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00자나 썼는데 이것들이 하라는 연애는 안 하고 따로 놀아서 추가된 분량이라고도 합니다.
노부메를 긴토키 대학 시절에 써버리긴 했는데, 같은 반이거나 아니면 다른 반인 도서위원이었어도 엄청 재밌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소고 속이 불편하겠죠.[야]
늦어서 미안하다는 말에도, 기다려줘서 고맙다는 말에도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을 뿐이었다. 다 괜찮다고 했다. 전부 다, 괜찮다고. 대신 그는 소고의 뺨을, 눈을 코를, 입술을 만지고 뜨거운 목과 가슴에 손을 대어 마치 그 밑에 피가 흐르는 지를, 그 속에 심장에 뛰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소고의 눈을 보면서 말한 것이었다.
“네가 살아서, 약속을 지키러 왔으면, 됐어.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어.”
그대로 눈을 감고, 감사 기도라도 올리는 것처럼 고개를 떨구고서 이마를 자신의 어깨에 맡긴 긴토키를, 소고는 떨리는 손으로 안았다. 그의 자신을 향한 마음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 그대로 피부로 느끼면서. 긴토키에 비하면 자신이 기다린 시간 같은 건 정말 아주 적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울 것만 같아서, 이 사람이 울지 않는데 자신이 울 수는 없다고 겨우겨우 참으며. 겨우 제 품에 들어온 온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꼭 끌어안았던 것이다.
긴토키 집에 자고 가겠다는 것을 긴토키가 억지로 집까지 데려다줬을 때도, 끝까지 아쉬운 듯 좀처럼 손을 놓지 못하고, 몇 번 돌아보고, 몇 번 다시 인사를 하고, 겨우 헤어졌던 것이다.
그런 4월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계절과 교복이 바뀌고 학교 수영장까지 개장된 지금, 6월.
두 사람 사이의 진전은 아직도 4월과 변함이 없었다.
그야 이제 아무것도 필요 없다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이상 진도를 전혀 안 나갈 건 없지 않은가. 그게 그 뜻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 긴토키에게는 그 뜻이었나? 아무리 이번에도 10살 이상 나이차가 난다고 해도 그렇지 아직 서른도 안 됐으면서 뭐가 그렇게 욕심이 없어? 아니면 그게 깨달음의 경지라는 건가? 언뜻 지나가는 소리로 ‘120년’이란 말을 들은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 건가? 아니, 그래도 저번에는 안 그랬잖아. 아무것도 기억 못하는 오키타 소고라도 그렇게 뜨거운 눈으로 본 게 누군데.
“뭘 멍하니 있냐 해? 빨리 일지 안 쓰고.”
보기만 했으면 말도 안 한다. ‘오키타 소고’는 그렇게 뜨거운 눈으로 봐놓고 결국 아무것도 안 했으면서 그 때의 ‘이마이 노부메’랑 할 짓 안 할 짓 다 한 게 누군데? 아니, 별로 화내는 건 아니지만. 기억 못한 내 잘못이니까 화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야! 일지 쓰란 말이 안 들리냐 해!”
“들려. 시끄러. 쓰면 되잖아.”
세 마디로 대화를 끝내버린 소고는 여전히 앞에서 으르렁거리는 카구라를 무시하고 도서실일지를 펼쳤다. 말한 대로 일지를 쓰고 있으니 뭐라 하지는 않겠지만 그 태도가 맘에 안 들었던 거겠지. 얼굴을 들지 않아도 카구라의 매서운 시선이 느껴지는 것을 소고는 애써 무시하며,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 계속 부러지는 샤프심에 더 큰 짜증을 느꼈다.
첫날은 긴토키를 보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몰랐지만, 놀랍게도 같은 반의 중국인 유학생 ‘야토 카구라’는 신센구미 시절 몇 번이나 사투를 벌인 ‘여왕’이었다. 그리고 긴토키와 도망쳤을 때는 순간적으로나마 진심으로 죽음을 각오했던 상대. 그다지 엮이고 싶지 않다는 것이 솔직한 심경이었다. 이곳은 그 때처럼 살벌한 세상이 아니고, 자신도 일개 고등학생일 뿐 진검을 차는 일은 없어졌지만 여전히 마주하면 반사적으로 온몸이 싸울 준비를 해서 필요 이상으로 지치는 것이다. 20명이 넘는 학생이 있는 교실에서야 어쨌든, 좁은 도서실 카운터에서 둘이 앉아있어야 하는 도서위원 당번날은 지옥이다. 또 다른 도서위원인 시무라 신파치와는 그렇지도 않은데, 무슨 우연인지 당번은 높은 확률로 소고-카구라, 아니면 신파치-카구라 페어였다. 속이 다 아프다.
“너,”
말 걸지 마. 속으로 말을 자른 소고였지만 당연히 카구라에게 들릴 리 만무하기에 그녀는 무정하게 말을 이었다.
“당번 때마다 꼭 자기가 일지 쓰고, 긴 쨩한테 내고 가고. 그렇게 선생님한테 잘 보이고 싶냐 해? 우등생은 참 피곤하다 해.”
소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두꺼운 안경알너머의 카구라를 보았다. 남들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 건가. 그야, 카구라나 신파치는 물론이고 다른 반의 도서위원과 당번을 맡을 때도 매번 자기가 일지 써서 선생님께 내고 갈 테니 먼저 가라는 핑계로 국어준비실에 가지만. 우등생인 것도 뭐, 중간고사 결과는 그런 소릴 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성적이긴 했지만…….
아니, 그렇게 보인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너랑 상관없잖아.”
아무렇지도 않은 체 다시 고개를 숙여 일지를 보았다. 이제는 익숙한 문어의 나열과 마지막 작성자 란의 오키타 소고. 그런데 그렇게 티가 날 만큼 그랬나 싶어 전 날짜의 일지를 살펴보자, 과연. 작성자 란의 반 정도를 ‘오키타 소고’가 점거하고 있었다. 다른 핑계를 찾는 게 좋으려나……. 하지만 상담이랍시고 가기에도, 주 5일 중에 사흘을 상담 때문에 가는 건 이상하고…….
“상관있으니까 말하는 거다 해. 긴 쨩이 담당이라고 해서 도서위원 한 건데 너 때문에 긴 쨩 얼굴도 못 본다 해.”
순간적으로 샤프를 도로 필통에 집어넣던 손이 멈췄다. 고개를 들자, 조금 뾰로통해 보이는 카구라가 있었다.
아마, 아닐 것이다. 직감적으로 소고는 그렇게 느꼈다. 긴토키에게 친애의 감정은 느끼는 것 같지만, 소고와 긴토키가 서로에게 갖고 있는 감정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어미새 뒤를 쫓아가려고 하는 아기새 같은 것이겠지. 안도는 했지만, 그렇다고 기분이 좋은 건 아니다.
“뭐야, 그렇게 선생님 얼굴이 보고 싶냐? 너 선생님 좋아해?”
솔직하지 못한 성격이라는 걸 알기에 일부러 한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호의를 드러내는 걸 쑥스러워하는 카구라는 절대로 긍정하지 않을 테고, 잘 하면 앞으로 긴토키에게 접근하려는 걸 막을 수도…….
“무슨 소리냐 해. 선생님 제일 좋아하는 건 너잖아.”
순간 말문이 막힌 소고를 구제한 것은 마침 울린 카구라의 전화벨소리였다. 전화를 받은 카구라는 내용으로 추정하건데 친구와 놀러갈 약속을 한 듯, 몇 마디 주고받더니 전화를 끊지도 않고 “그럼 먼저 간다 해.”라며 도서실을 나가버렸다.
지금 그 말도, 그런 뜻이, 아니겠지만…….
카구라가 둔해서 망정이지 이러다간 들키는 것도 시간문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소고는 도서실의 불을 껐다. 드르륵 소리가 나는 미닫이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우고, 열쇠가 2개 달린 일지를 들고서 3층의 국어준비실로. 도서실의 열람시간도 끝나버린 학교는 조용하기만 했다. 2달 동안 꽤 익숙해진 아무도 없는 복도와 계단. 창문마다 노을이 드는 것에 그림자를 만들며 걸어서, 소고는 안에 사람이 있는 국어준비실의 문을 열었다.
“수고~.”
바퀴달린 등받이 의자에 앉은 긴토키-긴파치가, 등받이를 반쯤 뒤로 쓰러뜨리며 몸을 눕히고서 인사했다. 하늘하늘 흔드는 왼손에 다가가 일지를 넘겨주자 그는 확인하지도 않고 그것을 책장 끝에 꽂았다.
“쳐다는 봐라, 선생님.”
“이야~ 선생님은 오키타 군을 믿으니까.”
능청맞기는. 소고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대답하는 긴토키에게 속으로 말하며 옆의, 바퀴는 있지만 등받이는 없는 의자에 앉았다. 끌고 긴토키 바로 옆까지 간다.
“뭐 해?”
“쪽지시험 채점.”
“우리 반 거는?”
“끝났어. 왜, 점수 궁금해?”
“별로.”
그 말에 겨우 시험지에 동그라미와 빗금을 치던 긴토키의 얼굴이 소고 쪽을 향했다. 조금 기분이 좋아진다.
“우와~ 어차피 틀릴 거 없다 이거지? 전교권에서 노시는 오키타 군에게 쪽지 시험 정도는 껌이다 이거지?”
“어.”
“재수 없는 꼬맹이~!”
말하면서 긴토키의 손가락이 소고의 볼을 꼬집었다. 죽 늘이며 흔들지만, 그렇게 아프진 않다. 하지만 괜히 아파, 라고 엄살을 부려보았다. 입가는 웃고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하찮은 이야기를 하면서 장난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걸.
틀릴 리 없지 않은가. 당신이 손에 쥐고 한 글자 한 글자 볼 시험지인데. 누구 때문에 팔자에도 없는 국어 공부를 요즘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데. 물론 이 사람 앞에서는 그런 노력 없이도 좋은 점수를 받는 똑똑한 남자로 보이고 싶기 때문에 절대 말 안 하지만.
곧 손가락이 볼에서 떨어졌다. 동시에 긴토키의 눈 역시 시험지로 되돌아갔다.
“뭐, 덕분에 우리 반 평균이 비참한 꼴이 안 나서 다행이긴 한데…….”
말하며 그는 “너무 성적 안 좋으면 또 교장이 보충을 하니 마니 시끄러우니까.”라며 불평을 뱉었다. 교사에게도 학생이 모르는 일이 많은 모양이었다. “흐응.”하고 맞장구 같은 소리를 내며 소고는 긴토키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얀색 속눈썹이 안경알까지 닿아있다. 손을 뻗으면 혼난다는 것은 이제 학습했기 때문에 보기만. 낮은 편은 아닌 코나, 닿으면 부드러운 입술이나, 어쩌면 얼굴을 구성하는 모든 부분 중에 제일 잘생겼을 귀까지.
만약 정말로 누가 자신의 이 시선을 눈치 챈다면, 이렇게 보는 건 자신뿐이라고 해야지. 그렇게 결심을 굳힌다. 같은 일이 일어났을 때 압도적으로 입장이 난처해지는 것은 긴토키이다. 자신은, 아무리 심해봤자 전학이겠지. 물론 집안에 일대 파란을 불러일으키며 들어온 학교를 떠난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지만 긴토키가 학교를 떠나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나이를 먹어서 자유가 생기면, 데리러 올 거다. 이번엔 누가 떨어뜨리려고 해도 그와 떨어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에 가서, 긴토키를 잡아야지.
하지만 일단 지금의 제일은 역시 안 들키는 거지만.
“……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난 너만큼 잘 생긴 게 아니라서 그렇게 가까이서 빤히 보고 그러면 굉장히 뻘쭘하거든?”
“신경 쓰지 마. 예쁘다고 보고 있는 거니까.” 말없이 긴토키는 소고의 의자를 발로 밀어버렸다. 넘어지지 않도록 밸런스를 잡느라 저항도 못하고 책장까지 밀리는 소고. 뒤로 넘어가기 직전에 간신히 책장을 잡고, 뭐라 하려고 했던 찰나.
“선생님은 오키타 군이 거기 있는 책을 읽고 교양을 쌓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람을 숨이 닿는 거리에서 빤히 보는 교양 없는 행동을 안 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좋아하는 애 가까이서 보겠다는데 교양이 어디…… 알았어.”
더 이상 말하면 볼펜이 투척될 것 같아 소고는 입을 다물었다. 모처럼 평화로운 세상에 태어났는데 어째 쑥스러워 하는 방식이 전보다 폭력적이 된 것 같다. 아니, 전엔 그냥 쑥스러워할 시간이 없었던 건가? 생각하며 소고는 얌전히 긴토키의 말을 따라 책장 쪽으로 의자를 돌렸다. 빽빽이 꽂혀있는 문고판과 단행본. 꽤 넓은 국어준비실을 반 이상 차지하고 있는 모든 책장이 이런 상태다 보니 이곳에 매일 틀어박혀있는 걸 보면 국어 선생 티가 나기는 한다. 여전히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는 미묘하지만, 책도 보지 않고 와카를 술술 읊는 걸 보면 뭐…… 나쁘진 않다.
제목도 보지 않고 책등을 손가락으로 훑다가 대충 뽑아본다. 제목은, 일본 근현대문학특선 백넘버 64, 인간실격.
“이거 재밌어?”
의자를 돌리며 묻자 긴토키는 소고가 들고 있는 책을 인상을 찌푸리며 보더니(의자는 아직 돌아가고 있었다.) 곧 제목을 읽고 다른 의미로 인상을 또 찌푸렸다.
“그냥 읽어도 재미없다? 그거. 파고 들어가면 끝도 없는 문제작이니까.”
긴토키의 말을 한 귀로 들리며 소고는 책의 뒤표지를 보았다. 가장 유명한 구절이 문자디자인 방식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수치스러운 인생이었습니다.’——문학에 별 관심이 없는 소고도 아는 문장이다. 모르는 것보단 뭐라도 하나 아는 게 그나마 낫다.
“그냥 안 읽으면?”
“이 구절은 실은 무슨 의미라든가, 이 부분에서 문제제기 하고 있는 건 뭐라든가, 거기에 대해서 자기 생각은 어떠냐든가…… 뭐 그런 거.”
흐음. 소고는 다시 책을 앞으로 돌렸다.
“읽을래. 그거 해줘.”
“……내가 너 하나 데리고 독서교실 해야 되냐……?”
“일해, ‘긴파치 선생님.’”
일부러 지금의 이름으로 부른 것에 긴토키-긴파치는 얼굴을 찌푸렸다. 다시 만난 날부터, 남의 눈이 없을 때는 언제나 ‘긴토키’라고, 이제는 누구도 부르지 않는 이름으로 불렀던 것이다. 교실에 있을 때도 ‘사카타 선생님’이면서 ‘긴파치 선생님’이라니.
“그렇게 부를 거면 존대하지? 오키타 군.”
“얼굴도 못 보게 하면서 이 정돈 그냥 넘어가.”
하여튼 말로는……. 긴토키는 작게 한숨을 쉬고, 소고가 완전히 책장에 등을 기대고서 정독할 자세에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반년 전까지만 해도 중학생이었던 얼굴은 긴토키가 가장 처음 봤던 그보다 한참이나 어려 보였다. 16번째 생일을 한 담 남겨둔 15살. 방금 꼬집은 뺨도 아직 기억 속의 그것보다 더 동그랗고, 부드러웠다. 비율이 좋아서 혼자 서 있으면 안 그래 보이지만 긴토키 옆에 서면 머리도 어깨도 한참 아래에 있다. 봄의 신체검사 때보다는 큰 모양이지만 아직 10cm 이상 차이가 날 터다. 아직은 선이 가는 예쁜 소년.
하지만 그 모습이 곧 청년으로 변하는 과정을 긴토키는 알고 있었다. 이미 한 번, 가까이서 보았던 변화니까. 부드럽고 동그랗던 볼살이 빠져서 날카로운 턱 선을 드러내고, 크고 반짝이기만 했던 눈에 성숙함이 깃들고, 아직 가늘고 약한 팔다리에 근육이 붙고 단단해지겠지. 아직 고개를 숙여야 시선이 맞는 눈높이도 곧 그가 조금 발돋움을 하는 것만으로도 입술을 겹칠 수 있는 곳까지 올라온다. 보기 흉한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이 아니다. 원래도 아름다웠던 것이 세련미와 남자다움을 더하는 것이다. 분명히 손을 뻗지 못하고는 견딜 수 없을 만큼 눈이 부시겠지.
18살까지 앞으로 2년. 그 후의 자신이 과연 참을 수 있을지 긴토키는 자신이 없었다. 저번에는, 소고는 ‘소고’가 아니었으니까 손을 뻗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손을 잡지 않고서는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분명히 그 때와 같은 모습으로, 그 때와 같은 손길로 자신에게 닿을 터다. 아직은 마냥 어려 보여서 괜찮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시대가 달라져서 미성년한테 손을 대는 건 양심이 찔리는 데다 혹시 누가 보기라도 했다간 당장에 사활 문제다. 20살까지 계속 이 모습으로 있다가 20살 생일 되자마자 확 커주면 좋을 텐데. 그럼 긴토키의 걱정도 하나 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그리고 긴토키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아아, 진짜!”
소고의 인내심은 한계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얼굴 보는 것도 안 된다고 해서 시키는 대로 얌전히 책을 펼쳤더니, 책을 펼치자마자 자신에게 꽂히는 이 시선은 대체 뭐란 말인가. 복수인가. 그렇다면 효과 만점이다. 좋아하는 사람이 저렇게 뜨거운 눈으로 날 보는데 애써 무시하고 어떻게든 글자를 눈으로 훑는 척 하는 것만으로도 거의 고문에 가까웠으니까. 하지만, 이제 무리다.
바퀴가 칵 하는 소리를 내며 나무 바닥을 긁었다. 넓어봤자 교실보다 좁은 국어준비실. 긴토키에게까지 가는 건 금방이었다. 소고는 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거의 내던지듯이 책상 위에 두고서, 다른 한 순을 긴토키에게로 향해, 목에서 머리로 이어지는 부분을 붙잡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
평소엔 닿기도 전에, 혹은 닿기가 무섭게 긴토키의 손에 의해 강제 종료될 입맞춤은 거절당하지 않았다. 입술을 열면, 조금 메마른 긴토키의 입술도 순순히 열렸다. 재회한 이후로 처음으로 허락이 떨어진 것에 소고는 놀라고, 동시에 흥분했다. 이제 포옹만이 아니라, 이 사람의 안에 들어가도 된다고 허락한 것이다.
책을 내려놓은 오른손을 뻗어 긴토키의 뺨을 쓰다듬었다. 위로 올라가면 느껴지는 차가운 금속. 전에는 없었던 안경이다. 방해된다. 안경 같은 걸 써본 적이 없는 소고는 무작정 그것을 치워버리기 위해 가장 면적이 넓은 렌즈를 잡고 안경을 벗겼다. 하지만 그것을 책해야 할 입술은 여전히 그저 벌어진 채, 조금씩 안으로 들어오는 소고의 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긴토키의 혀도 입 안도 뜨겁기만 했다. 에어컨이 돌아가는 국어준비실에서조차, 화상이라도 입을 것처럼. 서로 얽히는 혀도, 쓰는 치열도, 쓰다듬은 부드러운 입천장도 오싹하도록 온몸에 흥분을 자아낸다. 입술이 잠깐 떨어지고, 또 붙고, 이번엔 입술 자체의 감촉을 즐기고, 혀로 핥아보고, 또 그 안으로. 입을 크게 벌려서 마치 잡아먹을 것처럼. 질척거리는 소리가 섞이고, 숨소리가 커진다. 머리가 멍한 상태에서 소고는 본능적으로 긴토키를 갈구했다. 부족하다. 더, 더. 아직 한참 부족하다. 머리를 고정하고 있던 손도, 뺨을 쓰다듬던 손도 아래로 내려간다. 뜨겁게 달궈진 목. 그 위를 감싸고 있는 와이셔츠와 느슨한 넥타이, 백의. 원래도 반쯤 풀려있다시피 한 넥타이를 아주 풀어버리려 손가락을 걸고, 거절 같은 걸 들을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말만이라도 허락을 구하려 입술을 떼고,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순간 그대로 정지한 소고와 긴토키였지만 두 사람은 곧 그것이 학생들의 최종 귀가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기가 학교고, 소고가 바로 그 귀가해야 하는 학생이라는 것도.
다음 순간, 엄청난 힘에 의해 강제로 자리에서 일어난 소고는 저항할 새도 없이 그 힘에 양 손목을 등 뒤로 구속당했다. 등 뒤에 있는 사람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긴토키!”
“네~ 착한 아이는 그만 집에 갈 시간이에요~.”
“지금 나랑 장난 치, 이거 안 놔?!”
“응. 놔 줄게, 놔 줄게. 복도에서.”
“야!”
참지 못하고 복도까지 다 울리도록 소리 지르지만 긴토키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선생님한테 그렇게 소리 지르면 못 써요~.”라는 웃기는 소리를 하며, 나름 전력을 다해 버티는 소고를 끌고서 책장에 막힌 앞문 대신 뒷문으로 향하는 것이다.
“여기서 끊는 게 어딨어?! 당신이 그러고도 사람이야?!”
“응~ 사람 아니고 선생이야~ 그러니까 얌전히 집에 가자~. 오키타 군 오늘 집에 가서 미츠바 쨩 숙제 봐 주고 저녁에 과외 선생님도 오신다며? 이런 데서 비행청소년 흉내 내지 말고 얼른 집에 가서 천사 같은 동생이랑 놀아야지, 시스콘.”
“누가 시스…… 당신 실은 내가 미츠바 얘기 하는 거 기분 나빴어?!”
기분 나빴다고 할 것까진 없지만 뭐 그렇다고 그렇게 유쾌한 화제는 아니었지, 하고 굳이 말해줄 생각이 없는 긴토키는 묵비권을 행사하며 발로 뒷문을 열었다. 예의와는 담을 쌓은 행동이지만 비상사태니 어쩔 수 없지. 그리고 뒷문이 열림으로서 마지막 발버둥 마냥 난리가 난 소고를.
“내일 봐, 소고.”
귓가에 대고 아주 작게, 아주 낮게 한 번 속삭이는 것으로 조용히 시킨 후 복도로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넘어지기 직전에 간신히 자세를 고친 걸 확인하고, 그 자세에서 넘어지지 않는 운동신경에 속으로 감탄하며, 그 운동신경으로 도로 이쪽으로 튀어오기 전에 뒷문을 닫아 문을 잠가버렸다.
“당신 진짜 이러기야?! 인간적으로 너무하지 않아?!”
“응~ 이러기야. 인간적으로 너무한 것도 맞으니까 그만 가세요~. 차 조심하고~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이상한 사람 조심하고~.”
“긴토키———!”
계속 저렇게 고래고래 소리 지를 수 있다니, 기운도 좋지. 15살은 다르네. 생각하며 긴토키는 뒷문에 등을 돌렸다.
“……오늘 밤에 책상에 묶어놓고 뒤에서 박는 걸로 딸감으로 써준다, 이 에로 교사…….”
뭔가 15살답지 않은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긴토키는 책상으로 돌아갔다. 중단했던 쪽지시험 채점을 재개하자마자 복도를 쌩 내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단념하고 늦지 않게 집에 가기로 한 거겠지. 현명한 판단이다.
소고가 3학년이 되면 학교에서 가장 스파르타인 츠쿠요 선생님께 담임을 부탁하고 자기는 1학년 담임으로 도망쳐야겠다고 굳게 결의하며, 긴토키는 거의 백지에 가까운 답안지에 빨간펜으로 ‘0’이라고 썼다.
'시-쨩'은 주변 친구들이 '토시'라고 부르는 걸 듣고 미츠바 쨩이 멋대로 부르는 호칭입니다.
그리고 미츠바 쨩은 '시-쨩'이 사실은 '시-군'이었다는 걸 모르고 초등학교를 졸업합니다()
가볍게 18000자 정도.
14살 생일날, 이럭저럭 평탄했던 오키타 소고의 인생은 극적으로 뒤집어졌다.
‘뒤집어졌다’고 해도 그의 신변에 무언가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13살에서 14살이 된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이었고, 학교는 여전히 가기 싫지만 가면 이럭저럭 재밌을 정도로만 따분했으며, 그림에 그린 것처럼 화목한 건 아니었지만 이렇다 할 불화가 있는 것도 아닌 오키타가에서는 여전히 맞벌이하는 부모님 대신 동생이 오빠를 맞아주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 ‘오키타 소고’는 여전히 그 전날의 오키타 소고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오키타 소고였던 것이다.
설사 소년에게 약 70년 분량의 기억이 더해진다고 해도, 그가 말하지 않는 이상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아직 생일에 나이를 먹는다고 슬퍼할 나이도 아닌데 묘하게 조용하다고 그의 부모는 생각했지만, 생일이라고 기뻐하는 게 촌스럽고 유치하다고 생각할 나이가 되었나 보다 하고 넘겼다. 동생은 몸 상태가 안 좋다는 오빠의 말을 믿고 걱정하는 티를 내면서도 조용히 방을 나가주었다. 그리고 방에 혼자 남은 소고는.
“……바보 아냐…….”
이 말을 해주고 싶은 사람에게 들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리며, 침대 머리에 등을 기대고 앉아있던 자세에서 천천히 상반신을 숙여 얼굴을 시트에 묻어버렸다.
겨우 사흘 같이 있었을 뿐인 남자애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 설사 그에게 연정을 느꼈다고 해도,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한심한 짓이다. 바보나 하는 짓이다. 최소한 그 때까지의 ‘오키타 소고’의 연애관에 의하면 그랬다. 누이가 그랬듯, 아무리 사랑해도 통하지 않는 일도 뜻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는데 하물며 목숨을 바친다니. 그런데 그런 어리석은 짓을 그 사람은 자신을 위해 한 것이었다. 모른 척하면 될 것을. 입술조차 한 번 맞대지 않은 그런 애가 죽든 말든, 내버려 두면 되었을 것을. 그걸 막으니까, 친구에게 칼을 겨누면서까지 그걸 막으니까, 그러니까, 결국은 함께 목숨을 끊게 되지 않았는가.
그것뿐이면 말도 안 한다. 그 때의 일에는 자신의 책임도 반은 있을 테니까.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래, ‘그 다음’. 놀랍게도 ‘그 다음’이라는 것이 존재했던 것이다. ———아무것도 모른 채로 다시 태어난 자신을 그 사람이 다시 찾아내 데리고 온다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기억이.
기묘한 느낌이었다. 분명히 기억속의 그 광경을 보는 ‘오키타 소고’는 아무런 감정도 없는데, 그것을 지금 보는 오키타 소고는 내장의 머리와 꼬리가 자리를 바꾸는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 처음 ‘오키타 소고’를 발견했을 때의 그 눈도, 결국 놓을 수 없어서 곁에 둔 ‘오키타 소고’를 볼 때의 눈도, 점차 성장해 이전과 비슷해진 ‘오키타 소고’를 보는 눈도, 자신의 딸과 나란히 선 ‘오키타 소고’를 보는 눈도, 전부, 전부 무감정한 ‘오키타 소고’의 몸을 뚫고 나가 당장 집어치우라고 주먹질을 해주고 싶을 정도로는, 속이 들끓었다.
그치만 ‘오키타 소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보는지 하나도 모르면서 곁에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어떤 마음인지도 모르고 속편하게 그 사람에게 ‘친애의 정’ 같은 감정을 향하는 것이다. 아닌데. 그 사람에게 향해야 할 감정은, 그게 아닌데. 그 사람에게 향하는 감정은 그런 미지근한 것이 아니라, 온몸의 피가 끓고 목이 타들어가고 눈앞이 다 아찔해지는, 그런 감정을———그 사람이 변함없이 자신을 향해 보내오는 감정을 돌려줘야 하는 것이었다.
