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흑화데이 기념.
미도리마가 자주 찾는 조용한 카페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4인석. 분명 정원수만큼 앉았음에도 불과하고 비좁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 기분 탓이 아니었다. 평균 신장이 191.5cm에 달하는 성인 남성이 넷 앉아 있으면 그야 좁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 네 명에게 있어서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신장이 또래 평균을 한참 웃도는 건 초등학교 때부터 늘 있던 일이니까. 따라서 거기에 대해 새삼스럽게 비좁다고 느끼는 건 아니다. 문제는, 키세만큼 언제나 하이 텐션은 아니지만 절대 우울한 편은 아닌 나머지 셋 중 한 사람이 지금 모든 것을 끌고 지옥으로 떨어질 기세로 저기압인 데에 있었다.
“야, 어떻게 좀 해 봐.”
옆자리의 키세를 팔꿈치로 툭 치며 말한 아오미네였으나 금발은 정신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왜 그걸 나한테 말해요?! 불러낸 미도리맛치가 어떻게 해야 할 거 아님까!”
화살은 다시 키세 정면의 미도리마에게로. 하지만 미도리마는 평소처럼 뚱한 표정으로 안경을 올리며.
“그게 됐으면 너희를 부르지도 않았던 것이야. 잔말 말고 어서 네 사명을 다해라.”
“이게 내 사명이에요?!”
“여기서 지금 너밖에 더 있냐?”
“타카오 군은?!”
“연락했더니 3분 쯤 혼자 웃다가 출석만 부르고 나온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 때까지 네가 어떻게 하는 것이야. 너희와 타카오를 부른 것으로 난 인사를 다했다.”
“인사 거기서 끝?! 진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좋을 것 같은데?!”
소리치는 키세였지만 물론 미도리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의대생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의자에 아주 등을 기대버리더니 눈으로 키세에게 ‘그러니까 어서 네가 어떻게든 해라.’라며 무언의 압력을 주기 시작했다. 옆에는 압력은 주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생각도 없는 듯, 농구 외에는 늘 그렇듯이 별 의욕이라는 게 보이지 않는 아오미네.
타카오 군, 빨리 와요……! 그리고 내 자리랑 바꿔 줘!
타카오가 들으면 혼자 한참 웃은 후에 거절할 것 같은 기도를 하면서 키세는 조심스럽게 저기압의 생성 원인-카가미에게 말을 걸었다.
“카, 카가밋치-. 그렇게 계속 엎드려만 있어도 우리는 무슨 일인지 몰라요……?”
반응, 없음. 아니, 예상 안 한 건 아니지만……. 그럼…….
“카가밋치가 울면서 전화할 정도면 엄청 큰일이잖아요? 다른 건 몰라도 쿠로콧치 관련이라면 우리도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움찔. 하고 카가미의 어깨가 흔들린 것은 ‘쿠로콧치’라는 말이 나온 순간이었다. 아, 역시 쿠로코 관련이다. 물론 미도리마가 전화로 “녀석이 이만큼 침울해질 만한 문제는 쿠로코밖에 없는 것이야.”라고 거의 확실한 예상을 하기도 했지만. 그렇다면…….
“중학교 때부터 벌써 거의 10년 정도 친구라구요, 우리! 물론 거리로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카가밋치가 더 가깝지만, 그거랑은 다른 거리에서 보이는 게 있달까……. 하여튼 의외로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올 거라고 생각함다! 사람이 셋 모이면 무…… 무…… 문…….”
“문수보살의 지혜! 그럼 네 명이면 석가모니인가? 갸하하하! 해서, 석가모니 대타 타카오모니 도착! A-yo 카가미!”
앞 글자 이후로 나오지 않던 키세의 말을 받아 화려하게 등장한 것은 물론 대학생인 지금도 고등학생 때와 변치 않는 하이 텐션을 자랑하는 타카오다. 자연스럽게 대화에 참여하면서 반대편 테이블에서 의자를 갖고 와 상석에 앉는 타카오의 스킬에 키세는 지금이라면 ‘타카옷치’라고 불러도 좋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참고로 나중에 이 얘기를 전해들은 타카오의 반응은 “필욬ㅋㅋㅋㅋㅋ없엌ㅋㅋㅋㅋㅋㅋㅋ”였다.
“빨리 빨리 못 오냐, 타카오.”
