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좌부동 이벤트 단편.
카게히카리.
쿠로코 테츠야는 난생 처음으로 법정에 서있었다. 뒤에는 법정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 양 옆에는 결연한 표정의 두 진영. 그리고 정면에는, 어째서인지 법복 차림의 아카시 세이쥬로.
“……아카시 군. 법복 잘 어울리시는군요.”
모든 사람을 지옥으로 떨어뜨릴 것 같은 포스가 특히.
“고맙구나, 테츠야.”
그런 쿠로코의 속을 못 읽는 게 아닐 텐데도 아카시는 수려한 얼굴에 미소를 띠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물론 아카시가 현실도피를 겸한 코멘트를 진지하게 받아쳐줄 거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쿠로코가 들은 것은 분명 주말인 오늘 오전 중에 체육관 사용 허가를 받았으니 연습하러 오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해도 안 뜬 시간에 눈을 뜨는 평일과 다르게 ‘늦잠’이라고 하기엔 이른 늦잠을 만끽하고, 주말이라지만 학교 집합이다 보니 교복 차림으로 체육관을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체육관 정문을 열자, 그곳은 법정이었다.
……여기가 애니화에 드라마화까지 한 모 호스트부 부실이라도 되는 줄 아나요. 라고 쿠로코가 순간 생각했던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대로 체육관 문을 닫고 자긴 아무것도 못 본 거라고 되뇌면서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 역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곧 “오, 드디어 주인공 납셨네! 야이야이! 카, 사, 노, 바!”라는 타카오의 의미 불명한 외침에 저지당했지만. 카사노바라니, 그게 16년 인생에서 연애라고는 딱 두 번 해본 자신을 가리키는 말일 거라고 어떻게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여자를 사귀었다 버리니 뺏기니 했다던 키세라면 또 모를까. 키세가 알면 또 뭐라 징징거릴 생각을 하는 사이에 쿠로코는 영문도 모른 채 오른팔을 츠치다에게, 왼팔을 후리하타에게 붙잡혀 이곳, 법정의 정중앙까지 연행된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도망치려고 시도라도 해봤을지 모르지만 세이린 농구부 각 학년을 대표하는 인격자 츠치다와 후리하타를 상대로는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이 문제만은 확실하게 하고 넘어가야 한다고 봐, 쿠로코.”라고 존경하는 선배인 츠치다가 말한 이상 더더욱.
뒤에는 이제껏 시합에서 봤던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자를 몇 줄로 정렬시키고 앉아있었다. 3학기도 끝난 지금 이제는 고등학생이 아닐 사람들 얼굴까지 보였다. 입시가 끝난 지 오래이긴 하지만 대학 들어가면서 자취하게 됐다고 들은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정말로 거기 계셔도 괜찮으신 건가요. 특히 카이조와 슈토쿠의 전 레귤러 여섯 분.
그리고 쿠로코의 왼편———이게 정말 법정이라면 원고측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은 모모이 사츠키, 이마요시 쇼이치, 키세 료타, 그리고 아오미네 다이키. 모모이와 이마요시, 키세는 그 중 둘과 중학교 때부터 알아온 쿠로코조차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세 사람 다 정장인 것이다. 아니, 잘 생각해 보면 키세는 전에 잡지 촬영에서 입었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를 했던 것도 같지만 기본적으로 그가 하는 말은 귀담아듣지 않는데다 잡지는 더더군다나 따로 챙겨보지 않는 쿠로코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여중생 때부터 여중생답지 않은 체형의 미소녀였던 모모이에 이제 와서 굳이 설명이 필요 없는 키세, 옆에 있는 키세가 너무 커서 그렇지 충분히 큰 키에 들어가고 농구로 다져진 몸의 이마요시. 이 세 사람이 정장을 입고 모여 있는 것만으로도 수상한 조직의 보스 이마요시와 그 수려한 두 측근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등학교 마지막 시합 때까지 그 보스 이마요시가 서슴지 않고 최강이라 일컬은 아오미네는———검은 러닝셔츠에 회색 반바지, 거기다 맨발이라는, 어딜 어떻게 봐도 홈웨어로 보이는 차림으로 팔다리가 구속되어 입에는 재갈까지 물고 있었다.
이마요시가 보스로 있는 수상한 조직은 납치 조직으로 판명되었다.
“하하, 뭐라카노~. 납치한 거 아이다~. 아오미네 이 자슥이 나오라켔는데 자빠져 쳐자고 있어싸서 내랑 모모이가 데꼬 온 거라 안 카나~. 맞제?”
모모이랑 키세에게 동의를 구하는 이마요시였으나 밝은 목소리로 “네!”라고 힘차게 대답하는 모모이와 달리 키세는 전력으로 시선을 회피하고 거의 기절해 있는 아오미네를 동정의 눈으로 볼 뿐이었다. 그리고 이마요시 씨,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대뜸 ‘뭐라카노’라면서 말을 시작하셔도 곤란합니다만.
키세와 비슷한 기분이 되어 쿠로코는 그들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반대편, 법정이라면 피고측에 해당하는 자신의 오른편을 보았다.
이쪽에는 똑같이 정장 차림인 리코와 히무로, 미도리마. 리코는 짧은 스커트 정장으로 각선미를 아낌없이 뽐내며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고, 그 옆에는 사람이 맞았다간 죽을 것 같은 두께의 법전(분명히 럭키 아이템이다.)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는 미도리마가, 또 그 옆에는 한 번 웃는 것만으로 뭇여성들의 마음을 녹이다 못해 그대로 하트캐치해버릴 것 같은 히무로가 앉아 있었다. 카가미는, 다행스럽게도 아오미네처럼 납치된 건 아닌지 구속을 당하거나 재갈을 물고 있진 않았지만 세이린 농구부 져지 차림으로 히무로 옆에 앉아, 불안한 듯 이리저리 시선을 옮기며 형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히무로가 곁에 없었다면 목에 걸고 있는 링을 쥐고 있었겠지만, 본인이 옆에 있으니 직접 잡는 모양이었다. 거기에 대해 뭔가 말하고 싶은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쿠로코는 입을 열지 않았다. 일단은 상황 파악이 먼저다.
“저, 아카시 군. 이건 대체…….”
“———그럼,”
쿠로코의 말을 가르고, 마이크나 확성기를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넓은 체육관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울리는 아카시의 목소리가 외쳤다.
“지금부터 제5회 쿠로코 테츠야 배우자 쟁탈 회의 및 쿠로코 테츠야 배우자 결정 최종 재판을 시작한다.”
의사봉을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대체 ‘배우자 쟁탈 회의’라는 게 뭔지, 애초에 ‘쟁탈’과 ‘회의’가 서로 붙어서 쓰이는 게 가능한 말인지, 자신은 참여한 기억조차 없는데 어째서 이게 벌써 ‘제5회’인 건지, ‘배우자 결정 최종 재판’은 또 뭔지, 왜 자신의 배우자를 다른 사람들이 회의를 하거나 재판을 해서 결정하는 건지 묻고 싶은 말은 그야말로 산처럼 많았지만 무엇보다 먼저 쿠로코는 속으로 내뱉었다.
완전히 수라장이잖습니까, 이거.
아예 감이 안 잡히는 상황이었으면 조금 나았을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살면서 한 번도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든가. 그러면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쿠로코는 저 ‘배우자’라는 말에 짐작이 안 가는 사람이 없지 않았다. 아니, 없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에…… 배우자…… 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아카시를 보다가, 도움을 청하는 것처럼 히무로를 봤다가, 마지막으로 조금 울상이 돼서 쿠로코를 보는 카가미.
무엇을 숨기랴. 세이린 농구부의 1학년 에이스이자 창설 2년 만에 일본을 제패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그, 카가미 타이가야말로 작년 여름부터 쿠로코와 교제를 시작한 ‘배우자’라는 말에 가장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반대편.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아카시이이! 테츠한테 지고 중2 좀 고쳤나 했더니 이제 다른 게 도졌냐?!”
어느 새 자력으로 재갈을 해결한 건지, 의자에 거의 묶이다시피 해서 앉아있는 상태로도 아카시를 향해 바락바락 소리 지르는 아오미네.
고등학교 농구계 최고 속도라 찬사를 받으며 DF가 불가능하다고 일컬어진 현 토오 농구부 소속, 전 기적의 세대 에이스인 그는 쿠로코가 중학교 때 교제했던 상대이자 처음으로 사랑한 기억과 가장 아픈 시간을 공유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배우자’라는 말에 무정하게 아니라고 내팽개칠 수 없는 사람.
다시 말해 지금 이 상황은, 중학교 때의 교제 상대인 아오미네와 지금 교제 상대인 카가미가 쿠로코의 배우자 자리를 놓고 쟁탈전을 벌이는 현장인 모양이었다.
……집에 가고 싶다.
“미안하지만 그건 곤란한데, 테츠야.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결판을 내겠다고 양쪽 다 물러서지를 않아서 말이야.”
생각을 읽고 대답하지 마십시오. 이마요시 씨도 그렇고 아카시 군도 그렇고, 치트가 앞과 옆에 있으면 저한테 어쩌라는 겁니까.
그러나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기만 한 아카시는 필요 이상으로 우아한 동작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아카시의 오른쪽, 그와 마주 보고 있는 쿠로코에게 있어서는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 왜 저렇게 결연한 표정인지 알 수 없는 모모이와 키세, 그리고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겉으로는 싱글싱글 웃고 있는 이마요시와 그에게 입이 막혀서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있는 아오미네다.
“그럼 아오미네 다이키측 대표 모모이 사츠키, 탈환의 변을.”
‘탈환(奪還)’, 빼앗겼던 것을 도로 빼앗아 찾는다는 뜻이다. 슥 의자에서 일어나는 모모이를 보며 새삼스럽게 단어의 뜻을 곱씹은 쿠로코는 다른 의미로 절망적인 기분이 되었다. 현실도피라면 다른 방향으로 하는 게 나을 뻔했다. 예를 들어, 지금 정장을 차려입은 모모이가 얼마나 매력적인 여성인가에 대한 거라든가…….
“먼저 테이코 중학교 출신이 아닌 분들, 혹은 테이코 중학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사실을 모르는 분들께 주지해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탈환의 변’이라는 말을 듣고 알아채신 분들도 계시겠지만, 다이…… 아오미네 다이키는 아무런 맥락도 없이 현재 카가미 타이가의 남자친구인 쿠로코 테츠야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었으면 애초에 이 재판은 개정되지도 않았겠죠.”
정정. 분명히 모모이는 지금 현역 여고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성숙한 매력으로 가득한 여성이었으나, 그만큼이나 위험한 인물이었다. 물론, 쿠로코에게. 쿠로코는 표정에는 드러나지 않지만 시합 때만큼이나 긴장해서 천천히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모모이를 바라보았다. 쿠로코를 한 번 흘끗 본 모모이는 그 시선을 그의 뒤편, 세이린 고등학교 체육관을 반 이상 채운 사람들 쪽으로 향했다.
“배심원 여러분.”
……설마 저분들 전부 배심원인가요……. 가볍게 교실 하나 정도는 채우고도 남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데, 정말 전부 배심원인가요…….
순간적으로 뒤를 돌아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 쿠로코였지만 모모이의 또랑또랑한 말소리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집중하고 있는 지금 그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모르시는 분이 훨씬 많을 거라고 생각하기에, 여기에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쿠로코 테츠야와 저희 측 아오미네 다이키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정식으로 교제를 해온 사이입니다.”
지금까지 고요하기만 했던 배심원석이 단번에 웅성거림으로 채워졌다. 반면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냉기가 도는 쪽은 쿠로코의 오른편, 카가미가 앉아있는 곳이다. 그의 모습이 시야의 한 구석에라도 들어올 것을 위구한 쿠로코는 조금 고개를 숙였다.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
웅성거리는 소리 사이를 뚫고 울리는 목소리. 그 주인은 이제는 입을 일이 없는 회색 교복 대신 사복을 입어서 더 어려 보이는 카이조의 전 캡틴이었다. 큰 눈은 모모이를 지나쳐 혼자 가장 높은 곳에서 법정을 내려다보는 아카시를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발언을 허가합니다.”라는 아카시의 말에 다시 한 번 조용해지는 배심원석. 카사마츠가 손을 내렸다.
“교제를 ‘해온’ 사이라는 건, 아직 안 헤어졌다는 거냐?”
분명히 아오미네 다이키 측, 모모이에게 하는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카사마츠의 시선은 우직할 정도로 아카시만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모이는 신경도 안 쓰는 듯.
“네.”
간결하고, 동시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과 동시에 다시 술렁이는 법정. 그러나 그를 조용히 시켜야 할 입장인 아카시는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단순한 웅성임의 내용이 점점 불온해져 쿠로코에 대한 규탄으로 변하려고 한 바로 그 순간, “까각!”하고 정체 모를 소리가 사람들의 귀를 때렸다. 모든 이들이 반사적으로 소리가 난 쪽으로 시선을 향하자.
“……아아, 미안.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서.”
어째서인지 바닥에 넘어진 히무로가 옷의 먼지를 털며 일어나 역시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의자를 다시 세우려고 하다가,
“……어라?”
그것의 파이프 부분이 손가락 모양으로 일그러진 것을 보고 곤란한 듯이 웃고 있었다.