‘오키타 소고’는 오키타 소고답게 눈치는 나쁜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 사람과 그의 아내가 어떤 사이인지도, 또——— 그 사람과 ‘이마이 노부메’가 어떤 사이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야 그 만큼 오랜 시간을 그 저택에서 지내면 모르기가 더 힘들겠지. 하지만 알면서도 ‘오키타 소고’는 아무런 감정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냥, 거대한 상단을 능숙한 수완으로 이끄는 총수님이 실은 저렇게 남자 밑에서 헐떡이는 걸 좋아하다니 의외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누구 때문에, 그 사람이 그러고 있는데……! 애초에 ‘오키타 소고’가 오키타 소고였으면, 그 사람에 대해 똑바로 ‘알고’ 있었으면 그가 ‘이마이 노부메’에게 안기는 일 같은 건 일어나지 않았다. 참다가 참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서 ‘이마이 노부메’의 손을 잡아채는 일 같은 건, 절대로 일어나지 않았다. 전부 자신이었다. ‘오키타 소고’여야 했다. 그 사람의 눈을 마주하고 그 마음에 답하는 것도, 사람들 눈을 피해 정욕으로 점철된 입맞춤을 나누는 것도, 하인들을 물리고 몰래 이부자리에 숨어드는 것도, 전부 ‘오키타 소고’가 했어야 하는 일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르니까 옆에서 계속 그렇게, 바보 같이, 두 눈을 멀쩡히 뜨고 그 사람이 다른 남자 손을 잡는 걸, 아무 생각 없이……!
그 사람도 그 사람이다. 저버리면 되지 않은가. 자기가 한 약속도 기억 못하는 인간 같은 거 저버리고, 아내든 아내가 아니든 새로운 사람을 보면 될 것이 아닌가. 대체 왜 어리석게 자신만 바라보고 있단 말인가. 차라리 그가 ‘이마이 노부메’를 사랑한 것이었으면 그게 더 나았다. 짓이기는 것처럼 마음은 아팠겠지만, 그랬으면 이렇게 분하지는 않았다. 왜 기억을 못하느냐고 붙잡고 화를 냈으면 더 좋았다. 그런데 그 사람은, 화도 내지 않고, 눈도 돌리지 않고, 그 사람을 볼 생각도 하지 않는 ‘오키타 소고’를 곁에 두고, 계속 곁에만 두고, 결국은 자기 딸의 손을 쥐어주고서, 그러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고, 그리고, 그대로.
물론 그런 그 사람의 마음 같은 걸 알 리가 없는 ‘오키타 소고’는 존경하는 총수님의 상단을 이어, 어떻게든 그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밖에 애인도 몇 있었지만, 존경하는 사람의 딸에게 자상하지는 못해도 할 도리는 하는 남편이었다. 상단 운영은, 글쎄, 시대가 안 좋았다고밖에는 할 말 없다. 이것저것 개혁을 해봤지만 실패도 많이 했고, 비슷한 수만큼 성공하기도 했다. 총점을 준다면 아슬아슬하게 급제점이겠지. 그러고도 과로로 명이 줄었으니 웃지 못 할 이야기지만. 하지만 결국 끝까지, 자신이 ‘누구’인지 깨닫지 못하고 50년 남짓의 생을 마감했다.
그리고, 지금.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 14년 만에 겨우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깨달음과 동시에 엄청난 초조함에 휩싸였다. ‘오키타 소고’가 기억하는 마지막 그 사람의 모습은 이미 여러 가지를 포기한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자기 딸과 나란히 선 ‘오키타 소고’를 보고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몇 십 년을 곁에 두고도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아무 말이 없었던 사람이다. 어쩌면 이번엔, 처음부터 포기하고 새로운 사람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약속도, 괴로운 기억도 전부 다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갖고 있어봤자 무겁기만 한 것들을 전부 버렸을지도 모른다.
위에서 무거운 무언가로 짓눌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사람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것만으로도, 이렇게. 그런데 그 사람은 실제로 자신을 기억 못하는 ‘오키타 소고’ 옆에서 그 오랜 시간 있었던 것이다.
시트에 눈두덩을 묻는다. 뜨겁다. 시트가 젖겠지만,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는 나았다. 무슨 자격이 있다고 운단 말인가.
“……바보 아냐…….”
그 사람을 그렇게 만든 건 난데.
약속을 한 것도, 약속을 해놓고 잊어버린 것도, 그래서 그 사람을 계속 기다리게 한 것도 나인데.
그럼, 그러면———이번엔 데리러 가야지. 약속을 지키러, 가야지.
기다리고 있어.
언젠가 입에 담았던 말을, 이번엔 속으로만 기도하듯이 말했다. 울음소리를 참느라 꾹 다물고 있는 입 대신 속으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하지만 총인구 1억 2천만이 넘는 지금의 일본에서 이름도 출신도 모르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다못해 이름이라도 알면 좀 낫겠지만, 전의 ‘오키타 소고’의 이름은 오키타 소고가 아니었기에(지금은 무슨 우연인지 오키타 소고지만.) ‘사카타 긴토키’도 지금은 다른 이름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열쇠는 생김새뿐이지만, 이름이 변할 수 있다는 게 증명된 이상 생김새라고 변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소고가 기억하는 한 자신은 매 번 이 얼굴이지만 긴토키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다. 또 문제는 나이. 원래도 10살 정도 연상이었지만, ‘저번’에는 가볍게 아버지와 아들 정도의 나이차가 있었다. 실제로 그 딸과 결혼했으니 사위이기도 했고. 그러니까 이번에는, 최악의 경우 이미 할아버지라든가, 별로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아직 안 태어났을 가능성조차 존재한다.
‘데리러 가겠다’고 결심한 그 다음 순간부터 닥치는 현실의 벽에 소고는 머리를 싸맸다. 이쯤 오면 저번에 자신을 찾아낸 그 사람이 존경스러울 정도다. 물론 그 때는 대상단의 네트워크를 이용해 전국을 구석구석 뒤져 비슷한 사람을 전부 데리고 오라고 해서 봤다고 하지만, 소고는 자기가 ‘몇 번 째’만에 찾아낸 ‘오키타 소고’인지 모른다. 못 해도 수 백, 어쩌면 수 천 명의 사람을 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까마득하다. 심지어 그건 당시 대상단 총수였던 그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일이고, 지금의 소고는 평범한 중학교 2학년이다. 사람을 찾는 수단에도 한계가 있다. 아직 부모님의 비호 아래 있는 몸으로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찾겠다고 집을 뛰쳐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니,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을 각오를 하면 그것도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소-쨩, 왜 그래?”
그랬다간 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생———오키타 미츠바가 슬퍼한다.
원래도 오키타 소고는 (친구들의 평에 따르면)보기와는 다르게 동생을 잘 챙기는 좋은 오빠였지만, 하나밖에 없는 누이가 그 전에도 하나밖에 없는 누이였다는 것을 알고 난 다음부터는 스스로도 시스콘끼가 더 심해진 것 같다고 자각하고 있는 바였다. 전에는 돌아가신 부모님을 대신해 어머니처럼 동생을 키워준 누이를, 이번엔 늘 집에 안 계신 부모님을 대신해 자신이 돌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상한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그런 건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오키타 미츠바가 살아서 자신의 누이로 있는데 그게 무에 문제란 말인가. 거기다 이번에 6살 어린 동생으로 태어나준 덕에 자신은 몰랐던 어린 미츠바의 모습을 잔뜩 볼 수 있는 것이다. 원래 아이들은 다 천사라고 하지만 솔직히 소고의 감성으로는 공감하기 힘들었는데(특히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꽤 악랄했던 기억이 있다.) 미츠바에 관해서만큼은 자신을 갖고 말할 수 있다. 천사다.
천사 같은 동생을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부드럽게 “왜?”라고 묻자 작은 얼굴에 잘도 들어가 있는 큰 눈에 걱정을 가득 담은 미츠바가.
“요즘 소-쨩이 자주 안 좋은 표정으로 멍하니 있으니까……. 무슨 고민 있는 거야? 누가 괴롭혀? 뭐든 말 해! 내가 혼내줄게!”
누님……이 아니라 내 동생 천사……!
자기 표정이 웬만하면 변하지 않는 것에 이 이상 없는 감사를 표하며 소고는 가는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놓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거 아냐.”
하지만 납득하지 않았는지 소고의 손아래서 조금 볼을 부풀린 미츠바는 불만 가득한 눈으로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거짓말. 시-쨩도 무슨 일 있으면 그런 표정으로 가만히 있는 걸.”
‘시-쨩’은 요즘 미츠바의 이야기에 나오기 시작한 학교 후배다. 1학년과 2학년이 같은 층을 쓰는 미츠바네 초등학교에서, 남자아이들에게 놀림당하고 있는 걸 구해줬다던가. “머리를 있지, 하나로 이렇-게 묶어서 엄청 예뻐!”라는 것이 미츠바의 소개였지만 초등학교 저학년 특유의 표현을 이미 중학생인 소고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쨌든 학교에 한 살 어린 친구가 생겼다는 모양이니 오빠로서는 기쁠 따름이다. 물론 아무리 놀림 당하는 애를 도와주기 위해서라도 남자애들을 상대로 싸움을 거는 건 아주 불안하지만. 무슨 일 있으면 쳐들어가야지라고 속으로 결의한 것은 절대 미츠바에게 말할 생각이 없다.
그건 그렇고, 오빠가 고민이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본 건 기쁘기도 하고 복잡미묘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초등학교 2학년을 상대로 이런 이야기를 상담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모르고 나이도 모르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일단 주변 사람들의 졸업앨범이란 졸업앨범은 다 빌려서 확인하고 있지만 끝도 안 나고 성과도 없어서 벌써 지친다”라는 말을 해봤자 어쩌겠는가, 초등학교 2학년이. 중학교 2학년도 작작 갑갑하지만 초등학생에게 신세한탄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오빠가 고민을 이야기해줄 기미가 없자 조금 삐친 듯하면서도 일단 포기한 모양인 미츠바는.
“나 아니라도 다른 사람한테는 꼭 얘기해서 도와달라고 해야 돼? 알았지?”
“아——…….”
“소-쨩! 대답!”
“……네.”
설사 이젠 6살 어린 누이라도 ‘소-쨩’이라고 부르며 대답을 다그치면 반사적으로 끄덕이게 되니 습관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그나저나 우리 누이는 약관 8살의 나이에 남에 대한 배려가 너무 넘쳐흐르고 사려가 깊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소고는 ‘료-쨩’과 미술학원에 같이 간다는 미츠바를 배웅했다.
대답을 해버린 이상 사정을 다 말할 순 없어도 누구에게 도와달라고 말이라도 꺼내봐야 하는 것이 소고의 도리였고, 그럴 때 소고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그 때나 지금이나 한 사람이었다.
“콘도 씨 아는 사람 중에 은발인 남자 없어요?”
기대를 하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 물어만 봤다. 중학생보다 훨씬 일찍 시작한 여름방학을 만끽하지도 못하고 이곳-할아버지가 경영하는 구멍가게를 지키고 앉아있는 콘도는 소고의 말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며 “은발인 남자?”라고 되물었다.
“할아버지 얘기하는 거야?”
“아니, 할아버지가 아니라…….”
거기까지 말하다 소고는 말을 멈췄다. 자신이 제일 처음 기억하는 그 사람은 향년 서른 정도였겠지만, 그 다음은 콘도가 말하는 대로 ‘할아버지’였다. 그리고 지금 그 사람은 연령 미상. 할아버지가 아니라는 보장은 없다.
“할아버지일지도 모르는 남자……?”
콘도가 매우 이상한 표정으로 봤지만 어쩔 수 없다. 사실이다.
“뭐야, 할아버지냐? 아냐? 아니면 외국인?”
그러고 보면 별로 생각하지 않았지만 꼭 일본인으로 태어난다는 보장도 없다. 아니, 그런데 전세계를 시야에 넓으면 범위가 너무 넓은데. 1억 2천만 중에 한 사람 찾는 게 단번에 60억 중에 한 사람으로 분모가 커진다. 1억 2천만도 갑갑한데 60억은 무리다.
그 생각에 눈 앞이 다 아득해진 소고가 아무 말도 못하고 있자, 그 사이에 알아서 “은발이라~.”라고 중얼거리며 혼자 머리를 굴린 모양인 콘도가.
“그러고 보면 1학년 때 은발머리 하고 다닌 선배가 있었는데.”
……‘하고 다닌’?
“대학은 정말 별의 별 녀석들이 다 모이니까. 예술대학 쪽에는 빨주노초파남보 머리가 다 있다는 소리도 들었었지. 난 빨, 노, 초밖에 못 봤지만. 아니, 그건 초록색이 아니라 청록색인가?”
하고 중얼거리는 콘도는 지금 대학교 3학년이다. 중간에 갑자기 “소고, 난 세계를 보고 BIG한 남자가 되어 돌아오마.”라며 휴학계를 내고 배낭여행 세계일주를 떠난 걸 고려하면 원래는 4학년이지만. 세계일주(사실 코스를 잘 들어보면 세계일주도 아니다.)를 하고 왔어도 BIG해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아, 그치만 그 선배는 끝까지 자기 머리라고 우겼었지. 참 이상한 선배라니까. 뭐, 사카모토 선배 친구니까 그럴 만도…….”
“콘도 씨, 그 은발머리 선배 얘기 자세히 좀 해 줘요.”
저도 모르게 콘도 씨 팔을 붙잡고 있었다. 콘도 씨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보면서도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세히, 라고 해도…… 나도 잘 아는 게 아니라. 같은 학부의 사카모토 선배가 같이 교직 듣는다고 꽤 친해서, 왔다 갔다 할 때 선배 옆에 있으니까 기억하고 있었던 거지 얘기해본 적도 없고…….”
“그 사람, 어떻게 생겼어요? 머리 말고, 키라든가, 얼굴이라든가.
“키는…… 사카모토 선배랑 있으니까 좀 작아 보였지만 꽤 컸을 걸? 180은 안 되겠지만. 얼굴은, 글쎄다. 그렇게 잘 생긴 것도 아니고 못 생긴 것도 아니고……. 맨날 잠이 부족한지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반쯤 감고 돌아다니더라고. 본인은 머리색이랑 눈 색이 다 원래 그렇다고 했다는데, 사람이 그럴 리 없잖아? 토끼도 아니고. 그리고…… 아아, 맞아. 사카모토 선배랑 같이 서있으면 우리 과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빠글머리 둘이 같이 서있다고 흑백빠글이라고 불렀다. 한쪽은 검은머리, 한쪽은 흰머리라고.”
“콘도 씨, 그 사람 이름, 알아요?” “응? 아…… 뭐랬더라……. 사, 사카…… 사카타! 맞아. 사카타다.”
———그 사람이다.
“콘도 씨, 연락처. 그 사람, 연락처!”
“우오오, 소고?! 왜 그래?! 무슨 일인데 그래?!”
“나중에 설명해줄게요! 연락처! 없어요?!”
“성도 겨우 기억하는 사람 연락처를 알 리 없잖아! 그냥 과 선배 친구라니까!”
“그럼 그 과 선배 연락처!”
“소고, 일단 좀 진정하고…….”
“내가 지금 진정이 안 된다구요!”
거의 멱살을 잡을 기세로 콘도에게 달려드는 소고와 그런 소고의 양팔을 잡고 어떻게든 벗어나려고 하는 콘도. 20살이 넘은 성인 남성과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이 구멍가게 카운터에서 그러고 있으면 안 그래도 없는 손님이 더 줄 것 같은 광경이었지만 두 사람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잠깐의 몸싸움 후 애초에 체격에서 밀리는 소고가 콘도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중학교에 들어간 이후 키가 부쩍 큰 소고가 이젠 좀 내팽겨 친다고 해서 다치진 않을까 걱정되지 않는다는 것이 콘도로서는 다행스러웠다. 물론 등을 세게 부딪친 소고는 조금도 다행스럽지 않았지만. 아픔에 바닥을 구른 후에 소고는 일어나 삐친 표정으로 도로 앉았다.
“진정됐냐?”
“콘도 씨 야만인…….”
“먼저 달려든 건 너잖아.”
말하며 별로 조심성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 손길로 소고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은 건지 누르는 건지 한 콘도는.
“사카모토 선배는 우리가 입학했을 때 4학년이라 2학년 됐을 때 벌써 졸업했어. 애초에 1학년이랑 4학년은 수업이 전혀 다르니까 친한 것도 아니었고. 유명하니까 우리가 일방적으로 아는 거였지. 사카타 선배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 비슷하게 졸업했을 걸? 사카모토 선배랑 같이 안 있어도 흰머리는 꽤 눈에 띄는데 그 이후로 본 기억이 없으니까.” “그럼 졸업앨범에 있겠네요?!”
“소고, 아직 한참 나중 일이니까 잘 모르겠지만 대학은 졸업한다고 무조건 다 같이 앨범 촬영 안 한다. 물론 하는 사람이 더 많긴 하지만 꼭 해야 되는 건 아니니까 안 찍는 사람도 있어.”
“……에.”
예상외다. 지금까진 주로 학교나 동네 형들의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 앨범 위주로 빌려서 찾았지만 장기적으로는 대학교도 그렇게 찾아야 되나 했었는데 설마 거기에 안 실리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아니, 그래도.
“그래도 있을 확률이 더 높을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하지만…….”
“콘도 씨 그거 못 구해요?!”
“졸업 앨범?”
소고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콘도는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생각하는 듯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못 구할 건 없지만…….”
“그럼 구해서 나 좀 보여줘요! 그 사카타란 사람만 보면 돼요!”
“아니, 소고…… 너 사카타 선배 아냐?”
안다고, 해야 할까. 애초에 그 사람이라고 확정된 것도 아니고, 설사 그 사람이라고 해도 지금의 그가 정말로 ‘그 사람’인지도 모르고.
“알지도 몰라요.”
대답은 자연스럽게 애매한 것이 되었다. 콘도가 눈썹을 찌푸리는 게 보였지만 소고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거짓말은 별로 하고 싶지 않다. 특히 콘도에게는. 이번에도 여전히, 자신을 믿어주는 콘도에게는.
“……그래, 알았다.”
한숨처럼 말하며 콘도가 또 소고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졸업앨범은 구하면 내가 보고, 사카타 선배가 있으면 말해줄게. 연락처는…… 일단 사카모토 선배 연락처는 과 선배나 사무실에 물어보면 나올 것 같으니까 거기서 또 물으면 되고. 이러면 되냐?”
여전히 조금 거친 손길. 소고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콘도가 이렇게까지 해줄 필요는 전혀 없다. 그와는 관계없는 일이니까. 아니,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래서, 왜 그렇게 사카타 선배 연락처는 알고 싶어 하는 건데?”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얼버무리는 건,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니다. 콘도는 언제나 그랬듯이 기다려주는 사람이고, 지금 말하지 않아도 용서해 주겠지. 그리고 기다려줄 거다. 혹은 거짓말을 해도, 넘어가줄 거다. 그건 알고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그에게 거짓말은 이제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의도한 것이 됐든, 결과적인 것이 됐든, 설사 그 자신을 위한 것이 됐든, 이제 그에게 진실이 아닌 걸 고하는 건 싫다.
물론 콘도는 갑작스러운 소고의 말에 놀라 굳어 있었다. 그럴 만도 하다. 부모님이 늘 바빠 혼자 놀기에 어렸을 때부터 챙겨온 동네 동생이, 이제 중학교 2학년인 애가 이미 졸업한 자신의 대학 선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지칭한 것이다. 그것도 남자애가, 남자 선배를. 사람을 끌어들이는 성격이라 발이 넓은 콘도였지만 20년이 좀 넘는 인생에서 한 번도 해보지 못했을 경험이리라. 기억만이라면 이제 콘도보다 한참 연상이 되어버린 소고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에게 동정과 사과의 뜻을 표했다.
한참을 말없이 소고 얼굴만 하염없이 보고 있던 콘도는 간신히 입을 뗐다 싶더니.
“소고, 취향 특이하구나…….”
……뭐, 거기에 대해서는 동의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콘도에게 부탁한 일은 조금의 성과도 얻을 수 없었다. 혹시나 해서 사카모토가 졸업한 학기부터 이후 3학기까지의 졸업앨범을 콘도는 구해다 줬지만 어디에도 그 사람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콘도가 알아낸 사카모토의 연락처는 그가 유학(영국이라던가.)간 이후로 번호가 바뀌어서 무용지물이었다. 유학을 간 후에도 그와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람도, 최소한 학부 내에는 없다는 모양이었다. ‘사카모토 선배’와도, ‘사카타 선배’와도 연락할 수단은 아예 없다고 해도 좋은 상황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처음부터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끝이 보이지 않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겉모습이 전과 다름없는 거랑 이름(성뿐이지만.), 나이, 출신 대학까지 알게 된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큰 수확이다. 어쩌면 1억 2천만 분의 1이 아니라 60억 분의 1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때에 비하면 훨씬 희망적이다. 여전히 일개 중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얼마 없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무엇을 해야 할지는, 보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이후로는 한없이 지루하고 인내심을 필요로 하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대강의 정보를 알았으니 일단 그 정보를 더 구체화시킬 필요가 있다. 소고는 도쿄도내에 위치한 콘도가 다니는 대학에 직접 찾아가 무작정 ‘사카타를 아느냐’고 묻고 돌아다녔다. 그 과정에서 그 사람이 ‘행방불명된 친척 형’이 된 건, 본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효과는 좋았다. 특히 여대생들에게. 공립 중학교 치고는 보기 드문 블레이저 교복 차림으로 대학 캠퍼스를 혼자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소고는 그 나이대 여성들에게 더없이 귀여워 보인 모양이었다. 그네들의 적극적인 협력 덕에 소고는 그 사람이 국어국문학과 소속이었다는 것과 사카모토와 같은 학기에 졸업한 것, 그리고 함께 교직 수업을 들은 사람이 있는바 교직 과정을 이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국어국문학과’에 진학한 것도 놀랄 노잔데 ‘교직 과정’이라니, 다시 말해 선생님이 된다는 소리다. 물론 이수만 하고 그냥 취직할 수도 있다는 모양이고 하니 꼭 교사가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 ‘사카타 긴토키’가, 선생님……. 아니, 지금의 그 ‘사카타’가 여전히 그 사람일 거라는 보장은 없지만 최소한 소고의 기억 속에 있는 그 사람에게는 참 안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누굴 가르치거나 하는 걸 별로 좋아하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으니까. 특히 문학 같은 건. 물론 ‘마지막’에 나눈 이야기는, 답지도 않게 문학적인 것이긴 했지만.
거의 매일 같이 다니지도 않는 대학에 얼굴을 내민 여름 방학이 끝나고, 소고는 2학기를 맞이했다. 학기가 시작되어 버리면 하루 중 반은 학교에 잡혀있게 된다. 거기다 학교가 끝나도 소고는 동생을 돌본다는 중요한 임무가 있었다. 결국 소고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인터넷의 도움을 받아 전국의 중고등학교 교직원의 얼굴과 이름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졸업 후 취직을 했으면 정말로 방법이 없지만 혹시라도 교사가 됐다면 어딘가에는 있을 터다. 학교 정보 공개니 교원 평가니 하는 교육 문제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던 소고였지만 학교 홈페이지에서 교직원의 얼굴과 이름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는 크게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매일 밤늦게까지 모니터와 눈싸움을 하는 2학기가 지나가고, 겨울방학. 여전히 성과가 없는 가운데 소고는 고등학교는 사립으로 가라며 학원을 다니라는 부모님과 일대 전쟁을 치루는 겨울을 보냈다. 생각해 보면 벌써 오랜 옛날 같은 중학교 입학 때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다음으로 미뤘던 것이다. 그리고 고등학교 입학이 바로 그 ‘다음’이다. 물론 소고는 사양이었다. 고등학교가 어떻고 대학이 어떻고 하는 이야기도 자기 얘기가 아닌 것 같았던 데다 학원 같은 걸 다녔다간 안 그래도 적은 시간이 줄어든다. 하루라도 빨리 그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하지만 부모님은 좀처럼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고, 소모전으로 3학기마저 그냥 끝나버렸다.
결국 소고가 꺾인 것은 3학년이 되기 직전, 어머니의 “오빠가 그렇게 공부하기 싫은 거 미츠바 쨩이 배우면 어쩌려고 그러니?!”라는 말에 의해서였다. 자기 자신의 미래는 솔직히 아무래도 좋지만, 6살 어린 누이는 그렇지 않다. 공부를 잘 해야 행복해진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못하는 것보단 잘할 때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은 건 사실이다. 부모님보다도 같이 있는 시간이 더 많은 자신이 미츠바에게 미치는 영향이 더 크다는 자각도 있었다. 그런 미츠바 얘기를 꺼내면 소고로서는 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었다. 3학년 1학기 시작과 동시에 소고의 생활은 반은 학교, 반은 학원으로 채워졌다.
학원을 다녀오면 그 때까지 안 자고 있던 미츠바가 “소-쨩 공부 하느라 수고했어!”라고 맞아주기에 잠깐 기분은 좋아졌지만, 전체적으로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학교 홈페이지 조사도 여전히 까마득했고, 여전히 성과는 없었다. 시간이 압도적으로 적어진 것도 이유 중 하나일 터다. 요령은 좋은 편이었기에 공부는 곧잘 할 수 있었지만 그게 무슨 위로가 된단 말인가. 공부를 잘 한다고 그 사람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였으면 지금부터라도 쓰러지기 직전까지 공부만 할 자신이 있다.
차라리 일단 조사를 중단하고 부모님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때까지 기다릴까. 자유롭게 쓸 수 있는 시간과 돈이 생기면 조사도 훨씬 수월해질 터다. 지금 정보로도 흥신소에 맡기면 어떻게든 될 것도 같고.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건 여름방학을 학원에서 갇혀있다시피 해 지내고 2학기가 시작되었을 때였다. 생활 사이클이 완전히 달라져서 미츠바의 얼굴을 거의 못 본 탓도 없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여전히 성과가 전혀 없는 것에 마음이 꺾일 것 같은 것이 더 크다. 대체, 언제쯤이면 찾을 수 있는 걸까. 처음 그가 있다는 걸 알았을 땐 훨씬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멀다. 대체, 대체 언제 그 사람을…….
학교에서 돌아와 학원으로 가기 전 잠깐의 시간에 거의 습관처럼 학교 홈페이지를 뒤지던 소고가 ‘은혼 고등학교’의 홈페이지를 클릭한 것은 부모님이 말한 사립학교에 원서를 낸 다음 날이었다.
그리고, 오키타 가를 뒤흔들 만큼의 격전이 그 다음 날부터 벌어졌다. 2학년 겨울 방학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험악한 분위기로 소리를 질러대며 싸우는 오빠와 부모님을 보고 미츠바는 불안한 모양이었지만, 이번만은 소고도 물러설 수 없었다. 그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거기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이유는 충분했다. 학교 끝난 후에 만나러 가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 부모님의 변이었지만 이미 하루의 반을 학교에 잡혀있어야 한다는 것을 통감한 소고에는 통하지 않았다.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 그 사람이 있는지 뻔히 아는데 만나러 가지도 않고 가만히 교실에 잡혀 있으라고? 죽어도 못 한다.
다른 학교에 갈 바에야 중졸로 남겠다는 소고의 고집과, 어머니의 눈물과, 아버지의 한숨과, ‘고등학교는 맘대로 가는 대신 대학은 부모님이 인정할 수 있는 곳으로 가겠다’라는 약속 끝에, 소고의 고등학교 입학원서는 한 번 반납되었다가 다시 제출되었다. 겨울방학과 3학기,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의 시간을 전부 학원에 바치게 되었지만 불만은 없었다. 봄이 되면 만날 수 있다. 봄이 되고, 꽃이 피면, 그러면, 그 사람을———.
입학식에 부모님은 오시지 않았다. 원래 다망한 사람들이다. 새삼스럽게 그런 걸 신경 쓰기에는 두 사람의 자식으로 태어난 오키타 소고도, 70년 이상의 기억을 가진 오키타 소고도 꽤 헤진 감성의 소유자였다. 그리고 입학식에 굳이 와서 자신이 ‘누구’를 만나러 이 학교에 온 건지 아는 것도 조금 곤란하다. 일생일대의 대전쟁 끝에 자기가 원하는 학교에 간 아들이 입학식에서부터 남자 교사 한 사람만을 뚫어져라 보고 있다는 건, 아무리 그래도 받아들이기 힘들 테니까.
“1학년 Z반 담임을 맡게 된 사카타 긴파치입니다.”