“수업까지 째고 왔는데 오자마자 이 냉혹한 코멘트! 역시 전 에이스님에 현 의대 수석! 보고 싶었엉~ 신 쨔앙~.”
“콧소리 내지 마라. 소름 돋는 것이야.”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얼굴을 들이미는 타카오를 가차 없이 거부한 미도리마는 여전히 테이핑을 하고 있는 왼손으로 그의 얼굴을 붙잡더니 그것을 그대로 카가미 쪽으로 끌었다.
“헛소리 할 시간이 있으면 이 녀석을 어떻게 해라. 예상은 했지만 키세로는 역부족이다.”
“미도리맛치가 시켰잖슴까! 시켜놓고 말을 그렇게 해요?!”
“흥. 그런 건 똑바로 사명을 수행한 후에 할 말이다. 타카오.”
“네네~. 해결사 타카오 쨩이 왔으니까 이게 걱정할 거 없어, 신 쨩!”
죽은 동태눈의 아저씨 같은 타이틀이었다. 몸을 뒤로 젖혀 카가미와 이야기하기 편하게 해준 미도리마와 “미도리맛치가 날이 갈수록 나를 막 대함다…….”라고 훌쩍이면서 아오미네에게 매달리는 키세, 그걸 귀찮아하면서도 받아주는 아오미네를 뒤로하고 타카오는 카가미에게 말을 걸었다.
“카-가미. 오랜만에 보는데 얼굴도 안 보여줄 거야? 나 나름 걱정해서 서둘러 온 건데. 물론 신 쨩이랑 키세, 아오미네도 그렇고. 우울한 건 알겠는데, 그렇게 계속 엎드려만 있어도 나쁜 생각밖에 안 들어. 문수보살의 지혜만큼 대단한 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얘기만이라도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목소리도 들려줄 겸 해서 안 해줄래?”
부드러운 표정과 목소리, 나긋나긋한 말투. 울던 아이가 그치고 여자라면 그 자리에서 사랑에 빠지고도 남을 그 화술은 카가미의 고개를 들게 하기에 충분한 모양이었다. 키세와 아오미네가 속으로 ‘HSK 타카오……!’라며 전율하고 그걸 안 미도리마가 자기 일도 아니면서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가운데, 카가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요약하자면, 전 세이린의 명물 파트너 겸 부부는 거하게 사랑싸움을 한 모양이었다.
청소를 하다 지금은 쿠로코의 서재가 된 방에 들어간 카가미는 거기에서 전날 자기가 코코아를 타준 기억이 있는 머그컵을 발견했고, 설거지를 할 생각으로 잔을 들었다. 그런데 당연히 비었을 거라 생각했던 그 머그컵에는 쿠로코가 먹다 남은 코코아가 조금 남아 있었고, 빈 잔이라 전제한 카가미의 움직임에 버티지 못하고 머그컵 안에서 벗어나———책상 위에 펼쳐져 있던 쿠로코의 책을 적셨다. 놀란 카가미가 얼른 컵을 내려놓고 티슈로 닦아보았지만 말 그대로 물은 이미 엎질러졌다. 하얀 종이에 스민 검은 자국만은 어떻게 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강의가 끝나 집에 돌아온 쿠로코는 예상대로 화를 냈다. 사정을 설명하고 미안하다고 사과한 카가미였으나 남들이 볼 땐 무표정으로 보일지 몰라도 카가미가 보기에는 확실히 기분 나쁜 것이 보이는 쿠로코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리고 이때까지는, 분명히 카가미도 순순히 용서를 구할 생각이었다.
“왜 제 서재에 맘대로 들어가신 건가요.”
“왜냐니, 그야 당연히 청소하려고…….”
“애도 아니고 혼자 청소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괜히 들어오지 말라고 저번에도 말씀 드렸잖습니까. 카가미 군이 청소하면 책 위치가 뒤바껴서 찾기 힘들단 말입니다.”
“……그럼 네가 똑바로 치우면 되잖아. 볼 때마다 책상이고 바닥이고 책이 쌓여있으니까 하는 수 없이 내가 치우는 거 아냐.”
“그건 청소할 단계가 아니라서 그런 겁니다. 작업 중에는 이 책 저 책 찾아보는데 일일이 치우면서 글 쓸 순 없잖습니까. 내버려두면 제가 알아서 하니까 남의 물건 건드리지 좀 마세요.”
