪽은 ‘쿠로코’고 한 쪽은 ‘테츠야’라니 그런 불공평한 경우가 어디 있는가. 아니, 불공평한 정도라면 상관없다. 그런데 왜 다른 세계인지 다른 이야기인지에서 왔다고 하는 ‘쿠로코 테츠야’ 쪽을 이름으로 부른다는 말인가. 엄연히 지난 1년 동안 파트너로서 카가미 타이가의 그림자로서 함께 한 자신이 ‘쿠로코’인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저쪽이 ‘테츠야’라니! 아카시처럼 어느 날 갑자기 인격이 바통 체인지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했을 뿐인데 저렇게 쉽게……! 그것도 조금의 망설임이나 거리낌도 없이 자연스럽게 “테츠야는?”이라니! 물론 히무로도 ‘타츠야’라고 이름으로 부르긴 했지만 평소엔 귀국자녀 특유의 프랭크함이랑은 담 쌓고 살면서! 전부 성으로 부르면서! 심지어 1학기 중간고사 직전까지 동기들 이름도 잘 못 외웠으면서!
그냥 아예 3호라고 부르면 되지 않을까. 테츠야 3호. 3호라고 불러도 될 것 같은데. 물론 2호 같은 귀여움이나 사랑스러움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오히려 자신을 향한 적대심밖에 느껴지지 않지만. 그야 물론 이쪽 세상 때문에 자기 쪽 세상이 먹히고 있다고 하니 ‘이쪽’의 주인공인 자신이 반가울 리는 없겠으나, 반갑지 않기는 이쪽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걸로 치면 아마 자신의 빛인 카가미도 준주인공 정도는 될 텐데 카가미에게는 어째서 저렇게 호감을 드러내는 태도로…….
……호감?
설마. 설마설마설마.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물론 자신도 카가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건 맞지만, 절대, 그런 감정은 아니니까. 그러니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똑같이 ‘쿠로코 테츠야’인 그가 자신과 같은 감정을 카가미에게 향한다 하더라도, 그냥, 그건, 그냥…….
쿠로코는 턱이 지끈한 느낌에 저도 모르게 자신이 이를 꽉 깨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의식적으로 힘을 빼자, 손에서도 힘이 빠져나갔다. 주먹도 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아니다. 그런 감정이, 아니다. 절대로. 이렇게 고민하는 것조차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래, 애초에 그가 오지 않았으면 이렇게 고민할 일도 없었겠지만.
‘연수’라는 게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되도록 빨리 원래 세계로 되돌아가게 해야겠다고 쿠로코는 다짐하며, 잠갔던 문을 다시 열고 밖으로 나갔다.
거실로 돌아가자, 어째서인지 마주 보고 앉아 있었을 터인 ‘쿠로코’와 카가미는 ‘쿠로코’가 카가미의 옆자리로 이동하는 모양새로 나란히 앉아 있었다. 커피 테이블 위에 있는 월간 농구를 함께 들여다보는 두 사람. 일본인으로서는 규격 외라고 해도 좋을 체격을 자랑하는 카가미와 선수로서는 작다고 하나 평균적인 또래 정도는 되는 ‘쿠로코’가 한 권의 책을 보려고 하면 필연적으로 밀착하는 수밖에는 없다. 저렇게 닿아있는 어깨처럼. 그리고 숨결마저 느껴질 만큼 가까이에 있는 두 얼굴처럼.
거울 두 개를 사용하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자신의 뒤통수가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쿠로코는 신기한 마음은커녕 당장이라도 저 하늘색 머리통을 붙잡고 이마를 커피 테이블에 박아주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으나, 그랬다간 카가미가 화를 낼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간신히 충동을 억눌렀다. 대신.
“카가미 군. 죄송한데 역시 저 홍차 한 잔 더 마셔도 될까요?”
“아? 야, 벌써 티포트…… 쯧. 알았어. 좀만 기다려.”
“죄송합니다.”