단번에 침묵이 찾아오는 체육관. 히무로 바로 옆에 있었던 미도리마와 카가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지만 식은땀을 흘리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비슷한 심경이었기에 누구도 지적하지 않았다. 다만 어째서인지 한없이 무표정인 카와하라와 후쿠다가 신속하게 히무로의 의자를 회수한 후 새 의자를 갖다 주었을 뿐이었다. 그 사이에 슈토쿠의 졸업생과 현역들이 앉아있는 좌석에서는 “어이, 저런 녀석 옆에 미도리마 앉혀놔도 괜찮은 거냐?” “아- 괜찮을 거예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 쨩이 아니라 쿠로코한테 일어날 테니까.”라는 귓속말이 오갔으나 들은 사람은 없었다.
히무로 덕분에(때문에?) 고요함을 되찾은 체육관을 이리저리 훑어본 아카시는 고개를 숙여 자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앉아있는 쿠로코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아오미네 다이키 측의 주장은 사실인가? 쿠로코 테츠야.”
위에서 자신을 향해 떨어진 말에 쿠로코는 한참이나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리고 그의 고개가, 어느 방향인지는 알 수 없지만 움직이려고 한 찰나.
“야, 지금 장난 하냐?! 사츠키 너 헛소리 그만 지껄이고 들어와! 그리고 집에 가!”
입을 막아 조용히 시키려고 한 이마요시에게 한참이나 무언의 저항을 해온 아오미네가 드디어 자유의 몸이 된 모양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입만. 뒤에서 양손이 모두 침범벅이 된 이마요시가 “하이고, 저 완전 산짐승이다. 스사~ 니 손수건 있나~.”라며 배심원석 쪽으로 잰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헛소리 아냐! 사실이잖아!”
“사실이고 나발이고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들어오라고 이 돼지야!”
“아, 아오미넷치. 아무리 그래도 모못치한테 돼지라니…….”
“누가 돼지야! 다이 쨩은 다이어트 같은 거 하나도 생각 안 하고 먹으면서! 까마면서! 내가 돼지면 다이 쨩은 흑돼지잖아! 흑돼지! 다이 쨩 흑돼지———!”
“……모못치…….”
갑자기 시작된 너무나도 수준 낮은 말싸움에 말을 잃은 키세였다. 요즘은 초등학생들도 이것보단 더 고차원적으로 싸운다. 중학교 때도 이렇게 싸우는 걸 몇 번 보긴 했지만, 고2인 지금까지 그 때랑 말싸움 수준이 똑같을 줄이야……. 아니, 이 둘이 자신과 하이자키처럼 싸워대면 그건 그것대로 살 떨리지만.
이런 저차원의 말싸움을 해본 적이 없어서(누이들과의 충돌은 ‘말싸움’이 아니다. ‘혀로 하는 핵전쟁’이다.) 말릴 방법도 안 떠오르는 키세는 하는 수 없이 위를 쳐다보았다. 아카시와 눈이 맞자, 법복 차림의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이 살짝만 어깨를 으쓱한 후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다 사츠키, 다이키. 사담은 삼가도록.”
“웃……. 네에…….”
아카시의 한 마디에 움찔하더니 순순히 입을 다문 모모이였으나 아오미네는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웃기고 있네! 아까부터 내 얘기 하고 있는데 나 보고 말하지 말라고?! 이씨, 이거 풀어! 어차피 또 너지? 아카시! 한 대만 맞아라, 진짜!”
“흠. 이 법정을 마련한 게 나라는 걸 알아채다니, 야생의 감은 여전한 것 같구나.”
“이 상황에서 네가 원흉인 걸 모르는 게 병신이지! 혼자 신나갖고 코스프레까지 하고! 너 지금 졸라 웃기거든?!”
“히이이이! 아오미넷치, 상대 아카싯치에요?! 아무리 WC 이후로 좀 유해졌다곤 하지만 그래도 아카싯치한테……!”
“앙?”
“아무것도 아님다.”
안 그래도 평소에 ‘연쇄 농구범’ 소리를 듣는 인상인데 기분이 최저점을 돌파하는 중인 아오미네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눈으로 키세를 토막살인(단 흉기는 농구공.)할 것처럼 보였다. 물론 손발이 묶여있는 사람에게 쫄아서 시선을 피해버린 키세가 한심하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흠. 다시 말해 다이키는, 자신이 주제인 이야기에 발언권이 없는 것이 불만이라고?”
“아? 아…… 아?”
아무래도 아카시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어느 샌가 스사의 손수건을 빌려 손을 닦은 이마요시가 뒤에서 큭큭거렸지만 도와줄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거라면 정당한 의견이라고 인정하지.”
“아니, 뭘…….”
“그럼 묻겠다. 아오미네 다이키. 쿠로코 테츠야에게 정식으로 이별 선고를 받은 적이 있나?”
그 말에 지금까지는 모르는 대로라도 말을 하려고 노력했던 아오미네의 입이 굳었다. 곧.
“별, 로……. 헤어진 건 헤어진 거…….”
“나는 ‘이별 선고’를 받았냐고 물었다만.”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던 흉악한 표정에서 조금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그리고,
“……그런 거 없어도, 알잖아. 어떻게 된 건지.”
입술을 가늘게 하며 꾹 다물고, 무언가를 참는 듯한 표정으로. 그 말이, 표정이, 무엇보다도 확실한 대답이었다.
불안한 듯 아카시와 아오미네의 대화를 지켜보던 모모이가 자기가 더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어 “다이 쨩…….”이라며 아오미네를 불렀지만, 자기 얼굴을 보이기 싫은 듯 얼굴을 숙여버린 아오미네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쿠로코 테츠야. 아오미네 다이키의 증언에 사실과 다른 부분은?”
아카시의 말에 쿠로코는 지금까지 아오미네 쪽을 훔쳐보던 눈을 꼭 감았다. 뜬다. 정면. 해야 할 말은 한 마디.
“없습니다. 저는 아오미네 군에게 이별을 통고한 적이 없고, 아오미네 군에게 이별을 통고 받은 적도 없습니다.”
얼굴의 양쪽으로 시선을 느꼈으나 쿠로코는 어느 쪽으로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가슴 아픈 듯이 자신의 소꿉친구를 보던 모모이였으나 그녀는 재빨리 스스로를 추스렸다.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패스를 해야 하고, 그건 지금이다.
“쿠로코 테츠야도 증언하는 대로, 양자 간에 교제 종료가 명언된 적은 없습니다. 또한 두 사람이 교류가 없었던 것은 재작년 전중 결승이 끝난 날부터 작년 IH 도쿄도 예선 결승 리그까지 1년이 되지 않는 기간이며, WC 본선 1회전 이후로는 빈번히 연락을 주고받고 있습니다.”
“그건! 테츠가 슛 가르쳐 달라든가, 스트리트 하자든가, 그냥……!”
“크리스마스에, 단 둘이서? 그것도 나랑 먼저 한 약속까지 깨고?”
“미안하다고 했잖아!”
“지금 그런 얘기 하는 거 아니거든?! 다이 쨩, 테츠 군이 보자고 해서 엄청 들떠서 갔으면서! 가서도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으면서! 그러면서 헤어지긴 뭐가 헤어져! 그게 테츠 군이랑 헤어졌다는 사람 태도야?!”
“야, 바, 너, 그거 어떻게, 조용히 안 해?!”
“안 해! 다이 쨩은 솔직하지 못하니까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것도 안 되는 걸! 아직도 테츠 군이 좋으면 좋다고 말하면 될 걸, 입도 한 번 못 떼보고! 그야 중학교 때 일 때문에 먼저 그런 말할 염치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다이 쨩은 아직 테츠 군을 좋아하잖아!”
“그런 거……!”
“아니야?!”
거의 비명에 가까운 모모이의 질문에 아오미네는 여태껏 크게 벌리며 소리를 지르던 입모양 그대로 잠시 굳었다. 크게 벌어져 있던 턱이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고, 마지막에는 얇은 입술을 꾹 다물어 옆으로 길어졌다.
거짓말이라도 그 말만은, 쿠로코 테츠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소꿉친구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지켜보며 모모이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 만큼 좋으면, 빈말이라도 부정하지 못할 정도로 좋으면 말이라도 하지. 어렸을 때부터 잘 움직이는 건 농구공을 다루는 손가락뿐이고 말도 표정도 서투른 그대로다. 그러니까, 그래서 내버려둘 수 없다.
한 번 코를 훌쩍인 모모이는 큰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범람 직전까지 갔던 눈물샘을 어떻게든 진정시키고서 그녀는 다시 법정의 중앙, 쿠로코 테츠야 쪽으로 몸을 돌렸다.
“테츠 군도 테츠 군이야. 내가 알 정돈데 테츠 군이 다이 쨩 마음이 어떤지 모를 리 없잖아. 그럼 테츠 군, 카가밍도 있으면서 다이 쨩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왜 하필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이 쨩 불러내서 슛 가르쳐달라면서 스킨십하고, 엄청 가까운 거리에서 의미심장한 눈으로 바라보고, 거기에 ‘당신이 다시 웃으면서 농구를 하게 돼 다행입니다.’라고 하면, 그건 그냥 도로 만나자는 거잖아!”
“사츠키이이이이이이?!”
방금까지의 시리어스 비스무리한 분위기를 단번에 날려버리는, 어떻게 생각해도 직접 그 현장을 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발언이었다. 물론 아까도 아오미네에 관해서 직접 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발언이 있었지만 그건 소꿉친구라 추측할 수 있는 범위라고 할 수 있어도 이건…….
“모, 모못치 그거 대체 어떻게…….”
“정보통이니까!”
“와- 모모이 장난 아이네! 안 그나, 키세.”
“네……. 정말 장난 아니네요, 모못치…….”
여전히 웃는 상의 이마요시에게 붙잡힌 키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반쯤 죽은 눈이 되어 긍정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모모이가 조만간 신주쿠의 벼룩 같은 정보상과 정보전을 벌이는 수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용히 마음속에 간직했다. 왠지 그런 말을 꺼냈다간 별 관련도 없는 아카시에게 혼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에헴, 하고 귀엽게 헛기침을 하고서 모모이는 다시 입을 열었다.
“테…… 쿠로코 테츠야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아오미네 다이키와의 관계를 수복할 의향이 없습니까?”
자신을 향해 직접 날아온 질문에 쿠로코는 모모이를 똑바로 마주 보았다. 아직 희미하게나마 눈물의 흔적이 보이는 분홍빛 눈동자. 소꿉친구를 생각하는 그녀의 마음은 처음 접하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 쿠로코는 위로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대신 아오미네를 혼내기도 하며 그녀를 안심시켜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저는…….”
뭐라고, 말해야…….
“테츠는 그런 게 아니라……!”
말을 잇지 못하는 쿠로코 대신 소리를 친 것은 또 아오미네였다. 아까부터 몇 번이고 반복되는 그의 쿠로코를 지키려는 노력은 실로 눈물겨울 정도였으나, 모모이는 그런 소꿉친구를 상대로도 자비가 없었다.
“그런 게 아닌데 왜 키스를 해?!”
이번에야말로 세이린 체육관은, 정말로 얼어붙었다.
그리고, 폭발했다.
“사츠키이이이이—————! 이, 꿀벌! 송곳벌! 호박벌! 맵시벌! 말버어어어얼!”
일단 아오미네 안에서 ‘벌’을 지칭하는 모든 말은 욕으로 쓰인다는 사실이 확실해졌다.
“에에에엑?! 쿠로콧치랑 아오미넷치 크리스마스 이브에 만나서 키스한 거예요, 그럼?!”
“와- 남자네, 쿠로코.”
깜짝 놀라 몸을 한껏 앞으로 뺀 키세와 놀리듯이 말하며 웃는 이마요시.
“우리랑 시합하기 전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쿠로찡…….”
기분 나쁜 듯이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며 빼빼로를 오물거리는 배심원석의 무라사키바라. 2m가 넘는 거한이 저기압인 것에 전·현 요센 선수들이 앉아있는 좌석 주변으로 긴장감이 감돌았으나, 평소 같으면 그에게 웃어주며 “그렇게 흥분하지 마, 아츠시.”라고 말릴 사람은 지금 그곳에 없었다.
바로 그 사람, 히무로는 차라리 저기압인 무라사키바라가 나을 거라는 확신이 들 만큼 무시무시한 기운을 휘감고서 피고측 좌석에 앉아있었다. 그 원인이 무라사키바라처럼 ‘우리와의 시합 전에 그렇게 불성실한 행동을 하다니’라는 스포츠맨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였다.
슈토쿠 쪽에서 “정말로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초 위험인물 옆자리에 미도리마를 둬도 괜찮은 것인가”라는 주제로 다시 긴급회의가 열린 것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쿠로코는, 여전한 포커페이스 아래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 상황은 도저히 ‘어쩌다 보니 분위기에 휩쓸려서’라고 변명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사적으로 단둘이 만나는 걸로는 1년도 넘는 공백 기간이 있었지만, 아오미네는 아오미네였다. 물론 중학교 시절과, 서로 아무 이유 없이 불러낼 수 있었던 시절과 똑같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사람이라도 서넛 죽이고 온 것 같은 흉악한 인상에 건드리면 베일 것 같은 분위기는 상당히 유해져 있었다. 또한 아주 조금이지만 예전의, 모르는 상대에게도 밝게 말을 걸고 ‘농구를 좋아하는 녀석 중에 나쁜 녀석은 없다’고 단언하며 웃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좋아했던 모습도.
조금 앞을 걷는 어깨도, 보폭 차이가 큰데도 자신에게 맞추려 노력하는 다리도, 잠시 머물렀다 다시 떠나는 눈길 하나, 농구공을 건네는 손길 하나까지. 전부 자신이 좋아하게 된 아오미네였다. 자신을 좋아하는 아오미네의 모습이었다. 그 때보다 어깨가 더 높아졌어도, 손이 더 커졌어도, 턱선이 더 날카롭게 변했어도, 여전히 ‘아오미네’였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정말로 슛 연습을 하려고 부른 거였는데. 애초에 자신이 먼저, 이 사람 곁을 떠난 거였는데.