학부모들의 눈이 있는 터라 일단 존대의 형식만 갖춘 자기소개였다. 속으로 학교 홈페이지에서 봤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고 대꾸하며, 소고는 강당에 있었을 때보다 훨씬 가까워진 사카타 긴파치—긴토키를 보았다.
하얀 피부에 하얀 머리에 백의. 전신의 반 정도를 하얀색으로 칠하고 있는 사람은 소고가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분필을 잡고 칠판에 이름을 쓰는 손가락도, 무기력함이 배어나오는 낮은 목소리도, 눈꺼풀 때문에 반 쯤 안 보이는 붉은 색 눈도. 그 앞에 안경알이 있는 것은 예상외였지만. 안경 같은 거랑은 연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는 대학에 가서 선생님이 될 만큼 답지도 않게 공부를 열심히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순간———눈이 맞았다.
하지만, 그래도…… 긴토키였다. ‘사카타 긴파치’라는 새로운 사람이 아니라 분명히 긴토키, 그 사람이었다. 눈을 본 순간, 깨달은 것이다. 이 사람이다. 지금까지 내가 찾던 사람. 내가 기다리고 있으라고 한 사람. 나한테, 너나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렇게, 말한 사람.
긴토키가 도망치듯 시선을 돌린 그 순간까지 소고는 눈을 뗄 수 없었다. 숨결이 닿는 거리에서 그 눈을 들여다보았던 기억이 바로 방금 있었던 일처럼 되살아났다. 전부 자신의 것이었다. 열이 깃든 눈도, 뜨거운 숨결도, 낮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까지 전부 자신의 것이었다. ‘오키타 소고’가 잊고 있었을 때조차, 언제나, 자신의 것이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들지 않은 자신을 칭찬하며, HR이 끝났다. 그리고 긴토키는 HR이 끝나기가 무섭게 말을 걸 새도 없이 쏜살같이 교실을 빠져나가, 소고가 서둘러 학부모 사이를 헤치고 복도로 나갔을 땐 이미 백의 자락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입학식날 칼퇴근이라도 할 생각인가. 아니, 물론 어차피 내일도 만나겠지만 자신은 오늘만을 기다리며 겨울부터 기다려왔는데……! 다급해진 소고는 신입생이 입학 첫날부터 교무실에 찾아간다는 용감무쌍한 행동에 나섰지만, 동료 교사라는 사카모토(이 사람이 콘도의 선배가 틀림없었다. 그리고 대체 누구야 ‘킨토키’는.)가 가르쳐준 긴토키 자리에는 점프와 교과서가 난잡하게 어질러진 책상과 가방이 있을 뿐이었다.
학교의 출입구는 한 곳이다. 신입생은 알 수 없는 학생들만의 출입구가 몇 개 더 있기야 하겠지만 교사가 그쪽으로 드나들지는 않을 터. 아니, 긴토키라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지만 자전거 통근(사카모토 제보)이라는 사람에게는 무리한 이야기일 터다. 워낙 제멋대로 돌아다녀서 어디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고, 전화해도 받지도 않으니 어쩔 수 없지. 소고는 학교 정문에서 언젠가 나올 긴토키를 기다리기로 했다.
입학식에 참석한 학부모들과 자신과 같은 신입생들이 수도 없이 소고 앞을 지나갔다. 가끔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남의 시선에는 아주 옛날부터 익숙하다. 소고는 신경도 쓰지 않고, 이따금 말을 걸까 망설이는 듯한 같은 중학교 출신 여학생들에게도 말 걸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을 주며 계속 서있었다.
해가 질 때 쯤 해서 소고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았다. 중간에 교사진이 대거 정문으로 나왔을 때는 깜짝 놀라 일어났지만, 그 안에 하얀 머리는 없었다. 멍하니 서있는 소고에게 그를 기억하고 있던 사카모토가 “킨토키 가방이 아직도 교무실에 있어서 문도 못 잠그고 나왔어! 아하하! 아무래도 오늘은 늦게 퇴근할 모양이니까 그만 집에 가라, 신입생.”라며 친절을 발휘했지만 소고는 끄덕였을 뿐 그 말에 따르지는 않았다. 놓친 게 아니라면, 됐다. 긴토키라고 학교에서 자지는 않을 테고 그럼 오늘 안에는 나오겠지. 그리고 시간이 늦어서 보는 눈이 없어진다면 소고로서는 그게 더 편하다.
하늘에 별이 박히는 것을 소고는 교문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바라보았다. 시계를 확인하는 것도 의미가 없는 일 같아서 안 봤기 때문에 얼마나 기다리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자신이 긴토키를 찾아 헤맨 시간이나, 긴토키가 전에 자신을 찾은 시간에 비하면. 기다리기만 하면 그는 분명히 이 옆의 정문에서 나올 테니까.
4월이라도 아직 쌀쌀한 밤공기가 새로 맞춘 가쿠란 사이로 들어왔다. 춥지 않을까, 긴토키는. 학교 안은 좀 낫겠지만 밖은 그렇지도 않다. 겉옷이 있으면 다행이지만 백의에 방한기능을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였다. 대체 학교의 어디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안 추워야 할 텐데.
절로 웃음이 나왔다. 긴토키에 대해서 이런 걱정을 할 수 있다는 지금이. ‘안 추워야 할 텐데’라니, 어디 있는지도…… 아니, 이 세상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때에는 절대 나올 수 없는 말이었다. 오면, 내 앞에 나타나면, 말 해줘야지. 당신을 이렇게 걱정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고.
하지만, 그래. 무슨 말을 가장 처음 하는 게 좋을까? 약속을 지키러 왔다고 말하면 될까. 아니, 그 전에 미안하다고? 아니면 고맙다고? 둘 다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긴토키는 오키타 소고에게 미안하다는 소리를 듣거나, 고맙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소고를 찾고 곁에 둔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 뭐가 좋을까. 걱정도 좋지만, 걱정할 수 있을 것만으로도 기쁘고, 그건 긴토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확신하지만 그래도 역시, 기뻐해주는 게 좋다. 웃어주는 게, 좋다. ‘그 때’는 언제나, 웃어도 언제나 끝을 각오하고 있었으니까. 이번엔 그런 거 없이, 그냥, 기쁘게.
숨을 쉰다. 폐를 채우는 밤공기. 어둠이 깔린 도로와, 가로수와, 그 한참 위에 하늘과, 별.
……그래, 별, 별을, 줘야지.
그 때는 몰랐지만 이번엔 “달이 예쁘네요.”도 “난 죽어도 좋아.”도 알고 있다. 하지만 둘 다, 자신과 긴토키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예전’에는 공감했던 “난 죽어도 좋아.”도. 이번에는 그렇게 해줄 수가 없다. 긴토키가 아무것도 모르는 자신 곁에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제 알고 있으니까. 그러니까 죽어줄 수는 없지만, 대신.
별은 솔직히 말해 아름다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런 감성은 나면서부터 어머니 뱃속에 두고 와서, 6년 후에 미츠바가 대신 가지고 나왔다. 미츠바가 꽃이 예쁘다느니 달이 예쁘다느니 할 때마다 물론 크게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는 것이다. 여전히 별이 예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애초에 저렇게 생겨서, 사람 눈에 반짝이는 것으로 보이는 우주의 흙덩어리. 그것이 소고의 인식이다.
하지만 그런 흙덩어리마저도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리고, 이렇게 기대되고, 이렇게 불안하고, 이렇게 1분 1초마저도 아깝고, 시간이 느린, 이런 마음으로 본다면, 그래서 이렇게 더 밝고 반짝이는 것으로 보이는 걸 ‘예쁘다’라고 표현한다면, 그래. 맞다. 분명히 저 별을, 예쁘다고 하는 걸 테니까. 그러니까.
공중에 떠있는 먼지가 햇빛을 받아 눈에 보이는 것을 멍하니 관찰하던 소고는 요 위에 늘어져 있던 팔을 움직였다. 금방 긴토키의 손에 닿았다. 잡는다. 긴토키도 소고의 손을 잡았다. 웃음이 났다.
“소고.”
“응?”
“밥부터 드실래요, 목욕부터 하실래요, 아니면 나?”
“붑.”
뿜었다. 실제로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그건 갑자기 왜 해?”
“아니, 단둘이 집에 들어와서 청소하고 같은 요에 누워있다 보니 무심코…… 원래 여기 아들 내외가 쓰던 데라며? 그럼 그거잖아. 부부의 보금자리.”
이번엔 소리 내서 웃었다. 긴토키가 작은 소리로 따라 웃는 소리가 들렸다. 웃음이 멈춘 후에 소고는 긴토키의 손을 잡고 있는 손으로 그의 손가락을 쓸었다. “응?”하고 그가 고개를 소고 쪽으로 돌렸다.
“그럼 목욕하고, 밥 먹고, 당신.”
“뭐야, 원래 이런 건 바로 ‘너’부터 나오는 거 아냐?”
“아무리 싱싱해도 씻어서 먹어야지. 배탈 나잖아.”
“푸하-.”
이번엔 긴토키가 낄낄거렸다. 몸을 완전히 소고 쪽으로 틀고 힉힉 소리까지 내며 웃기에 옆구리를 몇 번 간질여 주었더니 도마 위의 생선 같은 반응을 했다. 나중에 또 해야지. 다짐이랄 것도 없는 다짐을 하고 소고는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만 웃고, 욕실 가자.”
“무리, 잠깐, 하, 좀 기다려……!”
그렇게 말하고도 한참을 웃어대는 긴토키에게 인내심이 바닥난 소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등과 오금에 팔을 넣어 안아 올렸다. 어째서인지 “야이, 히, 바보, 공주님, 후히, 안기, 히히히히, 하, 아하하!”라며 더 웃어젖혔지만 알 바 아니다.
겨우 웃음을 그친 긴토키를 탈의실에 내려놓고 먼저 욕실에 들어간 소고는 먼지가 쌓인 목욕통을 물로 씻어내고 목욕물을 받기 시작했다. 자동차 하나 없는 시골 주제에 수도와 가스는 다 갖춰져 있으니 놀라울 따름이다. 아니, 차는 개인의 재력으로 구입해야 하는 거고 수도나 가스는 막부에서 하는 거니까 별 상관없나……? 잘 모르지만.
탈의실로 돌아가자 긴토키가 소고가 내려놓은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뜨거운 물 나와?”
“응.”
“신기하네.”
생각하는 수준이 비슷하다. 조금 웃고서, 소고는 상반신을 숙여 긴토키의 옷에 손을 댔다.
“꺄- 소고 군 엣찌-.”
“그런 국어책 읽기로 말해봤자……. 할 거면 아예 제대로 해. 그러면 흥분해 줄 테니까.”
“끼야아아아아! 여기 오픈된 마인드의 변태가아아아아!”
박진감 넘치는 외침이었다. 화답해 주기로 한다.
“여기서 소리 질러 봤자 아무도 안 오니까 지르고 싶으면 맘껏 질러.”
“끼야아아아아아! 여기 대사가 완전 악당인 오픈된 마인드의 변태가아아아아아!”
타이틀이 하나 늘었다. ‘대사가 완전 악당인’과 ‘오픈된 마인드’는 어딘지 모르게 상충하는 것 같은 기분이 안 드는 건 아니지만 소고는 일단 별 의미 없이 도망 다니는 긴토키를 역시 별 의미 없이 추격하기로 했다.
좁디 좁은 탈의실에서 펼쳐진 추격전이 1분 30초만에 소고의 승리로 끝나고, 승리자는 “부드럽게 해 줘…….” 같은 헛소리를 지껄이는 긴토키에게 대충 대답하며 다시금 옷에 손을 댔다. 천천히, 자신의 손이 어디 있는지 긴토키에게 확인시키면서 그의 옷을 벗기면 새벽에 봤던 참상이 다시 한 번 펼쳐졌다.
당장 목 주위를 가리지 않으면 바로 보이는 붉은 손자국부터 시작해서 그 아래에 보이는 수많은 멍과 칼자국. 그 전부가 오늘 새벽에 새겨진 것이기에 더욱 선명했다. 피부가 하예서 그런지 특히 눈에 띄는 그 상흔들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진다. 자신이 조금만 더 일찍 움직였으면, 그랬으면 최소한 이것보다는 상처를 줄일 수 있었는데. 혼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에 긴토키를 이렇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빨리 갔으면, 그랬으면 이렇게까지는…….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진다. 긴토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가린 탓이었다. 뭐라 묻기 전에, 긴토키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따로 들어갈까?”
“보기 싫지?”라는 말을 돌려서 한 거라는 건 소고도 알 수 있었다. 차라리 그렇게 스트레이트로 물었으면 소고는 긍정했을 것이다. 보고 싶을 리가 없지 않은가. 생길 필요도 이유도 없었는데 자신 때문에 생긴 상처 같은 걸. 아픈 척은 잘도 하면서 아픈 티는 죽어도 안 내는 사람이 이를 악물도록 만든 원인을. 하지만.
“아니.”
눈을 가린 손을 붙잡고 치운다. 분명 “안 봐도 돼.”라고, 그렇게 말할 것이다. 보기 싫은 것은 보지 않아도 된다. 무서운 것에서는 도망쳐도 된다. 자신에게 울지 말라고 한 긴토키라면 그렇게 말할 것이다. 그러나 이미 소고는 그에게 고백을 해 버렸고, 그와 입을 맞춰 버렸고, 그에게서 도망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내 거잖아.”
말하고 손을 은색 머리카락에 가져갔다. 밤새 식은땀을 흘렸던 머리는 마른 지금도 빈말로도 좋은 감촉이라 말하기는 힘들었다. 하지만 이 사람의 일부라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손가락 사이로 하얀 머리카락이 빠져나가는 것을 보고 느낀 후, 소고는 그가 기분 좋은 듯 눈을 감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자기보다 큰 몸을 안아들었다. 대체 이 자세의 어디가 그렇게 웃긴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일어서자마자 낄낄대는 것을 한 대 쯤 때릴까 하다가 양 손이 긴토키의 몸으로 막혀있기에 단념했다.
긴토키를 내려다보는 눈은 어느 샌가 다시 꽤 살벌한 것으로 돌아가 있었다. 본당 얘기를 할 때보다 지금이 더 무섭다. 국장만큼 대놓고 챙기고 예뻐하는 건 아닌 모양이지만 이 녀석도 꽤나…….
“너, 소고와 무슨 관계냐.”
담담히 사실만을 늘어놓는다는 태도로 이어지던 말투는 지금도 다르지 않다. 다만 눈이 “대답 여하에 따라서는 그냥 안 둔다.”라고 웅변하고 있을 뿐. 아니, ‘그냥 안 둔다’도 실은 매우 유한 표현이다. 저 진의를 그대로 말로 하면 그것만으로도 스플래터 영화 한 편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아- 무서라.
하지만 다행이다. 생각하며 긴토키는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확실하게, 입 꼬리를 위로 올리며 씩 웃어 보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꽤나 악랄한 표정이 됐을 거라는 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히지카타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더 굳었으니까.
그 아이 생각에 이만큼 분노할 수 있다면, 아마 괜찮다. 긴토키가 성공한다면, 아마 둘 다 감싸줄 거다. 화는 좀 낼지도 모르겠고 꽤 불같은 성정을 볼 때 그 아이 얼굴에 주먹 서너 대 정도는 날릴지도 모르겠지만 괜찮을 거다. 그렇게 확신하고, 긴토키는 입을 열었다.
“오키타 군, 잘 보면 꽤 예쁘장하게 생겼더라? 눈도 크고, 하얗고.”
남자의 얼굴이 얼어붙는다. 긴토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 애가 말이야, 누나? 동생인가? 하여튼 죽었다고 징징거리는데 그걸 이용 안 할 수는 없잖아?”
남자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본다.
“아니, 나도 그렇게 잘 될 거라곤 생각 안 했는데-. 보통 좀 더 경계하지 않나? 걔 내가 뒤를 밟아도 하나도 눈치 못 채고. 어려서 그런지 좀 잘 해주니까 금방 쫄래쫄래 따라오고.”
담배가 손 안에서 꺾이는 것을 본다.
“신문에는 사드 왕자라고 나질 않나 싸우면 꽤 살벌하질 않나 해서 어떨까 했는데, 생각보다 귀엽더라 ‘너희 소고’.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잡히기 전에 먹는 건데.”
쾅 소리를 내며 남자가 의자를 박차고 일어선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은 이어진다.
“뭐야, 화났어? 그렇게 사람 죽일 것처럼 볼 것도 없잖아? 그렇게 걱정되면 목줄이라도 채워서 가둬놓지 그랬어. 그렇게 예쁜 애를 혼자 나다니게 방치하니까,”
한 발짝 다가오는 것을 지켜보며 긴토키는 말을 맺었다.
“나 같은 나쁜 어른한테 걸리는 거야.”
직후 복부를 강타한 충격은, 순간적으로 위의 내용물이 역류할 뻔했을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아니, 내장 어딘가는 확실하게 치명적인 데미지를 입지 않았을까. 아픔에 얼굴을 찌푸리고 헉헉거리면서도 남의 일처럼 생각한다. 간신히 한쪽만 겨우 뜬 눈에 보인 히지카타는 ‘귀신 부장’이라는 말이 부족할 만큼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긴토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하, 좀 과보호 기가 있으시네. 아직 진짜인지 확인도 안 했으면서. 제3지소는 전멸이라고 하던데, 그것 때문에 머리에 피가 올랐나? 그 덕분에 성공한 거라면, 불만은 없지만.
“토시.”
아픔에 몸부림치는 동안 누가 또 창고에 들어왔는지 목소리가 하나 늘었다. 몇 번인가 큰 소리 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국장 콘도다.
“여유 없는 건 알지만 너무 몰아치지 마라. 얼굴은 안 돼. 죽이는 것도.”
“……알아.”
요는, 얼굴 외에는 죽기 직전까지 이것저것 하시겠다는 소리다. 오오, 무서워라 신센구미. 콘도는 인격자 타입의 리더라고 들었는데 적에게는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다. 하, 정말 목숨만 부지해서 나가겠네. 상관없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긴토키는 목을 긁는 듯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얼굴을 안 건드리겠다는 건 최소한 눈과 귀는 무사할 거란 소리다. 목숨도 붙어 있단다. 그럼 어쩌면, 만에 하나라도 여기서 나갔을 때 그 아이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충분하다.
열쇠를 줄 정도라면 당연히 문이 잠겨 있을 거라 예상하고 어느 새 체온이 옮아 따뜻해진 열쇠를 열쇠구멍에 꽂았다. 막힘없이 들어가는 작은 철 조각. 천천히 돌리면 귀에 거슬리는 스프링 소리를 한 번 내고서 제 위치에서 멈췄다. 열쇠를 빼고 그 손을 그대로 문고리로 가져간다. 묘한 긴장. 돌리고, 민다.
“여어.”
튜브형 아이스크림(통칭 츄페트)을 물고 벽에 기대 앉아 점프를 보고 있는 현 최강의 양이지사가 있었다.
“…….”
뭐지, 이 긴장해서 손해 본 것 같은 기분은.
“너 발소리 안 내고 걷지 마, 무섭잖아. 호카게가 되고 싶은 그런 썸씽이냐?”
발소리 안 내고 걷는 걸 기척으로 알아채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할 말이 아니다.
“아, 오키타 군도 츄페트 먹을래? 에- 포도맛이랑…… 아니, 포도맛밖에 없다. 그냥 포도맛 먹어. 아? 뭐야, 그 표정. 포도맛 별로야?”
“……아니, 당신을 보고 있자니 꽤 여러 가지가 아무래도 좋아졌달까…….”
구체적으로는 신센구미라든가 양이지사라든가 어제의 참극이라든가 기타 등등. 이 사람에 관해서는 생각하고 고민하는 만큼 다 손해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늘 여기 오는 것만 해도, 물론 망설임은 없었지만 꽤 복잡한 심경이었는데 정작 본인은 츄페트나 빨고 있고…… 하아…….
소고는 깊고 깊은 한숨을 쉬며 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바로 앞에 있던 신발장 겸 청소도구함 위에 열쇠를 올려놓고 신발을 벗은 후, 조금 고민하다 주먹 하나 정도 비우고 긴토키의 옆에 앉았다. 앉자마자 “응.”이라는 소리와 함께 보라색 츄페트를 건네 온다. 아니, 별로 츄페트가 먹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생각하면서도 일단 받아 절취 부분을 이로 잘라 버리고 빨아올렸다. 바로 입과 코에 퍼지는 싸구려 포도향. 오랜만에 먹는 거라 그리운 맛이라면 그리운 맛이지만 굳이 이런 상황에서 먹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
“너 안 잤어?”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지만 끝까지 말한 것은 긴토키뿐이었다. 하지만 말하는 그의 눈은 점프를 향해 있었다. 페이지는 어째서인지 편집부 코멘트. 보통 읽나, 저거. 소고는 방금 끊어버린 츄페트의 절취 부분을 방구석에 있는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골인.
“자기는 잤어.”
“3시간?”
이 사람 요괸가. 그 뭐냐, 사람 마음 읽는 요괴. 이름이 아마…… 사토리. 요괴든 아니든 거짓말 해봤자 안 통할 것 같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었지만. 결국 소고는 솔직하게 신고하기로 했다.
“……4시간.”
“생각보다 오래 잤네.”
하며 웃는다. 놀리는 듯한 반응에 조금 기분이 나빠져 소고는 말없이 츄페트를 다시 입에 물었다.
여전히 점프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 남자는 화장은 하고 있었지만 머리는 풀고 있다. 옷도 오늘은 은색 매화가 피어있는 새카만 나가기 단벌의 키나가시. 어제나 그제에 비하면 얌전한 편이라고 할까…….
“뭐 하느라 잠도 못 주무셨나?”
알면서 굳이 묻는 점에서 성격이 나온다. 내가 할 말 아니지만. 한숨을 쉬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소고는 츄페트에서 입술을 뗐다.
(중략)
눈을 뜨고, 처음엔 눈을 떴는지도 몰랐다. 눈을 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두웠기 때문이다. 조금 기다리자 천천히, 어둠 속의 하얀 윤곽이 뚜렷해졌다. 긴토키다. 그것을 확인하고 소고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눈을 깜빡였다. 점차 또렷하게 변하는 시야. 함께 눈에 들어온 생소한 천정에 이곳이 어디인지, 왜 여기 있는지 생각났다.
“깼어?”
숨소리만으로 위에 있는 남자가 묻는다. 두 사람뿐인 방에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들리는 것은 숨소리, 심장소리, 긴토키가 소고의 머리카락을 쓰는 소리. 닿아있는 부분의 열이 옷너머로도 소고의 몸에 완전히 동화돼서 따뜻하다. 숨을 쉬면, 달콤한 향기.
아아, 긴토키다.
소고는 손을 뻗어 긴토키의 목 뒤를 잡았다. 어제 이 사람이 직접, 자신의 손을 끌어 닿게 한 곳이다. 조금만 힘을 주면 별 저항 없이 얼굴이 아래로 내려왔다. 닿을 듯이 가까이했던 목, 턱, 입술. 어제는 땀이 배어 있었다. 오늘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향기만은 어제만큼, 아니 어제보다 더 짙게 다가왔다.
얼굴이 더 가까이. 어둠 속에서 더 하얗게 보이는 피부. 입술. 자신을 울리고,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고, 네가 울었으니 충분하다고 한 입술. 분명히 달콤한 향기가 날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더 가까이. 무의식중에 소고 역시 입을 조금 벌리고, 머리를 들어올려서,
닿기 직전에, 긴토키의 손바닥에 막혔다.
“오키타 군, 잠 덜 깼다.”
아니다. 잠이 덜 깨서라니, 그런 게 아니라.
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긴토키에게도 분명히 보였을 터. 짧게 숨을 뱉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 번 그가 이름을 불렀다.
“해도 돼? 정말?”
무슨…….
“이대로 해 버려도 되는, 그런 마음이야?”
정말로? 다시 한 번 물어온다.
긴토키의 손을 치워야 할 손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떨려야 할 성대도, 움직여야 할 입술도 제자리에만. 그대로 조금 시간이 지난다. 다시 한 번 긴토키의 숨소리가 들렸다.
“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절대 아니냐고 묻는다면, 그것은 아니다. 해도 될 것 같으냐고 묻는다면, 안 될 것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마음이 맞느냐고 묻는다면, 모르겠다.
짧게, 사람의 몸이 움직여서 생겨나는 바람. 온기. 이마에, 손끝.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타난 사람은 소고의 머리를 안 듯이 감싸, 이마에 댄 손으로 소년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10cm도 안 될 차이를 두고 그 위에, 붉은 색.
“애가 지나가다 보면 운다.”
붉은 눈. 눈가에 퍼지는 선명한 적색. 하얀 피부에 하얀 머리카락. 낮게, 크지 않은 소리로 귓가를 흘러가는 목소리.
그 사람이다.
“아니, 반댄가? 대장님이 우나?”
하며 짓궂게 웃기에, 소고는 거의 반사적으로 얌전히 위를 향하고 있던 머리를 그대로 돌진시켜 그 턱에 박아버렸다. “으겍!”이라는 듣기 좋지 않은 소리가 귓전에 울렸지만 알 바 아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밸런스를 못 잡은 건 한 쪽이나 당한 쪽이나 마찬가지여서 둘 다 별로 좋지 않은 꼴로 뒤로 넘어지는 형국이 되었다. 턱을 부딪친 남자와는 다르게 소고 쪽은 그렇게 데미지가 크지 않다는 것이 가장 큰 차이다.
“야, 너, 정말, 성격……!”
“얼굴 보자마자 맞을 소리 한 게 누군데?”
“그렇다고 거기서 박치기 하는 놈이 어딨냐?!”
“당신 앞에.”
“통역이랑 변호사 불러 와, 인마!”
꽥꽥거리는(본인이 들으면 한층 더 시끄러워질 표현이지만 입 밖으로 내지 않으니 문제없다.) 남자를 무시하고 소고는 먼저 자세를 정리하며 일어섰다. 바닥에 닿은 부분을 대충 툭툭 털고 다시 남자 쪽을 보면 아직 넘어진 자세 그대로 한 손으로 턱을 가리고 있었다. 음, 물론 박치기를 좀 전력으로 하긴 했지. 일부 과실을 인정하는 바, “괜히 왔어…….”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는 건 그냥 무시해 주기로 했다.
조금 기다리자 턱의 아픔이 좀 가셨는지 환부를 가리고 있던 손을 뗀 남자가 아직 찌푸린 표정으로 소고를 올려다봤다.
“애초에 너 말이지, 약속 장소로 묘지를 고르는 건 어떻게 돼먹은 센스와 개념인데? 나는 이런 애가 앞날이 창창한 낭랑 18세에 하늘같으신 공무원님이라고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요, 머리가.”
“턱이 아프겠지.”
“들어, 인마.”
“앞날 별로 안 창창해 보이는 당신도 여기 골랐잖아.”
“뒤는 사실이니까 넘어가겠는데 앞은 떼지?! 창창하지 않은 거 아니거든?!”
“별로 국어 잘하는 거 같지도 않은데 당신이 먼저 이중 부정을 떼지? 창창하지 않은 게 아닌 건 뭐야? 줄여.”
“다아아아아! 정말! 너! 너! 진짜!”
분을 못 이겼는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삿대질 하는 남자. 소고는 뭐라 큰 소리로 매도를 쏟아 붓는 남자를 꽤 냉정한 사고로 바라보았다.
왔다. 여기에, 제대로. 옷부터 화장까지 어제와 같은 차림의 남자는 의심할 여지없이 어제의 그였다. 얼굴도, 목소리도, 말투도, 표정도, 전부 그 사람. 겨우 어제 저녁에 헤어졌는데, 이렇게나 기쁘다.
정말, 어떻게 됐나 보다. 오키타 소고.
“뭐야, 왜 웃어?”
웃는 게 거슬렸는지 아니면 매도의 연장인지 곧장 시비조로 말을 거는 그에게 소고는 굳이 무표정으로 되돌릴 노력을 하지 않고 대답했다.
“아니, 내가 이겼잖아. 내기.”
이번엔 말이 없다. 대신 뚱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곧 깊은 한숨과 함께 뒷목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솔직히, 질 줄 몰랐는데……. 나참.”
“이긴댔잖아, 내가.”
