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호님께 써드린 것.
적→녹, 황→청 기반 적+황.
분명히 중간까진 살벌했는데...
“료타.”
20명 가까이 되는 1군 멤버들의 연습하는 소리에도 묻히는 일 없이 자신에게 똑바로 날아오는 목소리에 키세는 고개를 돌렸다. 머리 하나 정도 낮은 곳에 있는 밝은 적색. 어느 샌가 익숙해져버린 색이 다른 눈에, 익숙해지지 않는 위압감을 느끼며 키세는 “아카싯치.”라고 테이코 중학교 농구부 주장의 이름을 불렀다.
“오늘은 모델 일이 없나 보구나.”
“하하, 그렇게 맨날 일 들어오면 나 금방 부자 되게요? 그리고 촬영은 꽤 신경을 써야 돼서 연일로 하긴 피곤함다.”
“그래.”
넉살 좋게 웃어 보이는 키세였으나 아카시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관심 없겠지, 키세의 모델 이야기 같은 건. 그의 승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분야다. 그래도 옛날 같으면 조금은…… 아니, 됐다. 소용없는 생각이다.
“그럼 료타, 오늘 연습 후에도 별다른 일정은 없는 거겠지?”
“에…… 반 애들이 같이 노래방 가자고 하기는 했슴다…….”
“그건 선약에 들어가나?”
설사 선약이라도 당장에 취소시킬 사람이 뭘 묻는 건지.
“그런 거 아님다. 그냥 같이 안 갈래? 했던 것뿐이니까요. 솔직히 그런 거 한 번 가주면 다른 그룹 애들도 같이 가달라고 해서 피곤하고-.”
“그래. 다행이구나.”
아카싯치도 꽤 맥락 무시하고 자기 말만 하는 경향이 있다니까요. 생각하지만 입에는 내지 않는다.
“그럼 연습 후에 나랑 어디 좀 가도록 하지.”
“에…… 어딜 말임까……?”
“네가 자발적으로 갈 일이 없는 곳, 이라고 해두마.”
……안 좋은 예감밖에 안 듬다…….
키세는 자기 할 말을 다 하고서는 등을 돌려 유유히 걸어가는 아카시의 등을 잠시 보고 있다가, 그가 오기 전까지 하고 있던 드리블을 재개했다.
뭐 잘못한 거 있었나. 키세가 주장과 부주장 두 사람에게 혼나거나(주로 아카시가) 잔소리를 듣는(주로 미도리마가)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만 요즘은 혼날 일을 한 기억이 없다. 애초에 동아리 연습에 나와야 혼날 일이 생기든 말든……. 오늘도 오랜만에 나왔지만 그가 반갑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동경하는 사람도 존경하는 사람도 연습 풍경에서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압도적인 신장으로 한 번에 찾을 수 있는 보라색 머리카락도. 인사를 다 하는 부주장만이 전과 같은 모습으로 묵묵히 슛 연습에 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게 반가워서 괜히 한 번 말을 걸었다가 까이기만 했지만.
드리블하다 대충 던진 공은, 그에 소요된 노력에 반해 아주 쉽게 골대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동이리 활동 종료 후.
“아카싯치…… 나도 서점 정도는 가끔 가는데요…….”
“그래? 하지만 나는 네가 참고서로 공부를 하거나 독서를 하는 걸 본 기억이 없다만.”
“아니, 별로 서점에서 참고서랑 문고판만 파는 거 아님다. 잡지도 팔고 만화책도 팔고 그런다구요.”
“그런가 보구나.”
설마 혼자서 천천히 서점을 둘러본 적도 없는 건가, 이 사람. 키세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하지만 대상이 아카시라면 아주 거짓말도 아닐 것 같은 게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앞장 서는 주장의 뒤를 따랐다. 대형 서점의 체인 중에서도 큰 규모에 속하다 보니 키세가 보기에 책장과 책장은 거의 미로였다. 그나저나 경제서라니, 평생 이렇게 가까이서 볼 일도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전에도 얘기한 것 같지만,”
신중한 표정으로 책장을 둘러본다 했더니 갑자기 본제였다. 키세는 책장에 기대면 혼나겠지 하고 생각하며 아카시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신타로의 연습을 방해하는 건 좋지 않아, 료타. 녀석의 슛은 특히나 세밀한 조정이 필요하니까. 너와는 플레이 스타일도 완전히 다르고. 놀아달라고 조를 생각이라면 차라리 집에 가고, 지도가 필요하다면 나한테 말해라.”
“……하.”
절로 입에서 공기가 빠져나왔다. 그리고, 막을 새도 없이.
“미도리맛치가 요즘 안 놀아준다고 나한테 화풀이 하는 건 번지수 잘못 찾은 거 아님까?”
그를 상대로는 좀처럼 뱉는 일이 없는 예리한 말이 쏟아졌다. 그제야 다시 키세를 보는 색이 다른 눈. 그 눈에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카메라에 비치는 것이 일인 키세는 잘 알고 있었지만 일그러진 표정을 어떻게 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미도리맛치랑 한 마디라도 더 하고 싶으면 나한테 이럴 게 아니라 가서 단팥죽이라도 주면서 ‘미도리마’라고 불러주는 게 나을 걸요?”
‘신타로’가 아니라.
키세의 말이 끝나자, 책등의 위를 훑고 있던 아카시의 손가락이 그 중 한 권을 천천히 빼냈다. 팔락팔락 넘어가는 책장. 새 책 특유의 냄새와 함께 키세로서는 봐도 의미를 알 수 없는 그래프들의 향연.
“너야말로, ‘미도리마’한테 달라붙을 일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연습해서 강해지는 게 좋을 거다, ‘키세’.”
‘아오미네’가 돌아봐 주길 바란다면, 이다만.
“설사 지금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게 조금 힘들다고 해도, 내가 계속 승리하는 이상 신타로는 내 뒤를 쫓아올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 언제나 다이키 뒤에 있는 너에게는 상상이 가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한다만.”
탁 소리와 함께 책이 닫혔다. 키세는 자신의 입이 숨도 뱉지 못하고 이를 꽉 깨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아카싯치, 꽤 성격 나빠졌네요.”
“고맙구나. 하지만 너 정돈 아냐.”
“…….”
“자, 그럼 내 책은 이걸로 하고…… 네 책을 고르러 가도록 하자, 료타. 아동서적은 이쪽이야.”
“엣, 아ㄷ…… 하?!”
“방금 말했을 텐데? 신타로한테 괜히 매달리지 말라고. 초등경제교육 책이라도 하나 사줄 테니 일이 없는 날에 연습하기 싫으면 읽도록.”
“초등……! 나 돈 벌거든요?!”
“버는 것과 관리하는 건 다른 거야. 그리고 조용히 해라.”
“아카……!”
“조용히.”
돌아보며 한 마디. 그 기백에 키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꽤 신경에 거슬린 거겠지. 자신의 말이.
……앞으로는 미도리맛치 건드리지 말아야지. 성큼성큼 앞서 나가는 아카시 뒤를 하는 수 없이 따라가며 키세는 속으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