몇 번인가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저도 모르게 그 시절의 거리감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옆에 서는 거리도, 벤치에 앉는 거리도, 마주하는 거리마저 어느 샌가 가까워져서. 당장 손을 뻗으면 닿을 곳까지 그가 돌아와서. 파란 눈이 열을 담아 자신을 보면,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 손을 뻗게 되는 것도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도 어쩔 수가 없었다.
서로 어쩔 줄을 몰라서 어색하게 헤어졌지만, 그 날은 집에 돌아와서 베개에 머리를 박고 얼마나 자기혐오를 했는지 모른다. 거기서 왜 키스를 합니까, 쿠로코 테츠야! 본능입니까?! 본능에 충실한 겁니까?! 평소에도 조금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자각은 있습니다만 자중 좀 하세요! 아오미네 군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카가미 군은요?! 어떻게 책임지려고 그런 짓을 한 겁니까! 이 평균 신장 이하가!
거의 자학에 가까운 후회와 자기반성은 안타깝게도 이어지는 시합에 묻혀버렸고, WC 끝난 후 아오미네와 다시 사적으로 만날 일이 생겨도 이 반성이 빛을 보는 일은 없었다. 어려운 건 한 번뿐이고 그 다음은 쉽다고 누가 그랬던가? 쿠로코는 그것을 직접 몸으로 경험하게 된 것이었다. 안 되는 걸 아는데, 카가미가 알면 실망하고 상처 받을 텐데, 그런데…….
그리고 현재, 최악의 상황에서 카가미는 쿠로코와 아오미네 사이에 있었던 일을 알아버린 모양이었다. 그것도 하필 엘레강트 양키라 이름 높은 보호자까지 대동하고서.
……손발이 묶여서 태평양에 가라앉지 않을까요, 저…….
“조용.”
아카시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또랑또랑하게 울리고, 키세가 혼신의 힘을 다해 아오미네 입에 손수건을 물린 후에야 다시 법정다운 정숙함이 찾아왔다.
“쿠로코 테츠야. 모모이 사츠이가 적시한 사항 중 사실과 다른 부분이 있나?”
“……없습니다.”
자신의 오른편에서 불온하기 짝이 없는 오오라가 일렁인 기분이 들었지만 쿠로코는 애써 무시했다.
“그럼 아오미네 다이키와의 관계를 수복할 의향은?”
“……그건…….”
“아오미네 다이키에 대한 호의를 아직 갖고 있는지는…… 굳이 안 물어도 되겠군. 그 사이에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게도 키스를 할 수 있을 만큼 세속적이 되었다면 얘기가 다르다만.”
“아카시 군…….”
놀리는 듯한 말투에 쿠로코는 책하듯 말하며 올려다보았다. 매우 즐거워 보이는 서로 다른 색의 두 눈이 자신을 보고 있었다. 원래 성격에 좀 문제가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성격이 꼬였다고는 생각 안 했건만 그에 대한 인식을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아직 생각할 기회는 많으니까.”
그렇게 배려인지 뭔지 애매한 말을 한 아카시는 눈을 모모이 쪽으로 돌려.
“모모이 사츠키, 탈환의 변을 정리하도록.”
한 번 고개를 끄덕여 대답한 모모이는 천천히,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쿠로코 쪽으로 다가왔다. “테츠 군.”이라며 오늘 가장 가까이에서 들리는 목소리. 쿠로코도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다이 쨩 있지, 아직 테츠 군 많이 좋아해. 그 때도, 테츠 군이 말도 없이 떠나서 얼마나 힘들어했는데……. 아니, 테츠 군이 잘못했다는 게 아니야. 그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테츠 군은 떠났어도 결국 다시 돌아와서 다이 쨩을 웃게 해줬으니까……. 다이 쨩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게 테츠 군이라서, 나도 다이 쨩도 얼마나…….”
거기서 잠시 길게 숨을 뱉으며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인 후, 다시 말을 잇는다.
“말로는 절대 안 하지만 다이 쨩, 그것까지 전부 포함해서 전보다 더 테츠 군 좋아해. 그래서 테츠 군이랑 카가밍이 같이 있는 거 보면 엄청 외로워하고, 슬퍼하는 걸. 아, 절대 카가밍이 싫다든가, 테츠 군이랑 카가밍이 같이 농구하는 게 싫다든가 그런 건 아냐! 절대! 하지만 역시, 이제 같은 팀이 아닌 건 어쩔 수 없어도 다이 쨩은 테츠 군이랑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해. 그리고 나도, 테츠 군이 다이 쨩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어. 카가밍한테는 미안하지만, 테츠 군도 다이 쨩이 싫어져서 간 건 아니잖아? 다이 쨩한테 전혀 마음 없는 거, 아니잖아? 그럼, 제발, 부탁이니까 테츠 군, 다이 쨩한테 돌아와 줘. 나, 이제 겨우 웃으면서 농구하게 된 다이 쨩이 다시 슬퍼하거나 쓸쓸해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
하얗고 가는 손가락을 꼭 쥐고서 이야기하는 그녀는 보는 사람 가슴이 다 아플 정도로 간절하고 절실해 보였다.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부른 쿠로코는 이름의 주인이 간신히 입꼬리만 올려 웃으며 “부탁해.”라는 입모양을 만드는 것을 보았다. 한 걸음 그대로 뒷걸음친 모모이는 “이상입니다.”라고 짧게 고하고서 이번에야말로 쿠로코에게 등을 돌렸다.
마지막의 감정에 호소하는 말 때문인지 체육관 안의 분위기는 꽤 가라앉았다.
물론 똑같이 입을 다물고 있다고 그 흉중이 다 같은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그럼 카가미 타이가 측 대표 아이다 리코, 배수의 변을.”
쿠로코의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비롯한 배심원석의 세이린 농구부 선수들이라든가.
호명되어 자리에서 일어난 리코는 발끝을 바닥에 찍으며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는 것처럼 걸어서 법정의 중앙에 나섰다. 체육관에 모인 수많은 전·현 고교 남자 농구 선수들은 물론이고 유일하게 같은 여자인 모모이에 비해서도 상당히 키 차이가 있는 리코였지만 이곳에서 유일하게 감독직을 수행한 그녀의 기백은 타 학교의 1학년 선수들로 하여금 저절로 자세를 고치게 만들었다.
“모모이 사츠키의 연설에 다들 감동하시고 있는데 죄송합니다만,”
마침내 법정의 중앙에 도착해 발을 멈춘 그녀는 그대로 한 번 아오미네 다이키 측에 시선을 주고서,
“과거는 과거입니다.”
그렇게 잘라 말하고 시선을 다시 거두어 배심원들을 보았다.
“모모이 사츠키도 진술했듯이, 쿠로코 테츠야가 아오미네 다이키를 비롯한 테이코 농구부 앞에서 모습을 감춘 것은 중학교 3학년 전중 결승전이 끝난 날부터입니다. 원인에 대해서는…… 이건 굳이 말하자면 아오미네 다이키 측의 사정이니 언급하지 않도록 하죠. 그리고 양자는 그 다음 해 IH 도쿄도 예선 결승 리그에서 마주칠 때까지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으며 다시 교류가 시작된 것은 WC 본선의 저희와 토오 전이 끝난 후의 일입니다. 따라서 교류가 없었던 것은 실질적으로 1년 6개월에 달하는 기간입니다. 일반적으로 연인 관계에 있을 경우, 1년 6개월이나 서로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리코는 다시 한 번 칵 소리를 내며 한 발 앞으로 내딛었다.
“또한 쿠로코 테츠야와 카가미 타이가가 교제를 시작한 것은 여름방학이 시작되기 직전, 다시 말해 7월 말입니다. 당시를 기준으로 아오미네 다이키와 연락이 두절된 지는 약 1년. 그리고 고백은 쿠로코 테츠야 쪽에서 한 것이었습니다. 맞습니까?” 리코가 자기 쪽으로 몸을 돌리는 기척과 함께 던져진 질문에 쿠로코는 짧게 긍정했다. 그녀는 그 대답에 만족스러운 듯 다시 몸을 돌리고서.
“중학교 시절의 연인과 연락이 두절된 지 1년, 그리고 자기 쪽에서 누군가에게 먼저 고백을 할 정도라면 최소한 쿠로코 테츠야의 인식은 ‘아오미네 다이키와의 관계가 정리되었다’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모모이 사츠키는 양자 사이의 이별이 명언된 적이 없으므로 두 사람의 관계가 해소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습니다만, 이는 궤변입니다. 설사 이별이 명언되지 않았다고 해도 두 사람의 관계는 ‘자연 소멸’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리코의 말에 모모이는 약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그녀를 보고 옆자리의 이마요시가 “괘안타.”라며 가볍게 어깨를 두드려 주었고, 키세는 다시 한 번 탈출 작전을 감행하고 있는 아오미네를 진압하느라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잠깐, 이마요시 씨, 모못치랑 놀지 말고 이쪽 좀 도와줘요! 나 혼자로는 역부족임다!”라는 키세의 지원요청도 들은 체 만 체. 싱글싱글 웃으며 “어디서 개가 짖네~ 노-란 개~.”라며 결코 키세 쪽을 보지 않았다. 물론 “당신 그거 들리는 거잖아!”라는 항의도 묵살되었다.
그런 아오미네 다이키 측의 소란이 들릴 텐데도 눈길도 한 번 안 준 리코는 말을 이었다.
“물론 설사 그렇다고 해도 지금 쿠로코 테츠야의 마음이 완전히 아오미네 다이키에게 가 있고 카가미 타이가와의 연인 관계를 유지할 생각이 없다면, 아오미네 다이키와의 관계를 수복해야겠지요. 하지만,”
칵칵 하며 바닥을 찍는 듯이 걷는 소리. 그것이 점점 가까워지는 것에 쿠로코는 거의 반사적으로 자세를 고쳤다. 평소에 신는 운동화나 단화가 아니라 하이힐이라 오늘은 조금 소리가 다르긴 하지만 익숙한 리코의 발걸음이다. 세이린 농구부 소속 중에 그 소리를 듣고 등을 곧추 펴지 않는 사람은 없다.
“쿠로코 군.”
“네.”
바로 곁에서 떨어지는 목소리에 쿠로코는 곧장 대답하며 리코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을 확인한 그녀는 평소처럼 시원시원한 말투로 물었다.
“카가미 군하고 헤어지고 싶어?”
“아뇨.”
즉답이었다. 거기에 리코는 쿠로코에게만 보이는 입모양으로 “좋아.”라고 말하고서 아오미네 다이키 측을, 이어서 배심원석을 보았다.
“라고 합니다.”
한 마디 덧붙일 뿐.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입가에 떠오른 자신만만한 미소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WC 토오전 이후의 아오미네 다이키와의 사적인 접촉에서 부적절한 행동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은 결코 쿠로코 테츠야의 마음이 카가미 타이가에서 떠나서 비롯된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쿠로코 테츠야가 아오미네 다이키와의 관계를 수복해야 하는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물론 둘 사이에서 대화를 통해 문제를 정리해야 하겠습니다만…….”
말하며 리코는 자기가 앉아있던 방향을 보았다. 성모 마리아가 생각날 만큼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히무로가 정반대의 무언가가 등 뒤에 보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앉아있었다. 그리고 한 팔을 미도리마가, 한 팔을 카가미가 잡고서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 같은 그를 필사적으로 말리고 있었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 데서 살인은 현명한 판단이 아닌 것이야! 하려면 인사를 다해 완전 범죄를 계획할 일이다!”라며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하는 미도리마와 “타츠야아! 나는 타츠야가 살인자가 되는 거 싫어!”라며 매달리는 카가미. 카가미야 어쨌든 미도리마의 발언이 과연 당장이라도 ‘쿠로코 테츠야 살인 사건(假)’를 일으킬 것 같은 히무로를 말리는 말로 적절한지는 의문스러웠으나 의형제를 살인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 정신이 없는 카가미는 알 수 없었다.
슈토쿠 쪽에서 모 1학년이 “신 쨩ㅋㅋㅋㅋㅋㅋㅋ 그겈ㅋㅋㅋㅋㅋㅋㅋ 살인 방좈ㅋㅋㅋㅋㅋㅋ”라며 빵 터지고 있는 가운데(그리고 누군가가 “어이, 조용히 안 하냐 타카오?! 치어버린다?!”라고 소리치는 가운데) 들은 체도 하지 않은 리코는 마치 스릴러물이라도 보는 것처럼 긴장된 분위기의 배심원석으로 다시 고개를 돌리고서.
“최소한 아오미네 다이키 측의 주장이 쿠로코 테츠야와 카가미 타이가의 이별 사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여기에 확언 드립니다. 이상입니다.”
그렇게 말을 끝맺은 리코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모모이에 비하면 꽤나 짧은 연설에 몇 사람이 의아한 듯한 표정을 지었고, 표정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아카시도 마찬가지였다.
“카가미 타이가 측. 배수의 변은 정말 이걸로 충분한가?”
“충분합니다.”
망설임 없이 답하고서 덧붙이는 말.
“애초에 아무런 문제없이 잘 지내던 커플을 갈라놓겠다고 덤빈 건 저쪽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쪽은 감정에 호소할 필요 없이 정당성만 주장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말하자면 본처…… 겸 ‘진정한 빛’의 여유?”