수고를 끼친다는 쿠로코의 사과에 카가미는 대꾸하지 않는 대신 부엌으로 향하는 길에 손을 한 번 뻗어 그의 머리를 가볍게 치고 지나갔다. ‘신경 쓰지 마’라는 의미라는 걸 이해하는 데에는 굳이 말이 필요 없었다. 카가미의 모습이 부엌으로 사라진 것을 확인하기가 무섭게 쿠로코는 커피 테이블 쪽으로 몸을 돌려, 아슬아슬하게 발소리가 안 날 정도로만 힘을 주어 걸어서 ‘쿠로코’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사이좋네, 카가미 군이랑.”
“그야 뭐. 1년을 함께 한 유일무이의 파트너니까요. 그런데 조금 진척은 있으셨나요?”
“그다지. 카가미 군, 말로 설명하는 걸 잘 못 하나 봐. 몸을 쓰고 싶어서 좀이 쑤시는 눈치더라고. 그리고 한자도 약한 것 같고.”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매번 사활 문제인 사람이라. 괜찮다면 제가 카가미 군 대신 설명 드리겠습니다.”
옆에서 짧게 웃음소리. ‘괜찮다면’이라는 말이 붙어만 있을 뿐 배려를 가장한 견제라는 것을 ‘쿠로코’가 모를 리 없었다.
“나랑 카가미 군이 친하게 구는 게 맘에 안 드나 봐?”
“그런 거 아닙니다. 애초에 오늘 처음 만난 사이에 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지 않나요.”
“그렇지. 친하다는 건 너랑 카가미 군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나도.”
의외의 발언에 쿠로코가 수상하다는 눈빛을 숨기지 않고 옆자리의 소년을 보자, ‘쿠로코’는 자신의 얼굴이기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만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나도 카가미 군과 친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런가요.”
선전포고는,
“허튼 생각 집어 치우시지요, 쿠로코 테츠야. 내가 당신이 아니듯이, 당신도 내가 아닙니다.”
받은 이상 받은 만큼 갚는 것이 예의다.
“세게 나오네. 하지만 일단, 그 의견에는 나도 동의할게. 그래. 난 네가 아니고, 넌 내가 아니지. 애초에 난 이겨도 기쁘지 않으면 승리가 아니라든가, 그런 얼굴 화끈거리는 소리 할 생각 없는 걸.”
놀라 ‘쿠로코’의 얼굴을 보자 그는 “카가미 군이 자랑했어. 멋있는 내 그림자라고.”라며 놀리듯이 설명했다. 화장실로 도망가기 직전에 들었던 얘기가 IH 예선 때의 세이호와의 경기였으니, 필연적으로 다음 경기는 슈토쿠와의 일전이었다. 쿠로코에게 주먹으로 맞고서 서로 멱살을 잡았을 정도니 카가미에게 있어서도 강렬한 경기일 터였다.
“그 부분은 대대적인 수정이 가해진 모양이네. 나랑은 정반대야. 시합에서 이기면 그걸로 됐잖아. 이기기 위해서 매일 연습하는 건데. 내가 100점을 넣어도 시합에서 지면 하나도 즐겁지 않을 걸. 요는 이기기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거 아냐?”
“이겨봤자 기쁘지 않으면……!”
“뭐, 너도 나도 어차피 할 수 있는 건 그림자로서 빛을 더 반짝이게, 달로서 태양을 더 빛나게 하는 것뿐이지만.”
자신의 말을 중간에 자른 ‘쿠로코’의 말에 쿠로코는 미간에 주름이 생길 만큼 얼굴을 찌푸렸다. 물론 결국 해야 할 일은 같을지도 모른다. 팀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하지만 이 사람은, 이쪽의 쿠로코 테츠야는…….
“내가 맘에 안 드는 모양이네, 쿠로코 테츠야.”
“당신도 마찬가지일 텐데요.”
“뭐, 썩 맘에 드는 건 아니지.”
“그럼 맘에 안 드는 제가 주인공인 세계에 오래 있지 말고 어서 끝내고 본인 세계로 되돌아가 주시겠습니까?”
“공격적이네. 하긴, 공격적일 수밖에 없나. 카가미 군 때문이라도.”