“남……! 너 진짜 말 그렇게 할래?! 실수로 책에 코코아 좀 쏟은 거 갖고……!”
“당신이야말로 그 책이 어떤 책인지 알기는 하나요? 아리카와 히로 신작 초회호화한정판입니다! 제가 예약 발표 때부터 갖고 싶어서 아르바이트까지 하면서 돈 모아 산 거라구요! 거기다 한정판이라 이젠 구할 수도 없습니다! 그걸 저 꼴을 만들어놓고……!”
“그렇게 대단한 책이면 펼쳐놓지 말고 꽁꽁 싸매서 어디 숨겨두든지! 애초에, 네가 코코아 남겨두지 않았으면 이런 일도 없었잖아! 나도 네 서재 안 들어갔고!”
“지금 제 탓이라는 건가요?! 당신이 쓸데없이 남의 서재에 들어와서 건드리니까 이렇게 되는 거 아닙니까!”
“너 또……! 내가 들어가고 싶어서 들어갔냐고! 네가 컵이고 책이고 안 치우고 책상 위에 두니까 이렇게 된 거잖아!”
“————평행선인 것 같네요. 이 이상 이야기해도 무의미할 것 같으니 그만 됐습니다.”
용서를, 구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분명, 처음에는. 하지만 결국 가면처럼 차가운 무표정이 된 쿠로코가 발소리까지 내며 서재로 가더니 쾅 소리를 내며 문이 닫히는 결과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카가미도 역시 쫓아가서 다시 사과할 생각이 안 들 정도로는 화가 나고 말았다.
그리고 시작된 냉전은 사귄 이래 최대 장기전이 되었다. 원래 농구 외에는 맞는 게 없다고 서로 공언하는 두 사람이다. 싸우는 일도 많지만 그만큼 빨리 화해했는데, 이번만은 그러지 않았다. 카가미가 거실에 있으면 쿠로코는 서재에서 나오지 않았고, 카가미가 침실에 들어간 후에야 거실에서 다시 TV 소리가 들렸다. 킹사이즈의 침대는 계속 카가미 혼자 누웠고, 쿠로코는 서재에 있는 간이침대에서 자는 모양이었다. 어느 한 쪽이 문밖으로 나서도 배웅하는 말은 없었고, 돌아와도 반기는 것은 침묵뿐이었다.
아침 인사도 잘 자라는 말도 사라진 집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은 “잘 먹겠습니다.”와 “잘 먹었습니다.”뿐이었다. 동거를 시작했을 때 한 ‘싸워도 밥은 꼭 같이 먹는다’라는 약속만은 지켜지고 있는 것이다. 카가미는 말없이 쿠로코 몫까지 준비했고(그래봤자 양은 별로 다르지 않지만), 쿠로코도 식사 예절에 필요한 말만 입에 담으면서도 식탁에 앉았다. 그러나 식사 내내 말은커녕 눈도 마주치지 않았고, 식사 후에는 카가미가 “잘 먹었습니다.”라는 말에 대답도 하기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버렸다.
사실 냉전이 시작된 지 일주일도 안 돼서 카가미는 후회하기 시작했다. 같이 있는 게 좋아서 같이 사는 건데, 지금은 한 집에 있을 뿐 얼굴도 제대로 못 보는데다 마주하고 있어도 불편하기만 하다. 이게 아닌데. 쿠로코랑 이렇게 지내고 싶은 게 아니었다. 얘기가 하고 싶은데. 그냥, 오늘 있었던 일을, 특별히 재미있었던 일도 없었고 슬픈 일도 없었지만,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실없는 이야기로 조금이라도 웃어주면, 그러면, 그걸로.
하지만 카가미 나름의 노력은 전부 물거품이 되었다. 쿠로코가 있을 때 일부러 거실에 가면 곧 특기인 미스디렉션으로 기척을 지운 후 서재로 사라져버렸고, 혹시라도 오지 않을까 해서 일부러 침실 문을 열어놓고 침대의 반을 비워놓아도 아침까지 차갑기만 했다. “잘 갔다 와.”는 입술이 떨어지는 것보다 문이 먼저 닫혔고, 쿠로코 취향에 맞춰 탄 커피는 결국 카가미 손 안에서 식어버렸다. 그걸 반복하기를 며칠. 카가미의 사고 회로는 평소의 그로서는 생각할 수도 없을 만큼 비관적이 되어 있었다.
