始
비로소 시
1. 비로소
2. 바야흐로
3. 먼저, 앞서서
4. 일찍, 일찍부터
5. 옛날에, 당초에
6. 처음, 시초
7. 근본, 근원
8. 시작하다
9. 일으키다
빼앗는 것은 아주 익숙한 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언제나 빼앗으면서 살아온 것이다. 이르자면, 살아낼 힘이 없는 자신을 위해 누이의 행복을. 이르자면, 콘도의 곁에 있기 위해 누군가의 목숨을. 이 두 가지를 18년이나 반복하면 그야 익숙해지지도 않겠는가.
빼앗기는 것도 익숙한 일이다. 자신을 향하던 눈을, 미소를, 손길을 전부 한 남자에게 빼앗기는 일은 빼앗는 것에 비하면 아직 한참 미숙하긴 했지만 이쪽도 익숙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는 많은 시간 이어져온 일이다. 빼앗은 것을 전부 도로 빼앗기는 아픔을 견디기 위해서는 익숙해지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에게서 다시 뺏어올 수 있을 수 있었더라면 가장 좋았겠지만 무리였다. 아무리 해도, 무리였다. 포기할 생각까지는 없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손이 닿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고 있었다.
이렇게 계속 빼앗으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모순된 이야기였지만.
귀에 들리는 자신의 숨소리가 지극히 짧은 간격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BGM으로는 단말마. 아니, 자신의 숨소리 쪽이 BGM일까? 어느 쪽이든 큰 차이는 없었지만. 하는 일은 달라지지 않는다. 베고, 찌르고, 피하고, 넘어뜨리고, 차올라서, 베고, 받아치고, 베고, 베고, 베고, 베고. 귀를 때리는 총소리는 아까부터 집요하게 시야의 구석에 비치는 남자를 노리고 있었다. 원한이라도 있는 건지 아니면 저쪽이 더 위험하다고 판단한 건지. 신센구미 돌격대장 타이틀이 울겠다. 아니, 돌격대장도 귀신 부장은 못 이기나. 그럴지도.
적은 강하지는 않았지만 집요했다. 저쪽도 아마 배수의 진이다. 에도 전역에 흩어져 있어 한곳에 인원을 집중시키는 것은 어렵지만 머릿수만이라면 한참 압도하는 신센구미에게 걸린 것이다. 지금 여기서 수뇌부-무려 국장에 부장에 돌격 대장이 한 자리에 모여 있다-를 확실히 처리하지 않으면 밀수가 적발된 텐카이야도, 밀매 경로가 노출된 양이당도 후퇴할 곳이 없다. 아니, 후자는 전자에 비하면 믿는 구석이 좀 더 있겠지만 입장이 난처해질 것이라는 건 확실하다. 반대로 여기서 신센구미를 쳐낸다면 일이 훨씬 쉽게 굴러갈 터다. 필사적으로 덤비고도 남을만한 이유였다.
그럼 나는? 또 방금 이 손에서 목숨이 하나 무참히 꺾인 것을 느끼며 생각한다.
막부와 쇼군에게 반기를 드는 불온 양이 세력의 숙청을 위해서? 하, 설마. 내버려 두면 나중에 신센구미에게 해가 될 테니까? 틀리지는 않았다. 콘도를 위해서? 물론, 그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히지카타가 죽는 것을 내버려 둘 수가 없어서? 죽어도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게 없다고는 말 못한다. 죽기 싫으니까? 아아, 그래. 맞지. 맞지만.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이유로 자신은 지금 여기서 사람을 죽이고 있단 말인가.
그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
병원을 뛰쳐나오기 직전에 본 모습. 안 그래도 좋지 않은 혈색이 완전히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오래 들어서 귀에 익은 기침 소리조차 터져 나올 때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새빨갛게 시트 위로 튀던 피. 그렇게 선명한 붉은 색은 이제껏 본 적이 없었다. 간호사가 들어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의학 용어를 소리치고, 병실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지고, 누이가 누워있던 침대는 가히 기동성이라고 형용할만한 속도로 수술실로 사라졌다.
“보호자 분께서는 각오를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라고 의사가 던진 말을 마지막으로 귀에는 의미 있는 말이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만 수 분이 걸렸다. ‘보호자’는 미성년이어도 유일한 피붙이인 자기 자신을 지칭할 터였다. 입원 수속 때에도 보호자란에 서명한 기억이 있다. 그럼 누구에 대한? 누이다. 결혼 준비로 에도에 올라온 누이. 폐병 때문에 결국 또 쓰러진 누이. 수술실로 들어간 누이. ‘각오’? ……각오? 무슨, 각오를?
무슨 각오를 하란 말인가. 전에 검사 받았을 때 들은 시한부가 어쩌고 하는 그 얘기를 말하는 건가. 지금이 그 때라고 말하는 건가. 그럴 리가. 설마, 그럴 리가. 그치만 그 사람은 나한테 행복해질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분명히 행복해져 줄 거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런데 각오라니. 아니다. 그럴 리가 없어. 말도 안 돼. 왜, 지금. 아직 아닌데. 아직, 남았는데, 벌써, 안 돼.