그렇게 말하고 살짝 고개를 갸웃하며 웃어 보이는 리코. 그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모모이는 책상 아래서 손을 꼭 쥐었다. 그야 물론 진정한 빛이니 운명이니 한 건 다이 쨩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그럼 카가미 타이가 측의 주장은 정리된 것으로 하지.”
리코가 자리로 돌아가는 것과 동시에 아카시가 말했다.
“지금부터 양측은 최종 판결에 참고 요소로 작용될 사항에 관하여 제시하도록.”
아직도 남은 겁니까……. 쿠로코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대체 뭔가요, 이 고문. 이 수치 플레이. 남의 사생활 갖고 이러면 재밌나요. 재밌어 보이네요, 아카시 군. 이렇게 즐거워하는 거 중학교 때도 본 적 없는데 말이죠.
이번에도 역시 시작하는 건 아오미네 쪽인 모양이었다. 어느 샌가 아오미네 진압 바톤을 배심원석에서 호출당한 와카마츠에게 넘긴 키세가, 여기에 여학생이 있었더라면 절로 입을 벌리고 바라볼 만큼 완벽한 수트 차림으로 자리에서 걸어 나왔다. 평소에 저 상태로 입 안 열고 있으면 데르모 소리를 안 들을 텐데……. 쿠로코는 일말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상대는 키세다.
“에헴. 제가 여기 나온 건…… 중학교 때의 쿠로콧치랑 아오미넷치가 얼마나 반짝반짝☆샤라라한 커플이었는지 말하기 위해서임다!”
아, 키세다. 유감스럽지 않은 키세는 키세가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키세다.
“솔직히 나는 어렸을 때부터 인기 많아서, 그야말로 초등학교 때부터 발렌타인 데이에 초콜릿을 박스로 담아갔지만 내가 한 연애랑 내가 본 연애를 통틀어서 쿠로콧치랑 아오미넷치만큼 순수하고 반짝반짝거리는 커플은 본 적이 없슴다.”
뒷얘기를 하기 위해 과연 앞의 자기 인기 자랑은 굳이 필요한 부분이었던 걸까. 그리고 그냥 키세가 못 본 것뿐이고 자기와 아오미네 같은 커플은 꽤 많았을 것 같은데……. 중학생이 하는 연애가 순수할 확률과 순수하지 않을 확률을 따지면 일반적으로는 전자가 더 높다. 공식에서 중학교 때부터 하이자키에게 NTR을 당했네 마네 한데다 나중에 ‘그런 멍청한 여자’ 같은 소리까지 한 키세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그런 쿠로코 마음을 읽을 수 없는 키세는 말을 이어갔다.
“나중에 모못치한테 들은 얘기지만 쿠로콧치랑 아오미넷치, 체육관에서 처음 만난 날부터 유령인줄 알고 놀란다든가 그러고도 ‘농구 좋아하는 녀석에 나쁜 녀석은 없다’든가 그런 소리 했다면서요? 어디의 청춘물임까! 거기다 쿠로콧치가 농구부 그만두려고 할 때 붙잡은 것도 아오미넷치라고 하고. 자신감이 없는 주인공을 격려하고 지지해주고 붙잡아주고, 완전 히로인이잖슴까! 그 때 벌써 1학년 레귤러였던 아오미넷치가 퓨어미네 스마일로 웃으면서 그렇게 말해주면 안 넘어갈 사람이 어딨슴까! 아오미넷치는 아오미넷치대로 내가 쿠로콧치 어디가 좋냐고 했을 때 ‘농구가 좋아서 절대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는 점……하고 상냥하면서 의외로 터프한 점’이라고 했었다구요, 중학교 때! 쑥스러워 하면서! 천사임까! 퓨어미네 마지 텐시임까!”
어째서인지 화내는 것처럼 소리치는 키세였으나 곧 “레귤러 연습 합류한 후에 아오미넷치가 먼저 체력 고갈된 쿠로콧치 챙기는 거 볼 때마다 난 정말…… 정말……!”이라며 얼굴을 감싸버리고 말았다. 어떤 감정이 최대치를 초과한 모양이었다. 자리를 지키고 있던 모모이가 잰걸음으로 나와 키세 등을 두드리며.
“알아, 키-쨩. 키-쨩이 들어왔을 땐 러브러브 절정기였으니까. 나도 다이 쨩이 의외로 남 잘 챙기는 건 알고 있었지만 테츠 군을 그만큼 챙길 줄은……. 쉬는 시간마다 나보다 먼저 가서 테츠 군 챙기고, 드링크 먹여주고……. 정말, 테츠 군이 아무리 좋아도 자중 좀 해야 되는데 다이 쨩 원래 그런 거 안 하고, 테츠 군도 테츠 군대로 마이 페이스니까 테이코의 빛과 그림자가 아니라 오셀로 호모 부부로 소문날 뻔했는걸. 막았지만.”
뭔가 마지막에 매우 신경 쓰이는 한 마디가 붙어 있었지만 못 들은 건지 무시한 건지 키세는 얼굴을 가리던 손을 치우고 한참 아래에 있는 모모이를 내려다보며 “모못치는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거죠……!”라고 감격에 찬 눈빛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거기에 힘차게 끄덕이며 “그럼!”이라고 올려다보는 모모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른다면 미소년과 미소녀가 손을 맞잡고 사랑이라도 맹세하는 걸로 보일지도 몰랐다. 실제 그 내용은 중학교 동창인 두 소년의 연애에 관한 깊은 관심과 애정이었지만.
갑자기 배심원석에서 날아온 고함소리(“키세에-! 시집도 안 간 남의 집 귀한 딸 손을 어딜 맘대로 잡고 있어?! 죽고 싶냐?!”)에 키세가 반사적으로 방어 자세를 취한 후에야 두 사람은 떨어졌다. “친구끼리 손 정도는 잡을 수 있는 거잖아요! 선배 벽창호!”라고 반론한 키세였으나 고함에 이어 의자까지 날아온 관계로 입을 다물었다. ‘벽창호’ 뒤에 ‘동정’도 붙이려고 했는데 안 붙이길 잘 했다고 생각한 키세였다. 붙였으면 의자가 아니라 본인이 날아와 연행해 갔을 것이다.
이번에도 어째서인지 한없이 무표정인 카와하라와 후쿠다가 카이조 쪽에 새 의자를 갖다 주었다. 소란이 겨우 진정됐을 때쯤에 일어선 것은,
“지금 우리 카가미 군을 상대로 ‘히로인’ 얘기를 꺼낸 거야?”
리코였다.
“1화에서부터 쿠로코 군과 빛과 그림자가 되기로 하고 일본 제패를 약속한 카가미 군을 제치고, 쿠로코 군 본인마저 포기하려고 했을 때에조차 쿠로코 군을 믿고 기다려준 카가미 군을 제치고 히로인이 어쨌다고?”
“그, 건……! 애초에 그 빛과 그림자도 미도리맛치가 쿠로콧치랑 아오미넷치 보고 한 얘기고……!”
“키-쨩! 지금 미도링은……!”
“……아.”
잊고 있었다. 지금 미도리마는, 놀랍게도,
“날 불렀냐? 키세.”
천적인 카가미 편이다.
슈토쿠 쪽에서 어김없이 “신 쨩-! 신 쨩이다-! 신 쨩이 드디어 제대로 말했어-! 오오츠보 씨, 봐요! 신 쨩이-!”라는 환성이 들렸지만 미도리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미도리맛치……. 아니, 응. 지금까지 말할 분위기가 아니라 가만히 있었는데, 미도리맛치가 왜 그쪽에 있는 거예요? 오늘 오하아사에서 사자자리한테 붙는 게 좋대요?”
“그러니까 넌 안 되는 것이야. 오하아사가 지정하는 것은 럭키 아이템까지다. 그리고 오늘 게자리의 럭키 아이템은 법전. 법전 중 가장 큰 판형의 가장 두꺼운 것을 골라온 나에게 사각은 없는 것이야.”
“……그렇슴까.”
영혼 없는 표정으로 영혼 없는 대답을 한 키세였으나 말을 하지 않았을 뿐 모모이도 비슷한 표정으로 미도리마를 올려다보았다. 이제 곧 고등학교 2학년이 되는데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는 동창이다. 중학교 때 봐서 어느 정도 익숙한 두 사람과는 달리 미도리마랑 이야기조차 몇 번 해보지 않은 리코는 당혹스럽기까지 했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전파지만 지금은 같은 편이다. 같은 편. 아까도 히무로가 이곳을 살인사건 현장으로 만드는 걸 어떻게든 막아주지 않았는가?
“그래서, 내가 왜 카가미의 손을 들어주느냐는 이야기였나? 키세.”
“아, 네. 미도리맛치, 카가밋치 싫어하잖아요? 만날 때마다 싸우면서. 그런데 왜 카가밋치 편드는 거예요? 미도리맛치도 아오미넷치랑 쿠로콧치가 어땠는지 봤으면서.”
“흥. 네가 아오미네 편을 드는 이유는 고작 그거냐? 짐작은 했지만, 너는 그래서 안 되는 것이야.”
“…….”
일단 사람을 전부정하고 시작하는 건 역시 미도리마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기에 키세는 반쯤 포기하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알고 있겠지만, 나는 호오의 문제로 농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에도 인사를 다하는 것뿐인 것이야. 이번 일도 마찬가지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오미네나 카가미를 싫어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운명의 선택을 받는 것은 언제나 인사를 다한 쪽이어야 한다. 그리고 언제나 인사를 다하는 내 눈에 양자의 차이는 너무나도 확연한 것이야.”
그 말은, 즉.
“애초에 쿠로코와 아오미네가 헤어지게 된 것은 아오미네가 인사를 다하지 않게 된 것이 원인인 것이야. 테이코는 실력주의였고 감독님과 부장이었던 아카시가 용인했으니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만, 실력이 있는 것과 인사를 다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다. 아오미네가 연습을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계속 인사를 다했다면 애초에 이런 이야기가 나올 필요조차 없었을 것이야.”
“그건……! 그치만 그 때 다이 쨩이 얼마나……!”
반 발짝 앞으로 나가며 반론한 모모이였으나,
“아오미네가 어떤 심리 상태였다고 해도 그는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 100보 양보해서 농구에 대한 인사를 포기한다 하더라도 쿠로코와 파국을 맞고 싶지 않았으면 교제에는 인사를 다했어야 할 터. 하지만 아오미네는 무엇을 했냐? 우리와 똑같이 여름 이후로 졸업할 때까지 쿠로코를 만나지도 않았던 것으로 아는데?”
미도리마는 가차 없었다. 모모이는 결국 도로 입을 다무는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타협이나 감정론은 통하지 않는다. 표현 방법이 꽤 꼬여 있어서 그렇지 사실 직정적인 성격의 미도리마의 기준은 꽤 심플하다. 노력하는 자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렇지 않은 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성격적으로 맞지 않는 카가미와는 별개로 미도리마에게 있어 아오미네는, 실력 외에는 평가 받을 수 있는 부분이 없다. 그리고 그것마저도 농구라는 영역을 떠나면 전무하다. 연애는 문외한이라고 하지만 ‘노력’에 관해서만큼은 그의 전문 분야. 아오미네가 혹평을 받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 인사를 다 못해서 관계가 파탄 났다고 해도 다시 쿠로코와의 관계를 수복하고 싶다는 것이 아오미네의 의지라면 지금부터 인사를 다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지금의 아오미네도 인사를 다하는 걸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야.”
그렇게 말하며 그가 시선의 아오미네는, 와카마츠와 어느 샌가 가세한 스사와의 힘 싸움에서 지쳤는지 두 사람에게 팔이 잡혀 축 늘어져 있었다. 미도리마는 다시 정면의 키세와 모모이에게로 눈을 돌렸다.
“농구 스타일은 맘에 안 들고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미스터리일 만큼 머리가 나쁜 것도 한심하기 짝이 없다만, 나를 이겼을 정도다. 카가미가 나름의 인사를 다한다는 것은 인정하도록 하지. 그리고 그것은 쿠로코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인 것이야. 중학교 때는 연락 사항 문자밖에 안 했던 녀석이 카가미가 자기를 위해 해준 요리라고 사진까지 첨부해서 보낼 정도니 알만 하다고 본다만.”
미도리마가 보기에는 ‘얼마나 자랑이 하고 싶었던 거냐’라는 심경이다. 쿠로코가 테이코 레귤러가 됐을 때부터 교류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둘 다 문자로 잡담 같은 걸 할 성격도 아니고 책과 농구를 제외하고는 이야기가 통하지도 않기 때문에 개인적인 용무로 문자를 하는 일은 전무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카가미 군이 해준 오늘 저녁 식사입니다.’라고 문자가 왔으니. 처음에는 문자의 의도 자체를 이해 못해서 화면을 켠 채 한참 굳어있었으나, “뭔데, 뭔데?”하고 들여다본 타카오가 대폭소 후에 말해준 진의(“지 애인 자랑이잖아 이겈ㅋㅋㅋㅋㅋㅋ”)를 듣고 미도리마는 눈썹을 한껏 찌푸리며 바로 답장 버튼을 누른 것이었다. 그리고 “팔불출도 작작하는 것이야”라는 한 마디만을 제목에 넣어주고 내용은 비워둔 상태로 반송(은 아니지만)해 주었다.