카가미의 이름이 나오기가 무섭게 쿠로코는 찌푸린 표정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처음부터 썩 맘에 들지 않았던 것은 쿠로코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향하는 적대감은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느껴졌으니까. 그러나 지금 이렇게까지 그가 거슬리는 것은 승리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의 차이도 있지만 역시, 카가미 때문이다. 차마 그것을 인정할 수는 없었지만.
“좋은 사람이네, 카가미 군. WC 우승고의 에이스라고 하니까 당연히 좋은 선수일 테고. 네가 그를 선택한 이유를 알겠어. 우리 같은 사람에게 정말 눈부신 사람이야, 카가미 군.”
말하면서 부엌 쪽을 돌아보는 ‘쿠로코’의 뒤를 이어 쿠로코도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래 걸린다 했더니 홍차와 함께 먹을 다과자를 준비하고 있었는지 쟁반 위에는 접시가 몇 개나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무언가를 찾으며 찬장을 뒤지고 있는 옆모습. 쿠로코가 카가미 집에 올 때마다 남몰래 기대하는 요리하는 카가미의 모습이었다.
“……갖고 싶어질 만큼.”
……뭐?
“뭐야, 니들 왜 둘 다 이쪽 보고 있어? 뭐 먹고 싶은 거 있냐?”
작게, 무심코 흘러나온 것처럼 발음도 부정확하고 겨우 들릴 만큼 작게 중얼거린 한 마디. 그것에 순간적으로 ‘쿠로코’ 쪽을 보려고 한 쿠로코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카가미의 목소리가 두 사람을 향했다.
“난 없는데.”
“저도, 없습니다.”
간신히 부자연스럽지 않은 간격으로 짜낸 대답을 듣고선 카가미가 “그럼 왜 보고 있었던 거야?”라고 툴툴거리며 쟁반을 들고 커피 테이블로 돌아왔다.
“요리하는 거 보고 있으면 재밌잖아. 마법 같아서. 난 할 수 있는 요리라고는 삶은 계란밖에 없는 걸.”
“그것도 쿠로코랑 똑같냐, 너…….”
‘쿠로코’의 말에 한심하단 눈으로 ‘쿠로코’와 쿠로코를 번갈아 본 카가미는 “근데 왜 하필 삶은 달걀이야? 이상한 녀석들.”이라고 한 마디 던진 후.
“그리고, 요리 정돈 그냥 다 하는 거잖아. 뭘 마법이야, 마법은. 그냥 너희가 못 하는 거지. 마법은 쿠로코의 패스 같은 게 마법…….”
잠시 침묵. 그리고.
“아아아아아—————!”
“카가미 군, 또 그런 소릴…….”
“시끄러! 취소! 지금 거 취소!”
“카가미 군도 꽤…… 낯간지러운 말 잘 하는구나.”
“너도 조용히 해-!”
그렇게 얼굴이 시뻘게져서 한참을 빽빽거린 후에야 카가미는 뚱한 표정으로 다과자를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안정을 되찾았다.
그 후로는 쿠로코의 신경을 극도로 소모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사사건건 카가미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 ‘쿠로코’의 시도를 열 번 가까이 저지했고 그보다 훨씬 많은 수를 실패했으며 이따금 카가미가 그를 ‘테츠야’라고 부를 때마다 부글부글 끓는 속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다. ‘테츠야’라고 불린 후 자신과 눈이 맞는 ‘쿠로코’에게 부아가 치밀었기에 더더욱.
어떻게든 1년 치 월간 농구를 정리하고 쿠로고가 드디어 끝났다고 안도한 순간 ‘쿠로코’는 TV장에 가득 들어있는 DVD를 가리키며 “저거 시합 영상이지? 좀 볼 수 있을까?”라며 지극히 저자세로 카가미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카가미는 그런 부탁을, 그것도 쿠로코 테츠야의 부탁을 거절할 사람이 아니었다.