“그러니까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냐고, 그 자신감……. 이게 바로 말로만 듣던 근자감이냐? 응?”
어이가 없다는 듯한 눈에 소고는 짧게 소리 내 웃었다. 그야,
“당신이 진심으로 날 안 보고 싶어 해도 나 원래 이런 운은 좋으니까 이길 자신 있는데,
당신이 날 보고 싶어 하는 것까지 합치면 당연히 내가 이기지.”
소고의 말에 잠시 눈만 깜빡이며 소년을 보던 남자는 곧 뭐라 말하기 힘든 표정을 한 손으로 감추더니 “정말 뭐니, 얘…….”라며 작게 중얼거렸다. 뭐냐고 묻는다면 당신을 보고 싶었던 오키타 소고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지만 그걸 묻는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입을 다물었다.
대신 손을 뻗어, 얼굴을 가리고 있는 손의 소매를 잡아끌면 그것은 순순히 소고 쪽을 향해왔다. 하얀 손이다. 하지만 크고 거친 남자 손이다. 그것이 의외로 눈에 익은 콘도의 손과 비슷해서 소고는 눈을 가늘게 했다. 소매 대신 손을 잡는다. 체온은 자신보다 낮았다.
“내가 이겼으니까, 도망갈 생각 말고 바른대로 불어.”
“에, 뭐니 이거. 취조? 수갑 같은 거 꺼내는 거야?”
말은 저렇게 하면서 손은 얌전히 소고의 손 안에 잡혀 있으니 이 사람도 이 사람대로 질이 나쁘다고 해야 할지 뭐라 해야 할지. 뭐, 어떤 사람인지는 지금부터 하나씩 물어보면 된다.
일단 먼저, 이름을.
입을 열고 숨을 들이쉬고, 성대가 떨리려는 순간 그것보다 먼저 공기를 흔드는 소리가 있었다. 날카롭게 귀를 때리는 그것은 소고에게는, 아니 신센구미에게는 꽤 익숙한 소리였다.
긴토키가 그 소년을 볼 때마다 하는 생각은 대체로 위와 같았다. 약관 18세라는 나이를 신문에서 본 이후의 일이다. 그 전부터 어려 보인다고 생각은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센구미 대장직을 맡고 있는데 20살은 넘었을 거라고 선을 긋고 생각했던 것이다. 설마 미성년일 줄이야. 이제 열여덟이라면 양이전쟁 세대에 들어가지도 않을 텐데(그 기준으로 따져도 긴토키네가 끝물이다.), 별 무서운 10대가 다 있다고 한탄 비슷한 소리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 얘기를 들은 친구들 및 옛 전우들은 “18살 때의 네가 훨씬 더 무서웠다”고 입을 모아 반론했다. 아니 내가 뭘 했는데? 긴토키 본인으로서는 당연한 의문을 제기했지만 제대로 된 답변은 돌아오지 않고 어째 다들 어딘가 먼 곳을 보는 듯이 입을 다물어 버리거나, “트라우마가! 트라우마가———!”라고 소리치며 도망쳤다. 전자는 그렇다 치고, 후자, 어이.
별로 트라우마 남을 짓까진 안 한 것 같은데…….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소년에게 초점을 맞춘 긴토키는 자기가 저거보다 더 심했다면 확실히 트라우마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고쳤다. 긴토키의 동체시력으로 아슬아슬하게 보일 정도로 움직이면, 그야 다른 사람에게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말 그대로 눈앞에서 사라졌다 했더니 자기의 뒤에 가있고, 그 때는 이미 칼날이 살을 베고 지나간 후이다. 이쯤 오면 괴기 현상이라든가 심령 현상이라는 이름을 붙여도 손색이 없다고 긴토키는 감탄했다. 거기다 순수한 속도와 검기만으로 저렇게 압도적인 소년과 다르게 긴토키는 아류다보니, 지금도 그렇긴 했지만 그때는 꽤나……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전투를 했었다. 어라, 트라우마 유효 판정 인가?
이리저리 머리를 산만하게 굴리면서 내려다보고 있는 긴토키였지만 사실 그의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그렇게 딴 생각을 해도 될 만큼 평화로운 것이 아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부두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어둠보다 새카만 수 십 개의 그림자. 창고 몇 개와 2층 건물 높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높이 쌓인 화물들 사이에 가려 항구 밖에선 아마 제대로 보이지 않을 그 그림자들은 하나 같이 칼이니 총이니 하는 무기들을 손에 들고 서로의 목숨을 끊어내려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한쪽은 지당(支黨) 소속인 낭인들과 그들과 밀매했다는 텐카이야에서 고용한 사병들, 다른 한쪽은 검은 대복의 무장경찰 신센구미. 굳이 손으로 셀 것도 없이 눈대중만으로도 몇 배나 차이나는 인원 수 중 한 명이 바로 그 소년이었다. 그래서 더욱, 저 압도적인 숫자를 상대로 잘도 저렇게 싸운다고 감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다수를 상대로도 굴하지 않고 싸우고 있는 것은 그 소년만이 아니었다. 가장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귀신 부장이라 이름 높은 남자도, 나중에 합류한 국장을 비롯한 다른 신센구미 대원들도 수적인 열세에 굴하지 않고 선전하고 있었다. 지당 놈들, 계산 잘못했네. 긴토키는 낭인 한 명이 또 목숨을 잃는 것을 내리깐 눈으로 지켜보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밀매한 무기들과 고용한 사병들만으로 신센구미를 처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듯하지만 긴토키가 보기에는 이건 텄다.
지당-아마 따로 이름이 있을 터지만 이미 두 자릿수가 된지 오래인 지당과 분당(分黨)의 이름을 전부 기억할 의욕이 긴토키에게는 결여되어 있었다-은 저번 당내 분쟁에서 약화되어버린 세력을 화력 강화로 되찾으려고 했고, 사실 그 목적은 반 정도 달성되었다. 본당 쪽으로도 귀병대를 중심으로 하여 그 화기들이 들어왔던 것이다. 오늘날 전체 양이 세력을 통틀어 타와의 비교를 불허할 만큼 큰 영향력을 자랑하는 본당에 그만큼 이익을 가져온다는 것은 지당의 입장이나 발언권에 있어서도 큰 메리트다. 때문에 지당 쪽에서도 이참에 한 번 일찍 분당한 다른 지당들에게 지지 않을 만큼 세력 확장을 하고 싶었을 터고, 그게 눈앞에 보였을 터다. 그래서 다소 무리를 했다. 그리고 그게 안 좋았다.
무기 밀매상 쪽에서 신센구미의 관계자와 혼인을 어쩌고 하는 소리를 긴토키도 얼핏 들은 기억은 있었지만 관심도 없었을 뿐더러 그렇게 잘 될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방법이 통했으면 카츠라는 그렇다 치더라도 타카스기의 부하들 중에 아직도 미혼인 사람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반사이가 아직도 결혼 못 하고 기타나 치고 있는 시점에서 깨달으라고, 그걸. 긴토키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지당에는 그 생각에 도달한 사람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들과 계약한 밀매상, 텐카이야에도. 장사꾼이라는 건 다들 머리 회전이 빠른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라고 긴토키는 인식을 새로이 했다. 아니, 머리가 너무 빨리 돌아가서 한 바퀴 돌아 제자리인 건가? 싸우는 데 말고 머리를 그렇게 빨리 돌려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지만.
결국 결혼이니 뭐니 하는 데에 정신이 팔려 관리가 소홀해진 틈에 신센구미 귀신 부장에게 꼬리가 잡혔다. 그나마도 결혼 예정이었던 그 신센구미 관계자가 병으로 오늘내일 한다는 모양이니, 한 번 운이 없으려면 참 이렇게도 철저하게 없을 수가 있다. 정확히 누구의 관계자인지는 모르겠지만 국장의 혈연 쯤 되는 여자였더라면 하다못해 인질로라도 써먹어서 어떻게 목숨 부지라도 했을 텐데. 그랬더라면 본당 쪽에서 움직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본당 간부진 면면들이 있었더라면 이만큼 머릿수에서 차이가 나는데도 밀리는 일은 일단 없었다.
물론 긴토키가 여기에 이렇게 제대로 된 무늬 하나 없이 새카만 하카마 복장으로, 스스로도 안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검은 가발을 쓰고 서있는 시점에서 다 물 건너간 이야기다. 진검이 아니라 목도를 차고 어둠 속에 몸을 숨기듯이 서있는 그가 갖고 온 것은 품속에 넣어둔 약병 하나뿐이다.
그러니까 뭐든 적당히 하는 게 중요하다니까. 생각하며 긴토키는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에서 자신처럼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보았다. 쿠라바 토우마. 텐카이야의 사장이자 오늘 긴토키가 접촉한 유일할 사람이었다. 지당도 지당이지만, 그가 무리하게 장사의 규모를 키우려고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혀를 찬 소리에는 아주 조금의 동정이 없지는 않았지만 방에서 점프를 읽으며 굴러다니다 타카스기에 붙잡혀 이런 곳까지 오게 된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이 훨씬 더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야 요즘은 다른 양이당과의 충돌도 거의 없고 신센구미와도 반 정전 상태라 특히나 긴토키는 한가한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일 하라고 쫓아낼 것까진 없지 않은가. 카츠라는 허구헛날 무슨 교섭을 한다고 나다니고 타카스기는 자금 조달이랍시고 무슨 상단이니 밀매니 하며 본부에 있기는 해도 늘 사람들이랑 이야기하며 바빠 보이지만 별로 긴토키가 바쁘게 지내라고 요구한 것도 아니다. 좀 편하게, 느긋하게 지내면 될 텐데. 적당히 놀면서.
애초에, 양이 활동으로 바쁘게 지낸다는 것 자체가 자신과는 안 어울린다. 양이지사라는 게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데에도 아직 위화감이 있는데. 그야 즈라나 타카스기 녀석이야 타도 막부라든가 타도 쇼군이란 말 엄청 좋아하지만 솔직히 막부야 타도되든 붕괴되든 하늘로 솟든 땅으로 꺼지든 난 그닥…….
“오키타 대장님!”
갑자기 귀에 확 꽂힌 목소리에 긴토키는 다시 초점을 맞추었다. 몇 번인가 들은 적이 있는 목소리이긴 했지만 사실 그게 유난히 잘 들린 것은 그 목소리 자체보다는 불린 사람의 이름이었다. 신센구미 1번 대 대장, 오키타 소고. 방금까지 관찰하고 있던 소년의 이름이다. 처음 신센구미와 대치했을 때부터 괜히 눈이 가는 소년이었다. 가장 어린 것도 있고, 가장 검을 잘 쓰는 것도 있고, 또 왠지——누군가를 닮은 것도 같아서.
이름을 불린 소년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서서 자신의 이름을 부른 남자-아마 밀정이다- 쪽을 향하고 있었다. 긴토키의 위치에서 보이는 그 옆모습은 아슬아슬하게 표정을 알 수 있을 정도다. 물론 긴토키가 동체 시력만이 아니라 그냥 시력도 상당히 좋은 편이고 밤눈도 좋다는 것까지 감안해서.
이렇게 급박한 상황에 국장이나 부장의 이름이 아니라 저 소년을 이름을 부른다는 건 굉장히 이상한 일이다. 그것도 소년의 이름을 부른 목소리는 아주 절박한 것이었다. 무슨 일이야? 하고 생각한 순간 아까 이름을 부른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엔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
긴토키는 소년의 옆얼굴이, 소년이 천천히 눈을 크게 뜨는 것을 지켜보았다. 18살이라고 들은 나이보다도 조금 더 어려보이는 얼굴에 절망이 서리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가 절망하는 모습은 보기에 썩 유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자기보다 어리거나 약한 사람이라면 더욱. 때문에 긴토키는 검은 가발 아래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그런 표정이었다. 이 멀리까지 직접 쏘는 것처럼 전해지는 감정. 긴토키는 약간 찌푸린 얼굴 그대로, 소년이 자신의 대장에게 무슨 말인가를 듣고 달리기 시작하여 곧 차를 타고 항구를 떠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가 없다. 신센구미의 동향은 그게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본당에서 최우선으로 파악하니까 어쩌면 나중에 듣게 될지도 모르지만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어쩌면 소년 개인적인 일일지도 몰랐다. 조직 단위의 중요한 사안이었다면 이 자리에 있는 전원이 후퇴하거나, 설사 방금처럼 한 명만 보낸다 하더라도 국장인 콘도가 갔을 터다.
관계없는 일이다. 길게 숨을 뱉은 긴토키는 속으로 그렇게 잘라 말했다. 그렇다, 관계없는 일이다. 물론 긴토키도 소년을, 소년도 긴토키를 일방적으로 아는 사이였지만 서로 제대로 된 대화 한 번 해본 적이 없다. 연이 없는 건지 긴토키는 콘도와도 히지카타와도 검을 맞대본 적이 있었지만 소년의 검을 받아친 적은 없었다. 그 목소리가 “카-츠라-!”라고 소리치며 바주카를 쏜 적은 있었지만 긴토키의 기억이 맞는다면 이름을 불린 적도 없다. 겨우 그 정도의, 무슨 사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런 사이다. 그러니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든 그가 무엇에 절망했든 관계없는 일이다.
소년이 떠난 것으로 주요한 전력을 잃었을 터인 신센구미였지만 어째서인지 전투는 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특히 히지카타는 귀신 부장이라는 이명에 걸맞게 정말 귀신같은 형상을 하고, 방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가열한 기세로 낭인들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기세가 세진만큼 쓸데없는 움직임이 늘어 틈이 많아졌다는 게 문제였지만. 무슨 불이 붙었는지는 몰라도 저거 잘못했다간 한 방에 훅 간다. 검을 들었을 때 흔들림이 있으면 바로 명줄이 흔들리는 것이라는 걸 모르지도 않을 텐데.
잠시 지켜보던 긴토키는 시야의 구석에서 남자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렸다. 쿠라바 토우마와 낭인 서넛. 어디론가 이동할 셈인 모양이었다. 그건 곤란하다. 긴토키의 일은 여기, 항구에서 끝내야 하니까. 새하얀 피부 빼고는 빠짐없이 어둠에 잠긴 남자는 소리 없이, 그러나 재빠르게 움직였다.
목표물이 화물에서 내려간 시점에서 따라잡은 긴토키는 자신의 목도 대신 반 발짝 앞에 있으면서도 자기 뒤에 누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낭인의 검에 손을 뻗었다. 날붙이가 달빛에 빛나는 것을 남자가 깨달았을 때는 이미 그의 등을 사선으로 크게 가로지르며 핏줄기가 뿜어져 나왔다. 짧은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돌아보려는 다른 남자의 목이 떨어진다. 검을 뽑으려던 그 옆의 남자의 손목이 먼저 떨어진 후, 이번엔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그 목이 베인다. 마지막으로 남은 낭인은 지당 소속이었던 듯 긴토키의 얼굴을 보자마자 “시……!”라고 소리쳤다. 가발까지 썼는데 시로야샤인 걸 알아보다니, 눈썰미가 좋다. 물론 바로 가슴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으니 별로 의미는 없는 일이었지만.
“당신이 쿠라바 토우마야?”
순식간에 자신의 호위 네 명이 살해당하는 것을 본 쿠라바는 비명도 안 나오는 듯, 자기 앞에 선 남자를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대답은 없지만 어차피 확인 차 물었을 뿐이다. 귀병대의 낭인이 보여준 사진에서 본 얼굴과 똑같으니 이 남자가 오늘의 목표물이 확실하다. 그럼 망설일 것은 없다. 긴토키는 품속에 손을 넣어 낮에 타카스기에게서 건네받은 약병을 꺼냈다. 그냥 보면 눈약으로 착각할 것 같은 투명한 용기 속에 붉은 액체. 그도 장사꾼이 이상 그게 무엇인지는 아는지 안 그래도 공포에 질려있던 얼굴이 더 흉하게 일그러졌다. 물론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쿠라바가 비명을 지르기 전에 손을 뻗은 긴토키는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아 고개를 위로 꺾었다. 공포에 조금 벌어져 있던 입이 닫힐 새도 없이 한 손으로도 쉽게 열리는 용기의 뚜껑을 열어, 바로 그 입 속으로. 꿀꺽하고 한 번 목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 것을 확인하고, 긴토키는 재빨리 민첩해 보이지 않는 몸을 바닥에 쓰러뜨려 구속했다. 머리통을 붙잡아 고개를 숙이지 못하도록 위로. 별로 이렇게까지 해서 보고 싶은 면상은 아니었지만 어쩔 수 없다.
“아- 마음은 알겠는데 너무 저항하고 그러지는 않는 게 좋아. 한 모금 마셨으면 이미 아웃인 거 알지? 괜히 토해내서 일 만들지 말고. 이거 뱉으면 내가 친절히 댁 손목을 그어줘야 되는데, 아픈 거 싫잖아? 그치?”
설득이라고도 권유라고도 말하기 힘든 말을 해 보지만 과연 이게 쿠라바 귀에 제대로 들리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약을 토해내려고 하지만 않으면 긴토키로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지만. 긴토키에게 깔려있는 남자가 저항해봤자 이 구속에서 빠져나오는 건 애초에 무리다. 이대로 죽어준다면 그게 최선이다. 사실 방금 쓴 칼로 베어버리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어디까지나 자살로 위장해야 한다고 하니 별 다른 방법이 없다. 차선책으로는 손목을 긋는 것도 있지만 그거로는 죽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들은 적이 있다. 역시 자살 위장 어쩌고 하려면 목을 그어버리면 되지 않아? 자기 손으로도 목은 그을 수 있잖아? 아, 그러려면 단도로 자기 쪽에서 그은 것처럼 해야 하나? 뭐야,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해 본 적이 있어야지. 귀찮네. 역시 약으로 죽어주는 게 제일이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긴토키는 문득 쿠라바의 숨이 아주 가늘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도 초점이 맞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처음에는 벗어나려 버둥거리던 몸도 힘이 없는지 축 늘어져 있다. 이 정도면 굳이 구속할 필요도 없다. 긴토키는 몸을 일으켜서 쿠라바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말을 하려는 듯이 입이 움직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유언 정도는 들어줄 생각이 없지도 않았는데. 근성이 없네. 그 생각을 한 다음부터 쿠라바가 절명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코 밑에 손을 갖다 대고, 맥도 짚어서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하고 긴토키는 이제 시신이 된 남자의 몸을 뒤집었다. 되도록 부자연스럽지 않게, 약을 먹고 그 자리에서 쓰러진 것처럼. 그의 손에서 떨어진 약병이 굴러가다 멈춘 거라고 생각하기에 적당한 위치에 빈 병을 놓으면 완성이다. 호위 4명이 죽은 것에 대한 의문은 남겠지만 내버려 두면 저쪽에서 알아서 이유를 만들어줄 것이다. 돈이라든가, 알력 싸움이라든가, 공포로 인한 착란이라든가 기타 등등. 누가 하는지는 몰라도 최대한 상층부는 아닐 테니 없는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유를 만들어야 하는 졸병들에게 짧은 동정을 했다.
이미 다른 곳에서 명이 끊어졌을 지당의 총수와 간부진, 그리고 방금 절명한 쿠라바 토우마까지. 이것으로 지당과 텐카이야의 밀매 무기가 긴토키의 본당까지 흘러들어갔다는 것을 아는 사람, 그리고 그 루트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모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간만에 한 일은 어땠냐?”
장지문을 열면서 들어온 타카스기가 한 말이다. 해가 중천에 뜬 시간에도 잠옷차림으로 누워서 신문을 보고 있던 긴토키는 벌써 20년 쯤 매일 같이 보고 있는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영양 상태 문제로 타카스기보다 작았던 긴토키가 친구들 중에서 가장 커진 것도 벌써 10년 전 일이다 보니 이렇게 그를 올려다보는 일은 거의 없다. 거기에 특별한 감흥도 없이, 긴토키는 주인 허락 없이 문을 여는 걸로도 모자라 방에 들어와 당연한 듯이 바닥에 앉는 타카스기를 피해 옆으로 굴렀다. 애초에 프라이버시 같은 건 없다시피 한 사이다.
“어차피 저번에 내가 돌아왔을 때 보고 들었을 거면서 뭘 굳이 물어 봐? 일 좀 하라고 빙 돌려서 까는 거냐? 앙?”
“잘 아네.”
툴툴거리는 긴토키의 말에 쿨하게 대답한 타카스기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 그대로 품을 뒤지더니 담뱃대를 꺼냈다.
“여기서 피우지 마, 안대 담뱃대.”
발로 차는 걸로 항의하자 “안대랑 무슨 상관이야.”라며 한 마디 하면서 타카스기는 긴토키의 발을 피해 이동했다.
“즈라 놈은 못 피우게 한단 말이다.”
“그렇다고 나한테 와서 피우는 건 무슨 경운데? 네 방 가서 피워, 네 방 가서.”
쫓아가서 또 발로 공격하는 긴토키와 빈손으로 그걸 막는 타카스기. 공방전은 잠시간 이어졌지만 결국 타카스기가 졌다. 이곳이 긴토키의 방인 시점에서 승률은 처음부터 별로 높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원래 긴토키는 담배 연기 같은 걸 신경 쓸 만큼 민감한 사람이 아니지만 얼마 전에 본 TV 프로그램에서 흡연이 미각을 둔하게 한다는 소리를 들은 후부터는 적극적으로 흡연을 저지하게 되었다. 이르기를, 담배 같은 걸로 당분의 즐거움이 줄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모양. 그건 직접 흡연이지 간접 흡연 얘기가 아닐 거라고 말해 봤자 들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이게 30이 다 되어가는 남자, 그것도 이 섬나라 굴지의 실력파 양이지사 입에서 나온 소리라니. 소문이나 전장에서의 그밖에 모른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는 수 없이 담뱃대를 다시 품 안에 넣은 타카스기는 발 공격을 멈춘 긴토키에게 다시 한 번 처음의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어땠냐?”
“뭐가?”
“다.”
애매한 질문이었지만 긴토키는 의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잠시 붉은 눈동자를 옆으로 돌린 후 잎을 열었다.
“이제 지당 이름이니 간부 얼굴이니 하나도 못 외우겠어.”
“걱정 마라, 그건 나도 못 외우니까.”
카츠라 귀에 들어갔다간 “너희들은 이 나라에 새로운 빛을 가져올 양이지사로서의 자각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라는 말로 시작되는 설교 3시간 코스짜리 발언이었지만 둘 다 카츠라가 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하는 말이다. 본당 내부 총괄 및 외교 전담이라는, 말 그대로 조직의 우두머리인 카츠라 본인은 오늘도 아침 일찍 나가 무슨 당과 조정 미팅 중이다.
“아- 그리고 네가 들여온 약 처음 써봤다.”
“어땠어?”
“내가 마신 거 아니니까 모르지.”
말하고 같이 낄낄거린다. “그야 그렇지! 나도 정확히 어떤지는 모르니까!”라며 클클거리는 타카스기, 그런 친구에게 “넌 들여온 놈이 그것도 안 마시고 뭐 했어?”라며 역시 클클거리며 또 발로 툭 치는 긴토키.
“그거 한 모금이라도 마셨다간 벌써 선생님이랑 사이좋게 손잡고 꽃밭을 걷고 있었을 거다.”
“오, 그거 좋네. 도와줄까?”
“앞으로 네놈이 주는 술은 안 먹어.”
여전히 웃으면서 하는 말에 이번엔 타카스기가 긴토키를 툭 쳤다. 말로만 오가는 험한 소리와 아프지 않은 발길질. 그것을 몇 번인가 더 반복한 후에 긴토키가 겨우 이야기를 원래의 궤도로 끌고 왔다.
“근데 진짜로 10분? 인가 있다 죽던데, 즈라가 뭐라 안 그랬어?”
“처음에는 좀 시끄러웠지만, 예상이 빗나가서.”
어깨를 으쓱해 보이는 타카스기.
“뭐가?”
“맛이 없거든, 그 약.”
당연하단 듯이 나온 대답에 긴토키는 잠시 말없이 친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약이라는 것은 물론 어젯밤에 긴토키가 쿠라바 토우마에게 먹인 미량의 액체를 말한다. 최근 다른 은하계에서 발견되어 지구에는 본당-귀병대를 중심으로 하여 밀수된 극약을 가리키는 것만은 확실했지만 앞뒤 문맥이…….
“원래는 암살용으로 들여온 거였다고, 그거. 그래서 일부러 타케치에 반사이까지 보내서 신중히 가져온 거고. 그런데 정작 가져와 보니 그게 지구인 감각으로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맛이 없어서 암살용으로 쓰는 건 도저히 무리더라.”
라며 타카스기는 “천인들한테는 그 맛이 안 느껴지는 건지 암살용으로도 잘 통했지만. 미각 괜찮은 거냐? 그 녀석들.”이라며 추가 설명을 했다. 그리고 조용히 듣고 있던 긴토키는 설명을 이해한 후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웃어젖혔다.
“하, 히, 뭐야, 그거, 암살용인데, 히힉, 맛이 없어서, 못 쓴다고? 후, 후하, 히, 히히히히……!”
“숨넘어가겠다, 너.”
타카스기의 말에도 긴토키는 “그치만 이걸 어떻게 안 웃어”라며 여전히 대폭소 중. 아예 뒤로 넘어가서 배를 잡고 깔깔거리는 걸 잠시 지켜보다가 왠지 자기가 비웃음 당하는 것 같아서 은근히 부아가 치민 타카스기는 “그만 웃으라고, 천연 파마.”라며 그의 배를 밟아 버렸다. 개구리 터지는 것 같은 소리가 나고 바로 웃음이 멎었다. 음, 효과 만점이다.
“야!”
“웃다가 숨넘어가기 전에 구해준 거다. 감사한 줄 알아.”
“웃다 죽은 놈 얘긴 들은 적 없거든?!”
반격으로 발차기가 들어오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타카스기는 긴토키가 일어나지 않는 이상 공격하지 못할 곳까지 도망쳤다. 저 자타공인 귀차니스트는 절대 이런 일로 일어나서까지 쫓아오지 않는다.
“그래, 어째 네가 처음에 밀수 건으로 즈라랑 툭탁거리더니 그 다음부터 조용하더라.”
본디 본당의 3두령이라고 불리는 세 사람 중 성격적인 이유로 가장 발언권이 센 카츠라는 역시 그 성격 탓에 암살 등 본인이 비겁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좋아하지 않는다. 타카스기가 막부 타도와 조직을 위해서라고 설득하면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일도 있지만 그런 때에도 시종 굳은 표정이니 알만하다. 그런 그가 암살용 극약 밀수 같은 일에 대찬성했을 리는 없고, 늘 그렇듯이 처음에 좀 말이 많다 나중엔 조용해졌기에 결국은 납득했나 했더니 이런 이유였을 줄이야. 그것도 다른 간부가 아니라 타카스기가 진행한 일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즈라도 어이가 없는지 자긴 반대했으면서 나한테 ‘너는 이런 것도 제대로 조사 안 한 거냐.’라더라.”
“당연하지!”
“천인의 미각이랑 우리 미각이 이만큼 차이가 있는 줄 어떻게 아냐고.”
말하는 타카스기의 표정에도 불만이 가득했다. 아마 이 일을 직접 진행했을 부하들은 다들 한동안 잔소리 꽤나 들었을 터다. 금전적인 피해도 있었을 테고. 물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늘 그렇듯이 귀병대 쪽에서 물건을 다른 쪽으로 흘려 자금 회수 수준이 아니라 흑자까지 남겼을 테니 걱정 없지만.
“그런데 그렇게 맛이 없어? 냄새는 안 나던데.”
“없다더라. 냄새는 없는데, 아무리 맛이 진한 음식에 섞어도 숨길 수 없을 만큼 맛없대.”
어떤 의미로 대단한 극약이다. 효능만이 아니라 미각적으로도 극약. 그 극약이 지구에 들어온 것은 귀병대를 통해서가 처음이니 방금 타카스기가 말한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희생이 있었을 터였으나 긴토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사소한 일이다.
“아니, 약이 더 나았을 거다. 맛은 없지만 아픔도 없거든. 통각부터 전부 마비시키고 서서히 죽는다고 하니까, 처음에 좀 맛없는 것 빼고는 나쁘지 않은 자살 방법이야.”