다만 미도리마와는 반대로 재밌는 걸 좋아하는 타카오는 그런 문자가 맘에 든 모양인지, 그 이후로 쿠로코와 카가미의 근황은 어째서인지 타카오를 통해 듣게 되었다. 둘이 어디를 놀러갔다든가, 세트로 뭘 샀다든가, 카가미에게 이게 어울렸다든가, 카가미가 뭘 해줬다든가 기타 등등. 왜 관심도 없는 남의 연애사를 숨이 넘어갈 것 같은 타카오의 웃음소리까지 곁들여서 들어야 하는 건지 납득은 가지 않았으나 라이벌이고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 자체가 싫은 것은 아니다. 잘 지낸다면, 그 이상은 없다. 괜히 둘이 싸우기라도 해서 농구에 지장이 있으면 곤란하니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오늘 이 자리에서 방관하며 배심원석에 앉을 수 없었던 거지만.
“본래는 인사를 다한 후 운명에게 선택 받기를 기다리는 것이 옳지만, 이번 일만큼은 천명을 기다리기만 해서는 해결될 일이 아니기에 여기까지 나온 거다. 쿠로코의 눈이 흐려져서 천명을 제대로 읽지 못한다면 대참사라고밖에는 할 말이 없으니까.”
“그렇게 말하면 아오미넷치가 대참사의 원흉 같잖슴까!”
“아니라는 거냐?”
반론하는 키세를 한 마디로 막은 미도리마는 조금 숨을 들이쉬고서,
“요리부터 청소, 빨래까지 다 할 줄 아는데다 웬만한 일로는 충격도 받지 않고, 설사 좀 흔들린다고 해도 똑바로 말하면 바로 제자리로 돌아오는 멘탈의 소유자에 지금까지 이용했던 거라고 하는데도 받아주는 대범함을 겸비한 카가미에 비해 언동은 불량하기 짝이 없으면서 속은 섬세해서 놀아주는 사람 없다고 멋대로 비뚤어져서는 ‘날 이길 수 있는 건 나뿐이다’ 같은 소릴 지껄인다든가 아무 데서나 시를 읊는다든가 하는 아오미네는 여자친구로서 대참사급이라고 생각한다만.”
“우와아아아! 미도리맛치 그거 말하면 안 돼요! 마지막 전중부터 WC 이전 일은 거의 다 흑역…… 아오미넷치이이이!”
키세가 소리치며 고개를 돌린 곳에는 190cm가 넘는 몸을 최대한 작게 움츠리고 머리 위에 먹구름을 띄우고 있는 아오미네가 있었다. 양옆에는 어쩔 줄 모르는 와카마츠와 난처한 듯이 웃는 스사, 앞에는 쪼그리고 앉아 “괘안타! 다 아였을 때 한 거 아이가! 니만 그런 거 아이다. 그니까 뚝 그쳐라 아오미네. 그래도 니는 와카마츠만 좀 팼지 가위 휘드르고 그라지 않았잖아~.”라며 아오미네의 멘탈 케어에 전력을 다하는 이마요시.
“아오미넷치 섬세한 거 아는 사람이 그렇게 큰 소리로 말하면 어떡해요——!”
“정말로 다루기 까다로운 귀찮은 녀석인 것이야.”
“아니, 아오미넷치도 미도리맛치한테 그런 소리 듣고 싶지 않을 걸?!”
농구부 공인 억지 하루 3번 사용권이 있는 사람이 누구에게 까다롭다느니 귀찮다느니 할 입장은 아니었다. “그리고 좀 까다롭고 귀찮은 게 어때서요! 여친은 원래 좀 까다롭고 귀찮은 맛이 있어야 사귀는 기분이 나는 검다!”
“호오. 그래서 너는 이상형이 ‘속박하지 않는 여자’인 거냐?”
“에…… 아니, 그…… 일반론, 이랄까…….”
“네가 ‘일반론’이라는 말을 알고 있었다니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라고 아카시도 놀랄 일인 것이야.”
“미도리맛치 나 괴롭히려고 나온 거예요?!”
“네 귀는 장식이냐. 아까 내가 한 말을 뭘로 들은 것이야. 널 괴롭히려고 이런 곳에 서다니, 난 그렇게 한가하지 않다.”
“모못치이-! 미도리맛치가 괴롬힘다-!”
결국 말싸움으로 미도리마를 이길 재간이 없는 키세가 퇴각했다. 자기와 머리 두 개 가까이 차이 나는 모모이 뒤로 숨는 키세와 대신 한 발짝 앞으로 나오는 모모이. 핑크빛 머리너머로 미도리마가 한심해 짝이 없다는 눈으로 보았으니 키세는 전력으로 무시했다.
“다이 쨩이 귀찮다든가,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지금! 누가 테츠 군에게 더 어울리느냐, 다시 말해서 누가 더 히로인에 가깝냐 하는 얘기잖아?”
키세 대신 입을 연 모모이는 그렇게 아오미네가 불리한 이야기에서 발을 빼고.
“키-쨩도 말했지만 농구를 포기하려고 했던 테츠 군을 붙잡아서 결국 테이코 레귤러가 될 계기를 만든 것도, 처음으로 ‘빛과 그림자’가 된 것도 다이 쨩이잖아? 말하자면 ‘쿠로코의 농구’의 시작이 된 거라구, 다이 쨩이! 테츠 군이 카가밍한테 빛이 되어달라고 한 것도 다이 쨩이 다시 웃으면서 농구하는 걸 보고 싶어서고! 이런 다이 쨩이 히로인이 아니면 대체 누가 히로인이라는 거야!”
거의 돌진할 기세로 역설하는 모모이에게 미도리마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물러서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그 사이를 다시 채우듯이 나타난 것은 리코였다.
“미안하지만, 그거 WC 전까지의 이야기거든?”
그녀의 등장에 안도한 듯 반 발짝 더 뒤로 물러나는 미도리마와 무언가를 감지한 건지 움찔하더니 모모이 등에서 떨어져 조금씩 뒤로 도망가는 키세. 후에 그가 이르기를 “큰 누나랑 작은 누나 연합군이랑 붙으면 그냥 죽도록 까이고 끝나지만 큰 누나랑 작은 누나가 싸울 때 새우등 터지면 우주 먼지가 됨다. 여자 둘이 싸울 때 끼어드는 거 아님다.”라고 하였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현명한 판단……이라기보다는 자기 방어 본능이었다.
그렇게 키세로 하여금 전선에서 도망치게 만든 장본인들은,
“모모이 양은 단행본도 안 봤나 봐? 아아, 미안. 연습도 안 나오는 주제에 손이 많이 가는 소꿉친구 때문에 그런 거 챙겨볼 시간이 없지? 우리 카가미 군은 연습 꼬박꼬박 다 하면서 그 와중에 쿠로코 군 챙기고 다 끝나고도 오버워크 되지 않게 말려야할 만큼 농구바보라 난 그런 거 잘 몰라서.”
“아하하~ 제가 좀 바빠서요. 다른 학교 선수들 데이터도 수집해야 하고, 또 혹시 테츠 군이 다이 쨩 두고 바람은 피지 않나 가끔 가서 보기도 해야 하고. 솔직하게 가서 예쁘게 굴고 앙탈 부릴 수 있는 성격이 아니니까요, 다이 쨩. 뭐, 중학교 때부터 하던 일이라 익숙하지만요. 아아, 리코 언니는 중학교 때 둘이 어땠는지 모르니까 잘 모르시겠다.”
체육관에 눈보라를 몰고 왔다.
전원 전·현 고교 농구 선수들인지라 체육계 남자 조직에 익숙해져 있는 일동은 대부분 얼어붙었다. 일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이(“캡틴, 저 두 사암 왜 저애요?” “쉿! 조용히 해, 하야카와. 불똥 튄다! 그리고 너 라행!”)와 여자 형제가 있어서 이 상황이 낯설지 않은 이(“어, 어이. 타카오. 이거…….” “아- 괜히 끼어들지 말고 얌전히 있으면 보통 알아서 해결 보니까 그냥 방관하심 돼요. 라고 신 쨩한테도 말해줘야 되는데…… 아, 분위기 파악했네요.”)를 제외하고 전원 입도 뻥끗 못하는 가운데 그 태풍의 눈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글쎄, 쿠로코 군 중학교 때 일에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 테이코’ 출신이라는 건 물론 입부 때 중요한 참고요소지만 어느 중학교 출신이든 전부 ‘세이린’의 선수로 만드는 게 내 할 일이잖아? 그리고 쿠로코 군도 무사히 ‘테이코 중학교의 식스맨 쿠로코 테츠야가 아니라 세이린의 쿠로코 테츠야’라고 하면서 지금은 완전히 세이린의 선수가 됐고 말이야. 과거는 과거, 현재는 현재. 살면서 꽤 중요한 거 아니겠어? 물론 인간관계에서도.”
“그럼요. 중요한 건 과거보다 현재죠. 하지만 현재라는 건 과거의 축적이니까요. 과거를 잊고 사는 건 불가능한 일인 걸요. 그러니까 테츠 군, 그 ‘세이린의 쿠로코 테츠야’가 된 다음에도 시합 후에 아오미네 군이랑 주먹 부딪친 거 아니겠어요?”
“아아, 그거? 그렇게 해석한 거야? 생각보다 긍정적이네, 모모이 양. 아오미네 군하고는 다르게. 아니, 우리도 별로 그걸 과거와의 결별이라고 보는 건 아니지만……. 굳이 말하자면, 정리? 잊고 사는 건 불가능해도 계속 질질 끌 순 없는 거잖아? 새 팀이 있고, 새 사람이 있는데. 그것도 자기가 세니까 팀플레이 필요 없다면서 그림자도 버리는 유리 심장이 아닌 빛이.”
“에~ 그치만 아무리 이상적이라도 출연양이 테츠 군 다음으로 많은데 인기투표 4위밖에 못하는 히로인은 좀 그렇지 않나요-? 다이 쨩이 같은 출연 분량이었으면 훨씬 더 높았을 것 같은데 말이죠, 순위.”
잠시 정적.
“힘들지 않겠어? 아오미네 군이 농구도 잘하고 멋있는 건 인정하지만 팀플레이 내던진 히로인이 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아니, 그게 다 괜찮다고 쳐도 그 멘탈로는 IH 끝날 즈음에 만화도 같이 끝나지 않을까? 여러 의미로.”
또 다시 정적. 숨소리조차 하나 들리지 않던 시간이 지나가고, 그리고.
“다이 쨩 멘탈이 떨어지면 깨질 것 같고 닿으면 부서질 것 같은 멘탈은 맞지만 좀 종잇장 멘탈이면 어때서요! 다이 쨩도 좋아서 그런 습자지 멘탈인 게 아니라구요!”
“카가미 군도 좋아서 인기투표 4위인 거 아니거든?!”
폭발했다.
“카가밍은 중학교 때 레이프 눈이었으면서! 1화에서도 일본의 농구는 다 거기서 거기라든가 그랬으면서! 다이 쨩은 중학교 때 천사였다구요! 엄청 웃으면서 농구하고 테츠 군 챙겨주고, 처음 보는 키-쨩한테 웃으면서 이름 부를 정도로 낯도 안 가리는 그런 퓨어미네였다구요! 테츠 군이랑 완전 둘이서 천사 커플이었는걸!”
“우리 카가미 군이랑 쿠로코 군은 현재진행형으로 현모양처와 상남자 커플이거든?! 서로 이름만 부르면 뜻이 통하는 레벨로 일심동체거든?! 그리고 과거편에서 퓨어미네에 천사 커플이면 뭐해! 본편에서 중간 보스인데! 그것도 자기 멘탈도 유리면서 한 번 진짜로 주인공 멘탈을 산산조각 내는 중간 보스인데! 카가미 군이 멘탈 튼튼하고 포용력이 태평양급인데다 끝까지 주인공을 믿어주는 정통파 히로인이었으니까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IH에서 쿠로코 군 리타이어잖아!”
“그, 그건 좀 오버해서 그랬던 거지 다이 쨩도 별로 그럴 생각은……!”
“두 번만 오버했다간 만화 끝나겠다! 그만하고 인정해! 아오미네 군은 히로인 포지션이 아니라 중간 보스야! 그걸로 끝! 주인공과의 과거가 있는 사연 많은 중간 보스면 충분하잖아! 히로인 자리는 누가 뭐래도 1화부터 프로포즈 받고 아오미네 군에게 ‘운명’ 소리까지 들은 카가미 군이야!”
“아니에요! 중간 보스가 아니라 한 번 다크 사이드로 떨어졌다가 주인공에게 구원받아 다시 돌아오는 히로인 포지션이라구요, 다이 쨩은! 애초에 츤데레다 쿨데레다 얀데레다 하는 요즘 세상에 카가밍이 정통파 히로인으로 가니까 인기가 없는 거예요! 말하자면 다이 쨩은 진히로인 속성이라구요! 시작이 다이 쨩이었으면 끝도 다이 쨩! 수미쌍관이어야죠!”
“시작이 왜 아오미네 군이야? 1화에서 쿠로코 군이 카가미 군한테 그림자가 당신의 그림자가 되겠다고 프로포즈한 거 잊었어?”
“그게 시작이 아니라 애초에 다이 쨩이……!”
그렇게 시작된 모모이와 리코의 논쟁은 그야말로 폭풍과도 같았다. 주변의 피해가 막심하다는 점에서 특히.
큰 소리가 날 때마다 움찔거리는 배심원석은 긴장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슈토쿠 쪽에서는 가끔 자지러지는 듯한 웃음소리가 들렸다가 바로 무언가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조용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카이조 쪽에서는 안 그래도 여자에 면역이 없는 모 졸업생이 “여자 무서워……!”라며 시합 때에조차 호전적으로 웃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기도 하였으나 평소 같으면 그걸 커버할 여성을 이 이상 없을 만큼 좋아하는 다른 졸업생도 조용히 끄덕거릴 뿐이었다.