WC 때 혼자 자취를 하는데다 넓기까지 하다는 것이 밝혀진 카가미의 집은 WC 내내, 그리고 WC이 끝난 후에도 학교 농구부실을 오래 이용할 수 없는 날엔 세이린 농구부의 미팅 장소로 쓰였다. 그 와중에 농구부 미팅을 위한 자료들—그 중에서도 시합 상대 학교 경기 영상과 세이린 경기 영상, 그리고 자세 교정이나 전략 수정을 위한 연습 풍경 촬영 영상이 대부분 카가미 집에 모이게 되었다. 그 양은 실로 오늘 밤을 새워서 본다고 해도 다 못 볼 만큼의 분량이 되어 있었다.
쿠로코는 저도 모르게 혀를 찼으나 카가미에게는 들리지 않은 듯, 그는 신나서 토오와 카이조의 IH 준결승전을 틀어놓고 아오미네와 키세가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해서 ‘쿠로코’에게 떠들기 시작했다.
본인들 앞에선 절대로 말해주지 않을 칭찬을 흥분한 기색으로 줄줄이 늘어놓는 카가미는 마치 어린애가 자기 친구들을 자랑하는 것 같아서 나름 귀엽다고 못할 것도 없었지만 그 상대가 ‘쿠로코’라는 점에서 쿠로코의 기분은 하강 일로를 내달렸다. 물론 카가미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시합이라는 것도 알고 분명 이 시합의 선수들은 양 팀 다 전력을 다했으며 시합 내내 화려한 기술들이 난무한, 농구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흥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경기라는 것도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렇게 볼까지 조금 붉어질 만큼 흥분해서 눈을 반짝이며 ‘쿠로코’에게 말을 걸 것은 없지 않은가. 전에 같이 NBA 시합 보다가 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얘기했을 때 얼마나…… 아니다. 뭐가 아닌지는 차마 말할 수 없지만, 어쨌든 아니다.
결국 해가 저물 때까지 쿠로코는 카가미의 주의를 이따금 자신에게 돌리려고 노력하면서 열 편이 넘는 시합 영상을 봐야 했다. 그러다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카가미가 “저녁 준비 해야지.”라며 허둥지둥 부엌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일단 쿠로코의 인내력 시험 시간은 막을 내렸다. “넌 보고 있어도 돼.”라며 새 DVD를 틀어두고 부엌으로 향한 카가미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간 쿠로코는 안 도와도 된다는 카가미의 사양을 굳이 물리치고 그와 함께 요리 카운터에 섰다.
오늘 잠시도 둘만 있지 못했던 데다 카가미가 ‘쿠로코’에게만 신경을 써서 분해서 그랬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근데 너 어디 아프냐?”
하는 수 없이 카가미가 명령한 감자 깎기에 혼신의 힘을 다 하고 있는데, 무엇에 쓰는지 알 수 없는 양념장을 만들고 있던 카가미가 조용히 물었다. 그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어 카가미를 보자 에이프런을 다시 두른 카가미는 쿠로코 쪽을 보지도 않고서.
“표정 안 좋더만. 아프면 무리 하지 말고 집에 가서 쉬어. 내일도 연습인데 아침부터 쓰러지지 말고.”
툭툭 내뱉는 듯한 말투와 이쪽을 보지도 않는 옆모습. 하지만 그런 카가미에게서 자신을 향한 걱정을 읽고서 쿠로코는 도로 고개를 숙이고 잠시 멈췄던 감자 깎기 작업을 재개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차라리 몸이 안 좋은 게 더 나을 뻔했겠지만. 이런 흉한 감정에 휘둘리는 것보다야, 그 편이 훨씬.
“걱정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별로 걱정한 건……! 아니…… 어…….”
하지만 그런 흉한 감정마저도 카가미의 한 마디면 이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기에, 쿠로코는 그것이 너무나도 기쁘고 쑥스럽고 행복하면서, 동시에 그와 같은 공기를 마시고 있다는 것마저 이렇게 불편해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경기 영상을 틀어놓은 덕에 말 한 마디 오가지 않으면서도 꽤 소란스러웠던 식사 풍경은 이번에도 가장 먼저 식사를 마친 ‘쿠로코’가 입을 열면서 또 쿠로코를 얼어붙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오늘 중에 다 못 볼 것 같다. 어떡하면 좋지…….”