“덕분에 비싸게 팔렸지.”라고 한 마디 더. 흐응-. 긴토키는 흥미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대꾸를 했다. 실제로 아무래도 좋다. 암살용으로 쓰지 않는다면 앞으로 자기가 누구에게 먹일 일도 거의 없을 테고, 자기가 먹을 예정은 더더욱 없다.
약 얘기는 그 이상 할 것도 없어서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나 잠시 생각하던 긴토키는 문득 중간에 전선을 이탈한 소년을 떠올렸다. 특히, 그 옆모습.
“신센구미에 무슨 일 있대?”
“특별한 동향은 없는 것 같다만. 네가 돌아온 직후에 지당 소속 낭인들이고 용병이고 반쯤 튀고 반쯤은 녀석들이 잡아서 끌고 간 모양이다만, 살아남은 놈들은 죄다 위 사정까지는 모르는 말단들이니까 이쪽 루트까진 못 캘 거다.”
“아니, 그런 거 말고.”
“뭐?”
뭐냐고 물어도, 긴토키로서는 대답하기가 궁하다. 결국은 그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지 못하고, 최소한 짐작이라도 가는 게 있어야 하는데 그것도 없다. 소년의 이름을 꺼내면 알 수 있을지도 몰랐지만 그렇게까지 해서 알아야 하는 일이냐면, 물론 그것도 아니었다. 무난한 선을 찾자면…….
“누가 죽었다든가.”
“대장급 이상으로는 전혀. 평대원 서넛 죽었다고 하더라.”
그 날 밤 일이다. 그리고 역시 긴토키가 원하던 정보는 아니었다. 긴토키가 아는 것만 해도 적지 않은 부하를 전장에서 잃은 소년이 이제 와서 부하가 죽었다고 그렇게 절망할 리는 없다.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게 확실하지만, 굳이 파헤칠 필요는 없다. 긴토키는 이야기를 거기에서 끊었다.
“그래서 결국 뭐야, 일 좀 하라고?”
“알면 나가서 정세 조사라도 해라, 반 니트.”
“긴 상은 파칭코랑 당분 아니면 나가고 싶지 않은 사람이에요-.”
“즈라한테 꼰지른다, 반 히키코모리.”
“너 날 말려죽일 셈이냐?”
카츠라가 무서운 것은 아니지만 그가 한 번 설교를 하겠다고 나서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없이 짜증스럽게 만드는 재능의 소유자라는 것만은 둘 사이에 공통된 인식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고지식했던 사고방식은 커서도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성장하며 흡수한 이론 덕에 괜히 한 마디 잘못 했다간 그 말꼬투리를 잡아서 사람 정신을 피폐하게 만든다. 오래 같이 있다 보니 척하면 척이라 한 귀로 흘리면서 듣고 있으면 바로 알아채고, 그 어느 해충에 뒤지지 않을 만큼 끈질기기까지 해서 아무리 도망쳐도 포기하지도 않는다.
물론 카츠라는 기본적으로 정론을 좋아하기 때문에 긴토키고 타카스기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말을 들으면 애초에 그렇게 설교가 길어질 일도 없지만 그럴 위인들이 아니었기에 이런 사태가 발생한다. 그 증거로 부하들이 카츠라에게 설교를 듣기 시작해서 30분 이상 이어지는 일은 없었다. 요약하다면, 둘 다 자업자득이다.
“아니, 요 며칠 화기 문제로 쪽잠만 자다보니 네가 팔자 좋은 게 배 아파서.”
“그거 나 전혀 상관없지 않아?! 내가 화풀이 당할 이유 없지 않아?! 그리고 평소엔 너도 그렇게 열심히 일 안 하잖아! 즈라한테 다 던져놓고 지 하고 싶은 일만 골라 하면서!”
“하고 싶은 일 골라하는 것조차 안 하는 놈이 어디서 생색이야? 너는 칼 안 들면 도움이 안 되잖아.”
“방해만 되니까 싸움 아니면 괜히 끼어들지 말라고 그래서 안 끼어드는 거 아냐!”
“자랑이냐.”
하며 타카스기가 다시 또 발로 툭 찬 것을 시작으로 잠시 말없는 공방전이 이어졌다.
긴토키가 하겠다고 덤비면 웬만한 일은 평균 이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귀찮아해서 그렇지 검부터 시작해 별 하잘 것 없는 소일거리까지 쓸데없을 만큼 다재다능한 인간이다. “차라리 심부름센터 같은 거 하면 대성했을 것 같은데.”라고 본인이 툴툴거리던 소리에 킬킬거리고 한동안 “센터장님.”이라고 불러대며 놀렸지만 속으로는 긍정했었다. 조용히 지낸다고 지내도 그 성품 탓에 주변에 사람이 절로 모일 정도니, 정말 심부름센터라도 차렸다간 마을 전체랑 얼굴을 트고 살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만약의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한 카츠라와 타카스기가 양이 활동을 포기하는 일은 없을 테고, 긴토키 역시 친구들이 살아있는 한 두 사람의 곁을 떠날 리가 없었다. 그 사람과의 약속이라고 했다. 타카스기도 카츠라도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물은 적이 없었지만 그 사람과의 약속이라면, 긴토키가 어길 리가 없다.
물론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뿐이지 그가 양이 활동에 적극적이냐면 그건 아니었다. 전투가 벌어지면 선봉에 서는 친구들의 곁에 서지만 그 외의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안 그래도 생선 눈깔 같은 눈이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따분하다는 태도를 숨기지도 않고 선대답만 해대니 그런 사람한테 다른 양이당과의 외교니 활동 자금 확보를 위한 거래니 하는 중요한 일은 맡길 수는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카츠라도 타카스기도 충분히 유능했으므로 긴토키가 일하지 않아도 크게 문제는 없었다.
같이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어린 날 봤던 광경과 지금 보는 광경 사이에 빠진 사람은, 그런 구멍은 하나로 충분했다.
잠시간 이어졌던 공방전이 늘 그렇듯이 긴토키 우세의 무승부로 끝난 후에 타카스기는 억센 뒤꿈치에 공격당해 얼얼한 발등을 감싸며 아까의 공격으로 긴토키가 손에서 놓아버린 신문을 쥐었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는지 손으로 잡았던 부분이 흉하게 구겨져 있었다. 방에 들어왔을 때 긴토키가 보고 있던 부분이 아마…….
“부고란?”
“한 쪽밖에 없으면서 눈도 좋아.”
긴토키를 한 대 더 차주고.
“아는 사람 중에 여기 이름 올릴 예정인 사람이라도 있냐? 보통 노친네들이 병사했을 때 내는 거잖아.”
“그냥.”
어쩐지 시원찮은 대답에 침묵으로 추궁한다. 정말로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면 입을 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지만 본당의 3두령이 서로에게 정말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라는 게 없다시피 하다는 것은 본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거, 보고 있으면 왠지 편해지더라고.”
긴토키는 무엇이 어떻게 편해진다는 건지 설명하지 않았지만 타카스기에게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는 사람의 이름이 없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보고 있었던 것이다. 죽은 사람들의 이름, 나이, 사인, 장례식 일정 등이 쓰인 작은 칸들을 하나하나 지날 때마다 안도하면서.
“악취미.”
“너보다 더할까.”
웃으면서 던진 비난을 역시 웃으며 긴토키가 받아친 것을 듣고 타카스기는 만족했다. 만약 긴토키보다 먼저 타카스기의 눈에 부고란이 들어왔더라면 자신도 그와 같은 행위를 했으리라. 자신과 그는 이런 부분이 닮았다.
갑자기 복도 쪽에서 들린 발소리에 둘은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바닥을 콩콩 찍는 것처럼 걸어오는 작은 발. 애초에 극악한 남녀 비율을 자랑하는 이곳에서 저런 발소리를 내며 걷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중2- 마타코가 부른다 해-.”
소리 내며 장지문을 연 것은 이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본당 본부에서 함께 생활하는 귀중한 여성 조직원이었다. 새하얀 피부에 중국식으로 올려 묶어 장식을 단 붉은 머리, 거기에 역시 중국식 복장. 아직 어리지만 알 만한 사람은 한 번에 알아볼 그 모습, 야토.
막부의 개국에 반대해서 양이 활동이 시작되었는데 그 양이 조직에 천인이 소속되어 있으니 참 묘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역시 같은 본당 소속인 엘리자베스처럼 양이 사상에 이해를 표하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똑같은 천인이라도 각자 주인을 닮았다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부른댄다. 얼른 가 봐, 중2.”
“긴토키…….”
어느 새 상반신을 일으켜 앉아있던 긴토키가 씩 웃으면서 일부러 입에 담는 호칭에 타카스기는 자신의 목소리가 절로 낮아지는 것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카구라가 저런 매우 불명예스러운 호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원인이 긴토키였으니까.
그야 물론 전쟁이 끝날 때 쯤 하여 심신이 매우 피폐했던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타카스기의 정신 상태 역시 상당히 좋지 않았던 것도, 변명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성년도 지난 남자가 “난 그저 부술 뿐이다.” 같은 소릴 해도 된다는 건 아니지만. 타카스기 본인 역시 가능하다면 그 때로 돌아가 평생 쪽팔리게 되는 소리를 하기 전에 한 대 쳐서 갱생시키고 싶었으나, 안타깝게도 그것은 당시의 긴토키와 카츠라의 역할이었다. 당시에는 “어디 나사가 하나 풀려 있었다.”라고, 지금은 “중2병이 늦게 왔다.”라고 친구들이 말하는 타카스기의 증상은 친구들의 지나치게 애정 어린 주먹으로 강제 수정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부끄러운 과거는 긴토키가 술만 들어가면 끄집어내어 실실 웃으며 툭툭 건드리는 좋은 놀림 재료가 되었다. 그야말로 카구라가 그걸 기억해 타카스기를 “중2”라고 부를 정도로. 실제로 중학교 2학년에 해당하는 나이는 타카스기가 아니라 카구라이건만. “중2병이었던 신스케 님도 멋있슴다!”라고 말해주는 소녀도 하나 있었으나 전혀 위로가 못 된다. 오히려 상처를 후벼 파는 기분이다. 젠장.
“무슨 약이 어쩌고 했었다 해.”
“알았다.”
사실 귀병대가 관련된 ‘약’은 한 두 개가 아니지만 어차피 이 소녀에게 물어 봤자 모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타카스기는 두 말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 열심히 하고 오세요, 신스케 오빠-.”라며 높은 목소리로 실실거리는 친구를 마지막으로 한 대 더 차주고, 긴토키 흉내를 내서 “신스케 오빠-.”라고 부르는 카구라에게 탈력하며 장지문을 연 타카스기는 고개만 뒤로 돌려서.
“나랑 즈라 신경 그만 긁고 정말 마을에는 한 번 갔다 와라.”
“네- 네-.”
“담뱃잎도 사오고. 한 봉지밖에 안 남았어.”
“어이, 너 진짜 용건은 그거였지.”
긴토키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장지문을 닫아버렸다.
“아- 자기 부하 시키면 되지.”
“중2 부하들은 다 바빠 보인다 해. 여기서 한가해 보이는 건 긴 쨩밖에 없다 해.”
분명히 타카스기와 같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14살 소녀가 눈을 똑바로 보면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상외의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뭐야, 이거. 내가 굉장히 한심한 놈 같잖아. 니트 같잖아. 아니, 니트가 아니냐고 물으면 좀 할 말이 없긴 하지만.
“가면 되잖아, 가면…….”
“간 김에 편의점에서 피자 호빵도 사와라 해.”
“네가 가!”
“무슨 소리냐 해, 나도 바쁘다 해. 신파치가 짐 옮기는 거 도와달라고 했었다 해. 금방 나갈 거다 해.”
그러니까 얌전히 호빵이나 사오라고 말을 매듭짓고 카구라는 그 자리에 앉았다. 이것들이 죄다 사람을 심부름꾼 취급하고 있어. 긴토키는 투덜거리면서, 방구석에 있는 책상 쪽으로 움직였다. 실은 옷을 먼저 갈아입어 버리는 것이 편하지만 카구라가 긴토키가 지금부터 하는 일을 말은 안 해도 실은 꽤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괄량이 우주 선수권이 열리면 메달 정도는 깔고 들어가면서 의외로 이런 부분은 그 나이 여자애답다고 해야 할지. 아니, 요즘 14살 여자애들은 누구랑 사귀니 안 사귀니 하는 게 보통이라니까 한참 늦은 거긴 하겠지만.
생각하며 긴토키는 서랍에서 세울 수 있는 거울과 남자 혼자 쓰는 방에 존재할 거라 생각하기 힘든 물건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확인하며 천천히 흰색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색조 밸런스에 붉은 색을 더해간다.
멀지 않은 곳에 앉아 긴토키의 얼굴을 관찰하던 카구라는 거울 속의 자신과 눈싸움하는 것을 끝낸 그와 오랜만에 눈을 맞췄다.
“긴 쨩은 정말 쓸데없는 것만 잘 한다 해.”
“어이.”
‘쓸데없는 것’이라는 말이 거슬렸는지 목소리를 낮게 한 긴토키였지만 카구라는 그의 책상 위로 올라왔던 것들을 다시 서랍에 넣는 것을 보며 덧붙였다.
“그치만 보통 남자가 그런 거 잘 해도 쓸모없다 해.”
카구라가 ‘그런 거’라고 칭한 것은 방금 긴토키가 한 행위———본격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눈가를 붉은 색으로 장식하는 화장을 말한다. 카구라도 그 방면에 밝은 것은 아니기에 잘은 모르지만 원래는 훨씬 더 많은 화장품을 여러 단계에 걸쳐 사용해야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맨얼굴에 눈 화장을 했을 뿐인 긴토키의 ‘화장’은 지극히 간소한 것이었지만 카구라가 보는 한 단 한 번도 손이 미끄러져서 지우거나 실패한 일이 없었으니 이쪽으로 손재주가 좋은 것만은 확실했다.
“쓸모 있잖아. 즈라라든가. 저번엔 신파치도 했었고. 또…….”
눈을 돌리며 긴토키가 손가락으로 꼽는 사람들은 전부 연회의 벌칙이나 잠복 임무 때문에 내키지 않는 여장-여기서 카츠라는 제외한다. 어째서인지 그는 여장을 하면 하이해진다. 그쪽 취미라도 있나?-을 해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긴토키의 손을 거쳐 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본인은 옛날 애인이 하던 걸 대충 따라한 것뿐이라고 하지만 나중에 여장한 카츠라를 본 마타코가 “어떻게 나보다 잘 할 수 있씀까…….”라며 여자로서 패배감을 맛봤다고 하니 재주란 무섭다.
다섯 개의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하던 긴토키는 곧 기억력의 한계를 맞이했는지 접고 있던 두 개의 손가락을 펴고서 “뭐, 요즘 제일 많이 하는 건 나지만.”이라며 내던졌다.
이르기를, 연회 벌칙으로 여장한 카츠라를 부하들도 못 알아보는 것을 보고 타카스기가 써먹을 수 있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얼굴이 알려지지 않은 일반 조직원들은 문제가 없지만 본당의 간부급 정도 되면 행동에 제약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여장을 해 버리면 남자인 것까진 알아보더라도 그것이 양이지사인 누구라고까지는 생각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카츠라처럼 입만 열지 않으면 그냥 키가 큰 여자라고 생각할 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이용하는 귀병대 두령 타카스기 신스케가 볼 때 여장을 이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타카스기 본인은 강력히 거부했다. 카츠라가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시키다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냐 타카스기!”라며 소리를 쳐도 “너랑 긴토키는 별로 안 싫으니까 됐잖아. 난 싫다.”라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덕분에 자기 연지를 타카스기의 입술에 발라 줄 생각을 하고 있던 마타코가 조용히 저기압이 되기도 했지만 물론 타카스기가 알 바는 아니었다.
이제는 카츠라가 이동할 때 여장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여자 옷을 입는 것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으면서도 긴토키가 눈에 확 띌 만큼 화려한 옷을 입고서 화장을 하고 나가는 것도 꽤 흔한 일이 되었다. 일전에 한 번 그렇게 눈에 띄는 꼴로 돌아다녀도 괜찮겠냐고 신파치가 걱정했을 때 “오히려 그쪽에만 눈이 가서 나인지 몰라.”라고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었다. 지금까지 안 들키고 잘만 다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센구미랑 스쳐지나갔는데도 못 알아봤다고 깔깔거리며 비웃는 것을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듯했다.
“그리고 긴 상은 연지 하나도 제대로 못 바르는 애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거든요-. 뭐야, 질투야?”
“누가 그런 걸 질투 하냐 해! 연습하면 할 수 있다 해! 아마!”
“그렇게 당당하게 ‘아마’라고 해봤자…….”
긴토키의 도발에 파르르 타올라 소리를 질러대는 카구라였지만 그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화장하는 긴토키를 빤히 보고 있다가 “왜, 너도 할래?”라는 말에 손을 댄 것까지는 좋았는데 파멸적일 정도로 이런 쪽에는 재주가 없었던 것이다. 왜 내 손인데 내 생각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는 거냐고 손과 눈싸움을 했을 정도다. 그 후로도 몇 번 시도해봤지만 카구라 얼굴에 자연스러운 모양으로 연지가 덧칠해진 것은 긴토키가 해줬을 때 외에는 없었다.
“하면 된다 해!”
“아, 그래, 그래. 돼, 돼.”
“후캬——————!”
건성건성 대답하는 긴토키에게 폭발해서 덤벼드는 카구라. 긴토키는 “우오오?!”라는 소리와 함께 자기 코앞까지 왔던 손날을 피했다. 아무리 장난이라지만 야토의 손날을 정통으로 맞았다간 본당의 3두령이 양두령으로 재편된다.
“스톱! 이 이상 하면 긴 상의 머리통이 가여운 꼴이 되니까 스톱! 알았어! 미안! 잘못했어! 놀려서 죄송합니다 카구라 님!”
“키이이이———!”
“야생동물이냐! 미안하다니까! 아니, 못해도 괜찮아! 연지 좀 못 바르면 어때! 내가 해줄게!”
그 말에 정신없이 공중을 가르던 카구라의 손이 멈췄다. 긴토키의 머리 바로 위에서. 우와, 지금 건 진짜 골로 갈 뻔 했다……. 아슬아슬하게 참극을 면한 긴토키는 어째서인지 갑자기 움직임을 정지한 소녀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았다. 내버려 둬도 쉴 새 없이 변하는 표정이 웬일로 복잡 미묘 상태로 굳어있다.
“카구라……?”
“진짜냐 해?”
“하?”
“긴 쨩이 해주는 거.”
무슨 얘긴가 하고 잠시 생각하는 긴토키는 곧 깨달았다. 화장 얘기다. 고개를 끄덕인다.
“계속?”
“아니, 언젠가는 네 손으로 하는 게 좋지 않겠어……?”
이번엔 괴성과 폭력 대신 무언의 압박이 가해졌다. 카구라 쨩, 눈이 무서운데요. 눈이 야토적인 썸씽으로 번뜩이는데요. 나 너 이런 눈 전투 외에서 보는 거 처음인데요. 신변에 위협이 느껴지고 막 그러는데요. 생각하며 속으로 식은땀을 흘린 긴토키는 결국 “아뇨, 기쁜 마음으로 언제까지든 해드리겠습니다…….”라며 항복 선언을 했다. 대답이 마음에 드신 모양인지 카구라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피자 호빵 잊지 마라 해-.”
아까 괴성을 지르던 사람과 같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즐거운 목소리로 말하고서 카구라는 발걸음도 가볍게 긴토키의 방을 나갔다. 그녀가 발로 장지문을 닫은 후(매우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인지라 눈에 띌 때마다 카츠라가 주의하고는 있지만 본인에게 고칠 의사는 없어 보였다.), 긴토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위협이 사라졌다.
카구라가 여기 있는 이유가 긴토키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니 따르는 것이 당연하고, 따라주면 물론 기쁘기도 하지만 뭐랄까……. 긴토키는 본부에서의 평상복으로 걸치고 있는 하얀 바탕의 하늘색 물결무늬 키모노-키나가시로 입는 나가기(長着)-를 벗으며 생각했다. 역시 그 때 고향 별로 돌아가라고 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돌아가도 아무도 없다고 해서 남아도 된다고 해 버리긴 했지만, 자신에게 의존하는 것은…… 좋지 않다. 차마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역시, 스스로 서야한다. 이렇게, 약속에만 매달려서 살아가는 인간처럼 되지 말고. 자신의 다리로 서서 똑같이 서있는 사람과 손을 맞잡는 사람으로. 물론 그녀가 어리다는 것을 알기에 아직은 아니지만, 멀지 않은 언젠가.
뭐, 신파치도 안 그래 보이면서 실은 심이 확실하게 서있는 걸 보면 카구라도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보이지만. 희미하게 웃으며 긴토키는 마지막으로 오비의 매듭을 지었다. 자기와는 다르다. 손을 잡아오기에 피하지 않았지만 실은 자기보다 훨씬 강한 아이들이라는 것을, 긴토키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잡생각은 여기까지. 긴토키는 어째서인지 이불장 안쪽에 달려있는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잠깐 보았다. 어렸을 때는 시체 같다느니 귀신 같다느니 하는 소리를 들은 새하얀 피부와 붉은 눈, 시로야샤라는 이명의 이유가 된 하나로 묶어 올린 백발. 그리고 그것을 감추듯이 눈가를 장식한 붉은 화장과 흑색과 적색이 섞인 키나가시 차림. 긴토키 본인이나 그와 오랜 시간 함께한 친구들이 보기에는 의심할 여지도 없는 사카타 긴토키였으나 수배 전단의 그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이것만으로도 사카타 긴토키가 아닌 모양이었다. 시각이라는 건 생각보다 별 도움이 안 된다니까.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긴토키는 이불장의 문을 닫았다.
카부키쵸는 언제 와도 활기가 가득한 점을 긴토키는 내심 매우 높이 평가했다. 얼굴이 팔린 것도 있고 귀찮기도 해서 외출 자체를 거의 안 하다시피 하는 긴토키였지만 카부키쵸만은 언제 와도 변치 않는 것이다. 유흥가답게 적당히 활기차고, 적당히 더럽고, 적당히 속물적이고, 적당히 인정이 있다. 신파치나 카구라를 만난 곳도 전부 이곳이었고, 술 생각이 나면 가장 먼저 찾게 되는 스낵 오토세도 이곳에 있었다. 긴토키가 터를 정할 일이 있다면 두말없이 카부키쵸를 택했으리라.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날 리 없었지만.
지나가는 사람 중 몇 명인가가 알아보고 “여어!”라며 손을 들어 인사하는 것을 웃음으로 받아넘긴다. 물론 그들이 아는 체를 한 것은 시로야샤 사카타 긴토키가 아니라 사천왕 사이고 보호 아래에 있는 가게 중 하나-놀랍게도 하나가 아닌 것이다, ‘그런 가게’가-의 종업원으로 추정되는 ‘긴 상’이지만.
그들보다 먼저 같은 길을 걸었던 사람으로서 사이고가 본당이나 다른 양이당의 부탁을 이것저것 들어주는 것은 맞지만 한참 전에 은퇴한 사람이고, 긴토키와 사이고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애초에 긴토키는 누구 밑에서 일을 한다는 게 자신에게 맞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대선배라고 해도 차마 눈 뜨고 봐줄 수 없는 여장남자 거한 따윈 애초에 대상외다. 물론 그렇다고 굳이 부정해서 귀찮은 일을 만들 필요도 없기에 필요할 때 이름은 써먹지만. 못된 후배구만. 스스로에게 꽤 정확한 평가를 내리며 긴토키는 “또 농땡이야? 마드모아젤한테 걸릴 때 되지 않았어?”라며 아는 체를 하는 샌드위치맨에게 “이르면 안 돼?”라며 검지를 세워 입술에 갖다 댔다. 한참 전부터 대체 어느 가게에서 언제부터 일하는지 끈질기게 물어보는 남자다. 슬슬 포기 좀 하지.
남자가 눈으로 자신을 쫓는 시선을 뒤통수에 느끼며 긴토키는 바로 다음 골목을 눈으로 확인했다. 계속 저렇게 물고 늘어지면 곤란하다. 적당히 둘러대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 얼른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 긴토키는 재빨리 골목을 꺾었다.
“아.”
꺾은 순간 골목에서 튀어나와 방금 긴토키가 온 방향으로 가려고 하는 남자. 거의 부딪칠 뻔한 것을 뛰어난 신체 능력으로 아슬아슬하게 피한 긴토키는 두 발짝 뒤로 물러나면서 다시 자세를 가다듬었다. 서로 고개에서 꺾다가 부딪칠 뻔 했으니 쌍방 과실이지만 별 일 없었다고 해도 넘어질 뻔한 것은 긴토키 쪽이다. 그러나 남자는 긴토키와 부딪칠 뻔했다는 사실조차 마치 없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길을 가고 있었다. 물론 이런 거 일일이 엄청 사과 받고 싶은 그런 타입은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 긴토키는 남자를 불러 세우려다가 곧, 그가 자신이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센구미 꼬맹이다.
대복이 아니라 붉은 하카마를 입은 사복 차림이었지만 황토색 머리카락에 호스트바에 데려다 놓아도 손색없는 미소년이 아무리 그래도 에도에 둘이나 있을 리는 없다. 있어도 곤란하고. 공급과 수요적인 의미에서.
솔직히 아무리 변장(이라고 할 것도 없지만.)을 했다고 하더라도 신센구미와 접촉하는 것은 그다지 환영할 만한 사태가 아니다. 특히나 대장 클래스 쯤 되면 전투에서 한두 번 마주친 것이 아니라 알아챌 가능성도 더 높다. 때문에 사실 이대로 멀어져가는 뒷모습에 긴토키 역시 등을 돌리고 소년과 다시 마주치지 않을 길을 가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다. 현명한 판단, 이지만…….
방금 스쳐지나간 소년의 옆모습은, 그 날 밤 긴토키가 느낀 것이 아마 정답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분명, 혼이 빠져나가서 육신밖에 안 나간 인간이 걸어 다닐 수 있다면 저런 모습일 거다.
긴토키는 인상을 찌푸리고 조금씩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주시했다. 감당할 수도 없을 만큼 큰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의 뒷모습은 수없이 보아왔다.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그 날부터 수도 없이. 하지만 작은 등은 긴토키의 눈에 익숙한 그것이 아니었다. 절망보다 더 안 좋은 것이다. 그것보다 훨씬 더 헤어 나오기 힘든 것. 그야말로 아득히 오랜 시간 동안 발목을 잡고 놓지 않는 것. 누구보다도 자신이, 가장 잘 아는 것.
한숨을 쉬었다. 차라리 저번처럼 척 봐도 알 수 있을 만큼 절망에 짓눌려있는 게 나았다. 그러면 역시 그 때처럼 제 알 바가 아니라고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러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지 않은가.
저렇게 귀찮고 한심한 것에 발목이 잡힌 인간은 나 하나로 족하다.
아- 진짜로 들킬 생각은 없지만, 정체를 안 들켜도 즈라가 알면 되게 뭐라 그러겠지. 속으로 카츠라에게 이 일을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긴토키는 거리를 두고 천천히 황토색 뒤통수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소년의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힘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저 이동을 해야 하기에 발을 옮기고 있을 뿐. 그러면서도 이렇게 사람이 많은 카부키쵸에서 사람과 부딪치지 않는 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들이 그를 피해서 걷고 있기 때문이다. 대복 차림이 아니라 못 알아보는 이가 더 많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의 소년이라면 무의식중에서라도 피해 걷게 될 것이다. 몸이 있는 유령 같은 것과 굳이 부딪치고 싶은 사람은 없을 테니까. 실제로 아까 그의 팔을 잠시 붙잡았던 여자 종업원은 금세 그것을 놓아 버렸다. 잠시 후 긴토키가 정면을 지날 때 그녀는 호객을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찜찜한 표정으로 아까 소년이 지나간 방향을 보고 있었다. 운이 없었다고 속으로 동정하면서 긴토키는 소년의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계속했다.