쿠로코는 벌써 자신에게 정이 떨어져버린 게 아닐까. 맘대로 서재에 들어가서 소중한 책을 더럽혀놓고 사과도 똑바로 못하는 연인 같은 건 이젠 애정이 식었단 소리를 들어도 당연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쿠로코가 “제 눈엔 예뻐 보이니 문제없습니다.”라고 해서 그에게 안기고는 있지만, 애초에 ‘카가미 타이가’의 어디에 예쁜 구석이라는 게 있는지도 의문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190cm대에 달했던 키는 그 이후로 몇 센티 안 되지만 더 커졌고, 계속된 훈련으로 농구 선수로서의 몸도 이젠 완성돼서 그 때 같은 미성숙함도 사라졌다. 집안일은 이럭저럭 하지만 그 정도 할 수 있는 여자도 많을 테고, 이젠 남자 평균키는 되는 쿠로코보다 작고 예쁜 여자도 얼마든지……. 그럼 쿠로코는, 더 이상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쿠로코는 이대로 집을 나가버리는 게 아닐까. 아직 서재의 책을 정리하지 않았으니까 있는 것뿐이고, 그것만 정리하면 금방이라도…….
아침 연습을 끝내고 혼자 집에 있던 카가미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그건, 안 된다. 어떻게든 붙잡아야 하는데. 하지만, 어떻게?
마음이 약해졌을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예나 지금이나 의형제였지만, 한 살 위의 형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미국으로 돌아간 지 오래다. 시차를 생각하면 지금 전화하는 건 매우 비상식적인 행동이었다. 그 다음으로 생각난 건 고등학교 최고 학년이 되기 전가지 신세를 져서 지금도 거역할 수 없는 세이린의 여장. 하지만 그녀는 카가미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공부(후배들의 부탁으로 딱 한 번 전공서적을 보여줬으나, 일단 카가미는 100년이 걸려도 자기에겐 불가능하다는 것만 알았다.)를 하느라 바쁜 몸이었다. 선배인 요괴 사토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동기인 동글눈썹 얀데레한테만은 절대 질 수 없다며 전국대회 결승전 같은 투지를 불태우는 그녀는 그 좋은 머리로도 학과 공부로 벅찬 모양이었다.
카가미는 자기가 머리가 나쁘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래서 자기 머리로 해결이 안 될 때는 머리 좋은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최선이라는 것도. 그가 아는 한 가장 가까운 사람은 리코였고, 그 리코가 안 된다면 그 다음은…….
“……미도리마?”
“정말로 너냐, 카가미. 이름이 표시된 걸 보고도 반신반의한 것이야. 네가 나한테 전화를 하다니, 대체 무슨 일이냐. 미안하지만 난 너만큼 한가하지 않…….”
“윽…… 미, 미도리…… 윽, 으읏, 우, 아…….”
“……어이, 카가미……?”
“흑, 히극, 흐, 흐아아아……!”
“우, 우는 거냐?! 자, 잠깐 카가미! 그치는 것이야! 상황을 전혀……!”
“히윽, 흑, 미도리마아…… 히극, 후아아아아아———!”
“그치는 것이야! 전화하자마자 대뜸 울기 시작하면 나한테 어쩌라는 거냐?! 카가미, 일단 이야기를 해라. 전화로 안 되겠으면 나가 줄 테니까…….”
“으와아아아앙!”
“그만 뚝 하는 것이야!”
“그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뚝 하는 것이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신 쨩 퀄리티 정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으겍!”
호흡 곤란을 일으킬 것 같은 타카오의 웃음소리는 미도리마가 뒤통수를 후려치면서 강제 종료되었다.
“분위기 파악을 하는 것이야!”
“신 쨩이 ‘분위기 파악’이라니! 잠깐 타임머신 좀 발명해 올 테니까 그 말 그대로 1학년 때의 신 쨩한테 해 줘! 분명히 ‘이 녀석은 무슨 소리를 하는 것이야?’라는 눈으로 볼 테니까!”
“그렇게 머리통으로 테이블을 파손해보는 게 소원이라면 이뤄주는 것이야.”
“죄송합니다. 분위기 파악하겠습니다.”