혼잣말처럼 그렇게 중얼거린 말이 명백히 카가미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쿠로코는 바로 눈치 챘으나 둔한 카가미가 그것을 알 리 없었다. 그는 볼을 잔뜩 부풀리고 우물거리던 것을 목구멍으로 꿀꺽 넘기더니.
“다음에 또 와서 보면 되잖아?”
“음-. 내가 말을 안 했으니까 모르는 게 당연하지만, 카가미 군. ‘저쪽’에서 ‘이쪽’으로 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야.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오는 일이니까, ‘이쪽’은 별 영향이 없을 것 같지만 ‘저쪽’은 붕괴가 더 빨라질 위험도 있고.”
“그래?!”
놀라 소리 지르는 카가미에게도 태연하게 “응.”이라고 대답하고서 ‘쿠로코’는 다시 한 번 “어쩌면 좋지…….”하고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속 다 보인다고요 당신……!’하고 쿠로코가 분개하는 사이.
“그럼 보다가 늦어지면 우리 집에서 자고 내일 또 봐.”
“잠……!”
“그래도 돼?”
“그래도 돼?”는 무슨 얼어 죽을 놈의 “그래도 돼?”입니까!
“인터넷카페에서 자면 되잖습니까!”
“인터넷카페는 돈 들잖아. 침대도 없지 않냐? 거기.”
“나도 몇 번 가본 적 없어서 잘 모르겠는데.”
“우리 집에 방이 없는 것도 아닌데 뭐 하러 돈 들여서 인터넷카페까지 가?”
그렇게 쿠로코에게 묻는 카가미의 눈에는 순수한 의문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쿠로코는 카가미가 ‘쿠로코’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그것도 이 집에서 재운다는 말도 안 되는 상황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저희 집에서 주무시죠.”
“너희 집? 아- 하긴. 쿠로코 집이니까 테츠야 집이기도 한 건가?”
……그러니까 그 ‘테츠야’ 좀 어떻게…….
“나도 그러고 싶긴 한데, 그럼 부모님이랑 할머니한텐 뭐라고 설명할 건데? 우연히 만난 얼굴이랑 이름이 똑같은 애?”
“…….”
쿠로코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이름이야 가명을 댄다고 해도, 본인이라고 착각할 만큼(어떤 의미로는 본인이 맞지만.) 닮은 얼굴은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모르는 사람이 보면 혈연이라는 걸 확신하고도 남을 테고, 잘못했다간 평화로운 쿠로코 가에 아버지 혹은 어머니가 외도를 했다는 말도 안 되는 오해의 폭풍이 몰아칠 터였다. 그 광경을 상상한 쿠로코가 갑자기 밀려오는 두통에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른 사이.
“그냥 너 여기서 자라. 아버지 방 비어 있으니까.”
“그럼 신세 좀 질게. 미안해, 카가미 군. 하루 종일 폐만 끼치네.”
“신경 쓰지 마.”
이야기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끝나버렸다. 쿠로코는 거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저도 여기서 자겠습니다.”
“아? 무슨 소리야, 너. 저녁 먹으면 집에 가.”
“네?!”
웬만해선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쿠로코치고는 아주 큰 축에 속하는 볼륨이었으나 카가미는 왜 그런 반응이냐는 듯이 눈을 몇 번 깜빡이고서.
“아버지 방 침대 싱글인 거 알잖아? 우리 집이 다다미도 아니고, 바닥에서 자면 관절 아프다며. 내일도 아침부터 연습인데 집에 가서 자야지. 체력도 없는 게.”
“아니, 그건…… 그렇습니다만…….”
“전철 시간도 있고. 밥 먹고 가면 대충 맞겠네.”
“…….”
쿠로코는 자신의 형편없는 체력을 전에 없을 만큼 원망했다.
“아, 테츠야는 밥 먹고 목욕해라. 시합 영상 보다 그냥 자면 안 되니까. 근데 너 잠옷은? 있어?”