숨이 막히고, 다리가 후들거리고, 넘어지기 직전에 벽을 잡은 손끝마저 덜덜 떨리고 있었다. 터져 나오는 것처럼 겨우 숨을 뱉으면 동시에 토기가 같이 올라왔다. 확실하게 필요 이상으로 많은 양의 공기를 들이쉬고, 뱉고, 그 반복. 분명히 숨을 쉬고 있는데도 목을 졸리는 것 같은, 가슴을 옥죄는 것 같은 이상한 압박감. 초점마저 흐려지려고 하는, 그 순간이었다.
다급하게 복도에서 달려온 야마자키가 무언가 소리쳤다. 텐카이야, 무기 밀수, 양이지사, 부장, 혼자, 항구. 간신히 인식한 단어들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겨우 몸에 힘을 주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을 질타한다. 움직여, 움직여, 움직여. 어서 움직이라고. 움직여. ‘항구’로 가야 해. 어서, 이곳에서, 여기서, 누이에게서———도망쳐야지.
달리기 시작한 다리는 뒤에서 야마자키의 목소리가, 겨우 병원에 도착한 모양인 콘도의 목소리가 들려도 멈추지 않았다.
항구에 도착했을 때 이미 전투는 가경이었다. 히지카타가 혼자 바주카를 등에 지고 칼을 들고서 수 십 명의 완전 무장 낭인들을 상대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들고 있는 무기가 칼이면 모를까 총이니 웃음도 안 나온다. 정말로 죽을 생각이었던 걸까, 저 사람은. 저 수많은 총화기를 상대로 겨우 바주카와 칼 한 자루라니. 물론 이쪽은 아예 바주카조차 없으니까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경악하는 것을 무시하고 전투에 뛰어든 지 또 얼마간 지난 후에 겨우 콘도와 다른 대원들이 도착했다. 다른 대원들이라고 해봤자 지금 상대하고 있는 낭인들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했지만 신센구미 병력이 에도 전역에 얼마나 분산되어 있는지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저쪽이 본당(本黨)의 간부진을 끌고 나오지 않는 이상은 쉽게 당해줄 생각이 없다. 화력에서 우세하니 어떻게든 할 수 있다 생각하는 모양이나, 미안하지만 신센구미 수뇌부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실제로 수와 화기에서 객관적으로 한참 뒤지는 신센구미는 텐카이야가 고용한 사병들과 양이당 낭인들을 상대로 매우 선전하고 있었다. 소고의 눈대중이 맞다면 신센구미는 부상자 한 둘, 상대는 사상자가 열을 넘는다. 이대로라면 곧 소고가 빠져도 문제없을 것이다. 생각하며 소년은 고개를 들어 흘끗 몇 번 만난 적이 있는 남자의 그림자를 확인했다. 높은 곳에서 항구의 전투를 내려다보고 있는 그 남자, 텐카이야의 사장이자 미츠바의 약혼자였던 쿠라바 토우마 그였다.
저 자를 베는 것은 자신이다. 소년은 조용히 이를 악물었다. 그를 베면, 용서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어서, 너무 늦기 전에, 얼른 저 목을.
“오키타 대장님!”
그 느낌을 뭐라 설명할까? 밤공기를 가르고 소고의 귀까지 도달한 야마자키의 목소리는 마치 청아한 노랫소리 사이에 섞인 노이즈 같았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확실하게 고막을 울리는 것.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것. 그리고 이 이상 없이, 불쾌한 것. 불쾌한 것은 별로 야마자키의 목소리가 맘에 안 든다든가 그에 대한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그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단 한 마디가 굉장히 불길하기 짝이 없었다. 징조. 예감. 말은 얼마든지 갖다 붙일 수 있었지만 소고에게는 그 중에서 적절한 어휘를 고를만한 여유가 없었다.
저도 모르게 움직임을 멈추고 자신을 보는 소고를 야마자키도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보았다. 원래 전투에 그다지 강하지 않은 그는 이럴 때 연락 담당이다. 그런 그에게 무슨 정보가 들어왔는지, 왜 굳이 소고의 이름을 불렀는지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야마자키는 움직임을 멈춰버린 소년을 대신해서 그를 베려고 하는 낭인을 히지카타가 베어 넘기는 것을 보았다. 콘도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소년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멍하니, 차마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야마자키를 보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길지 않은 시간 후에 야마자키가 겨우, 소리를 냈다.
“미츠바 씨가…….”
뒤로는 아무 말도 이어지지 않았지만 그 내용을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야마자키 쪽을 보았던 콘도가 다시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소고를 본 것인지 히지카타를 본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그는 곧 어금니를 세게 악물었다. 마치 그곳만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이제 슬슬 청년이라 불릴 나이의 소년과 남자는 꼼짝도 못하고 굳어 있었다.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은 분명 이런 기분이라고, 가장 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도망쳤을 뿐이다. 모르지는 않았다. 눈앞에서 그 사람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게 무서워서 이곳으로 도망쳤을 뿐이다. 그러니까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자신이, 아니 이 세상의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의사가 신이 아니라는 것은 지금까지 적지 않은 동료와 부하들을 병원에서 잃은 소년이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도, 누이도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알고 있었다. 알고서, 여기로 도망친 것이다.