갑자기 멈춰 서기에 긴토키도 같이 발을 멈췄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미행하고 있는 걸 들켰을 리는 없다고 자신하지만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혹시라도 돌아보지는 않을까, 물론 돌아본다고 자신의 정체를 간파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하지만 긴토키의 걱정을 뒤로 하고 소년은 그 자리에서 서서 잠시 고개를 위로 하여 가만히 있더니 곧 다시 걷기 시작했다. 왜 섰던 거야? 생각해 봤자 긴토키에게는 알 수 없는 일이다.
큰길에서 벗어나 골목으로 접어들자 사람이 적어져서 혹시 이번에야말로 들킬까 또 긴장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아무래도 지금의 저 신센구미 대장은 누가 자기를 미행하지는 않는지 사람 기척을 신경 쓸 여유도 없는 모양이었다. 돌아볼 기색은 더더욱 없다. 어이, 어이. 그래도 되냐? 적도 많으면서. 거기다 오늘은 칼도 안 차서 진짜로 양이지사가 기습이라도 했다간 훅 갈 텐데? 평소라면 또 몰라도 지금 정신 상태로 제대로 반격이나…… 아니 왜 내가 신센구미 녀석 걱정까지 하고 있는 거야. 인상을 찌푸린 긴토키였지만 지금 자신이 소년의 뒤를 쫓고 있는 시점에서 새삼스러운 것이었다.
제 집 마당 같은 카부키쵸의 골목길을 요리조리 꺾으며 걸어가는 소년은 미행하기에 쉬운 대상은 아니었다. 어떤 구체적인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가 어디로 향하는 지도 모르기에 특히 더. 지리감에는 자신이 있는 편이지만 소년은 몇 번이나 긴토키가 모르는 골목으로 꺾어 들어갔다. 역시 매일 같이 에도를 누비는 신센구미를 히키코모리랑 비교하면 안 되나.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긴토키가 정체를 들킬 위험을 감수하고서까지 굳이 밖으로 나돌아 다니고 싶냐면 그것은 절대 아니었기에 별로 의미 없는 반성이었다.
그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달은 것은 긴토키도 딱 한 번 들린 적이 잇는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을 때였다. 언제였던가 오랜만에 카부키쵸에 와 스낵 오토세에 갔지만 가게가 닫혀 있었다. 굳이 다른 데서 술잔을 들 기분도 아니었기에 적당히 돌아다니다 오토세 본인을 우연히 발견한 게 바로 이곳이었다. 거침없이 들어가 옆에 서자 남편의 기일이라고 했었다. 공물은 만쥬.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가 오토세에게 꽤 센 힘으로 손등을 맞은 건 씁쓸한 기억이다.
그 날 밤에 소년이 혼자 전장에서 사라졌을 때부터 안 좋은 소식일 거라고 생각은 했었으나 개인에게 일어날 수 있는 불행 중 최고 레벨이 닥쳤던 모양이었다. 긴토키는 먼저 계단을 올라 묘지로 사라지는 소년을 바로 쫓지 않고 인기척이 거의 없다시피 하는 길에 멈춰 서서 조금 멀리 보이는 묘비들을 바라봤다. 칼도 안 차고 나왔으면서 손에 뭘 들고 있기에 뭔가 했었는데, 공물이었나 보다.
사실 묘지에는 별로 가고 싶지 않지만……. 그러나 긴토키의 생각이 맞는다면 자신과 같은 소년도 망설임 없이 묘지로 향했다. 어쩔 수 없지. 긴토키는 다시 발을 뗐다.
한산함을 넘어서 적막한 묘지에서 지금까지 죽 쫓아온 소년을 찾는 것은 금방이었다. 발소리도 기척도 최대한 죽이며 다가간다. 벌써 묘비 앞 작은 제단에 공물을 올려놓은 소년은 어째서인지 묘비에 한 손을 대고서 가만히 서있었다. 큰 소리로 말을 걸지 않아도 들릴 거리까지 와도 반응은 없다. 아 글쎄, 위험하다니까 이 꼬맹이. 실제로 지금 양이지사에게 이만큼 접근을 허용했다. 긴토키가 그럴 생각만 있었으면 벌써 목이 날아갔다. 만약 그 날 이후로 죽 이 상태였다면 그것 참 상사들 속이 속이 아니었겠다고 저도 모르게 신센구미 수뇌부를 동정했다. 만약 긴토키라면 일단 밖에 안 내보낸다. 내보냈다간 목이 붙어서 돌아올 것 같지가 않다.
대체 어디까지 가야 눈치를 채나 싶어 조금씩 더 가봤지만 결국 소년은 긴토키가 바로 옆 묘지까지 가도 묘비를 보고 있던 시선을 하늘로 옮겼을 뿐 옆에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큰일이다, 너. 속으로 한숨을 쉬며 긴토키는 제단에 등을 대고 바닥에 앉았다. 땅바닥은 찬데다 옷도 더러워지겠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만큼 세심한 신경으로 구성된 인간은 아니었다.
눈에 들어오는 풍경이라고 해봤자 차가운 돌들이 줄줄이 늘어선 것밖에 없는 묘지에서 딱히 할 일도 없는 긴토키가 소년을 관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미행하는 내내 뒷모습만 봐서 그런지 옆모습은 조금 신선했다. 그러고 보면 사복 차림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다. 대복을 입었을 때보다 조금 더 어려 보이는 건 역시 대복을 입으면 ‘신센구미’라는 틀에 묶여서일까. 만약 이 차림으로 처음 만났다면 나중에 18살이라는 나이를 들었어도 전혀 놀라지 않았으리라. 오히려 잘 뜯어보면 눈 자체도 크고 동공이 높은 비율을 차지해서 제 나이보다 어려 보인다. 열여섯인 신파치와 동갑이라고 해도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키에 비해 필요 이상으로 길어 보이는 하반신이나 옷 위로도 알 수 있는 단련된 몸. 저 얼굴만 해도 엄청난 이득인데 체형까지 좋은 건 대체 무슨 차별이란 말인가. 거기다 만지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빠져나갈 황토색 생머리까지. 이래서 신이라는 놈은 옛날부터 좋아할 수가 없다니까.
조금 입을 비죽 내밀고 있던 긴토키는 곧 하늘을 보고 있던 소년이 눈을 감아 버리는 것을 보았다. 제단 위에 올려놓은 과자 봉지의 주인을 눈꺼풀 아래서 보는 걸지도 몰랐다. 그것밖에 없을 터다. 망자를 만나는 방법은.
묘, 하늘, 지하. 사람마다 말이 다르니 망자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전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하지만 긴토키는 한 번도 그런 곳에서 망자를 본 적이 없었다. 시신에도, 묘에도 없었다. 하늘은 너무 넓어서 다 찾을 수 없고, 지하는 그리 깊게 들어갈 수 없었다. 아니, 하늘이나 지하 어딘가에 있지만 다들 찾을 수 없기에 묘에 있다고 믿는 걸지도 몰랐다. 때문에 장례도 매장도 전부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믿기 위한 것. 실제로 그것은 꽤 유효했다. 먼저 간 동료에게 향을 올리는 일은 본당에서 아주 흔한 풍경이고, 카츠라나 타카스기가 때때로 각자 혹은 같이 그 사람의 묘를 찾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 앞에서 울며 무너져 내리기도 하고, 마치 살아있을 때처럼 기쁜 소식을 전하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분명 큰 위안이리라.
자신도, 이 소년도 그럴 수 있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묘비를 본다. ‘오키타 가의 묘’라고 새겨진 비석 아래에는 소년의 가족 중 누군가의 시신이 하얀 가루가 되어 묻혀 있을 터다. 하지만 그뿐이다. 목 위로만 남아있던 ‘그’가 ‘그 사람’이 아니었듯이, 분명 묘비 아래의 하얀 가루도 지금 소년의 눈꺼풀 속의 그 사람이 아니다. 그 사실이 사람을 어떤 마음으로 만드는지 긴토키 자신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눈을 감은 소년이 어떤 기분인지도.
“어이.”
말은 저절로 입에서 흘러 떨어졌다. 눈을 뜬 소년이 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긴토키의 눈에 비쳤다. 크게 뜨인 붉은 색 눈동자가 똑바로 긴토키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말을 걸어버린 건 이제 어쩔 수 없으니까 넘어간다 하더라도 그 다음 행동에 대한 계획이 있을 리 만무하다. 어쩐다. 그러나 긴토키가 생각한 시간은 지극히 짧았다. 당연한 일이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똑바로 대처하지 못했다면 벌써 한참 전에 끊어졌을 목숨이다. 그는 곧장.
“그거, 공물이냐?”
턱으로 가리킨 것은 제단 위의 과자봉지였다. 자세히 보니 봉지에는 큰 글씨로 ‘매운 센베’라고 쓰여 있었다. 아, 헤? 매운 센베? 공물로? 하는데 소년이 고개를 끄덕인다. 진짜냐. 아니, 맵다고 붙어 있기야 해도 거의 과자 이름 앞에 붙어 있는 ~~맛이라는 건 그냥 좀 그 맛이 나다 마는 것뿐이니까 별로 맵진 않겠지만……. 응-. 공물이냐고 물어 봐놓고 그냥 넘어갈 수도 없고…….
“먹어도 돼?”
묻자 소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더니 그대로 묵비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려운 질문을 한 것 같진 않은데……. 긴토키는 열심히 고민 중인 붉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대체 뭘 고민하고 있는 건지 감도 안 잡힌다. 하지만 내버려두면 긴토키가 돌아가야 할 시간까지 입을 안 열 것 같은 분위기에 긴토키는 코로만 크게 숨을 뱉고 손을 뻗었다.
소년이 무슨 소리를 한 것도 같지만 무시하고 봉지를 뜯는다. 센베가 빨간색인 건 아무리 그래도 이상하지 않아? 식욕적인 의미에서. 하고 긴토키는 가벼운 마음으로 센베를 하나 집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혀에 닿는 순간 온 감각 기관을 지배하는 매운 맛에 눈앞에 별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뱉어버릴 뻔한 것을 긴토키는 아슬아슬하게 남아있는 이성으로 참아냈다. 저도 모르게 조금 비명 비스무리한 소리를 낸 것도 같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뭐야, 이거. 잠깐, 뭐야, 이거, 에, 센베? 이게? 말도 안 돼, 뭐야, 벌칙이야? 공물이라며? 하? 짧은 순간에 머릿속을 휘젓는 수많은 사고들. 하지만 무엇 하나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혼란의 극을 달리던 생각들은 결국 ‘달라고 했으니 끝까지 먹는 수밖에는 없다’라는 결론으로 취합되었다.
한숨을 쉬는 것으로 복잡한 마음을 내뱉고 각오를 다진다. 그리고 긴토키는 자신의 잇자국이 남은 센베의 나머지 부분을 전부 입 안에 넣고서 우적우적 씹어 목으로 넘길 수 있을 만큼 잘아지자마자 삼켜버렸다. 당분의 대표적인 음식인 과자를 긴토키가 먹는 방법으로서 있을 수 없는 방식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이렇게 혀가 얼얼한 당분은 세상에 없으니까. 긴토키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심호흡을 몇 번 크게 하고서, 세차게 고개를 쳐들었다.
“엄청 맵잖아!”
“맵다고 써 있잖아.”
소년은 뭘 그렇게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그러고 보면 이게 오늘 처음으로 들은 그의 목소리이기도 하고 18살이면 긴토키보다 족히 10살은 어릴 텐데도 반말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사소한 일이다.
“아니, 보통 맵다고 써 있어도 이 정도로 맵지는……! 누가 공물로 이런 걸 올리냐?! 나 매운 거 별로거든?!”
물론 긴토키가 매운 걸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는 소고가 알 리 없는 사실이지만 지금의 긴토키는 일단 무작정 이 혀가 마비될 것 같은 스트레스를 발산하고 싶은 기분이었으므로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긴토키의 말이 단순한 화풀이라는 걸 올바르게 이해한 듯, 이제까지 무표정이었던 소년이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구겨진 얼굴까지 잘 생겼다는 게 더 화를 돋운다. 그러고 보면 매운 음식은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소릴 들은 것도 같고 안 들은 것도 같고. 아니, 지금은 스트레스의 직접적 원인이지만.
“당신이 맘대로 먹었잖아. 애초에, 누구 허락 받고 먹고 있는 건데? 그거.”
“주인 없는 걸 누구 허락 받고 먹어?”
대충 대꾸하며 긴토키는 두 번째 센베를 입에 물었다. 두 번째가 되니 좀 덜 매운 것도 같다. 아니, 그게 그건가?
허락이 어쩌고 했으면서 아무런 말이 없기에 슬쩍 봤더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래도 ‘주인 없는 거’라는 게 걸리는 모양이었다. 뭘 새삼스럽게. 긴토키는 바로 그 주인 없는 과자 봉지의 성분표를 확인해 뭘 넣었기에 이런 혀의 인권을 무시하는 것 같은 맛이 된 건지 살피며 입을 열었다.
“물어 봤는데 바로 대답 안 하는 거 보면 최소한 네 건 아니잖아.”
대꾸는 없지만 부정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말을 잇는다. 아, 뭐야 이거. 타바스코? 우와-. 누구야, 이런 쓸데없는 발상의 전환을 한 놈. 클레임 넣어서 잘라버릴까 보다.
“그럼 그 ‘오키타 가의 묘’ 공물이라는 건데, 이거 주인 없잖아, 여기.”
긴토키는 본래 주인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다음 센베를 입으로 가져갔다. 여전히 맵다. 이런 걸 공물로 가져올 정도면 정말 좋아했던 모양인데, 대체 미각이 어떻게 돼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런 걸 먹을 시간이 있으면 단 걸 먹는 게 좋지 않아? 무슨 악취미야? 온 세상의 매운 걸 좋아하는 사람들이 들으면 격노할 생각을 하면서도 긴토키는 혀의 아픔을 견디며 센베를 씹어 삼켰다. 그나마 처음의 비명 지를 뻔했던 매운맛에 비하면 마비됐는지 좀 낫긴 하지만 희미하게 눈물이 맺힐 정도라는 점에서는 역시 고통에 불과하다. 그러고 보면 매운 맛은 미각이 아니라 통각이라지. 어디에선가 주어들은 지식을 반추하며 긴토키는 쉼 없이 손과 턱을 움직였다.
겨우 봉지를 다 비웠을 때에는 절로 죽을 뻔했다는 불평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원체 단 걸 좋아해서 매운 건 입에도 잘 안 대는 긴토키다. 그런데 이렇게 혀가 얼얼한 센베를 한 조각도 아니고 한 봉지나 먹다니. 3년 쯤 먹을 매운 음식을 다 먹은 기분이다. 그리고 이게 다
“너, 책임 져라.”
이 녀석 때문이다.
“사복인 거 보니 오늘 비번인 모양이고, 어차피 할 일 없지?”
오히려 할 일이 있으면 그게 더 놀랄 노자다. 국장인 콘도 이사오는 인정이 두텁기로 소문난 인간이다. 그 인덕으로 신센구미를 이끌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런 사람이 가족을 잃은 부하를, 그것도 조직 내 최연소의 소년에게 일을 줬을 리는 없다. 뭐, 설사 일이 있다고 해도 그건 긴토키 알 바가 아니지만.
아까까지 반말로 잘만 쏘아붙였으면서 도로 입을 다문 소년은 대답이 없다. 이 녀석 즈라 쫓아다닐 때는 꽤 어그레시브하던데, 쓸데없을 정도로. 어디 갔어, 어그레시브. 뭐야, 내가 어그레시브 해야 되는 거야? 그래? 귀찮게. 그야 뭐 평소엔 방에만 있으니까 이럴 때 어그레시브를 좀 발휘하지 않으면 국 끓여먹을 때밖엔 못 쓰겠지만. 하고 긴토키는 몸을 일으켰다. 해보자, 어그레시브.
“가자, 경단집.”
여전히 말이 없는 소년은 음성 언어 대신 몸짓 언어로 “뭐래는 거야, 이 사람.”이라고 웅변하고 있었으나 긴토키는 물러설 생각이 없다. 좀 신경 쓰여서 쫓아온 건 맞지만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잘 먹지도 않는 매운 음식을 입에 대게 한 죄는 크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지가 안 맞는다. 그렇다면.
“미래의 당분왕인 나에게 매운 센베를 먹인 책임은 경단집에서 한 턱 쏘는 걸로 쿨하게 면제해 줄 테니까 가자고.”
실은 경단집만이 아니라, 파르페, 케이크, 마카롱, 도너츠, 화과자 등등 요구하고 싶은 게 산더미였지만 굳이 다 입에 담지는 않았다. 원래 사기라는 건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속여야 하는 거다. 이게 사기라는 건 아니지만.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망설이고 있는 소년에게 손을 뻗는다. 긴토키가 전력으로 덤비면 모르지만 지금이라면 소년도 여유롭게 피할 수 있다. 하지만, 안 피하겠지. 확신 같은 예감으로 뻗은 손에는 귀여운 얼굴 생김새치고 별로 가늘지는 않은 손목이 닿았다. 잡아끌면 그대로 발 한 쪽이 자신을 향해 왔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도, 닿은 것도 생각해 보면 처음 있는 일이다. 제 말을 따르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 참고로 나 매운 건 몰라도 단 건 엄청 많이 들어가니까 각오해라, 대장님.”
말 걸어도 무시하던 고양이가 처음 말을 들은 것 같아서 조금 기분이 좋았다고 하면 아무리 20년 친구들이라도 어이가 없어 할 것이다.
경단이 오자마자 “제일 맛있는 메뉴니까 음미하면서 먹어, 음미하면서.”라며 쥐어주자 “내가 돈 내는 건데 왜 당신이 생색이야?”라며 뚱한 표정으로 받아들었다. 아까부터 좀 느껴지긴 했지만 말이 길어지니까 정말 말 하는 싸가지를 어머니 뱃속에 고이 모셔두고 나온 놈이다. 뭐라 할까도 했지만 한 입 먹은 소년의 표정이 뚱한 것에서 무표정으로 변했기에 긴토키는 자신의 경단을 먹는 작업에 집중하기로 했다. 맛있으면 좀 더 맛있다는 티를 내면 좋을 텐데. 귀여운 건지, 안 귀여운 건지. “맛있어?”라고 물으면 “좀 덜 단 게 좋아.”란다. 역시 안 귀여워, 이 꼬맹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서 거의 무의식적으로 파칭코 가게로 향하자 아직 해도 밝은데 벌써 중년의 남자 몇 명이 담배를 물고서 앉아 있었다. 몇 번인가 파칭코도 술자리도 함께 했던 선글라스(본체)를 찾아 봤지만 이 안엔 없다. 뭐, 못 만나는 날도 있다. 볼 때마다 일자리가 없다고 한탄하고 있었으니 어쩌면 겨우 직장을 구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한 긴토키가 제일 좋은 기계에 가서 앉자 뒤에 소년이 없었다. 돌아보니 입구에 가만히 서있다. 뭐 하는 거야? 손짓으로 부르자 뭐라 말하기 힘들지만 일단 떨떠름하다는 것만은 확실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걸어왔다.
“당신 참…….”
“왜?”
“마다오의 표본 같은 사람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예의라는 게 없는 꼬맹이다. 사실은 사실 그대로 말 하면 안 되는 거야. 상처 받으니까. 훈계하자, “알아.”라며 이쪽을 보지도 않고 옆 기계 앞에 앉으며 대답했다. 어이, 알고서 그 코멘트냐? 야, 인마.
파칭코의 신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자비롭지 않았다. 그나마 소년은 몇 번 슬롯을 당기다가 지기만 하자 재미없는지 그만 둬 버렸는데 긴토키는 그렇지 못했다. 늘 다음엔 될 것 같은 것이다, 이게. 다음번에 안 되면 그만 둬야지 해도 2개가 맞아 버리면 다음엔 될 것 같고, 다음에 안 되면 방금 전엔 됐으니까 몇 번만 더 하면 될 것 같고, 이만큼 했으면 한 번 쯤은 걸릴 때가 된 것도 같고…….
“…….”
“누가 보면 모든 걸 새하얗게 불태운 사람인 줄 알겠어.”
“새하얗게 불태웠어…….”
“당신 말고 돈이.”
심장이 아프다.
“우으…… 대장님…….”
“콧소리 내지 마, 오카마. 소름 돋아, 오카마. 붙지 마, 오카마. 징징거리지 마, 오카마. 그리고 당신 대장 아냐, 오카마.”
“그렇게 까대면서 말끝마다 오카마까지 붙이는 건 너무하지 않아?! 위자료로 파르페를 청구한다?!”
먼저 일어서서 나가려는 소년을 쫓아가며 소리치자 시끄럽다고 한 쪽 귀를 막으면서도 의외로 승낙이 떨어졌다. 놀라서 이유를 물었더니 절망하는 얼굴이 재밌었다고 한다. 이 S가. 긴토키는 작게 내뱉고, 하지만 파르페를 마다할 이유는 무엇 하나 없었기에 재빨리 앞장서서 그가 파르페를 높이 평가하는 가게로 향했다.
소년은 놀랍게도 만화 카페에 온 것이 처음이라고 했다. “18살이잖아, 너.”라고 놀란 기색을 감추지도 않고 묻자 일 때문에 바쁜데다 쉬는 날에도 둔소 밖으로는 잘 안 나간다는 모양. 설사 나간다고 해도 묘한 의미의 교우 관계를 넓히거나 저주 도구를 사러 가거나 SM…… 어이.
“삭막한 청춘이라고 해야 할지, 썩어빠진 청춘이라고 해야 할지…….”
만화 카페면서 놀라울 정도로 높은 퀄리티를 자랑하는 파르페를 먹으며 긴토키가 평하자 당연히 한 마디도 안 지는 소년 역시 입을 열었다. 참고로 그 손 안에는 모 배달부인 마녀 업무에 종사하시는 키키 양 애니메이션 코믹스. 언밸런스하기 짝이 없는 초이스지만 아까 이유를 물었을 때 “조교할 때 제일 재밌을 것 같잖아, 키키.”라는 대답을 들었다. 잘못한 건 얜데 내가 감독님께 괜히 무릎 꿇고 사과하고 싶어지는 건 왜일까.
“일 땡땡이 치고 남의 돈으로 파칭코 갔다가 단 거 순회하다가 점프나 보고 있는 오카마는 조용히 하지?”
여전히 쓸데없이 진실돼서 남에게 상처를 주는 놈이다. 오카마는 아니지만. 아니, 눈 화장은 아웃인가……? 인 아냐? 긴토키는 고민했으나 물어볼 사람은 앞에 앉아 아메리카노-저걸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왜 자기 입에 쓴 걸 들이 붓는 거지? 약이냐?-를 쓸데없이 우아하게 마시며 만화책을 보고 있는 소년뿐이었고, 그에게 오카마가 아니라는 걸 말하는 것이야말로 아웃이다. 카츠라나 타카스기에게 물어봤자 전자는 이유도 없이 우주의 신비가 느껴지는, 후자는 악의가 99%인 대답밖에 못 들을 테니 마타코나 반사이에게 물어봐야겠다고 긴토키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번에도 먼저 다 읽은 모양인 소년이 책을 덮는 소리가 났지만 긴토키는 점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이마, 머리카락, 귀, 어깨, 팔, 꼬고 있는 다리, 가슴께, 목, 입술, 코———눈. 타겠다, 인마. 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시선에 속으로만 말을 뱉는다. 눈에 다다른 뒤 이동을 멈춰버린 시선. 할 말이, 또 묻고 싶은 말이 있을 터다. 틈을 주지 않은 건 긴토키다.
자신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끝낼 수 있다면 그게 최선이다. 긴토키 스스로도 입에 담은 적 없고 담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니까. 그러니까 긴토키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소년이 스스로 생각해서 어딘가에서 해답을 찾아 가 준다면 그것이 최선이다.
물론 이 뜨거운 시선을 보면 그른 모양이었지만. 생각해 보면 긴토키가 저 나이 때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이다. 그렇게 쉽게 나올 해답이었으면 그도 이런 마음으로 약 10년의 세월을 살아오지 않았다. 이야기를 하면 바로 답이 나오냐면 그건 아니지만 슬슬 각오를 굳힐 때가 됐다.
점프를 덮고 고개를 들자 곧장 눈이 맞았다. 그야 그렇게 계속 보고 있는데 긴토키도 소년 쪽을 봐 버리면 눈이 맞을 수밖에 없다. 피곤한 기색은 역력하지만 붉은 눈 한 쌍은 곧게 긴토키를 보고 있었다. 작은 입술은 여전히 굳게 다문 채. 그럼 긴토키가 먼저 입을 뗄 수밖에.
“배고프다. 밥. 술.”
“점프 좋아하면 얼굴 가죽도 점프 두께가 되는 줄은 몰랐는데.”
“점프력 20년 쯤 되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지.”
두 눈이 “칭찬 아니거든?”이라고 말없이 소리치고 있었으나 긴토키는 무시하고 먼저 일어섰다.
좌식으로 된 테이블들을 칸막이로 가려놓은 술집은 사실 타카스기의 취향이다. 본인은 풍류라고 주장하는 허세가 덜 빠져서 가끔 의미도 없이 샤미센을 켜곤 하기 때문이다. 그 장단에 맞춰서 술이 많이 오른 긴토키가 춤을 추거나 아주 가끔 카츠라가 노래-의외로 잘 하면서 평소엔 절대 하지 않는다-를 하기도 하니 보는 눈은 적을수록 좋은 것이 사실이었다. 반대로 긴토키는 쉽게 움직일 수 있고 오가는 사람들을 붙잡을 수 있는 시끌벅적한 입식이 더 취향이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다.
입구에서 여주인이 소년을 알아본 것을 “아스카 쨩, 왜 그래? 내가 완전 사랑하는 거 알지?”라고 실실 웃으며 몸을 밀착시켜 무마시킨 긴토키는 그렇게 싫지는 않은 표정으로 괜히 피곤한 일 만들지 말라는 그녀의 말에 역시 헤실헤실 웃으며 대답하고선 소년의 어깨를 밀며 가장 안쪽 테이블로 향했다. 입구에서 가장 멀고 부엌과도 반대편에 있어 있는지 없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 자리. 술은 대원들이 밖에서 사온 것을 둔소에서 마신다는 소년이 “이런 방법이 있었네.”라며 쓸데없는 지식이 늘어났다는 사실을 시사했으나 긴토키는 거기에 아무 말도 않았다.
술과 안주라는 이름의 식사가 나오고 서로 잔을 채워준 것까진 좋았지만 두 사람의 잔은 맞부딪치지 않았다. 무엇을 위해서 건배를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충 아무 말이나 해도 소년이 잔을 맞대줄 것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신센구미 대장님에게 본당의 두령이랑 저도 모르게 잔을 나누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부딪치지 않은 작은 잔들은 그러나 동시에 각자 주인의 입술에 닿았다.
술이 약하면 다음 날은 고생이지만 빨리 취할 수 있어서 좋다는 것이 긴토키의 생각이다. 가장 주량이 센 타카스기에 의하면 지극히 자신의 형편에 좋은 생각이고 주사의 가장 큰 피해자인 카츠라는 민폐니까 취하지 않을 노력이라도 하라고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취했을 때 특유의 이유도 없이 고양된 기분이 좋은 거니까. 그래서 곁에 있는 사람을 붙잡고 억지로 술을 먹인다든가 해서 다들 긴토키가 술을 마시면 도망 다니지만 그에게 고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다.
“히지카타 씨만큼 술 약한 사람이 또 있었을 줄이야…….”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리는 소년 앞에 앉은 긴토키의 얼굴은 뺨과 귀, 목이 빨갛게 달아올라 완전히 취기가 오른 사람의 그것이었다. 참고로 긴토키가 비운 잔은 딱 세 잔. 같은 양을 섭취한 소년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소년은 술이 센 축에 속하는 모양이었다. 별로 부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귀신 부장이라 악명 높은 히지카타가 긴토키만큼 술이 약하다는 건 재미있는 정보였다. 타카스기가 들으면 기뻐하지 않을까.
“피, 피, 피자 호빵~ 피자피자피자~ 호빵~.”