“나 빈손으로 왔는데…….”
“그랬지 참. 그럼 내 옷 입어.”
“…….”
미개봉 칫솔의 유무에 대해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한 카가미는 쿠로코의 엄청난 표정을 보지 못했는지, 곧 또 밥을 뺨이 한가득 차도록 입에 넣고 우물거리는 것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카가미는 “속옷까지는 없다.”라며 긴팔 티 하나와 반바지를 ‘쿠로코’에게 건넸고, 받아든 ‘쿠로코’는 감사 인사를 하고서 욕실로 사라졌다. 그것을 거의 절망적인 기분으로 지켜보고서 쿠로코는 현관까지 바래다 줄 요량인 듯 따라 나오는 카가미에게 쫓기는 것처럼 현관문을 열었다.
막상 현관에 서서 벗어두었던 신발을 신고나자 갑자기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카가미 집에서 처음 잔 건 WC이 끝나고 동기들과 연습 후 다 같이 놀러 와서 잤을 때였다. 만난 지 반년이 넘어서, 그것도 친구들 셋과 같이. 그런데 ‘쿠로코’는 오늘 처음 만나 카가미 집에서 자고 가겠다고? 그것도 모자라 카가미 옷까지 빌려 입고서? 아니, 이게 다른 세이린 농구부원이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1년 동안 희로애락을 함께한 그들은 이제 가족 같은 거라고 쿠로코는 생각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어째서 이 사람은 이렇게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외간남자를…….
“……쿠로코? 왜 그래?”
현관에서 신발로 갈아 신은 채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쿠로코를 이상하게 여기고 카가미가 말을 걸었으나, 떠나야 할 사람은 발에 뿌리라도 돋아난 것처럼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을 뿐이었다. 뭐 놓고 간 거라도 있는 건가 하고 카가미가 생각한 찰나.
“카가미 군은, 조금 더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고개를 가만히 숙이고 있던 쿠로코가 홱 얼굴을 들고, 거의 카가미를 노려보는 듯한 시선으로 꺼낸 말은 그런 것이었다.
“인터폰이 울리면 이름으로 확인하지 말고 먼저 누군지 똑바로 물어보세요. 다른 사람이 사칭이라도 하면 어쩔 겁니까? 그런 반응을 유도해내는 사기꾼이 얼마나 많은지 아나요? ‘나야 나’ 사기 전화라도 오면 단번에 걸릴 겁니다, 당신. 그리고 아무리 맨션 현관 인터폰으로 봤어도 현관문을 열 때 한 번 더 확인하세요. 그렇게 문을 함부로 열어주면 어떡합니까? 강도가 타이밍 맞춰서 초인종 누른 거면 어떡하려구요?”
“아니, 190이나 되는 고딩 혼자 사는 집에 들 강도는 없을 것 같은데. 그리고 우리 집엔 훔쳐갈 것도…….”
“시끄럽습니다.”
노도와 같이 말을 쏟아낸 쿠로코는 주저하면서도 입을 연 카가미의 반론조차 톡 쏘아붙이고, 한꺼번에 많은 말을 한 반동처럼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조금 주름이 진 미간과 드물게 불쾌함이 엿보이는 눈동자. 쿠로코가 부조리한 소리를 카가미에게 쏟아내는 것은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었으나, 이렇게 기분이 나쁜 것을 표출하는 일은 별로 없다. 하지만 오늘 하루를 돌이켜봐도 쿠로코가 이렇게 기분 나쁠 이유는 없었다고 카가미에게는 생각되었다. 더 놀고 싶은데 일찍 가라고 해서 삐친 건가?
한편 입을 다물고 이 말을 해야 할까 하지 말아야 할까 망설이던 쿠로코는, 지금 말하지 않으면 결국 두고 두고 후회할 자신의 성미를 올바르게 파악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테츠야’가 뭡니까, ‘테츠야’가.”
“하?”
“저도 ‘테츠야’입니다만. 덤으로 말하자면 테츠야 2호도 엄밀히는 ‘테츠야’입니다.”