타카오는 양손을 들어 순순히 항복하고 미도리마가 분위기 파악을 하라고 말하게 한 원인———말하면서 불안함이 되살아났는지 도로 울고 있는 카가미와 의자를 끌고 카가미 옆까지 와서 그를 달래고 있는 키세를 보았다. “아아, 카가밋치 그만 울어요. 그러다 눈 붓슴다. 쿠로콧치랑 화해하려면 조금이라도 예뻐 보여야죠. 그만 그쳐요.”라는 키세의 위로(?)가 효과가 있었는지 훌쩍거리는 정도로는 울음을 그친 카가미였다. 그런데 뭐라고 할까, 남친과 싸운 여자애와 친구를 위로하는 그 여자친구 같은 광경이라고 할까…….
“어이, 카가미. 고만 징징거리고 그쳐. 듣기 싫다.”
우와- 내가 분위기 파악하라고 신 쨩한테 까인 지 얼마나 됐다고 저 발언- 폭군은 여전하네-. 라고 속으로만 생각한 타카오는 미도리마의 큰 손에 머리를 잡혀 테이블과 급속히 친해지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으므로 입을 열지 않았다.
“아오미넷치!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너도 붙어있지 말고 떨어져, 데르모. 테츠한테 카가미 어깨 안았다고 이른다?”
“힉!”
키세는 재빨리 카가미에게서 몸을 뗐다. 정말로 쿠로코 귀에 들어갔다간 모델 생명을 위협할 만큼의 물리적 공격이 기다릴 테니 현명한 판단이었다.
“바보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머리가 안 돌아가냐 바카가미?” “앙?!”
훌쩍이면서도 아오미네의 도발에 반응하는 건 역시 카가미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아오미네는 카가미의 시선이 확실히 자기 쪽을 향한 걸 확인하고선 비어버린 지 오래인 잔(콜라의 잔해조차 남아있지 않다.)을 빨대로 빙글빙글 저으면서 말했다.
“테츠가 정말 너랑 헤어지고 싶으면 아직까지 그 집에 있겠냐? 그 날로 짐 싸서 나왔지. 서재? 까짓거 키세 보내면 되지 그거 갖고 집에 붙어 있겠냐?”
“왜 거기서 갑자기 내가 나와요?!”
“그건…… 그렇지만…….”
“카가밋치도 인정하고 들어가지 말지?!”
중간에서 컁컁 짖는 키세를 무시하고 이야기는 이어졌다.
“테츠 성격 모르냐? 아닌 건 죽어도 아닌 놈이잖아. 그런데 말을 안 하든 어쨌든 거기 있는 시점에서 그 녀석은 너랑 헤어질 생각이 없는 거라고. 테츠 하루 이틀 보냐? 너.”
“……그치만…… 나한테 말도 한 마디 안 걸고…… 눈도 안 마주치고…….”
“아- 뭐, 고집도 세니까. 하지만 거야 네가 먼저 잡고 말 걸면 되는 거 아냐.”
거의 울음을 그치고 말하던 카가미는 아오미네의 말에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는.
“……내가 먼저 말 걸었는데 쿠로코가 씹으면 나 그 자리에서 울지도 몰라…….”
도로 테이블 위로 침몰했다. 네거티브는 여전한 모양이었다. 그 말에 거하게 한숨을 쉰 것이 아오미네, 동시에 ‘이 녀석 괜찮은 거야?!’라고 생각한 것이 키세와 미도리마. 그리고 타카오는 웃음을 참느라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이 자리에 카가미 의형제 사정을 아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소중한 관계일수록 소극적이 되는 부분이 여전한 카가미의 성격에 머리가 아팠을지도 모르나 안타깝게도 자세히 아는 사람은 이 안에 없었다.
잔뜩 찡그린 표정으로 뒤통수를 벅벅 긁은 아오미네는 다시 한 번 한숨을 쉬고서, 테이블 밑으로 카가미의 다리를 툭 찼다. 카가미가 고개를 드는 것과 동시에.
“그렇게 네가 먼저 말 거는 게 싫으면 테츠가 먼저 말 걸게 하면 되겠네.”
“그게 되면…….”
“아- 고만 징징거려. 이 다이키 님이 해결책을 가르쳐줄 테니까.”
그 말에 카가미를 포함한 전원의 눈이 아오미네를 향했다. 모두의 기대와 불안이 섞인 시선을 한 몸에 받고서 아오미네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들어라, 카가미. 이렇게 된 이상————에로 작전으로 간다.”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이야!”
그리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미도리마에게 메뉴판으로 정수리를 얻어맞았다.