생각하며 긴토키는 아까부터 작지 않은 소리로 흥얼거리던 노래를 계속했다. 참고로 3절 째다. 한 잔 입에 대고 식사를 시작한 시점에서 꽤 좋아진 긴토키의 기분은 두 잔째가 들어갔을 때 손가락 장단에 맞추어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으며, 세 잔이 들어간 이후로는 본격적으로 가사가 붙은 노래가 되었다. 물론 그는 자신이 노래-특히나 음정을 맞추는 데에 재능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듣는 사람이 한없이 괴롭거나 웃기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노래는 하는 사람이 즐거우면 된다는 게 기본적인 입장이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사람이니까 기분이 좋아지면 노래도 좀 할 수 있는 거지. 나오는 걸 어떡하라고. 음치가 조용히 좀 하라는 의견은 자동 기각이다.
“피자 호빵은~ 맛있어~ 피자~ 호~ 빵~.”
알코올이 돌아 이유도 없이 머릿속이 붕붕 뜨는 기분은 역시 절로 노래가 나올 만큼은 좋은 것이었다. 온몸에서 적당히 열이 나고 촉각을 비롯한 감각들이 전체적으로 둔해지고, 괜히 다른 사람을 붙잡고 술을 먹여서 이것을 공유하고 싶어진다. 물론 지금 긴토키가 술을 권할 사람은 바로 앞에서 별로 변화가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는 소년뿐이었지만. 이미 긴토키 안에 그가 미성년이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 노래가 끝나면 얼른 잔 비우라고 해야지. 노래에 대한 미묘한 집착을 보이는 긴토키는 아까부터 조금씩 몸을 앞뒤로 흔들던 것을 좌우로 바꾸며 마지막 소절을 불렀다.
“피~ 자~ 호~ 빵~.”
코러스가 붙는다면 아마 장엄할지도 모를 마지막 소절을 마치고서 긴토키는 “박수~.”하고 벌써 약간 부정확해진 발음과 함께 손뼉을 쳤다. 바로 앞에서 의욕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박수가 서너 번 이어지더니 바로 그쳤다.
“대장님~ 그걸 지금 박수라고 친 거야~?”
“쳐준 것만으로도 감사해.”
얄짤없다. 이렇게 언동에 자비가 없으니까 신문에도 S라고 나는 거다.
네 번째 잔을 들이키고 내려놓자 눈이 맞았다. 아니, 오늘 점심때부터 계속 함게 있었으니 눈은 벌써 양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이 맞았지만.
“당신, 일은? 취한 상태로 가는 거야?”
“아- 나는 취했을 때가 더 접객 태도 좋다고 해서.”
같은 질문을 받을 때마다 하는 똑같은 대답. “이거 다 먹으면 지각 들키기 전에 갈 거야.”라고 한 마디 더해둔다. 대답은 그 사실에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 듯한 “흐-응.”이었다.
“무슨 접객? 노래는 절대 아닌 것 같고.”
“나보다 더 못하는 애도 있거든?!”
신파치는 타고난 평범함 덕에 밖에 나갈 때 여장을 해야 하는 번거로움 같은 건 없지만 일단 주장해 본다. 하지만 소년은 들은 건지 안 들은 건지 “음치니까 악기도 안 될 테고.”라고 실례되는 의견을 연이어 피력하고 있었다. 누가 음치야, 인마. 그냥 좀 머릿속에서 음정이란 게 아메바 같은 썸씽이 되어 흩어질 뿐이야. 어린이가 된지 년 단위로 지났는데 아직도 초딩인 모 고등학생 천재 탐정도 절대 음감이지만 음치잖아. 그런 거라고.
“춤?”
잔을 들이킨 후 어깨와 가슴을 왔다 갔다 하던 시선이 묻기에 긴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 이상으로 근육이 붙은 것도 아니고 군살도 없는 긴토키의 몸은 많이 움직이는 사람의 몸이다. 사이고의 가게에서 일을 한다고 하는데 보디가드가 아니라면 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생각한 사람들의 잘못된 인식을 긴토키는 고칠 생각은커녕 오히려 고정시킬 생각밖에 없었다. 품 안에 넣어두고 다니는 손부채 역시 그 용도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왜, 보여줄까~?”라며 조금 웃어 보이자 “남자가 춤추는 걸 뭐 하러…….”라는 지극히 상식적인 대답이 돌아왔다. 하긴 저 나이에 벌써부터 그런 취향은 없나. 생각하면서도 긴토키는 “읏차”하고 소리를 내며 무릎을 세워 일어났다. “당신 정말 사람 얘기 안 듣는다…….”라고 소년이 중얼거렸지만 무시. 노래를 했으면 이번엔 춤이다. 긴토키로서는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취한 타카스기가 혈색 좋은 얼굴로 샤미센을 꺼내는 것과 비슷한 이치였다.
몇 년 전에 유행했던 곡 제목을 대고 부를 수 있냐고 묻자 소년은 별로 내키지 않은 표정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충분하다. 기분이 좋아서 얼굴이 절로 웃는다. 긴토키는 손바닥으로 손목을 때려서 박수를 치고, 그것이 세 번째 소리를 냈을 때 한숨처럼 소년이 입을 열어 노래를 시작했다. 그 다음부터는, 금방이다.
부채를 펼치는 동작. 부드럽게 회전하는 손목. 바닥을 가볍게 미끄러지는 발끝. 시선을 유도하며 살짝 펄럭이는 옷자락. 뒤로 돌면 흔들려서 존재를 주장하는 머리카락. 흑과 백, 적과 백의 선명한 대비. 짧은 곡임에도 수도 없이 마주치는 눈. 소년의 눈길, 호흡, 열기까지. 그것을 온몸으로 받은 후에 자리에 앉았을 때는 술 때문인지 춤을 춰서인지 더 몸이 뜨거워져 있었다. 움직인 탓에 술이 더 돈 걸지도 몰랐다.
“어때?”라고 물으면 “잘리진 않겠네.”라고, 여전히 퉁명스럽기만 한 대답. 하지만 술병을 들어서 잔을 채워주겠다는 제스처를 하는 걸 보면 마음에 안 든 건 아닌 모양이었다. 긴토키의 춤이 끝나자마자 소년이 비운 잔을 다시 채워주고 몇 번 만에 겹친 잔을 드는 타이밍에 둘은 잠시 멈칫했다. 속을 들여다볼 요량으로 본 앳된 얼굴은 아까 전에 비하면 조금 붉어져 있었다.
“할까?”
건배.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는 목적어에 소년이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뭐에.”라고 낮게 물었다. 술은 아까보다 더 돌았는데 기분은 어째 가라앉는 것 같은 묘한 느낌 속에서, 억지로라도 그것을 띄우는 것처럼 긴토키가 조심스레 자신의 잔을 소년의 잔에 갖다 댔다. 귀에 겨우 닿을 만큼 작은 소리가 났다.
“어딘가에 있을 그 사람들에게.”
그 말에 소년이 눈을 크게 뜨고 긴토키의 얼굴을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무시하고 눈을 감아버렸다. 단번에 또 잔을 비운다. 6잔? 7잔인가? 벌써 허용량은 오버한지 오래다. 긴토키가 잔을 내려놨을 때가 돼서야 소년은 겨우 자신의 잔을 비우고 있었다. 조금 위로 젖힌 목에 선명한 목젖. 얼굴이 앳돼서인지 가늘다는 인상을 주지만 옷 위로도 보이는 몸은 전혀 가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아직 이렇게 새파란 꼬맹이한테 질 거라곤 생각 안 하지만, 싸워 보면 꽤 괜찮은 선까지 가지 않을까. 산만한 사고에 몸을 맡기고 긴토키는 벽에 기댔다. 곧 소년도 잔을 내려놓았다. 벽에 기댄 채 한 손으로 따라주자 시선이 멍하니 움직이는 그 손을 쫓았다.
“누님이,”
갑자기 앞에서 들려온 갈라진 목소리에 긴토키는 술잔에서 눈만 들어 소년의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긴토키의 손끝을 보고 있었다.
“매운 걸 좋아하셔서,”
잔을 채우고, 술병을 세운다.
“그래서, 콘도 씨가,”
뚝뚝 끊어지는 말과 말은 도무지 정돈되지 않은 것이었다.
“하지만,”
숨을, 토하는 소리. 이산화탄소 말고 다른 것이 함께 터져 나온 것이 마치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갈 곳을 잃은 그것들이 테이블 위에 산란한다. 소년은 어쩔 줄을 모르고 입을 작게 벌린 채 자신의 술잔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술이 얇고 작은 입이 곧 한 일자 모양이 된다. 이를 악문 것이라는 걸 알고 손을 뻗었다.
“거기 없는데 어떻게 갖다 주라는 거야.”
힘이 들어갔을 턱을 가볍게 손가락 등으로 쓸고 “그치?”라고 더한다. 술잔을 보던 눈이 긴토키의 눈으로 그 시선을 돌린다. 턱에서 힘이 빠진 것을 확인하고도 긴토키는 손가락을 떼지 않았다. 부드러워서 기분 좋다. 18살 남아 피부라고 생각하면 우스웠지만.
“그렇게 쉽게 뭘 주고, 보고, 말할 수 있으면 누가 이 고생을 한다고.”
이를 테면, 카츠라가 그 사람의 무덤에 가서 큰 작전이 성공했다며 당신이 바라던 세상에 한 걸음 다가섰다고 이야기할 때. 이를 테면, 타카스기가 쓸데없을 정도로 좋은 술을 구해서 그 앞에 공양하고 하염없이 담배만 피우고 앉아 있을 때. 무엇이 보이는지, 들리는지 묻고 싶었다. 묻지 않은 것은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하더라도 믿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보기에 아무것도 없는 곳에 그 사람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 때 이미 10년을 함께한 친구들이었고, 함께 싸워온 동료였고, 같은 사람 아래서 자란 형제였다. 서로 다 다른 곳을 보고 있었지만 함께 있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에게는 그 사람이 보이는데 자신에겐 이 세상 어디에도 그 사람이 없다는 것만은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소외감과 질투와 공포와 불안과 방황과 초조. 쏟아지지 않도록 그걸 전부 눌러 담고서, 기약 없는 약속을 지키면서 다시 10년.
이 아이에게는 그런 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찾아도 없는데, 뭘 어떻게 주고 말 하라고. 할 수 있었으면 진작에 했지.”
그런 건 나 혼자로 족하다.
“나도, 묻고 싶은 말도, 하고 싶은 말도 산더미라고…….”
선생님, 나 어떻게 해야 해? 여기 있어도 돼? 계속 이 녀석들이랑 같이 있으면서 지키면 돼? 하지만 선생님, ‘모두’라고 했잖아. 선생님이 있어야 ‘모두’잖아. 그럼 나 벌써 약속 어긴 거잖아. 어떻게 해야 해? 나 약속 어겼는데, 여기 있어도 돼? 소중한 사람 하나 못 지켜놓고 여기 있어도 돼? 아니면 선생님을 빼고 ‘모두’야? 그냥 계속 여기에 이렇게 있으면 돼? 하지만 선생님, 그러면, 누구 하나라도 잃을까 무서워서, 또 갔다가 돌아오지 않게 될까 무서워서, 소중한 사람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데, 어떻게 해야 해? 선생님, 선생님, 선생님…….
뺨에 대고 있던 손에 무엇이 묻어서 생각이 현실로 돌아온다. 묻은 것. 액체. 투명하고 뜨거운 것. 아아. 다행이다. 네가, 나보다 낫다. 한 번도 제대로 울지도 못했던 나보다, 훨씬.
“나도,”
“응.”
대답하면서 뺨에 대고 있던 손가락을 그대로 올리며 눈물을 닦는다.
“누님한테, 미안, 하다고…….”
“응.”
반대편 뺨에도 손을 댄다. 알코올 때문에 한참 전부터 체온이 상승한 자신의 손도, 소년의 뺨도 뜨겁기만 하다.
“누님이 날 원망해도,”
“응.”
“그래도, 나는, 누님 동생이라, 행복했다고…….”
딸꾹질이 섞인다. 원래도 붉은 눈이 주변까지 붉게 물이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말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만 있다면 테이블을 넘어가고 싶었다. 옆에서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은 그 누구보다도 사카타 긴토키가 잘 알고 있었기에. 대신 이 아이에게 울지 말라고, 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해야 하는 의무도 없었다. 소년이 이름 한 번 듣지 못한 이 백발의 남자는 양이지사도 아니고, 신센구미는 더더욱 아닌 카부키쵸에 사는 남자 종업원일 뿐이니까.
그러니까 이 정도는, 해도 될 터다.
“응. 나도,”
손바닥으로 뺨을 쓸어 올려 눈물을 닦는다. 계속해서 새로운 눈물이 줄기를 만들기에 별로 의미는 없는 행위였다. 손가락 끝이 황토색 머리카락에 닿았다. 곧게 뻗은 생머리. 손가락을 벌려 머리카락이 그 사이사이를 지나가는 걸 느끼며 머리를 쓸어주었다.
“미안하다고,”
초저녁부터 여기저기서 큰 소리가 나는 술집이다. 설사 우는 사람이 있어도 술주정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애초에 다른 사람들에게 이 구석진 자리가 보일지조차 의문이지만.
“고맙다고…….”
그러니까 울고 싶은 만큼 울어도 된다고. 언외로 그렇게 말하며 머리카락을 계속 쓸어주었다. 큰 눈에서 그 만큼이나 큰 눈물방울이 쉼 없이 떨어지는 걸 계속 보고 있었다. 이만큼 울 수 있다면, 됐다. 자신의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 하더라도, 자신의 눈은 눈물방울 하나 떨구지 못하더라도 충분했다. 이렇게 머리를 쓰는 것만으로도 긴토키는 오늘 이 소년의 뒤를 쫓아온 의미가 있다.
한참이나 울고, 겨우 그게 잦아들 때 쯤 됐을 땐 소년의 눈가가 붉게 부어 있었다. 신센구미 대장님이 이러고 둔소에 돌아가도 되는 건지. 코를 훌쩍거리고 있는 소년이 자신의 상황을 모를 리는 없었지만 지금 그 사실을 건드리는 걸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기에 긴토키는 다른 말을 꺼냈다.
“정말, 어디로 갔는지 몰라. 땅은 팔 재간이 없고, 하늘은 너무 넓고. 한 번 쯤은 나타나 줘도 될 걸 그러지도 않고. 허구헛날 애들한테 둘러싸여있던 사람이니까 혼자 있으면 쓸쓸할 텐데.”
어차피 대꾸를 바라고 하는 말이기에 긴토키는 소년이 모를 거라는 걸 알면서도 멋대로 떠들었다. 이 정도 정보로 그의 스승의 이름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이 차이가 꽤 있으니 아예 이름조차 모를 수도 있다. 그렇게 전제하고 이어지던 긴토키의 혼잣말은 “혼자 아냐.”라는 말에 뚝 잘렸다. 울기 시작한 후로 처음 들은 목소리에 놀라 눈을 마주친다. 아직 눈물막 속에 잠긴 눈이 긴토키를 본다.
“당신이 그렇게 생각할 정도의 사람이면 혼자 아냐. 누님하고 같은 곳에 있을 테니까.”
아직 조금 코 막힌 소리. 내용도 내용이다. 지금 자기 앞에 앉아 있는 남자에 대해 뭘 안다고. 그 스승에 대해 뭘 안다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슨 근거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것보다 훨씬 압도적인 것이 가슴에서부터 목으로 치고 올라와서 긴토키는 입을 다물었다. 겨우 “그래.”라고 짜내고, 아직 머리카락을 쓸고 있던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10년 동안 제대로 한 번 울지도 못했는데 그 말에 조금 울 뻔했다니, 카운터펀치라는 건 무섭다.
울음을 그친 후에는 흥분이 가라앉아 쑥스러워졌는지 꽁해있던 소년을 데리고 긴토키는 가게를 나왔다. 시간은…… 카부키쵸가 본격적으로 활력에 찰 시간이다. 슬슬 타임아웃이다. 긴토키는 뒤쪽에 서있던 소년을 흘끗 보았다. 훔쳐 볼 생각이었는데 눈이 맞는다.
“당신, 일?”
“어. 대장님도 슬슬 집에 가지? 청소년이 밖에 나다니면 경찰 아저씨가 집에 안 가고 뭐 하냐고 물을 시간이니까 얼른 집에 가.”
“그거 내 일이거든. 내가 경찰이라고.”
바로 받아친 소년이었지만 곧 “의외로 심약한 고릴라 하나가 쓸데없이 걱정할 테니까 가긴 가지만.”이라고 덧붙였다. 그럼 됐다. 긴토키의 뇌 내 지도가 맞는다면 여기서 신센구미 둔소까지는 별로 멀지도 않고, 무엇보다 낮이랑은 소년의 눈이 다르니 설사 칼을 안 차고 있다고 해도 이젠 혼자 보내도 될 것이다. 그럼 적당히 보내고……. “가게 어디야? 카맛코 구락부?”
……어라.
“거기 아냐. 비슷하지만.”
“어디냐고.”
“꼬꼬마는 못 들어오는 곳이에요~. 아, 여기처럼 꼼수로 들어오려고 해도 안 된다? 법을 준수하라고, 경찰.”
“어느 주둥아리가 준법정신 같은 소릴…….”
지당한 의견이었지만 긴토키는 무시했다. 것보다, 이런 걸 묻는다는 것은.
“왜-? 나 보러 오게?”
“…….”
침묵은 긍정. 긴토키는 속으로 신음했다. 큰일 났다. 필요 이상으로 친해진 모양이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누가 호감을 가져주는 건 나쁘지 않지만 그 상대가 신센구미 대장인 건 곤란하다. 애초에 긴토키로서는 오늘 소년의 모습을 보고 도저히 그냥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말을 건 것이지 굳이 또 만날 생각은 없었다. 너무 친해지는 것도, 정체를 들키는 것도 본의가 아니다. 거절 외에 다른 선택은 없다. 다만 어떻게 말해야 이 배배 꼬인 꼬맹이 납득을…….
“안 돼?”
……왜 그런 식으로 날 볼까나, 이 꼬맹이…….
긴토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신음과 비명과 별 맥락 없는 카츠라에 대한 매도를 적당히 늘어놓는다.
정체를 들킬지도 모른다. 신센구미의 1번대 대장이다. 즉 막부 소속의 인간으로, 적이다. 원수다. 언젠가 서로 죽고 죽이게 될 텐데 친해져서 어쩌겠다는 건가. 한 순간의 동정으로 목숨이라도 버릴 셈이냐, 사카타 긴토키.
아무리 많은 ‘만나서는 안 될 이유’를 나열해 봐도 그것이 전부 ‘자신도 만나고 싶다’라는 감정 하나를 못 이겼다. 그치만 이 애가, 지난날의 자신과 똑같은 소리를 하니까. 그러면서도 그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소릴 하니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 말이 와서 가슴에, 심장에 스민 것을.
“그럼,”하고 숨을 들이쉬고.
“내기할까?”
소년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크게 뜨는 것을 보며 잇는다.
“내일 4시, 오늘 갔던 데 중 한 곳에 있을게. 그래서 만나면, 가르쳐줄게.”
확률은 1/5. 불가능할 만큼 낮지는 않지만 절대로 높지도 않다. 기회가 한 번뿐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이. 이것이 스스로에 대한 최대 양보선이었다. 못 만난다면 그뿐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소년은 눈에 띄는 편이니 다음부터 피해다닐 뿐이다. 만난다면———운명이라 생각하고 포기하는 수밖에.
“그냥 가르쳐 주면 안 돼? 뭘 그렇게 비싸게 굴어?”
“야.”
가볍게 이마를 한 대 치면 평탄한 목소리가 “아야.”하고 소리를 냈다. 분명히 뜻은 아픔을 호소하는 것인데 목소리가 전혀 아프게 들리지 않는다. 아까 통곡을 하긴 했지만 표정도 기본적으로 별로 안 변하고, 성격도 나쁘고. 잘은 생겼는데 여러 가지로 참 안타까운 녀석일세. 생각하며 “할 거야, 말 거야?”하고 묻자 살짝 찌푸렸던 미간에서 다시 주름을 없애고 똑바로 올려다본다.
“해. 나 이런 운은 좋거든.”
“일하는 중에 찾아가서 쪽 팔린 꼴 봐줄 테니까 각오해, 당신.”이라며 씩 웃는다.
……이 표정은 좀, 좋을지도 몰랐다.
“네가 아무리 내 쪽 팔린 꼴을 봐도 내가 오늘 본 거에 비하면 안 쪽팔리거든요~.”
“당신 오늘 유치장에서 잘래?”
“죄송합니다.”
잽싸게 사과하고 긴토키는 먼저 걸어 나갔다. 몇 걸음 떨어진다. 어두워서인지 몇 발짝만 떨어져도 소년의 눈가가 붉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면 뭐, 대장님 체면 구기는 일은 없겠다.
“너무 늦으면 마드모아젤한테 거꾸로 매달릴 것 같으니까 먼저 간다.”
“어.”
“차 조심하고~.”
“내가 애냐?”
웃고서 돌아섰다. 손을 흔들고.
“안녕, 오키타 군.”
내일 보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보다 훨씬 쓸모 있는 오감은 소년이 그 자리에 계속 서있다는 사실을 전해왔기에 돌아보지 않고, 긴토키는 똑바로 걸어갔다.
일단 피자 호빵을 사고, 담배는…… 내일 나가는 구실로 써먹어도 괜찮겠지. 타카스기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긴토키는 서서히 카부키쵸의 인파 속에 휩쓸려 사라졌다.
빼앗는 것은 아주 익숙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빼앗으면서 살아온 것이다. 이르자면, 살아낼 힘이 없는 자신을 위해 누이의 행복을. 이르자면, 콘도의 곁에 있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이 두 가지를 18년이나 반복하면 그야 익숙해지지도 않겠는가.
빼앗기는 것도 익숙한 일이다. 자신을 향하던 눈을, 미소를, 손길을 전부 한 남자에게 빼앗기는 일은 빼앗는 것에 비하면 아직 한참 미숙하긴 했지만 이쪽도 익숙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는 많은 시간 이어져온 일이다. 빼앗은 것을 전부 도로 빼앗기는 아픔을 견디기 위해서는 익숙해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에게서 다시 뺏어올 수 있을 수 있었더라면 가장 좋았겠지만 무리였다. 아무리 해도, 무리였다. 포기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손이 닿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빼앗으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모순된 이야기였지만.
귀에 들리는 자신의 숨소리가 지극히 짧은 간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BGM으로는 단말마. 아니, 자신의 숨소리 쪽이 BGM일까? 어느 쪽이든 큰 차이는 없었지만. 하는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베고, 찌르고, 피하고, 넘어뜨리고, 차올라서, 베고, 받아치고, 베고, 베고, 베고, 베고. 귀를 때리는 총소리는 아까부터 집요하게 시야의 구석에 비치는 남자를 노리고 있었다. 원한이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저쪽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건지. 신센구미 돌격대장 타이틀이 울겠다. 아니, 돌격대장도 귀신 부장은 못 이기나. 그럴지도.
적은 강하지는 않았지만 집요했다. 저쪽도 아마 배수의 진이다. 에도 전역에 흩어져 있어 한곳에 인원을 집중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머릿수만이라면 한참 압도하는 신센구미에게 걸린 것이다. 지금 여기서 수뇌부-무려 국장에 부장에 돌격 대장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를 확실히 처리하지 않으면 밀수가 적발된 텐카이야도, 밀매 경로가 노출된 양이당도 후퇴할 곳이 없다. 아니, 후자는 전자에 비하면 믿는 구석이 좀 더 있겠지만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라는 건 확실하다. 반대로 여기서 신센구미를 쳐낸다면 일이 훨씬 쉽게 굴러갈 터다. 필사적으로 덤비고도 남을만한 이유였다.
그럼 나는? 또 방금 이 손에서 목숨이 하나 무참히 꺾인 것을 느끼며 생각한다.
막부와 쇼군에게 반기를 드는 불온 양이 세력의 숙청을 위해서? 하, 설마. 내버려 두면 나중에 신센구미에게 해가 될 테니까? 틀리지는 않았다. 콘도를 위해서? 물론, 그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히지카타가 죽는 것을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죽어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게 없다고는 말 못한다. 죽기 싫으니까? 아아, 그래. 맞지. 맞지만.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이유로 자신은 지금 여기서 사람을 죽이고 있단 말인가.
그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병원을 뛰쳐나오기 직전에 본 모습. 안 그래도 좋지 않은 혈색이 완전히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오래 들어서 귀에 익은 기침 소리조차 터져 나올 때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새빨갛게 시트 위로 튀던 피. 그렇게 선명한 붉은 색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간호사가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의학 용어를 소리치고, 병실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고, 누이가 누워있던 침대는 가히 기동성이라고 형용할만한 속도로 수술실로 사라졌다.
“보호자 분께서는 각오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의사가 던진 말을 마지막으로 귀에는 의미 있는 말이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만 수 분이 걸렸다. ‘보호자’는 미성년이어도 유일한 피붙이인 자기 자신을 지칭할 터였다. 입원 수속 때에도 보호자란에 서명한 기억이 있다. 그럼 누구에 대한? 누이다. 결혼 준비로 에도에 올라온 누이. 폐병 때문에 결국 또 쓰러진 누이. 수술실로 들어간 누이. ‘각오’? ……각오? 무슨, 각오를?
무슨 각오를 하란 말인가. 전에 검사 받았을 때 들은 시한부가 어쩌고 하는 그 얘기를 말하는 건가. 지금이 그 때라고 말하는 건가. 그럴 리가. 설마, 그럴 리가. 그치만 그 사람은 나한테 행복해질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분명히 행복해져 줄 거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런데 각오라니.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왜, 지금. 아직 아닌데. 아직, 남았는데, 벌써, 안 돼.
숨이 막히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넘어지기 직전에 벽을 잡은 손끝마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터져 나오는 것처럼 겨우 숨을 뱉으면 동시에 토기가 같이 올라왔다. 확실하게 필요 이상으로 많은 양의 공기를 들이쉬고, 뱉고, 그 반복. 분명히 숨을 쉬고 있는데도 목을 졸리는 것 같은, 가슴을 옥죄는 것 같은 이상한 압박감. 초점마저 흐려지려고 하는, 그 순간이었다.
다급하게 복도에서 달려온 야마자키가 무언가 소리쳤다. 텐카이야, 무기 밀수, 양이지사, 부장, 혼자, 항구. 간신히 인식한 단어들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겨우 몸에 힘을 주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질타한다. 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어서 움직이라고. 움직여. ‘항구’로 가야 해. 어서, 이곳에서, 여기서, 누이에게서———도망쳐야지.
달리기 시작한 다리는 뒤에서 야마자키의 목소리가, 겨우 병원에 도착한 모양인 콘도의 목소리가 들려도 멈추지 않았다.
항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전투는 가경이었다. 히지카타가 혼자 바주카를 등에 지고 칼을 들고서 수 십 명의 완전 무장 낭인들을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가 칼이면 모를까 총이니 웃음도 안 나온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었던 걸까, 저 사람은. 저 수많은 총화기를 상대로 겨우 바주카와 칼 한 자루라니. 물론 이쪽은 아예 바주카조차 없으니까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경악하는 것을 무시하고 전투에 뛰어든 지 또 얼마간 지난 후에 겨우 콘도와 다른 대원들이 도착했다. 다른 대원들이라고 해봤자 지금 상대하고 있는 낭인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했지만 신센구미 병력이 에도 전역에 얼마나 분산되어 있는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저쪽이 본당(本黨)의 간부진을 끌고 나오지 않는 이상은 쉽게 당해줄 생각이 없다. 화력에서 우세하니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생각하는 모양이나, 미안하지만 신센구미 수뇌부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실제로 수와 화기에서 객관적으로 한참 뒤지는 신센구미는 텐카이야가 고용한 사병들과 양이당 낭인들을 상대로 매우 선전하고 있었다. 소고의 눈대중이 맞다면 신센구미는 부상자 한 둘, 상대는 사상자가 열을 넘는다. 이대로라면 곧 소고가 빠져도 문제없을 것이다. 생각하며 소년은 고개를 들어 흘끗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남자의 그림자를 확인했다. 높은 곳에서 항구의 전투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남자, 텐카이야의 사장이자 미츠바의 약혼자였던 쿠라바 토우마 그였다.
저 자를 베는 것은 자신이다. 소년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그를 베면,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서, 너무 늦기 전에, 얼른 저 목을.
“오키타 대장님!”