“아니,”
“오리지널인지 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희 기준으로는 3번째니까 테츠야 3호잖습니까. 그냥 3호라고 부르면 되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강아지랑 똑같은 취급은 너무하지 않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카가미의 어깨가 움찔한 것이 보였다. 그것이 자신이 노려본 탓일 거라는 것을 쿠로코는 충분히 짐작했으나,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미 머릿속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쿠로코 테츠야’를 꽤 감싸고도시네요. 맘에 드셨나 봅니다? 아까 보니 말도 자주 붙이던데요. 당신 평소에 저한테도 그렇게 말 많이 안 붙이지 않나요.”
“아니, 그건…… 너랑 얼굴이랑 목소리 똑같은데 반말하는 게 신기해서…….”
주저하면서도 그렇게 말하고 “너 집에 전화할 때도 엄마한테 존대하잖아…….”라고 입을 비죽이는 카가미는 그냥 변명을 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쿠로코는 그를 몰아붙이려던 기세가 꺾여버려서 맥없이 “그런, 가요.”라고 한 마디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런 게 곤란하다. 마치 카가미가 자신에게 큰 관심이 있는 것 같은 그런 발언들이. 이 사람이 계속 이런 소리를, 이런 태도를 보이니까
“설마 그에게 협조적인 것도, 그래서 그런 건가요……?”
이런, 자의식과잉 같은 말이 입 밖으로 나와 버린다.
이번엔 카가미가 입을 꾹 다물 차례였다. 슬쩍 시선을 피해 신발장을 향하는 그의 눈동자를 쿠로코는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고, 곧 바닥으로 떨어진 붉은 시선과.
“……그럼 안 되냐?”
그 한 마디가 쿠로코의 추측을 진실로서 입증했다. 말을 뱉고 나자 이제 숨겨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는지, 그러면서도 아직 겸연쩍은 듯이 목을 벅벅 긁으며 카가미가 다시 입을 뗐다.
“어려운 얘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테츠야는 쿠로코 형 같은 거잖아? 그럼, 잘 모르겠지만 그쪽 세상이 지금 위기라고 그러면, 도와주고 싶잖아.”
……이 사람은, 믿는 사람이니까. 그리고 말은 툭툭 던지더라도, 절대 자기 사람을 내치지 않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그런 거다. 쿠로코 테츠야가 특별한 것이 아니다. 만약 감독님이나 캡틴의 오리지널 같은 사람이 왔어도 분명 똑같이 행동했을 거다. 그뿐이다. 조금도, 특별하지 않다.
그렇게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고서 쿠로코는 간신히 떨리지 않는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그 사람과 형제라니 제 쪽에서 사양입니다.”
“아니, 너야말로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건데?! 아- 그거냐? 타카오가 전에 말했던 동…… 동종…….”
“동족혐오겠죠.”
“그래, 그거!”
동족 정도가 아니라 거의 본인이니 동족혐오라고 하기도 뭣하지만.
“응? 근데 너 별로 타카오 안 싫어하잖아.”
“네, 뭐. 저 사람에 비하면 타카오 군이 100배 정도 낫다고 생각합니다.”
“……니들 내가 안 본 사이에 싸웠냐?”
“아뇨, 별로.”
그런 건 ‘싸움’ 축에도 끼지 않으니까요. 속으로 덧붙이며 쿠로코는 팔짱을 끼고 “그런데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은 거야?”라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가미를 보았다. 다 당신 때문 아닌가. 당신이 그에게 웃어 주니까. 말을 거니까.
“……둔탱.”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내일 학교에서 뵙죠.”
“어……. 내일 보자.”
마지막으로 문이 닫히는 틈으로 카가미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서 쿠로코는 카가미의 집을 뒤로 했다.
불만이 다 없어진 건 아니지만, 그래도 카가미가 그에게 말을 거는 이유도 그를 돕겠다고 한 이유도 전부 자신이라는 것은 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애초에 왜 불만이 생겼는지는 굳이 생각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하며, 동시에 왜 카가미의 말에 이렇게 기분이 도로 좋아진지도 생각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면서 쿠로코는 집으로 향했다. 어서 그와 약속한 ‘내일’이 되기를 바라면서.