하지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것은 내내 두 사람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당사자 셋이었다. 여러 의미로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어서 푹 숙이고 앉아있는 쿠로코와, 도망칠 의지까지 새하얗게 불타버린(놀라운 일이다.) 관계로 구속은 풀렸지만 대신 영혼이 없는 아오미네, 그리고 머리만 숨으면 다 숨은 줄 아는 가재 마냥 형의 품에 머리를 박고 새빨개진 얼굴을 숨기고 있는 카가미. 뭐가 어쨌든 자신의 과거 및 현재 연애사와 흑역사가 낱낱이 밝혀지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당사자들이 어떤 상태이든 개의치 않고 두 소녀들의 공방전은 점차 그 열기를 더해갔다. 두 사람의 행적부터 시작해서 성격, 언동, 태도, 쿠로코와 있었던 크고 작은 사건들, 그에 관한 주변인들의 평가 등등. 누가 더 쿠로코 테츠야의 짝으로 어울리냐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는 종으로 횡으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고, 그들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체육관에 아카시밖에는 없었지만 그에게는 말리고자 하는 의지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두 사람의 목소리를 즐겁게 듣고 있을 뿐이다.
“카가밍은 눈썹끼리 이산가족이면서! 다이 쨩이 훨씬 섹시하다구요! 다들 까맣다고 뭐라 그러지만 그게 얼마나 레어한 건데!”
“하아?! 눈썹 좀 갈라진 게 어때서! 애교 있고 귀엽잖아! 그리고 섹시? 아- 모모이 양? 그야 카가미 군도 꽤 험악한 인상이긴 하지만 사실 연쇄 농구범 소리 듣는 아오미네 군보단 못하거든? 내 눈엔 아오미네 군의 어디가 섹시한지 도저히…….”
“키-쨩!”
“아, 넵!”
갑작스러운 모모이의 부름에 불똥이 튀지 않도록 구석으로 조용히 피신해있던 키세가 놀라서 대답했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키세 쪽을 돌아본 모모이는 “다이 쨩!”이라고 한 마디. 키세 쪽을 보면서 아오미네 이름을 부른다는 건……. 머리는 나쁠지 몰라도 눈치는 나쁘지 않은 키세는 얼른 자신이 앉아있던 곳으로 돌아가, 지금은 손발이 묶이지 않은 상태로 축 늘어져 있는 아오미네의 팔을 붙잡았다. 키세가 잡자 영혼 없는 눈이 한 번 그를 봤으나 그 외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키세는 거의 끌다시피 하여 아오미네를 모모이 앞에 대령했다. 그러자 모모이는 리코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다시 한 번 입을 열더니,
“다이 쨩이 어디가 섹시한지 보여드리면 되죠?”
라고 한 마디 하고서, 아오미네가 잠옷 대신 입고 잔다는 탱크톱을 양손으로 잡아, 눈 깜짝할 사이에 그것으로 머리 위로 벗겨버렸다.
“에…… 뭐…….”
“키-쨩 잘 잡고 있어!”
“네, 넵!”
아무리 영혼이 나가 있었어도 이런 비상사태가 되면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인 아오미네가 도망이라도 칠까 다시 한 번 키세에게 엄명을 내린 모모이는 리코 쪽을 본 상태로 아오미네의 허리를 하얗고 가는 손으로 거의 붙잡듯이 감쌌다.
“보세요, 이 근육이 붙어 있으면서도 늘씬한 몸! 절대 보기 흉하게 울퉁불퉁하지 않은 라인! 어깨는 넓으면서 역삼각형으로 떨어져서 확실히 들어가 있는 게 보이는 허리! 작은 엉덩이! 말 그대로 초콜릿 같은 속살! 거기다 피부도 이렇게 좋다구요! 다이 쨩, 관리도 하나도 안 하는데!”
“사츠키이이이이이이이!”
드디어 제정신으로 돌아온 아오미네가 자신의 허리를 손바닥으로 쓸며 피부에 감탄하고 있는 소꿉친구를 말리려고 했지만, 안타깝게도 팔은 이미 키세에게 붙잡혀 있었다.
“이렇게 완전 일자로 된 쇄골도 정말 보기 드물다구요! 그래서 다이 쨩 많이 파져 있는 옷 입혀놓으면 얼마나 예쁜데요! 브이넥 흰색 세로줄 세타라든가! 교복 와이셔츠 사이로 은근 보이는 것도 그렇고! 테이코 교복이 흰색인데다 다이 쨩 와이셔츠 단추 두 개는 기본으로 풀고 다니니까 테츠 군이 안 보는 척 하면서 보기도 하고, 연습하면서 옷으로 땀 닦을 때도…….”
“갸아아아아아아아아———!”
뒤의 말은 아오미네의 혼신의 비명에 의해 들리지 않았지만 추측하기에는 충분했다. 키세가 쿠로코 쪽을 보자, 대체 언제부터 그러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모모이의 손에 의해 반바지 1장 차림이 되어버린 아오미네를 뚫어져라 보고 있던 그가 키세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고개를 돌린 참이었다. 진짜임까, 쿠로콧치. 생각해 보면 중학교 때 꽤 아오미넷치만 빤히 보고 있긴 했지만…… 거기다 지금도……. 남자네요, 쿠로콧치…….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테츠 군이 이상한 눈으로 봐서 땀 닦기 왠지 어색하다고 나한테 상담했던 게 누군데!”
“야, 너, 그거, 그걸 지금 말하면……! 옷! 옷 내놔 멍청아———!
“농구하다 더우면 아무 생각 없이 웃통 벗고 돌아다니면서 뭘 새삼스럽게…….”
“그거랑 이거랑 같냐?! 됐으니까 빨리 내노라고! 키세, 너도 이 팔 놔 새끼야 죽는다?!”
“왜 나까지?!”
그렇게 잠시 소란스러웠던 모모이와 아오미네, 키세 세 사람은 결국 모모이가 키세에게 탱크톱을 주고, 와카마츠가 또 호출당해 아오미네가 키세를 때리지 않게 팔을 잡고서 도로 입혀주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다시 탱크톱을 입은 아오미네가 팔을 구속당해 심기가 불편해 보이기는 하지만 얌전해지는 것으로 일단락된 뒤, 모모이는 다시 리코 쪽을 보았다.
“어떤가요?”
“응, 정말로 좋은 수치…… 아니, 좋은 몸이네. 아오미네 군.”
리코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눈으로 아오미네의 수치를 읽어낸 모양이었다. 배심원석의 세이린 1학년들이 존경으로 눈으로 보고 있었으나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리코는.
“뭐, 아오미네 군이 섹시하지 않다는 말은 철회할게.”
“철회한달까, 철회하지 않을 수 없달까-. 카가밍이 못 가진 매력이니까요, 이건.”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이는 모모이. 물론, 치열한 승부욕으로 WC에서 정점을 거머쥔 세이린의 감독은 그런 도발을 그냥 넘어가 줄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천천히 얼굴에 미소를 띄우더니 작은 입술을 열어 한 마디 던졌다.
“카가미 군. 이리 와.”
이름과 명령. 거기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리코를 본 카가미였으나, 곧 자기 쪽을 돌아본 그녀의 표정을 보고 혈색이 좋은 편인 얼굴이 파랗게 되었다. 저 표정은, 상대방을 지옥으로 떨구고 싶을 때의 리코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 편을 먼저 지옥으로 떨어뜨릴 때의 리코다.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중간부터 다시 얼굴을 묻었지만 아오미네가 모모이에게 무슨 일을 당했는지 대충은 안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 가면…….
“빨리 와.”
고개를 가로로 저은 카가미였으나 의미는 없었다. 반짝이는 미소의 리코가 한 자 한 자 끊어 발음 한 명령 한 마디에 몸은 카가미의 의지를 배반하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지난 1년 동안 ‘감독의 말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고 몸이 기억하는 카가미가 리코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평소의 당당한 걸음걸이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쭈뼛쭈뼛 걸어서 리코 옆에 선 카가미. 불안한 듯 자신을 내려다보는 후배를 보고 리코는 여전히 아름다운 미소로.
“셔츠 벗어.”
세이린 일동이 “와- 옛날 생각난다-.”라고 모두 같은 코멘트를 하게 만드는 명령을 내렸다. 다만 지금 그 목적이 ‘수치’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 그들의 ‘옛날 생각’과는 다른 점이었지만. 그것을 알기에 카가미는 큰 몸을 한껏 움츠리고 저항했으나 “카가미 군.”이라고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그를 용납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카가미는 “우으…….”라고 낮은 소리로 웅얼거리며 팔을 교차시켜 셔츠자락을 붙잡았다.
“나도 사실 정말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애초에 언급조차 하고 싶지 않은 그런 부분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쪽에서 그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도 어쩔 수 없지.”
카가미가 옷을 벗는 옆에서 먼저 그렇게 운을 뗀 리코는 천천히 한 손을 들었다. 그녀의 신호에 나타난 것은 지금까지 배심원석에 있었던 키요시와 미토베. 언제나 그렇듯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웃는 상인 키요시 옆에서 미토베는 곤란한 듯한 표정이었다. 세이린의 대표 센터 두 사람의 등장에 카가미가 움찔할 시간조차 주지 않고 리코는.
“텟페이, 미토베 군. 꿇려. 그리고 잡아.”
그냥 들으면 어디 폭력조직의 보스가 한 말이라고 착각할 것 같은 발언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물론 피해자인 카가미도 마찬가지였는지 눈을 경악으로 크게 뜬 그였으나 “카가미, 다리 다치면 안 되니까 괜히 움직이지 말고 구부려-.”라는 키요시의 말에 움찔거리면서도 카가미는 얌전히 무릎을 꿇었다. 개인주의인 토오는 아니라는 모양이지만 세이린은 피라미드의 정점인 감독에 대한 절대 복종과 연공서열이 철칙. 그것도 상대가 2학년 최고의 온건파 두 사람이면 저도 모르게 따를 수밖에 없다.
카가미가 순순히 무릎을 꿇고 양팔을 각각 키요시, 미토베에게 붙잡힌 것을 확인한 후에야 리코는 다시 모모이를 보았다.
“확실히 아오미네 군은 늘씬하게 근육이 붙어서 야생 흑표범이라도 보는 것 같달까, 뭐 그런 섹시함이 있다는 건 인정하겠지만 말이지, 모모이 양. 우리 에이스를 그냥 날개 없이도 코트를 날아다니는 천사로만 생각하면 곤란해.”
여러 의미로 어딘가에 숨고 싶어진 아오미네와 “천사……?”라고 의문을 표하는 카가미를 뒤로 한 채 리코는 말을 이었다.
“카가미 군의 섹시함이라는 건 말이지, 근육이랑 살이 적당히 같이 붙어서 만졌을 때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몸이라고! 특히 가슴!”
“감독?!”
깜짝 놀라 리코를 부른 카가미였지만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겨 카가미 바로 뒤까지 온 그녀는 무릎을 꿇어 자기보다 시선이 낮아진 후배의 몸에 손을 뻗어, 놀랍게도 그의 가슴 부분을 움켜쥐었다.
“봐! 이 볼륨! 이 탄력! 손바닥에 달라붙는 것 같은 감촉! 심지어 부드럽기까지 하다고?! 근육인데!”
“히이이이이이익! 감독, 손! 손———!”
너무 놀라 거의 패닉 상태가 되어 반쯤 우는 카가미가 자신의 가슴 위에 올라와있는 두 손을 떼 줄 것을 요청했으나 리코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거기다 카가미 군, 가끔 속옷 안 입고 바로 티셔츠 입으니까 그 땐 정말 장난 아니라고! 뭐가 장냔 아니냐고? 티셔츠가 카가미 군 몸에 달라붙는 거랑 그래서 젖꼭지까지 다 보이는 거랑 그걸 보는 쿠로코 군의 산짐승을 노리는 사냥꾼 같은 눈이! 그 어떤 맹수라도 이 손으로 잡아서 (가죽을)벗겨 버리겠다는 결의에 찬 눈이!”
“가, 가가, 감……!”
“시끄러, 카가미 군! 남자면서 나보다 크면 이 정도는 감수해! 자, 어때? 모모이 양. 가슴으로도 부족하다면 그에 못지않게 글래머러스한 엉덩이도…….”
“타츠야아아아아아아아!”
결국 카가미의 구조 요청에 달려 나온 히무로가 “여기까지 할까? 아이다 양. 저쪽도 이 정도면 납득했다고 보는데.”라고 부드럽게 웃으며 리코의 손을 치운 덕에 상황은 종료되었다. 다만 분위기 파악이라는 것을 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키요시가 훌쩍거리며 다시 티셔츠를 입는 카가미에게 “이야~ 카가미는 가슴이 굉장하구나!”라는 무신경한 한 마디를 던져 배심원석에서 “넌 그냥 입 다물어, 이 멍청아!”라는 주장의 성난 목소리가 날아왔다.
다시 옷을 갖춰 입은 카가미가 아직도 조금 콧물을 훌쩍이며 자기보다 작은 의형제에게 매달리다시피 하여 리코의 뒤쪽에 서게 된 후에야 그녀는 다시 정면, 모모이를 보았다. 그곳에 보이는 것은 살짝 입술을 깨물고 분한 듯이 카가미를 보고 있는 소녀의 모습.
“가슴과 엉덩이 메인의 글래머러스 나이스 바디라니. 카가미 군, 무서운 아이……!”