그것을 똑바로 지켜보고 받아낼 수 없었다. 그것은 아주 무서운 일이라,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일이라, 그래서 도망친 거다. 누이를 위해서가 아니라, 신센구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히지카타는 물론 콘도를 위해서도 아니라,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그 일을 견뎌내지 못할 자신을 위해서. 오직 그 이유 하나로 자신은 누이를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의료진 사이에 혼자, 차가운 수술실에 혼자 두고 도망쳐온 것이다.
18년 동안 실컷 빼앗아놓고, 결국 아무것도 돌려주지 못했으면서 마지막엔 혼자 두고 도망쳤다. 자기가 빼앗은 행복을 어떻게든 느끼게 해주겠다면서 히지카타에게 실컷 떠들어놓고 그보다 훨씬 잔인하고 치사하고 한심한 짓을 저질렀다. 언제나 그랬다. 그러니까 그 사람도 자신보다 히지카타를 더 본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결국, 이렇게밖에 하지 못했다.
하. 이런 걸, 동생이라고. 이런 걸 18년 동안 돌본 동생이라고. 차라리 없었더라면 아무것도 빼앗기지도 않았을 텐데. 전부 빼앗아놓고 끝까지 도망이나 치는 이런 걸, 이딴 걸, 동생이라고…… 차라리, 없었으면……!
“소고!”
콘도의 큰 손이 갑자기 어깨를 붙잡아 밸런스가 흐트러지는 것을 소고는 간신히 발을 뒤로 디뎌 막았다. 거의 동시에 그가 뒤에서 덤비는 낭인을 몸통으로 밀어붙여 날려버렸다. 수많은 종류의 검과 전투 방식이 공존하는 신센구미 안에서도 그의 장점은 파워다. 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고려해도 큰 키와 덩치, 거기에 그게 걸맞은 힘. 아무리 성인 남성이라도 정면으로 부딪치면 나가떨어질 수밖에는 없다.
콘도가 이름을 부른 것에 간신히 의식을 그에게로 돌린 소고는 곧 신센구미 국장이 “가라.”고 명령하는 것을 들었다. 어디로 ‘가라’는 건지는 길게 생각할 것도 없다. 지금 소식이 들어온 바로 그곳이다.
거기에 가라는 건가. 나 혼자서, 거기에. 그 두려운 곳에. 그 무서운 곳에. 거기엔 이제 그 사람이 없는데. 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러 가라는 말인가. 두려워서 도망친 곳으로 돌아가라고.
무의식적으로 잡으려 한 손은 닿기 전에 멀어졌다. 크고 두꺼운 남자의 손은 이번엔 역시 멍하니 서있는 히지카타의 등을 툭 쳤다. 한 발짝 앞으로 나간 히지카타는 잠시 그대로 있다가, 여기까지 으득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세게 이를 악물고, 그것보다 더 센 힘을 손에 줘서 손가락이 새하얗게 되도록 칼자루를 쥐더니 말 그대로 귀신의 형상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전투는 계속된다. 저쪽에서 물러날 생각이 없는 이상 신센구미도 여기서 철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알고 있다. 소고는 대 내 최연소지만 1번 대 대장이었으니까. 명령은 떨어졌다. 가야한다. 몇 번이나 되뇌고, 안 떨어지는 발을 겨우 떼고서 소고는 바로 코앞까지 왔던 칼날을 피하며 뛰기 시작했다.
소고가 가까이 오자 함께 달리기 시작한 야마자키에 이어 소년은 신센구미 순찰차의 조수석에 몸을 던졌다. 거의 반사적으로 문을 닫자 이상하도록 큰 소리가 왼쪽 귀를 때렸다. 평소에는 반응하지 않을 것에 움찔한 것을 보고 운전석의 야마자키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왔지만 소고의 눈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럴 만도 하다. 평소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하는 짓은 악랄한 1번 대 대장이지만 그도 겨우 18살인 것이다. 하나밖에 없다는 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럴 만도 하다. 야마자키는 스스로에게 납득시키고 약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도 기어를 수동으로 바꿔줘야 하는 순찰차를 익숙한 동작으로 출발시키며 야마자키는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순찰차는 곧 야마자키가 면허를 딴 이래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빠른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다. 야마자키의 반 발짝 앞을 걷는 소년은 차에서 내려서도 뛰려고 하지 않았고, 야마자키 역시 소년을 재촉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는 병원에서의 연락을 야마자키가 받았을 때 이미 사라졌으니까. 때문에 야마자키는 묵묵히, 마치 하얀 바닥에 한 걸음 한 걸음 발바닥이 들러붙는 것처럼 걸어가는 소년의 뒤를 걸었다. 차마 앞서 걷거나, 옆에 서서 그 얼굴을 볼 자신은 없었다. 자격도 아마 없다. 그 자격이 있는 사람은 지금도 전장에 있다.