“너는 어떻게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머릿속이 똑같은 것이야?! 대체 뭐가 들어있는 거냐! 차라리 농구공이 너보다 속에 많이 들었을 것이야!”
“농구공에 공기밖에 안 들었거든?!”
“넌 공기라도 들어있으면 다행인 것이야!”
“공깈ㅋㅋㅋㅋㅋㅋㅋ라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히이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도리맛치, 아오미넷치 스톱! 그대로 계속하면 타카오 군이 과호흡으로 실려감다!”
“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호흡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키세, 종이봉투를 준비하는 것이야!”
“엣?!”
“젠장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준빜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준비성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역시 신 쨩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의대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결국 타카오가 웃다 지쳐 테이블 밑으로 쓰러지는 것으로 일단 조용해졌다. 늦은 감이 있지만 평균 신장을 한참 웃도는 남자들이 이렇게 많이 와서 소란스럽게 굴면 가게에 민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키세였으나 자기가 아오미네와 미도리마를 막을 수 없다는 것은 중학교 때 이미 증명되었으므로 무시하기로 했다.
아오미네와 미도리마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다시 앉은 후 이야기가 재개되었다.
“아니, 별로 웃자고 한 소리가 아니라 꽤 진지하게 한 소리라고.”
“호오. ‘에로 작전’이?”
“째려보지 말고 일단 들으라니까. 카가미는 이 상태고, 테츠도 테츠대로 황소고집이니까 절대 안 굽힐 테고. 그럼 어떻게 하냐? 말은 싫다니까 몸의 대화를 나눠서 테츠의 본능을 깨워야지.”
“왜 그게 바로 그렇게 연결되는 거냐? 나나 네가 쿠로코와 교섭해 본다든가…….”
“그럼 묻겠는데, 미도리마 선생님. ‘그’ 테츠가 카가미 일로 너나 내가 무슨 말 한다고 들을 거 같냐? 아?”
아오미네의 말에 미도리마는 입을 다물었다. 머릿속의 쿠로코가 “마음은 고맙습니다만 저희 일입니다. 간섭하지 말아주십시오.”라며 무 썰 듯이 미도리마의 말을 막 잘라낸 참이었다. 고집하고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 미도리마였으나 진인사대천명이 좌우명인 이상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에로 작전으로 가서 테츠가 카가미 안 건드리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수밖에 없다니까?”
“그, 그런 것도 같고……?”
반쯤 넘어간 키세.
“하, 하지만 그런 파렴치한……!”
“파렴치는 무슨, 원래 붙어먹던 놈들한테. 얘네 평소에도 파렴치했거든-? 파렴치 안 한 지금이 이상한 거지.”
“붙어먹……! 말을 가려서 하는 것이야!”
“사실이잖아.”
귀찮다는 듯이 귀를 후비며 대답하는 아오미네였으나 미도리마는 분한 듯 입술을 깨물 뿐, 그 이상의 반론은 없어 보였다. 그 모습을 실실 웃으며 지켜보던 타카오는 체셔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아오미네 바로 앞 테이블을 콩콩 두드렸다.
“그래서, 그래서? 구체적으로는 어떻게 가는 건데? 에로 작전.”
“아? 그야 당연히 카가미가 테츠 와이셔츠 한 장만 걸치…….”
까지 말하고 아직 테이블에 엎드린 자세로 자기를 올려다보고 있는 카가미를 본 아오미네는.
“……고 싶어도 안 들어가겠다.”
“그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겠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타카오, 재침몰.
“아- 키세, 뭐 없냐?”
“엣?! 저요?!”
불똥은 어째서인지 키세에게 튀었다.
“음- 쿠로콧치가 본능적으로 변할 만한 거라고 하면, 알몸 유니폼이라든가…….”
“우와아…….”
“우와아…….”
“우와아…….”
“죽어.”
“왜 나만?!”
아오미네, 타카오, 카가미의 무언가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시선을 한 번에 받은 후에 미도리마의 절대 0도의 눈빛과 함께 폭언을 선사받은 키세였다.
“아, 아이디어 내라고 한 건 아오미넷치잖슴까!”
“아니, 그래도 그렇지 너 유니폼으로……. 야, 너…….”
“신성한 유니폼으로…….”
“키세…….”
“죽어.”
“나도 확 우는 수가 있어요?!”