그 느낌을 뭐라 설명할까? 밤공기를 가르고 소고의 귀까지 도달한 야마자키의 목소리는 마치 청아한 노랫소리 사이에 섞인 노이즈 같았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확실하게 고막을 울리는 것.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이 이상 없이, 불쾌한 것. 불쾌한 것은 별로 야마자키의 목소리가 맘에 안 든다든가 그에 대한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그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단 한 마디가 굉장히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징조. 예감. 말은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었지만 소고에게는 그 중에서 적절한 어휘를 고를만한 여유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 자신을 보는 소고를 야마자키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보았다. 원래 전투에 그다지 강하지 않은 그는 이럴 때 연락 담당이다. 그런 그에게 무슨 정보가 들어왔는지, 왜 굳이 소고의 이름을 불렀는지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야마자키는 움직임을 멈춰버린 소년을 대신해서 그를 베려고 하는 낭인을 히지카타가 베어 넘기는 것을 보았다. 콘도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소년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멍하니,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야마자키를 보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길지 않은 시간 후에 야마자키가 겨우, 소리를 냈다.
“미츠바 씨가…….”
뒤로는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내용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야마자키 쪽을 보았던 콘도가 다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소고를 본 것인지 히지카타를 본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곧 어금니를 세게 악물었다. 마치 그곳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제 슬슬 청년이라 불릴 나이의 소년과 남자는 꼼짝도 못하고 굳어 있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은 분명 이런 기분이라고, 가장 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망쳤을 뿐이다. 모르지는 않았다. 눈앞에서 그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게 무서워서 이곳으로 도망쳤을 뿐이다. 그러니까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자신이, 아니 이 세상의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의사가 신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까지 적지 않은 동료와 부하들을 병원에서 잃은 소년이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도, 누이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알고 있었다. 알고서, 여기로 도망친 것이다.
그것을 똑바로 지켜보고 받아낼 수 없었다. 그것은 아주 무서운 일이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라, 그래서 도망친 거다. 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센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히지카타는 물론 콘도를 위해서도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그 일을 견뎌내지 못할 자신을 위해서. 오직 그 이유 하나로 자신은 누이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의료진 사이에 혼자, 차가운 수술실에 혼자 두고 도망쳐온 것이다.
18년 동안 실컷 빼앗아놓고, 결국 아무것도 돌려주지 못했으면서 마지막엔 혼자 두고 도망쳤다. 자기가 빼앗은 행복을 어떻게든 느끼게 해주겠다면서 히지카타에게 실컷 떠들어놓고 그보다 훨씬 잔인하고 치사하고 한심한 짓을 저질렀다. 언제나 그랬다. 그러니까 그 사람도 자신보다 히지카타를 더 본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결국, 이렇게밖에 하지 못했다.
하. 이런 걸, 동생이라고. 이런 걸 18년 동안 돌본 동생이라고. 차라리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빼앗기지도 않았을 텐데. 전부 빼앗아놓고 끝까지 도망이나 치는 이런 걸, 이딴 걸, 동생이라고…… 차라리, 없었으면……!
“소고!”
콘도의 큰 손이 갑자기 어깨를 붙잡아 밸런스가 흐트러지는 것을 소고는 간신히 발을 뒤로 디뎌 막았다. 거의 동시에 그가 뒤에서 덤비는 낭인을 몸통으로 밀어붙여 날려버렸다. 수많은 종류의 검과 전투 방식이 공존하는 신센구미 안에서도 그의 장점은 파워다. 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려해도 큰 키와 덩치, 거기에 그게 걸맞은 힘. 아무리 성인 남성이라도 정면으로 부딪치면 나가떨어질 수밖에는 없다.
콘도가 이름을 부른 것에 간신히 의식을 그에게로 돌린 소고는 곧 신센구미 국장이 “가라.”고 명령하는 것을 들었다. 어디로 ‘가라’는 건지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지금 소식이 들어온 바로 그곳이다.
거기에 가라는 건가. 나 혼자서, 거기에. 그 두려운 곳에. 그 무서운 곳에. 거기엔 이제 그 사람이 없는데. 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러 가라는 말인가. 두려워서 도망친 곳으로 돌아가라고.
무의식적으로 잡으려 한 손은 닿기 전에 멀어졌다. 크고 두꺼운 남자의 손은 이번엔 역시 멍하니 서있는 히지카타의 등을 툭 쳤다. 한 발짝 앞으로 나간 히지카타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여기까지 으득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세게 이를 악물고, 그것보다 더 센 힘을 손에 줘서 손가락이 새하얗게 되도록 칼자루를 쥐더니 말 그대로 귀신의 형상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전투는 계속된다. 저쪽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는 이상 신센구미도 여기서 철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고 있다. 소고는 대 내 최연소지만 1번 대 대장이었으니까. 명령은 떨어졌다. 가야한다. 몇 번이나 되뇌고, 안 떨어지는 발을 겨우 떼고서 소고는 바로 코앞까지 왔던 칼날을 피하며 뛰기 시작했다.
소고가 가까이 오자 함께 달리기 시작한 야마자키에 이어 소년은 신센구미 순찰차의 조수석에 몸을 던졌다. 거의 반사적으로 문을 닫자 이상하도록 큰 소리가 왼쪽 귀를 때렸다. 평소에는 반응하지 않을 것에 움찔한 것을 보고 운전석의 야마자키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왔지만 소고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럴 만도 하다. 평소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하는 짓은 악랄한 1번 대 대장이지만 그도 겨우 18살인 것이다. 하나밖에 없다는 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럴 만도 하다. 야마자키는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약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기어를 수동으로 바꿔줘야 하는 순찰차를 익숙한 동작으로 출발시키며 야마자키는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순찰차는 곧 야마자키가 면허를 딴 이래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야마자키의 반 발짝 앞을 걷는 소년은 차에서 내려서도 뛰려고 하지 않았고, 야마자키 역시 소년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는 병원에서의 연락을 야마자키가 받았을 때 이미 사라졌으니까. 때문에 야마자키는 묵묵히, 마치 하얀 바닥에 한 걸음 한 걸음 발바닥이 들러붙는 것처럼 걸어가는 소년의 뒤를 걸었다. 차마 앞서 걷거나, 옆에 서서 그 얼굴을 볼 자신은 없었다. 자격도 아마 없다. 그 자격이 있는 사람은 지금도 전장에 있다.
자기 뒤의 야마자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 리가 없는 소년은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조금 열고서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항구에 도착해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긴 했지만 그 정도로 헐떡거릴 만큼 단련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설사 체력을 소모했다고 해도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숨을 정리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다. 때문에 숨은 크게 소리를 내며 기도를 드나들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주인이 느끼기에 굉장히 괴로운 것이었다. 숨이 가쁜 것이 아니다. 다만,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무언가가 서서히 목을 조이는, 그런 기분.
그 사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혼자 수술대 위에 누워서, 이런 기분으로 있었던 걸까.
아니었을 거라고, 바로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녀는 소고가 지켜보는 가운데 병실에서 정신을 잃었고, 바로 수술실로 들어가 마취한 후 수술이 시작되었다. 끝까지 의식은 없었을 테니 이런 기분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곧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집도의라는 남자가 소고를 불러 세웠다. 수술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한 그는 최선을 다했으나 살릴 수 없었다며 사죄 같은 말을 입에 담았지만, 소년은 남자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의사는 이런 반응이 익숙한 듯 인사를 하고 이제 유족이 된 소년을 뒤로 했다. 어쩌면 괜히 울부짖거나 환자를 살려내라며 의사에게 달려드는 사람들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사람에게서 즐거움도, 사랑도, 행복도, 심지어는 목숨까지 빼앗고서 도망친 게 누구인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데. 감히, 누굴 탓한다고.
간호사로 보이는 다른 남자의 안내를 받아 소고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누이가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부터 그녀와 함께 증상과 수술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던 소고였지만 그 내용을 전부 이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그는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더라도 이런 쪽으로 쓰는 머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누이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고 그것은 지금의 의학 기술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때문에 수술실에 피 한 방울 남아있지 않고, 입원복을 단정히 입고 있는 누이가 잠든 것처럼 수술대 위에 누워 있어도 그는 특별히 의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의문점은 다른 것이었다.
누이가, 오키타 미츠바가 숨을 거두는 것은 아주 두려운 일처럼 여겨졌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 자기 탓인 것만 같아서, 그래서 도망쳤다. 무서웠다. 그 사람이 죽는 것만이 아니라 그게 자기 책임이라는 것이, 누군가가 그런 자신을 책하는 것 같아서.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사람이 없는 것을 아는데도 심장은 이상할 정도로 빨리 뛰었다. 만에 하나 존재한다면 그것은 누이다. 지금까지 전부 빼앗기고 결국은 혼자 남겨진 누이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동생인 소고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 눈에 자신을 책하는 빛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는 그것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빼앗고 도망간 주제에 감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말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 한, 어머니 대신이 아니라 얼굴도 흐릿한 어머니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부정당하면 그것만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에게 부정당하고 살아갈 자신은, 오키타 소고에게 없다. 그래서 두려웠다. 숨을 거뒀다는 소식을 들어도, 계속 심장이 요동을 치고, 다리가 당장이라도 가루가 되어 흩어질 것 같고,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소년의 앞에 누워있는 사람은 오키타 미츠바가 아니었다.
소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자기 심장소리로 시끄러웠던 귀는 지금 조용하기만 했다. 발이 마치 물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수술실 바닥을 딛고 앞으로 향했다. 원래도 병적일 정도로 허옜지만 이제 아예 핏기가 사라진 피부. 그 위를 덮고 있는 하얀 천을, 거기에 지지 않을 만큼 하얗게 질린 손을 뻗어 걷어냈다. 나타난 여성의 얼굴은 확실히 그가 기억하는 오키타 미츠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오키타 미츠바’는 들어있지 않았다.
소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름도 용도도 잘 알 수 없는 기계들이 즐비한 수술실을 이리저리 훑어본다. 구석구석, 놓치는 곳이 없도록. 고개를 내려서 바닥까지 확인하고, 그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당연히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천장과 전등뿐이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오키타 미츠바’는 없었다.
누님은 어디로 가 버린 걸까?
그는 멍하니, 다시 시선을 내렸다. 다시 여자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것은 ‘오키타 미츠바’가 아니다. ‘오키타 미츠바였던 것’이다. 오키타 미츠바의 껍데기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겉포장에 불구하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도, 그가 찾는 것도, 그가 만나고 싶은 것도 ‘오키타 미츠바’인데 누이 그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님.”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대답은, 없었다.
장례식은 필요 없다는 소고의 말에 처음에 콘도는 좋은 얼굴을 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올 사람도 없어요.”라는 말에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장례식에 온다고 해도 미츠바보다는 소고 관계자가 더 많을 테고, 고향에서 한다면 또 모르지만 에도까지 부슈의 지인들이 와 줄 지는 의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골은 늘 바쁜 법이니까. 그리고 누이의 장례식만을 위해 둔소를 떠날 생각은 소고에게 없었다. 그렇다면 장례식 같은 것은 의미기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신 에도 안에 있는, 둔소에서 가장 가까운 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콘도는 제안했고 이번엔 소고가 거기에 끄덕였다. 소고가 자주 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겠지만, 별로 의미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장례식이 그 사람의 혼이 무사히 극락으로 갈 수 있도록 예의를 차리는 것이라면, 미츠바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다. 껍데기를 갖고 뭘 어떻게 해서 그녀를 극락에 보내겠다고.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다. 껍데기를 관 안에 넣고서 승려를 불러 불경을 읽겠다는 말인가. 그리고 조문객들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인가. 아무것도 안 들어있는 ‘미츠바였던 것’을 향해서? 하. 농담도.
장례식을 하지 않을 거라면 하다못해 미츠바에게 얼굴이라고 보여주고 오라고 콘도가 성화여서 소고는 하는 수 없이 둔소를 나섰지만 내키지는 않았다. 누이에게 얼굴을 보여주라니, 여기 없는 사람에게 뭘 어떻게 보여주란 말인가. 묘지에 그녀가 있다고? 껍데기를 묻었을 뿐인데 거기에 이제 와서 그녀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매운 센베까지 챙겨서 쥐어주는 콘도의 기대를 저버릴 수도 없었기에 그는 말없이 둔소를 나왔다. 확실히 무의미한 일을 하러 멀리까지 가는 것보단 가까이에 가는 게 나은 것도 같았다. 카부키쵸면 걸어갈 수도 있는 거리니까.
오랜만에 사복 차림으로 걷는 카부키쵸 거리는 예전과 똑같이 저속하고 소란스러웠다. 마치 사람 하나가 사라진 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전과 똑같았다. 당연한 일이다. 실종, 살인, 사고사. 신센구미로 정보가 들어오는 죽음만 해도 얼만데, 고작 시골에 살던 여자 하나가 죽은 걸로 무언가가 변할 리가. 겨우 그것뿐인 죽음이었다. 그것이 누구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더라고 해도, 고작 그뿐이다.
해도 중천에 떠서 아무리 하루의 시작이 늦은 환락가라도 여기저기서 이미 일하기 시작한 호객꾼들이 큰 소리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하고 있었다. 높은 목소리가 소고에게도 무언가 말을 걸며 소매를 슬쩍 잡았지만 그렇게 힘이 들어간 것도 아닌 하얀 손은 금세 떨어졌다. 그녀들에게도 행인이 손님이 될 사람인지 아닌지 보는 눈 정도는 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소고는 명백히 후자였다. 눈 밑에 검은 자국이 생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척 봐도 소년의 얼굴은 그 잘생긴 모양이 퇴색할 정도로는 피로가 짙게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이. 정면이 아니라 측면에서 그 눈동자를 본 여자는 슬쩍 힘을 줬던 손가락을 얼른 풀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지도층이라는 인간들부터 바닥의 그 밑바닥까지,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여자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런 눈을 하고 있는 사람과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장이라도 칼바람으로 모습을 바꿀 것 같은 바람은 아슬아슬하게 가을의 그것이었다.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것에 소고는 문득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지는 않지만 높은 하늘이었다. 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의식하고 얼른 다시 고개를 떨어뜨린다. 아니다. 이런 생각은,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걸음을 재촉한다.
큰길을 지나버리면 의외로 그렇게 시끄럽지도 않은 것이 카부키쵸의 신기한 점이다. 물론 괜히 밤의 거리라고 불리는 만큼 눈이 가는 거의 모든 곳에서 술집을 찾을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골목에 있는 술집들은 점심 장사는 아예 할 생각들이 없는지 반 정도만 셔터를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상경한 이후로 제 집 마당 마냥 누빈 골목과 골목 사이를 지나다니며 소고는 최단 거리로 목적지를 향했다.
묘지를 특별히 두렵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라면 또 모르지만, 최소한 소고가 기억할 수 있는 한은 공포를 느낀 적이 없다. 어렸을 때 누이의 손을 잡고 간 그곳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고, 상경한 후로는 하나하나 기억을 곱씹게 하는 전우들이 겨우 쉬게 된 곳이었다. 때문에 묘비가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있는 공원에 발을 들이고도 소고의 발걸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콘도에게 듣기만 했을 뿐 한 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는 묘비가 어디 있는지 찾으러 눈을 이리저리 돌릴 뿐이다.
‘오키타 가의 묘’를 찾는 데 크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가장 최근에 묘비를 세워서 아직 한 번 뒤엎은 땅이 덜 마른 곳. 손으로 만지면 아마 조금은 축축할 흙 위에 소고는 섰다. 한자로 글씨가 새겨져 있는 묘비는 소고가 고향에서 봤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좋게 말하면 대범하고 나쁘게 말하면 하는 일이 대체로 엉성한 구석이 있는 콘도지만, 의외로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쓴다.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소고는 이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 된 남자를 생각하고 웃으려다가, 입 꼬리가 안 올라가는 것을 자각하고 바로 포기했다. 대신 바로 그 남자가 꼭 가져가라며 챙겨준 매운 센베 봉지를 묘비 앞 작은 단 위에 내려놓았다.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콘도는 분명 이렇게 하기를 바랐을 터다. 제단 위에 매운 센베 봉지 하나만 올라가 있다는 기묘한 광경에서 소고는 눈을 떼고 똑바로 앞을, 묘비를 보았다.
손을 뻗는다. 차가운 공기 속에 서있는 차가운 돌은 당연히 오싹한 한기밖에는 전하지 않았다. 누이는 손이 찬 사람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혈액순환이 좋지 않았으리라. 안 그래도 여자 중에는 손이 찬 사람이 많다는데, 그 중에서도 병약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소고의 손을 잡고는 “소-쨩은 손이 따뜻하네.”라며 웃어 주었다. 잠시 잡고 있으면 자신의 체온이 누이의 손으로 전달돼 그녀의 손도 같은 온도로 변한다는 것을 소고는 철이 들기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쭙잖게 주워들은 말로 손이 찬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다는 소리를 하면 소녀처럼 쑥스러워했더라.
돌은 차갑기만 했다. 손바닥을 아무리 대고 있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차가움 속에 감추고 있는 따스함도 없었다. 그저 차갑게, 거기 서있을 뿐이다.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여기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소고는 오히려 냉기가 전해져 차가워져 버린 손바닥을 떼고 대신 하늘을 보았다. 맑고, 군데군데 구름이 떠다니는 높은 가을 하늘이었다.
이렇게 높으면, 누님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는데.
하염없이, 끝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껍데기 속에는 없었다. 그 사람이 지옥에 갈 리도 없으니 땅 속에도 없다. 그러니까 이 하늘 어디엔가 있어야 할 터인데, 하늘은 너무 넓고 높기만 했다. 아무리 찾아도 그 사람이 없는 하늘은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아서, 눈도 감아버린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버렸다.
두려웠다. 그 사람이 죽으면 전부 다 무너져 내릴 줄 알았다. 죄악감으로 숨이 끊어지는 줄 알았다. 분노와 슬픔으로 짓눌려 그대로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이 죽고 나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당혹스러워서 누이를 찾으려고 해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잃어 버렸다.’
분명 이것이 도망친 것에 대한 벌이라고, 멍하니 생각했다. 아마 그 때 그 자리를 지켰더라면, 확실히 누이의 죽음이라는 것을 똑바로 안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공포와 분노에 발광을 하든, 슬픔과 죄책감에 폐인이 되든 확실하게 지금의 자신보다는 더 나은 결과가 있었을 터였다. 넘어져야 일어날 수도 있다. 그 사람이 등을 떠미는 것을 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힘에 앞으로 달려갈 수도, 넘어질 수도 있는 거였다. 그걸 피했기에 이렇게, 길 잃은 아이 마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질질 끌며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고만 있다. 그 사람이 없으면 넘어질 수도 달릴 수도 없는데 이젠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도망이나 친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벌이다. 이대로 계속 살아가는 걸까. 숨을 쉬고 있으니까 죽지는 않겠지만, 이 상태로 또 적이 오면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그렇게? 계속? 하지만 내가, 그럴 자격이 어디에 있다고…….
“어이.”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들린 목소리에 소고는 놀라 눈을 떴다. 소리의 방향은 자신의 왼쪽, 조금 아래. 시선을 향하자 그곳에는 눈을 감기 전까지 없었던 것이 하나 늘어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강렬한 붉은 색이었다. 목소리부터 의심할 여지할 것 없이 남성인 그의 눈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것. 새하얀 피부와 새하얀 머리카락 사이에서 존재감을 주장하고 있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보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눈두덩을 덮고 눈꼬리에서 가늘어지면서 이어져 점점 사라지는 붉은 연지. 아니, 뺨이나 입술이 아니라 눈가를 장식하는 것이니 정확히는 연지가 아닐지도 몰랐지만 화장품에 대한 지식이 없다시피 한 소고로서는 명칭 같은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남자가, 붉은 눈 화장. 물론 카부키쵸에도 그런 가게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선명한, 이렇게 눈길을 사로잡는 붉은 색은 없었다. 아니, 어떤 여자가 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고 해도 이만큼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으리라. 일반적인 의미로 ‘어울리’냐면 그것은 아니었지만 묘하게 사람 눈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왜일까 생각을 하기도 전에 엄밀히는 다르지만 역시 붉은 입술이 다시 열렸다.
“그거, 공물이냐?”
“그거”라면서 남자가 턱으로 가리킨 쪽을 본다. 콘도가 쥐어준 매운 센베 봉지다. 미츠바가 이곳에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 치고 준 콘도의 의도는 공물에 맞기에 소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에 남자가 “공물로 매운 센베라니…….”하며 입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먹어도 돼?”
그 질문에 소고는 금방 답할 수 없었다. 남자는 소고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지만 소년으로서는 이 센베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사온 것은 아마 콘도다. 그러니 일단 콘도의 소유물일 터지만 콘도도 자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리라. 그는 이것을 ‘미츠바’에게 갖다 주라며 소고에게 건네 줬으니까. 그 말을 따라 여기까지 와서 다른 사람들처럼 단 위에 올리기까지 했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에 센베의 주인은 없다. 그럼 이 센베는 대체 누구 거라고 해야 할까? 소고가 허락을 해도 되는 것인가? 아니, 근본적으로 보통 공물을 먹나? 그것도 남이?
“……아.”
소고가 생각하는 동안 대답을 기다리기 질렸는지 옆에서 손이 나타났다. 까만 바탕에 붉은 물결무늬 소매와 그 아래의 새하얀 손. 남자 손답게 큰 그것이 매운 센베 봉지를 잡더니 본체 쪽으로 휙 사라졌다. 곧장 포장을 뜯는 소리가 들리고, 수없이 들어서 익숙한 까득 하는 소리.
“읏……!”
한 입 베어 문 남자는 소리 없는 비명 같은 것을 한 번 지르더니 크게 숨을 뱉고서 센베의 나머지 부분을 먹어 치웠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을 하더니 곧.
“엄청 맵잖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소고에게 항의했다. 일련의 동작을 말없이 보고 있던 소고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심정이었다. 대체 뭐야, 이 녀석. 하지만 그에게 일방적으로 항의를 받을 이유도 없기에 입을 연다.
“맵다고 써 있잖아.”
“아니, 보통 맵다고 써 있어도 이 정도로 맵지는……! 누가 공물로 이런 걸 올리냐?! 나 매운 거 별로거든?!”
그건 진심으로 소고가 알 바가 아니다.
“당신이 맘대로 먹었잖아. 애초에, 누구 허락 받고 먹고 있는 건데? 그거.”
콘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히지카타와 동년배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확실히 소고보다 나이가 10살 쯤 많을 터였지만 존대를 해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원래 그렇게까지 예의가 바른 편도 아니고, 남의 무덤 공물을 맘대로 먹는 인간에게 존대해줄 필요성도 없어 보이고. 하지만 남자는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아니면 센베가 너무 매워서 정신이 없는 건지 특별히 뭐라 말하지 않고 두 번째 센베를 베어 물며.
“주인 없는 걸 누구 허락 받고 먹어?”
당연한 듯이 그렇게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 생각은 얼굴에 바로 티가 났는지 남자는 곁눈으로 슬쩍 소고를 보더니 무엇을 확인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센베 봉지의 성분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물어 봤는데 바로 대답 안 하는 거 보면 최소한 네 건 아니잖아.”
그야…….
“그럼 그 ‘오키타 가의 묘’ 공물이라는 건데.
이거 주인 없잖아, 여기.”
소고는 숨을 들이쉬고, 잠시 뱉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센베의 주인은 물론, 오키타 미츠바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여기 없다. 어디에도 없다. 껍데기는 있지만 그건 오키타 미츠바가 아니기에 주인도 될 수 없다. 그래서 대답을 못 한 것이 사실이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례식도 무덤도, 모두 산 자를 위한 것. 죽은 사람이 거기 있다고 믿고, 죽은 사람을 대하듯이 거기에 공물을 올리는 것이다. 부모님의 묘에 함께 갔던 미츠바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 센베를 챙겨 준 콘도가 그랬던 것처럼. 그 감각을 소고가 공유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소고는 다시 한 번 남자를 빤히 보았다. 아까는 눈 화장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잘 보면 그것 외에도 꽤나 특징적인 사람이었다. 높이 묶은 새하얀 곱슬머리에 새하얀 피부. 머리카락만이 아니라 눈썹에 속눈썹까지 흰색인 것을 보면 염색이 아니라 자연색이다. 아무리 그래도 30은 안 됐을 나이에 새치로 저렇게 다 샜을 리도 없으니 정말로 처음부터 저 색인 것이겠지. 거기다 눈은 붉은 색. 아마 태생적으로 색소가 부족한 것일 터다. 하얀 머리카락과 피부, 붉은 입술과 눈동자와 눈 화장이 완벽하게 색채 대비를 이루는 얼굴이었다. 어떤 의미로 참 철저하다. 그야 저만큼 하야면 붉은 화장이 강렬하게 인상에 남을 수밖에 없다.
화장만큼이나 의상도 이목을 끄는 것이었다. 한쪽만 똑바로 걸치고 있는 검은 키나가시. 까만 바탕에 붉은 색으로 모양이 들어가 있는 옷은 그것을 걸치고 있는 남자가 지나치게 하얗다는 것과 맞물려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키나가시 안에 입고 있는 인너도 검정 바탕에 붉은 테. 사이로 살짝 보이는 목과 가슴께도 남자치고는 보기 드물 만큼 하얗다.
이만큼 화려한 의상에 눈 화장, 포니테일. 거기다 남자는 남자가 눈 화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혐오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는 괜찮은 생김새였다. 키나가시에 가려진 부분은 보이지 않지만 반팔 인너에서부터 뻗어있는 팔이나 속살은 쓸데없는 지방이 없는 근육질이다. 이 정도로 조건이 갖춰지면 남자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이고가 카부키쵸의 사대천왕 중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니 그 세력은 어마어마하고, 그 중에 이런 사람이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왠지 모르게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것도 그 탓일 터다. 좁은 카부키쵸에서 지나다니다보면 한 두 번은 마주쳤겠지.
소고가 남자를 관찰하는 동안 센베를 다 먹어버린 듯한 남자는 마지막 센베를 삼킴과 동시에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 매워 죽는 줄 알았네.”
그렇게 매우면 안 먹으면 될 걸. 생각한 순간 마음이라도 읽은 듯이 남자가 고개를 홱 들어 쏘아보았다. 신센구미의, 제복을 입지 않으면 야쿠자인지 경찰인지 구분이 안 가는 험악한 얼굴들을 매일 보고 살아서 물론 이 정도는 무섭지도 않지만.
“너, 책임 져라.”
이건 또 무슨…….
“사복인 거 보니 오늘 비번인 모양이고, 어차피 할 일 없지?” 대복을 입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아볼 정도로는 오키타 소고는 유명인인 모양이었다. 그야 그만큼 사고를 쳐서 허구헛날 신문에 나면 그럴 만도 하지만. 아니, 그게 아니라. 비번이 건 맞고 할 일도 없지만…….
“가자, 경단집.”
……이 녀석, 지구인 같이 생겼지만 실은 천인이 아닐까…….
소고는 옆의 묘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가 일어선 남자를 빤히 봤다. 분명히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말이 전혀 안 통하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대체. 책임? 경단집? 하?
“미래의 당분왕인 나에게 매운 센베를 먹인 책임은 경단집에서 한 턱 쏘는 걸로 쿨하게 면제해 줄 테니까 가자고.”
말하며 남자가 손을 뻗어왔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고, 남자가 하는 말이 무슨 논리인지는 짐작도 안 가며 이해할 생각도 없었지만 확실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기에 피하면 그만이었다. 아무리 사복 차림이라 칼도 안 차고 나왔다지만 그 정도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아까 한 말이. 여기에 센베의 주인이, 없다고.
소고의 손목은 남자의 손에 바로 잡혀 버렸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발을 내딛는 남자의 힘에 이끌려 한참 전부터 한 곳에만 머무르고 있던 발이 툭, 나간다.
“아, 참고로 나 매운 건 몰라도 단 건 엄청 많이 들어가니까 각오해라.”
대장님. 돌아보며 덧붙이는 그 얼굴이 씩 웃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 녀석은 아까부터, 대체가 사람 대답이라는 걸 듣지 않는다. 물론 지금의 자신은 어떤 것을 물어도 똑바로 대답할 거라는 보장이 없기에 그게 더 나을지도 몰랐지만.
하얀 머리통이 다시 앞을 향한다. 조금 앞에서 짧은 포니테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