원작 공인 글래머 미소녀가 하기에는 위화감밖에 없는 한 마디였다.
“후…… 어때, 좀, 이해가 갔어? 모모이 양.”
“네……. 역시, 테츠 군이 두 번째로 선택한 사람답네요, 카가밍…….”
조금 벅찬 듯 숨이 가쁜 두 사람이었으나 그야 그렇게 오랫동안 큰소리로 논쟁을 벌이며 체력을 소모하면 그럴 만도 했다. 리코 뒤에서 미토베가, 모모이 옆에서 아직도 아오미네를 잡고 있는 와카마츠가 걱정스럽게 소녀들을 바라보는 가운데 다시 자리로 돌아가 앉아있던 이마요시가 손을 들고서는 아카시 쪽을 봤다.
“자들 얘기도 다 해뿐 것 같은데, 인자 고마하고 본인 얘기 듣는 게 좋지 않겠나?”
“저도 그게 좋다고 생각합니다만……. 사츠키. 아이다 감독님.”
아카시가 이름을 부른 두 사람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고개를 끄덕여 승낙을 표했다.
분홍색 머리카락을 핑그르르 날리며 돌아선 모모이는 일어서서 자기 쪽으로 걸어온 이마요시에게 “다이 쨩을 부탁드려요.”라고 가볍게 머리를 숙였다. “내만 믿어라.”라며 마치 선수교대라도 하듯이 손을 들어 그녀의 손바닥과 마주친 이마요시가 모모이가 서 있던 자리에 서고, 모모이는 자리로 돌아가 의자에 앉았다.
리코는 뒤로 돌자마자 보인 히무로에게 “카가미 군을 위해서라도 상해 사건만은 참아 줘.”라고 한 마디. 빙긋 웃어 보인 히무로는 “선처할게.”라며 자기 옆을 지나간 리코를 배웅했다. 대신 그는 아직 자기에게 매달려있는 카가미를 데리고 한 발 앞으로 내딛어, 리코가 서 있던 자리에 섰다.
뚱한 표정으로 한 팔을 와카마츠에게 붙잡혀 의자에 앉아있는 아오미네와 그 옆에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로 선 이마요시. 모모이와 키세는 좌석으로 돌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마주보는 곳에 선 것은 훌쩍이는 건 그쳤지만 불안한 표정으로 형의 옷을 꼭 쥐고 있는 카가미와 히무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미도리마와 리코는 담담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마요시의 눈이 다시 한 번 아카시를 향하자, 법복을 입은 소년은 한 번 끄덕였다. 거기에 이마요시는 그 미소를 더 깊게 하고서.
“와카마츠. 고마 드가라.”
“엣, 하지만 이마요시 씨…….”
“인자 아오미네는 토끼고 안 그칸다.”
자신 있는 말투의 이마요시에게 와카마츠는 조금 당황한 듯 그와 아오미네를 번갈아 보고서, 천천히 아오미네의 팔을 놓았다. 여전히 당혹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이면서도 그가 다시 배심원석으로 들어가자, 시선으로 후배를 배웅한 이마요시가 고개를 돌렸다. 깊은 파란색 정수리와 검은 뒷목. 좀처럼 내려다볼 일이 없다보니 신선한 광경이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아오미네. 니 쿠로코 군한테 할 말 없나?”
“무슨 말을 시키고 싶은 건데?”
고개를 든 아오미네는, 무섭게 이마요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얼굴에 과장되게 어깨를 움츠리며.
“엄매 무서버라~. 이놈 눈 좀 보소, 눈. 니 맨날 그카니까 사람들이 연쇄 농구범이라카는기다. 알긴 아나?”
“어이.”
“농담이다, 농담~. 조크~. 내 농담도 몬 하나.”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하는 이마요시에게 아오미네는 혀를 한 번 찼다. 하지만 그런 아오미네의 태도를 조금도 개의치 않는 이마요시는 설설 웃는 낯으로 아오미네 옆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의심의 눈초리로 그를 내려다보는 아오미네. 하지만 이마요시의 시선은 후배가 아니라 사선에 있는 뒷모습, 쿠로코를 보고 있었다.
“니가 쿠로코 군 좋아한다카는 소리는 안 해도 된다. 여기 있는 사람 다 아는 소리 뭐 할라꼬 하는데.”
“어이, 난…….”
“아이가?”
이번에야말로 그 눈이, 아오미네를 보았다. 질문을 받은 사람은 입을 벌린 채로 굳었다.
“찐짜로 아이가?”
천천히, 그 입이 다물어지는 것을 이마요시는 가늘게 뜬 눈으로 지켜보았다.
“아이라고 말도 몬 하면서~.”
그 말에 더더욱 인상이 험악해지는 아오미네였지만 거기에 기가 죽을 이마요시가 아니었다.
“삐지지 마라~. 누가 쿠로코 군 좋아한다고 뭐라켔나? 사람이 그럴 수도 있는기지. 전 남친 아직 좋아한다고 누가 접시물에 코 박고 죽으라카드나? 아이잖아. 근데 니가 와 그라는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조금 긴 침묵 후에, 마치 쥐어짜내는 듯한 소리로 흘러나왔다.
“테츠는, 이제, 카가미 거잖아.”
햇볕에 탄 얼굴이, 아까와는 다른 모양으로 일그러진다.
“그러니까 나랑 무슨 일 있으면, 그건 그냥 바람핀 거고……. 키스도, 그냥 좀 욱했달까, 그냥, 그런 거고……. 결국, 카가미한테 돌아갈 거니까…….”
“그래서, 니는 우짜고 싶은데?”
아오미네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입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입술이 떨리다가, 그걸 참는 것처럼 입술을 입 안으로 당겨 꾹 누르고, 도로 제자리로. 검은 피부가 하얗게 될 만큼 손가락을 꼭 쥐고, 다시 푸는 걸 몇 번 반복하고. 그리고.
“별로…… 그냥, 이대로……. 카가미는, 농구는 한참 멀었지만 테츠한테는 좋은 여친이라 그러고……. 그러니까 그냥, 가끔 만나주면…… 그걸로…….”
겨우 나온 말은 아오미네답지 않게 소극적이고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고요한 체육관에 그 말을 못 들은 사람은 없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지만 그 ‘아오미네 다이키’가 이런 말을 했다는 것에 충격을 받은 사람은 적지 않았다. 그리고 저런 말까지 하게 만드는 그 절절함에 마음이 움직인 사람도.
하지만 그것을 전부 날려버린 것은, 체육관 전체에 울려 퍼지는 이마요시의 웃음소리였다.
“하이고야~ 이게 무슨 소리고. 천하의 아오미네가 만나만 주면 좋탄다! 히~ 내 배꼽이 다 빠질라카네. 야야, 임마가 폭군? 임마 보고 폭군이라켔나? 폭군 다 얼어 죽었나, 으이?”
“어이!”
“대~단한 지고지순 일편단심 민들레 났다, 그제?”
“아무리 당신이라도 이 이상 헛소리 하면…….”
“뭐가 헛소리고?”
말과 동시에 지금까지 울리던 이마요시의 웃음소리가 한 순간에 그치고, 그 얼굴에서 웃음기도 함께 사라졌다. 그 변화에 당황스러운 듯 아오미네가 잠시 말이 안 나오는 사이, 이마요시가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헛소리? 내가 한 말이 헛소리가? 아일텐데? 내보다 훨-씬 말또 안 되는 소리 쳐해싸코 앉아있는 놈이 여 있는데 이기 무슨 헛소리고?”
일반적으로 봐서 충분히 큰 키에 들어가는 이마요시가, 내려다보는 눈.
“만나만 주면 돼? 누가? 니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마라.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들장미 소녀 캔디였는데?”
뻗은 손이, 잠옷 대용이라는 용도 탓에 상당히 늘어져 있는 티셔츠의 목 부분을 붙잡았다. 그리고, 입을 크게 벌리고, 그 누구도, 그와 고등학교 3년간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한 친구조차도 들어보지 못한 큰 소리가 그 입에서 쏟아져 나왔다.
“좋아하면 좋아한다카면 되잖아! 가지 말라카면 되잖아! 와 말을 몬하노?! 말하면 누가 니 잡아 쭉이나?! 아이잖아! 근데 와 말을 몬 하는데! 쿠로코 군을 위해? 그리 쿠로코 군을 위한다는 놈의 자슥이 중학교 때 그 사단을 냈나? 웃기지 마래이. 내는 내, 할 말 하고 사는 게 니 아이가!”
“나는……!”
“토 나오는 소리 고마 해라! 니가 그러고도 아오미네 다이키가?!”
숨을 들이킨 것은 어느 쪽이었는지. 그리고, 한 순간, 침묵. 숨을 뱉고, 다시 들이쉬고, 크게.
“테츠!”
이마요시가 잡고 있는 아오미네의 티셔츠를 놓았다. 동시에 뒤로 빠지는 몸. 아오미네가 고개를 돌린다. 중앙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아카시 아래의, 오늘 이곳에서 유일하게 등을 돌리고 있는 사람. 하늘색 눈동자가 분명히 자신을 보는 것을 보고, 아오미네는 잠시 떨었다. 하지만 떨쳐낸다. 자신은, 아오미네 다이키는,
“내 옆에 있어!”
아무리 말도 안 되는 말도, 염치없는 말도, 무례한 말도,
“아무데도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그게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라면, 하는 것이,
“가끔 만나만 주면 된다는 거, 다 거짓말이다. 나는, 계속 테츠 옆에 있고 싶어. 어디 가고 그러지 말고, 계속, 거기서.”
아오미네 다이키다.
쿠로코가 드물게 표정에 티를 내며 놀라는 것을 보았다. 입술 모양이 자신을 부른다. 거기에 뭐라 말할 수 없이 벅차오른 아오미네는 자기가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지 않도록 입술을 꾹 깨물었다. 동시에 머리에 닿는 느낌. “하면 된다 아이가.”라고 작게 말하는 목소리. 그가 주장으로 있었을 때도 한 번도 닿은 적이 없었던 손이 머리를 쓸어주었다.
“당신 소리 지르고 그러는 거, 캐릭터랑 안 맞지 않아?”
“야야, 말또 마라. 목 아파서 파이다. 내 니 데꼬와노코 먼저 졸업해뻐려서 한기지, 아님 아 했다.”
그런 것까지 책임질 필요가 뭐가 있다고. 정말 이 사람에게는 토오에 있을 때도, 심지어 토오를 떠난 후에도 신세지는 일밖에 없다. 아오미네는 입을 꾹 다물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려고 한 건, 아닐 테니까. 말해봤자 “내일 눈 온다카드나? 내는 몬 들었는데~.” 같은 소리밖에 안 하겠지.
“슬슬 이쪽 얘기를 해도 될까?”
목소리는 반대편이었다. 뒤로 빠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카가미의 손목을 한 손으로 붙잡고 있는 주인공, 히무로. 그는 자기보다 키도 덩치도 큰 동생을 한 손으로 제압한다는 엄청난 광경을 연출하면서도 눈썹 하나 일그러뜨리지 않고 이마요시를 보았다. 아오미네를 쓰다듬던 손을 내리고 웃는 것을 긍정으로 받아들이고서 히무로는 다시 입을 열었다.
“드라마 같은 감동적인 한 장면을 연출한 차에 미안하지만, 음…… 뭐라고 하면 좋으려나…….”
카가미의 손목을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쪽 손을 턱에 갖다 대고 고민한 후 히무로는.
“끽해야 전 애인과의 불륜 주제에 말이 많다고 할까?”
“타츠야?!”
대체 뭘 고민했는지 알 수 없는 어휘 선택이었다. 거의 매도에 가까운 한 마디에 형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용을 쓰던 카가미가 놀라 그의 이름을 불렀지만 히무로는 그 뜻을 알 텐데도 여전히 웃으며.
“그렇잖아? 아무리 중학교 시절이 아름다웠네 순수했네 해도 결국 지금 쿠로코 군이 타이가랑 사귀고 있는 이상 그냥 외도인 걸. 엄연히 정식으로 교제하는 상대가 있는데 전 애인이랑 Kiss라니. Haha, 참 재미있는 농담이야. 그렇지? 쿠로코 군.”
이름을 불린 장본인은 움찔하며 몸을 굳었다. 지금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는 건, 저 사람 성격에…….
“지금 상황만으로도 당장 홈센터에 가서 야구 배트와 못을 따로 사 하나로 만들고 싶을 정도인데, 여기서 타이가랑 헤어지겠다든가 그런 소리가 나오면 나는 쿠로코 군을 데리고 함께 미국으로 가 평화적으로 이야기하는 수밖에는…….”
“타츠야, 머리에 총 갖다 대고 이야기하는 건 평화적이라고 안 하거든?!”
“Haha, 무슨 소리야? 타이가. 쏘지만 않으면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대화야.”
웃는 얼굴로 살해위협을 하는 귀국자녀가 거기에 있었다. 다른 한 명의 귀국자녀는 형의 말에 전력으로 고개를 가로젓고 있었으나 형은 그것도 본 체 만 체.
“물론 쿠로코 군은 내가 동생 Boyfriend를 멍석말이해서 미국으로 데려갈 사태 같은 걸 만들지 않을 정도로는 현명하겠지? 우리 타이가를 교제상대로 고를 정도니까.”
“그치?”라며 덧붙이는 히무로였으나, 쿠로코는 자기가 지금 그쪽을 등지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 히무로 뒤에 무언가 보여선 안 될 것들이 많이 보일 터다. 주로 건너가면 돌아올 수 없는 강이라든가, 성난 얼굴에 팔이 여섯 개 쯤 달린 거인이라든가, 머리가 셋 있는 개라든가.