자기 뒤의 야마자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 리가 없는 소년은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을 조금 열고서 간신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항구에 도착해서 격렬한 전투를 벌이긴 했지만 그 정도로 헐떡거릴 만큼 단련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설사 체력을 소모했다고 해도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숨을 정리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다. 때문에 숨은 크게 소리를 내며 기도를 드나들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주인이 느끼기에 굉장히 괴로운 것이었다. 숨이 가쁜 것이 아니다. 다만,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무언가가 서서히 목을 조이는, 그런 기분.
그 사람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혼자 수술대 위에 누워서, 이런 기분으로 있었던 걸까.
아니었을 거라고, 바로 자신의 생각을 부정했다. 그녀는 소고가 지켜보는 가운데 병실에서 정신을 잃었고, 바로 수술실로 들어가 마취한 후 수술이 시작되었다. 끝까지 의식은 없었을 테니 이런 기분은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라는 거야.
곧 얼굴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집도의라는 남자가 소고를 불러 세웠다. 수술에 대해 짤막하게 설명한 그는 최선을 다했으나 살릴 수 없었다며 사죄 같은 말을 입에 담았지만, 소년은 남자를 보고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의사는 이런 반응이 익숙한 듯 인사를 하고 이제 유족이 된 소년을 뒤로 했다. 어쩌면 괜히 울부짖거나 환자를 살려내라며 의사에게 달려드는 사람들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할지도 몰랐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사람에게서 즐거움도, 사랑도, 행복도, 심지어는 목숨까지 빼앗고서 도망친 게 누구인지 자기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데. 감히, 누굴 탓한다고.
간호사로 보이는 다른 남자의 안내를 받아 소고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누이가 처음 진단을 받았을 때부터 그녀와 함께 증상과 수술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들었던 소고였지만 그 내용을 전부 이해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애초에 그는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더라도 이런 쪽으로 쓰는 머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누이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고 그것은 지금의 의학 기술로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 그것뿐이었다. 때문에 수술실에 피 한 방울 남아있지 않고, 입원복을 단정히 입고 있는 누이가 잠든 것처럼 수술대 위에 누워 있어도 그는 특별히 의문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의문점은 다른 것이었다.
누이가, 오키타 미츠바가 숨을 거두는 것은 아주 두려운 일처럼 여겨졌다. 절대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처럼 여겨졌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 자기 탓인 것만 같아서, 그래서 도망쳤다. 무서웠다. 그 사람이 죽는 것만이 아니라 그게 자기 책임이라는 것이, 누군가가 그런 자신을 책하는 것 같아서. 그런 말을 입에 담을 사람이 없는 것을 아는데도 심장은 이상할 정도로 빨리 뛰었다. 만에 하나 존재한다면 그것은 누이다. 지금까지 전부 빼앗기고 결국은 혼자 남겨진 누이다.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동생인 소고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지막의 마지막에, 그 눈에 자신을 책하는 빛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그는 그것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빼앗고 도망간 주제에 감히 입에 담기도 부끄러운 말이지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함께 한, 어머니 대신이 아니라 얼굴도 흐릿한 어머니보다도 더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녀에게 부정당하면 그것만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녀에게 부정당하고 살아갈 자신은, 오키타 소고에게 없다. 그래서 두려웠다. 숨을 거뒀다는 소식을 들어도, 계속 심장이 요동을 치고, 다리가 당장이라도 가루가 되어 흩어질 것 같고, 숨이 멈출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소년의 앞에 누워있는 사람은 오키타 미츠바가 아니었다.
소고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 자기 심장소리로 시끄러웠던 귀는 지금 조용하기만 했다. 발이 마치 물 위를 미끄러지는 것처럼 수술실 바닥을 딛고 앞으로 향했다. 원래도 병적일 정도로 허옜지만 이제 아예 핏기가 사라진 피부. 그 위를 덮고 있는 하얀 천을, 거기에 지지 않을 만큼 하얗게 질린 손을 뻗어 걷어냈다. 나타난 여성의 얼굴은 확실히 그가 기억하는 오키타 미츠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에 ‘오키타 미츠바’는 들어있지 않았다.
소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름도 용도도 잘 알 수 없는 기계들이 즐비한 수술실을 이리저리 훑어본다. 구석구석, 놓치는 곳이 없도록. 고개를 내려서 바닥까지 확인하고, 그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위로 쳐들었다. 당연히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천장과 전등뿐이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오키타 미츠바’는 없었다.
누님은 어디로 가 버린 걸까?
그는 멍하니, 다시 시선을 내렸다. 다시 여자의 시신이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이것은 ‘오키타 미츠바’가 아니다. ‘오키타 미츠바였던 것’이다. 오키타 미츠바의 껍데기다.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겉포장에 불구하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도, 그가 찾는 것도, 그가 만나고 싶은 것도 ‘오키타 미츠바’인데 누이 그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누님.”
한참이나 말을 하지 않아서 그런지 잠긴 목소리가 나왔다.
대답은, 없었다.