다음 날.
쿠로코는 여느 때와 똑같이 해도 뜨지 않은 시간에 일어나 학교 갈 채비를 했다. 등교 시간은 아직 한참 남았지만 아침 연습 시간에 맞춰서 가려면 겨울엔 해가 뜬 후에 일어날 수가 없다. 물론 이미 중학교 때부터 3년-이제 4년 가까이 되어가는 생활이기에 특별히 고생스럽지도 않았지만.
아침 식사를 하고 학교로. 체육관으로 향하자 리코와 휴우가, 이즈키가 먼저 와 있었다. 보통은 리코나 휴우가에 이어서 2, 3등을 유지하는데 오늘은 안타깝게도 순위권 밖이다. 이즈키가 “하하, 유감이네 쿠로코…… 핫! 유감이…….”라며 말장난을 하려는 걸 다 듣지 않고 쿠로코는 부실로 향했다. 옷을 갈아입는 중간에 들어오는 동기와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밖으로.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선배들 사이에 섞여 스트레치를 하려고 다리를 편 순간.
“굿모닝-!”
밝은 목소리와 함께 그가, 세이린의 에이스가,
“선배님들이랑 쿠로콧치 다들 일찍 왔네요?”
키세 료타가 들어왔다.
………………어라?
“네가 늦은 거지, 멍청아. 선배들 다 와있는데 1학년이 제일 늦게 와? 앙? 곧 2학년 된다고 재냐? 죽을래?”
“아, 아직 집합 시간 전이잖슴까-!”
“지금 나한테 말대답 하냐?”
“캡틴이 평소보다 3배 더 부조리함다-!”
키세가 도착하자마자 어째서인지 클러치 타임에 돌입해 맹렬하게 쏘아대는 휴우가와 우는 체하며 이럴 때 감싸주는 이즈키에게로 도망치는 키세. 이즈키가 애매하게 웃으며 “집합 시간 전에 온 건 맞잖아, 휴우가.”라며 주장을 달래고 있었다.
몇 번이나 본, 익숙한 풍경이었다. 1년 가까이 본 세이린의 아침 연습 풍경.
이상한 점은 하나도 없을 터였다.
부족한 것 역시, 하나도 없을 터였다.
………………정말로?
제44회(2006년 11월) 점프12걸신인만화상 수상작품. 아카마루 점프 2007 SPRING에 게재되었다. 후에 주간 소년 점프의 "쿠로코의 농구" 연재로 이어졌다.
부원수 120여명을 자랑하는 농구 강호교 쇼에이 중학교 출신이자 기적의 세대 중 한 명인 쿠로코 테츠야가 세이린 고등학교에 입학해 귀국자녀 에이스 오기하라 시게히로를 만나 서로를 인정하고 "태양"과 "달"의 관계가 되는 이야기.
연재판 기준, 카이조 고등학교와의 연습시합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쿠로코가 반말을 사용하고 "이기면 그걸로 됐잖아."라고 이야기하는 등 연재판과 비교하면 캐릭터가 상당히 달랐다. 그러나 존재감이 없고 패스를 주무기로 하는 주인공이 재능과 존재감이 있는 에이스를 만나 파트너가 된다는 기본 뼈대는 같다.
연재판과의 상이점은 이 외에도 ①오기하라(카가미의 원형)가 자의식 과잉끼가 있는 언동을 함 ②첫 연습상대가 카이조가 아닌 요센 ③시합 중에 머리에 부상을 당해서 교체되는 것이 쿠로코가 아니라 카시와기(휴우가의 원형)이고, 교체되어 시합에 투입되는 것이 쿠로코
등이 있다.
그러나 언동은 난폭해도 상대를 인정하면 바로 자기 잘못을 뉘우치는 오기하라의 솔직한 성격이나, '반전 캡틴'이라고 불리는 카시와기의 독설 캐릭터 등 연재판으로 이어지는 요소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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