이미 반쯤 우는 키세가 빽 소리친 말에 지금까지 테이블에 몸을 맡기고 있던 카가미가 상반신을 일으켰다. 차가운 눈으로 키세를 보던 이들이 놀라 카가미 쪽을 보자, 그는 어째서인지 키세 쪽으로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울 거면 와라, 키세! 나 울 때 달래줬으니까 나도 해줄게!”
“……카가밋치 마지 텐시……!”
감탄사인지 뭔지 모를 소리를 저도 모르게 외친 키세였으나.
“타카오, 찍어서 쿠로코에게 보내라.”
“제목 지정은 ‘협박당한 카가미가 키세에게 몸을 바치는 현장’으로 하고.”
“OK, 본문은 사진이랑 ‘막지 못해서 미안’으로 하면 돼?”
“잠깐 거기 키세 료타 종료 공지 플래그 세우는 사람들 스토오오오오옵!”
눈 깜짝할 사이에 사망 플래그가 섰다.
“당신들 나한테 원한 있어요?!”
“그런 건 없는 것이야. 요즘 네 활동이 늘어서 오하아사 스폰서 CM에 매번 나오다 보니 짜증은 좀 난다만.”
“별로? 마이 쨩이랑 같이 CM 찍었는데 나한테 아-무 말이 없는 건 좀 거슬렸지만 그닥?”
“전혀! 재밌어 보여서!”
“어떤 의미로 타카오 군이 제일 무섭슴다-!”
꽤 째째한 범행 동기였다. 심지어 한 사람은 단순 유쾌범이었다.
“됐으니까 아이디어 다른 걸로 내 봐.”
“또 나에요??! 싫슴다! 또 깔 거잖아요! 타카오 군 시켜요!”
“키세의 피해의식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OK, 이번엔 안 깔게. 그러니까 키세 GO! 3, 2, 1!”
“에?! 아, 어…… 알몸 에이프런……?”
“콜.”
“엣?!”
아오미네가 내린 OK 사인에 당혹스러운 것은 오히려 키세였다. 하지만 아오미네는 그런 키세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고서 겨우 양팔을 내리고 똑바로 앉은 카가미를 봤다.
“어차피 네 덩치에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는 것 같고, 네가 테츠 상대로 애교니 앙탈이니 하는 것도 못 할 테니까 그냥 알몸 에이프런으로 가라. 평소에 쓰니까 최소한 사이즈는 맞을 거 아냐. 근데 너네 집 에이프런 무슨 색이냐?”
“어…… 검은색…….”
“음……. 하얀 프릴이 왕도지만, 뭐 평소에 보던 걸 알몸 위에 입는다는 의외성도 있고 검은색 정도면 차점은 될 테니까 그건 그것대로…….”
“저, 정말 알몸 에이프런으로 가는 거예요?!”
“아까부터 그렇게 얘기하잖아.”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냐는 듯이 대꾸하는 아오미네였으나 까이는 데 익숙한 키세로서는 당혹스러울 뿐이었다. 아니, 애초에 별로 그렇게 심사숙고해서 낸 아이디어도 아니고 그냥 뱉은 건데 이게 OK고, 생각해서 말한 아까 게 비난의 폭풍이라니 대체…….
“알겠냐? 카가미. 아무것도 안 입고 에이프런만 걸치고서 같이 밥만 먹으면 돼. 테츠가 알아서 손댈 테니까. 메뉴는…… 장어? 장어 맞냐?”
“장엌ㅋㅋㅋㅋㅋㅋㅋㅋ 아오미네가 완전 언스톱퍼블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장어 맞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놈은 허파에 바람이 들었나……. 어쨌든 메뉴는 장어덮밥이나 뭐 그런 걸로 해라. 아, 테이블 말고 꼭 상 차려서 바닥에 앉아서 먹고.”
“별로 상관은 없는데, 왜?”
“바닥에 앉아있어야 테츠가 깔기 쉽잖아, 바카가미. 굳이 서서 하고 싶으면 테이블에서 먹던지.”
“역시 너는 도가 지나친 것이야-!”
비교적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던 미도리마가 다시 폭발해 아오미네에게 각설탕을 던졌다. 타카오가 다시 킬킬거리기 시작하고 키세가 불똥이 튀지 않도록 몰래 도망가는 가운데 카가미가 혼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면서 미도리마 주최의 ‘쿠로코 부부 싸움 해결을 위한 카페 회합’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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