장례식은 필요 없다는 소고의 말에 처음에 콘도는 좋은 얼굴을 하지 않았지만 “어차피 올 사람도 없어요.”라는 말에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장례식에 온다고 해도 미츠바보다는 소고 관계자가 더 많을 테고, 고향에서 한다면 또 모르지만 에도까지 부슈의 지인들이 와 줄 지는 의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골은 늘 바쁜 법이니까. 그리고 누이의 장례식만을 위해 둔소를 떠날 생각은 소고에게 없었다. 그렇다면 장례식 같은 것은 의미기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대신 에도 안에 있는, 둔소에서 가장 가까운 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콘도는 제안했고 이번엔 소고가 거기에 끄덕였다. 소고가 자주 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겠지만, 별로 의미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장례식이 그 사람의 혼이 무사히 극락으로 갈 수 있도록 예의를 차리는 것이라면, 미츠바에게는 필요 없는 것이다. 껍데기를 갖고 뭘 어떻게 해서 그녀를 극락에 보내겠다고. 웃기지도 않는 이야기다. 껍데기를 관 안에 넣고서 승려를 불러 불경을 읽겠다는 말인가. 그리고 조문객들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인가. 아무것도 안 들어있는 ‘미츠바였던 것’을 향해서? 하. 농담도.
장례식을 하지 않을 거라면 하다못해 미츠바에게 얼굴이라고 보여주고 오라고 콘도가 성화여서 소고는 하는 수 없이 둔소를 나섰지만 내키지는 않았다. 누이에게 얼굴을 보여주라니, 여기 없는 사람에게 뭘 어떻게 보여주란 말인가. 묘지에 그녀가 있다고? 껍데기를 묻었을 뿐인데 거기에 이제 와서 그녀가 있을 리 없지 않은가.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대체 어디서 구했는지 매운 센베까지 챙겨서 쥐어주는 콘도의 기대를 저버릴 수도 없었기에 그는 말없이 둔소를 나왔다. 확실히 무의미한 일을 하러 멀리까지 가는 것보단 가까이에 가는 게 나은 것도 같았다. 카부키쵸면 걸어갈 수도 있는 거리니까.
오랜만에 사복 차림으로 걷는 카부키쵸 거리는 예전과 똑같이 저속하고 소란스러웠다. 마치 사람 하나가 사라진 것이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전과 똑같았다. 당연한 일이다. 실종, 살인, 사고사. 신센구미로 정보가 들어오는 죽음만 해도 얼만데, 고작 시골에 살던 여자 하나가 죽은 걸로 무언가가 변할 리가. 겨우 그것뿐인 죽음이었다. 그것이 누구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더라고 해도, 고작 그뿐이다.
해도 중천에 떠서 아무리 하루의 시작이 늦은 환락가라도 여기저기서 이미 일하기 시작한 호객꾼들이 큰 소리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려고 하고 있었다. 높은 목소리가 소고에게도 무언가 말을 걸며 소매를 슬쩍 잡았지만 그렇게 힘이 들어간 것도 아닌 하얀 손은 금세 떨어졌다. 그녀들에게도 행인이 손님이 될 사람인지 아닌지 보는 눈 정도는 있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지금의 소고는 명백히 후자였다. 눈 밑에 검은 자국이 생길 정도까진 아니었지만 척 봐도 소년의 얼굴은 그 잘생긴 모양이 퇴색할 정도로는 피로가 짙게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눈이. 정면이 아니라 측면에서 그 눈동자를 본 여자는 슬쩍 힘을 줬던 손가락을 얼른 풀어버릴 수밖에 없었다. 지도층이라는 인간들부터 바닥의 그 밑바닥까지, 수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여자였지만 아무리 그래도 저런 눈을 하고 있는 사람과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당장이라도 칼바람으로 모습을 바꿀 것 같은 바람은 아슬아슬하게 가을의 그것이었다.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것에 소고는 문득 하늘을 보았다. 구름 한 점 없지는 않지만 높은 하늘이었다. 걸음이 느려지는 것을 의식하고 얼른 다시 고개를 떨어뜨린다. 아니다. 이런 생각은, 나중에라도 얼마든지. 걸음을 재촉한다.
큰길을 지나버리면 의외로 그렇게 시끄럽지도 않은 것이 카부키쵸의 신기한 점이다. 물론 괜히 밤의 거리라고 불리는 만큼 눈이 가는 거의 모든 곳에서 술집을 찾을 수 있는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골목에 있는 술집들은 점심 장사는 아예 할 생각들이 없는지 반 정도만 셔터를 올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상경한 이후로 제 집 마당 마냥 누빈 골목과 골목 사이를 지나다니며 소고는 최단 거리로 목적지를 향했다.
묘지를 특별히 두렵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주 어렸을 때라면 또 모르지만, 최소한 소고가 기억할 수 있는 한은 공포를 느낀 적이 없다. 어렸을 때 누이의 손을 잡고 간 그곳은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부모님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고, 상경한 후로는 하나하나 기억을 곱씹게 하는 전우들이 겨우 쉬게 된 곳이었다. 때문에 묘비가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서있는 공원에 발을 들이고도 소고의 발걸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다만 콘도에게 듣기만 했을 뿐 한 번도 실물을 본 적이 없는 묘비가 어디 있는지 찾으러 눈을 이리저리 돌릴 뿐이다.
‘오키타 가의 묘’를 찾는 데 크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가장 최근에 묘비를 세워서 아직 한 번 뒤엎은 땅이 덜 마른 곳. 손으로 만지면 아마 조금은 축축할 흙 위에 소고는 섰다. 한자로 글씨가 새겨져 있는 묘비는 소고가 고향에서 봤던 것과 같은 모양이었다. 좋게 말하면 대범하고 나쁘게 말하면 하는 일이 대체로 엉성한 구석이 있는 콘도지만, 의외로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쓴다. 생긴 거랑 안 어울리게. 소고는 이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이 된 남자를 생각하고 웃으려다가, 입 꼬리가 안 올라가는 것을 자각하고 바로 포기했다. 대신 바로 그 남자가 꼭 가져가라며 챙겨준 매운 센베 봉지를 묘비 앞 작은 단 위에 내려놓았다. 의미가 있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콘도는 분명 이렇게 하기를 바랐을 터다. 제단 위에 매운 센베 봉지 하나만 올라가 있다는 기묘한 광경에서 소고는 눈을 떼고 똑바로 앞을, 묘비를 보았다.
손을 뻗는다. 차가운 공기 속에 서있는 차가운 돌은 당연히 오싹한 한기밖에는 전하지 않았다. 누이는 손이 찬 사람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혈액순환이 좋지 않았으리라. 안 그래도 여자 중에는 손이 찬 사람이 많다는데, 그 중에서도 병약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소고의 손을 잡고는 “소-쨩은 손이 따뜻하네.”라며 웃어 주었다. 잠시 잡고 있으면 자신의 체온이 누이의 손으로 전달돼 그녀의 손도 같은 온도로 변한다는 것을 소고는 철이 들기도 전부터 알고 있었다. 어쭙잖게 주워들은 말로 손이 찬 사람은 마음이 따뜻하다는 소리를 하면 소녀처럼 쑥스러워했더라.
돌은 차갑기만 했다. 손바닥을 아무리 대고 있어도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 차가움 속에 감추고 있는 따스함도 없었다. 그저 차갑게, 거기 서있을 뿐이다. 알고 있었다. 그 사람이 여기 없으니까 당연한 일이다. 소고는 오히려 냉기가 전해져 차가워져 버린 손바닥을 떼고 대신 하늘을 보았다. 맑고, 군데군데 구름이 떠다니는 높은 가을 하늘이었다.
이렇게 높으면, 누님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는데.
하염없이, 끝 같은 건 보이지도 않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껍데기 속에는 없었다. 그 사람이 지옥에 갈 리도 없으니 땅 속에도 없다. 그러니까 이 하늘 어디엔가 있어야 할 터인데, 하늘은 너무 넓고 높기만 했다. 아무리 찾아도 그 사람이 없는 하늘은 더 이상 보고 싶지도 않아서, 눈도 감아버린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 버렸다.
두려웠다. 그 사람이 죽으면 전부 다 무너져 내릴 줄 알았다. 죄악감으로 숨이 끊어지는 줄 알았다. 분노와 슬픔으로 짓눌려 그대로 터져버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정작 그 사람이 죽고 나자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렸다. 이게, 아닌 것 같은데. 당혹스러워서 누이를 찾으려고 해도 보이지 않았다. 말 그대로 ‘잃어 버렸다.’
분명 이것이 도망친 것에 대한 벌이라고, 멍하니 생각했다. 아마 그 때 그 자리를 지켰더라면, 확실히 누이의 죽음이라는 것을 똑바로 안았더라면 이렇게 되지 않았을 것이다. 공포와 분노에 발광을 하든, 슬픔과 죄책감에 폐인이 되든 확실하게 지금의 자신보다는 더 나은 결과가 있었을 터였다. 넘어져야 일어날 수도 있다. 그 사람이 등을 떠미는 것을 피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 힘에 앞으로 달려갈 수도, 넘어질 수도 있는 거였다. 그걸 피했기에 이렇게, 길 잃은 아이 마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을 질질 끌며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돌고만 있다. 그 사람이 없으면 넘어질 수도 달릴 수도 없는데 이젠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도망이나 친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벌이다. 이대로 계속 살아가는 걸까. 숨을 쉬고 있으니까 죽지는 않겠지만, 이 상태로 또 적이 오면 죽이고, 죽이고, 죽이고, 그렇게? 계속? 하지만 내가, 그럴 자격이 어디에 있다고…….
“어이.”
갑자기 가까운 곳에서 들린 목소리에 소고는 놀라 눈을 떴다. 소리의 방향은 자신의 왼쪽, 조금 아래. 시선을 향하자 그곳에는 눈을 감기 전까지 없었던 것이 하나 늘어 있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강렬한 붉은 색이었다. 목소리부터 의심할 여지할 것 없이 남성인 그의 눈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 것. 새하얀 피부와 새하얀 머리카락 사이에서 존재감을 주장하고 있는 그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보는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눈두덩을 덮고 눈꼬리에서 가늘어지면서 이어져 점점 사라지는 붉은 연지. 아니, 뺨이나 입술이 아니라 눈가를 장식하는 것이니 정확히는 연지가 아닐지도 몰랐지만 화장품에 대한 지식이 없다시피 한 소고로서는 명칭 같은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남자가, 붉은 눈 화장. 물론 카부키쵸에도 그런 가게가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본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선명한, 이렇게 눈길을 사로잡는 붉은 색은 없었다. 아니, 어떤 여자가 같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고 해도 이만큼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으리라. 일반적인 의미로 ‘어울리’냐면 그것은 아니었지만 묘하게 사람 눈을 잡아끄는 힘이 있었다. 왜일까 생각을 하기도 전에 엄밀히는 다르지만 역시 붉은 입술이 다시 열렸다.
“그거, 공물이냐?”
“그거”라면서 남자가 턱으로 가리킨 쪽을 본다. 콘도가 쥐어준 매운 센베 봉지다. 미츠바가 이곳에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 치고 준 콘도의 의도는 공물에 맞기에 소고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에 남자가 “공물로 매운 센베라니…….”하며 입 속으로 중얼거리더니.
“먹어도 돼?”
그 질문에 소고는 금방 답할 수 없었다. 남자는 소고에게 허락을 구하고 있지만 소년으로서는 이 센베의 주인이 자신이라는 생각은 없었다. 사온 것은 아마 콘도다. 그러니 일단 콘도의 소유물일 터지만 콘도도 자기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으리라. 그는 이것을 ‘미츠바’에게 갖다 주라며 소고에게 건네 줬으니까. 그 말을 따라 여기까지 와서 다른 사람들처럼 단 위에 올리기까지 했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에 센베의 주인은 없다. 그럼 이 센베는 대체 누구 거라고 해야 할까? 소고가 허락을 해도 되는 것인가? 아니, 근본적으로 보통 공물을 먹나? 그것도 남이?
“……아.”
소고가 생각하는 동안 대답을 기다리기 질렸는지 옆에서 손이 나타났다. 까만 바탕에 붉은 물결무늬 소매와 그 아래의 새하얀 손. 남자 손답게 큰 그것이 매운 센베 봉지를 잡더니 본체 쪽으로 휙 사라졌다. 곧장 포장을 뜯는 소리가 들리고, 수없이 들어서 익숙한 까득 하는 소리.
“읏……!”
한 입 베어 문 남자는 소리 없는 비명 같은 것을 한 번 지르더니 크게 숨을 뱉고서 센베의 나머지 부분을 먹어 치웠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심호흡을 하더니 곧.
“엄청 맵잖아!”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소고에게 항의했다. 일련의 동작을 말없이 보고 있던 소고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심정이었다. 대체 뭐야, 이 녀석. 하지만 그에게 일방적으로 항의를 받을 이유도 없기에 입을 연다.
“맵다고 써 있잖아.”
“아니, 보통 맵다고 써 있어도 이 정도로 맵지는……! 누가 공물로 이런 걸 올리냐?! 나 매운 거 별로거든?!”
그건 진심으로 소고가 알 바가 아니다.
“당신이 맘대로 먹었잖아. 애초에, 누구 허락 받고 먹고 있는 건데? 그거.”
콘도까지는 아니더라도 히지카타와 동년배 정도로 보이는 남자는 확실히 소고보다 나이가 10살 쯤 많을 터였지만 존대를 해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원래 그렇게까지 예의가 바른 편도 아니고, 남의 무덤 공물을 맘대로 먹는 인간에게 존대해줄 필요성도 없어 보이고. 하지만 남자는 그런 거에 신경 쓰지 않는 건지 아니면 센베가 너무 매워서 정신이 없는 건지 특별히 뭐라 말하지 않고 두 번째 센베를 베어 물며.
“주인 없는 걸 누구 허락 받고 먹어?”
당연한 듯이 그렇게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 생각은 얼굴에 바로 티가 났는지 남자는 곁눈으로 슬쩍 소고를 보더니 무엇을 확인하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센베 봉지의 성분표를 보며 입을 열었다.
“물어 봤는데 바로 대답 안 하는 거 보면 최소한 네 건 아니잖아.”
그야…….
“그럼 그 ‘오키타 가의 묘’ 공물이라는 건데.
이거 주인 없잖아, 여기.”
소고는 숨을 들이쉬고, 잠시 뱉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센베의 주인은 물론, 오키타 미츠바다. 그리고 그녀는 분명 여기 없다. 어디에도 없다. 껍데기는 있지만 그건 오키타 미츠바가 아니기에 주인도 될 수 없다. 그래서 대답을 못 한 것이 사실이지만,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장례식도 무덤도, 모두 산 자를 위한 것. 죽은 사람이 거기 있다고 믿고, 죽은 사람을 대하듯이 거기에 공물을 올리는 것이다. 부모님의 묘에 함께 갔던 미츠바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 센베를 챙겨 준 콘도가 그랬던 것처럼. 그 감각을 소고가 공유하지 못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소고는 다시 한 번 남자를 빤히 보았다. 아까는 눈 화장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잘 보면 그것 외에도 꽤나 특징적인 사람이었다. 높이 묶은 새하얀 곱슬머리에 새하얀 피부. 머리카락만이 아니라 눈썹에 속눈썹까지 흰색인 것을 보면 염색이 아니라 자연색이다. 아무리 그래도 30은 안 됐을 나이에 새치로 저렇게 다 샜을 리도 없으니 정말로 처음부터 저 색인 것이겠지. 거기다 눈은 붉은 색. 아마 태생적으로 색소가 부족한 것일 터다. 하얀 머리카락과 피부, 붉은 입술과 눈동자와 눈 화장이 완벽하게 색채 대비를 이루는 얼굴이었다. 어떤 의미로 참 철저하다. 그야 저만큼 하야면 붉은 화장이 강렬하게 인상에 남을 수밖에 없다.
화장만큼이나 의상도 이목을 끄는 것이었다. 한쪽만 똑바로 걸치고 있는 검은 키나가시. 까만 바탕에 붉은 색으로 모양이 들어가 있는 옷은 그것을 걸치고 있는 남자가 지나치게 하얗다는 것과 맞물려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키나가시 안에 입고 있는 인너도 검정 바탕에 붉은 테. 사이로 살짝 보이는 목과 가슴께도 남자치고는 보기 드물 만큼 하얗다.
이만큼 화려한 의상에 눈 화장, 포니테일. 거기다 남자는 남자가 눈 화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로 혐오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는 괜찮은 생김새였다. 키나가시에 가려진 부분은 보이지 않지만 반팔 인너에서부터 뻗어있는 팔이나 속살은 쓸데없는 지방이 없는 근육질이다. 이 정도로 조건이 갖춰지면 남자가 어떤 직업을 갖고 있는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사이고가 카부키쵸의 사대천왕 중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니 그 세력은 어마어마하고, 그 중에 이런 사람이 있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왠지 모르게 어디에선가 본 것 같은 것도 그 탓일 터다. 좁은 카부키쵸에서 지나다니다보면 한 두 번은 마주쳤겠지.
소고가 남자를 관찰하는 동안 센베를 다 먹어버린 듯한 남자는 마지막 센베를 삼킴과 동시에 크게 한숨을 쉬었다.
“하- 매워 죽는 줄 알았네.”
그렇게 매우면 안 먹으면 될 걸. 생각한 순간 마음이라도 읽은 듯이 남자가 고개를 홱 들어 쏘아보았다. 신센구미의, 제복을 입지 않으면 야쿠자인지 경찰인지 구분이 안 가는 험악한 얼굴들을 매일 보고 살아서 물론 이 정도는 무섭지도 않지만.
“너, 책임 져라.”
이건 또 무슨…….
“사복인 거 보니 오늘 비번인 모양이고, 어차피 할 일 없지?” 대복을 입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아볼 정도로는 오키타 소고는 유명인인 모양이었다. 그야 그만큼 사고를 쳐서 허구헛날 신문에 나면 그럴 만도 하지만. 아니, 그게 아니라. 비번이 건 맞고 할 일도 없지만…….
“가자, 경단집.”
……이 녀석, 지구인 같이 생겼지만 실은 천인이 아닐까…….
소고는 옆의 묘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가 일어선 남자를 빤히 봤다. 분명히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말이 전혀 안 통하는 것 같은 이 기분은 뭘까, 대체. 책임? 경단집? 하?
“미래의 당분왕인 나에게 매운 센베를 먹인 책임은 경단집에서 한 턱 쏘는 걸로 쿨하게 면제해 줄 테니까 가자고.”
말하며 남자가 손을 뻗어왔다.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도대체 영문을 모르겠고, 남자가 하는 말이 무슨 논리인지는 짐작도 안 가며 이해할 생각도 없었지만 확실하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기에 피하면 그만이었다. 아무리 사복 차림이라 칼도 안 차고 나왔다지만 그 정도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아까 한 말이. 여기에 센베의 주인이, 없다고.
소고의 손목은 남자의 손에 바로 잡혀 버렸다. 그리고 당연한 듯이 발을 내딛는 남자의 힘에 이끌려 한참 전부터 한 곳에만 머무르고 있던 발이 툭, 나간다.
“아, 참고로 나 매운 건 몰라도 단 건 엄청 많이 들어가니까 각오해라.”
대장님. 돌아보며 덧붙이는 그 얼굴이 씩 웃고 있었다. 아니 그러니까 이 녀석은 아까부터, 대체가 사람 대답이라는 걸 듣지 않는다. 물론 지금의 자신은 어떤 것을 물어도 똑바로 대답할 거라는 보장이 없기에 그게 더 나을지도 몰랐지만.
하얀 머리통이 다시 앞을 향한다. 조금 앞에서 짧은 포니테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