“아니, 저기, 타츠야, 나는 괜찮으니까 멍석말이라든가 평화적인 대화라든가 그런 거 안 해도…….”
“……괜찮아……?”
갑자기 이제까지 띄우고 있던 살벌한 미소가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누구 하나 기뻐할 일은 아니었다.
“괜찮다니, 뭐가 괜찮다는 거야? 타이가.”
“엣…….”
여태까지 쿠로코를 향했던 살기등등한 히무로의 눈이 이번엔 살기가 사라진 대신 쉬 말을 꺼낼 수 없게 만드는 압력이 되어 카가미를 향했다.
“쿠로코 군이랑 아오미네 군이 중학교 때 사귀었다는 거? 그걸 듣고도 괜찮아? 타이가, 쿠로코 군에게 고백 받았을 때는 사귀었던 것까지는 몰랐다며?”
“아니, 그건…… 옛날, 일이고. 그리고 별로 사귀게 됐다고 해서 과거사 일일이 다 캐는 건 예의가 아니라고 타츠야가…….”
“응. 뭐, 그 때는 설마 우리 타이가를 어디의 말뼈다귀 같은 놈이 채갈 줄 모르…… 타이가가 남자친구를 사귀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여성에 대한 예의 일반으로 가르친 거고.”
“에? 말뼈다귀? 곰국?”
“아무것도 아냐.”
절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발언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주장하고서 히무로는 말을 이었다.
“그럼 쿠로코 군이 카가미 군 모르게 아오미네 군 만나면서 키스했다는 건? 이것도 괜찮아?”
“그건…….”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가 형의 얼굴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곳의 뒷모습을 잠시 보았다. 그리고 이번엔 바닥으로.
“별로, 일부러 말 안 한 건…… 아닐 테고. 애인이라고 누구 만나는지 다 보고하는 건 아니고, 쿠로코도 쿠로코대로 사람 만나고 하는 거니까…….”
“헤에, 그럼 키스도 해도 돼?”
이번에야말로 카가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바닥을 본다고 해봤자 카가미보다 키가 작은 히무로에게는 보이는 그 표정.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 눈썹과 눈썹 사이에 주름이 생기는 것을 히무로는 담담한 표정 아래서 지켜보았다.
“……나, 나도! 알렉스한테, 가끔, 당하니까…….”
“타이가.”
이름을 부른 순간 움찔한 그 어깨를 보고도, 못 본 척.
“알렉스가 우리에게 해주는 키스랑 쿠로코 군과 아오미네 군이 한 키스가 전혀 다른 의미인 건 네가 가장 잘 알잖아? 그런 식으로 계속 아무것도 아닌 척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어?”
변명처럼 말을 잇던 입술은 이번에야말로 굳게 닫혔다. 언제나 중요한 말은 하지 않는다. 성격이라는 건 알지만……. 히무로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타이가. 무서워?”
이번에는 그 어깨가 떨리기 전에 먼저, 히무로는 동생의 손을 잡았다.
“뭐가 무서워?”
될 수 있는 한 부드럽게. 그야말로 어렸을 때 개를 만나 울음을 터뜨린 카가미를 어르던 것처럼. 자기보다도 크고 딱딱하고, 그러면서도 아이 체온 마냥 따뜻한 손을 천천히 쓸어주면 곧 그 손이 약하게 히무로의 손가락을 쥐었다.
“쿠, 로코가…….”
“응.”
간신히 입을 뗀 것을 받아주면, 그 후로는 봇물이 터진 것 같았다.
“아오미네를, 아직도 좋아해서 키스한 거면…… 내가 그러지 말라고 하면, 그럼 내가…… 싫어질 수도, 있잖아…….”
“응.”
“내가 싫어지면 헤어지자고 할지도, 모르고……. 헤어져도 쿠로코는, 똑같이 농구해주겠지만, 그것뿐이고……. 그치만 나는, 쿠로코랑 농구할 때만 같이 있는 게 아니라, 계속, 같이…….”
“응.”
“그러니까…… 쿠로코랑 같이 못 있을 바에야…… 그냥……… 이대로…….”
“타이가.”
카가미가 말을 시작한 이후 히무로는 처음으로 동생의 말을 가로막았다. 계속 아래를 보고 있던 카가미는 이름을 불린 것에 눈을 들어 형을 보고, 어깨를 잔뜩 긴장시키며 움찔했다.
“너는 나 때도 그러더니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일수록 짜증나도록 소극적이구나.”
그리고 체육관에는 정적이 찾아왔다. 배심원석은 말 그대로 유구무언. 자리를 지키고 있던 리코는 갑자기 지끈거리기 시작한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고, 미도리마마저도 ‘아무리 그래도 저건 아닌 것이야.’라고 생각했으나 히무로가 쿠로코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리고 간신히 입 밖으로 내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외야를 신경 쓸 리가 없는 히무로는 완전히 굳어버린 동생의 어깨를 붙잡고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잘 들어, 타이가. 싫으면 싫다, 좋으면 좋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야.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넌 그 때 나에게 절연당하는 게 싫었으면 가만히 맞고 있을 게 아니라 너도 한 대 치고 ‘동생한테 지면 형이 아니라니 그런 게 어딨어, 이 바보 타츠야! 난 그런 거 상관없이 계속 형제 하고 싶다고!’라고 소리쳤어야 했었어.”
“아니, 타츠야 내가 때린다고 해서 안 맞잖아?!”
“타이가한테 맞으면 아프잖아.”
“나도 아팠거든?!”
“아프라고 때린 거야.”
“…….”
이 세상의 부조리를 한곳에 응축시켜놓은 것 같은 대화였다. 다른 의미로 기운이 빠지기 시작한 카가미의 어깨를 가볍게 때리고서 히무로는.
“뭐, 다시 말해서 타이가는 좀 더 자기의 마음을 말로 표현하는 게 좋다는 소리야. 무조건 무서워 하지만 말고. 도망치기만 해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 이미 배웠잖아? 소중하기 때문에 부서지는 게 두렵다는 마음은 알겠지만, 두려워도 치고 나가는 용기는 코트에서만 필요한 게 아니야. 타이가도 이제 알지?”
“……응.”
“그래야 내 동생이지.”
작지만 그래도 확실하게 끄덕인 카가미를 보고 히무로는 이번에야말로 살기도 압박감도 없는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떼고 한 발짝 뒤로. 이제 아무것도 가리는 것이 없게 된 카가미의 시야에는 그의 뒷모습이 곧장 들어왔다.
“쿠로코.”
언제나, 부르면 돌아보게 되는 목소리. 그 뜻을 잘못 읽은 법 없는 목소리. 쿠로코는 고개를 돌려 그 주인을, 자신의 빛을 보았다.
“나한테 같이 있자고 말한 건 너지만, 계속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한 건, 나도 마찬가지니까. 그래서, 같이 있자고 한 거니까. 그리고 너는…… 네가 한 말은, 지키는 녀석이니까. 앞으로도 계속 나랑 같이 있어줄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평소와 변함없는 신뢰를 그에게 향한다. 그런 동생을 부드러운 미소로 지켜보던 히무로는 말을 끝낸 카가미의 등을 칭찬하듯이 두 번 두드려 주었다.
“잘 했어, 타이가. 네 신뢰가 배신당하지 않기를. 아, 혹시 쿠로코 군이 아오미네 군과 키스한 게 신경 쓰인다면 지금부터라도 내가 미도리마 군한테 가위를 빌려서 잘라버리…….”
“오늘 럭키 아이템은 법전인 것이야! 설사 가위라고 해도 아카시와 당신한테만큼은 빌려주지 않는 것이야!”
히무로의 말에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가리는 쿠로코와 아오미네, 그리고 격노하는 미도리마. 그 격렬한 반응에 “유감이네.”라고 한 번 어깨를 으쓱하는 히무로였다. 그리고 사태를 지켜볼 뿐 끼어드는 일도 별로 없던 아카시가.
“왜 거기서 내가 나오는 거지? 신타로. 예전에는 빌려줬잖아. 이제는 가위도 안 빌려줄 만큼 우리의 우정이 옅어졌다는 건가?”
“너는 전과가 있어서 빌려주고 싶어도 못 빌려주는 것이야! 네가 한 짓을 똑바로 생각해 봐라! 우리끼리 있었으니 망정이지 보는 사람이 있어서 협회에 알려졌다간 상해 미수로 출전 정지당했어도 할 말이 없다!”
“하하, 신타로는 걱정도 많지.”
“반성을 하는 것이야, 아카시———!”
웬일로 큰 소리를 다 내는 미도리마였으나 아카시는 빙긋이 웃고 있을 뿐 그의 주장을 받아들일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런 일방적인 힘의 관계를 보며 요센 쪽에서 “저 녀석들 중학교 때도 저랬냐 해?”라고 모 2학년, 그리고 “응~ 비교적~? 미도찡, 진인사랑 럭키 아이템 빼면 의외로 상식인이니까~ 아카찡은 규격외고~.”라고 모 1학년이 이야기하는 긴장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대화가 오갔으나 그들에게까지는 들리지 않았다.
“아카시 군은 가위로 상해 미수 사건이라도 낸 건가?”
“그, 글쎄……? 잘 모르겠는데……?”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WC 개막식 날에 있었던 일이 히무로 귀에 들어갔다간 이 자리에서 세기의 대결이 벌어질 것이라는 걸 정확하게 예상한 카가미는 모두의 평화를 위해 입을 다물었다.
“뭐, 어쨌든……. 설사 쿠로코 군이 타이가의 신뢰를 배신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가 다 알아서 잘 할 테니까 걱정 마.”
걱정밖에 안 되는 코멘트였다.
“아, 응……. 엄청 고마운데, 타츠야…… 뭘 할 건데 걱정하지 말라고……?”
“응? 음…… 큰 소리로 말하면 아무리 일본이라도 경찰이 출동할 것 같은데.”
라면서 히무로가 목소리를 낮춰 이야기를 시작하자, 카가미의 안색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듣고 싶지만 차마 무서워서 못 물어보는 동안 히무로의 이야기는 끝나고, 종잇장 같은 낯빛이 된 카가미는 식은땀까지 줄줄 흘리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걱정이 된 리코가 “카가미 군?”이라고 말을 걸자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린 카가미는 그러고도 잠시 침묵을 지킨 후에.
“……감독. 무슨 일이 있어도 쿠로코는 내가 지킬 테니까 걱정 마, 요.”
왠지 모르게 결의를 했다. 리코는 그 후에도 “타츠야를 극악흉악엽기살인범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라고 중얼거리는 카가미에게 애매하게 끄덕여주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다. 일단 결의를 다지는 후배 옆에 빙긋이 웃으며 서있는 이가 이 이상 없을 만큼 위험인물이라는 것만은 잘 알았다.
“양자, 발언은 이상으로 괜찮겠나?”
법정의 분위기를 일신한 것은 아카시의 한 마디였다. 아오미네와 카가미를 번갈아 보며 묻는 질문에 그들은 조금 시간 차이를 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확인한 후에 아카시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쿠로코 테츠야, 양자 및 배심원과 대면하도록.”
무슨 소리인지 생각할 틈도 없었다. 아카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배심원석에 안 보인다 했더니 어디에선가 튀어나온 네부야와 미부치가 쿠로코가 앉아있는 의자를 번쩍 들어(쿠로코가 여전히 앉아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그대로 뒤로 돌려 도로 내려놓더니 다시 바람 같이 사라진 것이었다. ……당신들 스미스 요원입니까……. 하고, 요즘 중학생 이하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을 한 쿠로코였다.
이렇게 하여 쿠로코는 오늘 체육관에 들어왔을 때 이후 처음으로 이 ‘법정’의 전모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자신의 오른쪽에는 아오미네, 왼쪽에는 카가미, 그리고 정면에 수많은 사람들. 배심원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의 눈이 전부 자신을 향하는 걸 느끼며 평소에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일이 없는 만큼 매우 불편해진 쿠로코였으나, 이 상황에서 도망칠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럼 배심원진, 의견을.”
아카시의 말이 떨어진 후, 잠시간은 정적이 이어졌다. 그러나 체육관이 소리로 가득 차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누가 처음에 입을 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군가를 시작으로 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각각 입을 열고 쿠로코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었다. 들리는 소리는 단편적인 것들이었다. 세 사람 중 누군가의 이름이라든가, 의리라든가, 신뢰라든가, 추억이라든가. 하지만 하나하나 똑바로 알아들을 수 없어도 그 감정만큼은 쿠로코에게 직선으로 날아와 꽂혔다. ‘무언가’를 혹은 ‘어느 쪽’을 지키길 바란다고.
마치 소리로 된 소나기 같은 것이었다. 오기 시작했다 싶더니 갑자기 세차게 쏟아지고, 쏟아지는 것을 맞으며 기다리면 조금씩 줄어들어 마지막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정적을 되찾았다. 그리고 쿠로코는 그제야 저도 모르게 멈추고 있던 숨을 턱 뱉었다. 감정의 홍수였다. 그것도 전부 자신을 향하는. 그리고 아마, 어렵기는 했지만, 받아냈다.
“쿠로코 테츠야. 최종 판결을.”
예상 안 한 건 아니었지만 역시 결정은 제가 하는 건가요. 하고 쿠로코는 생각했다. 물론 쿠로코 본인의 문제니까 당사자가 결정해야 하는 거지만 그럴 거면 아카시는 대체 뭐 하러 법복을 입고 혼자 저렇게 높은 곳에 앉아 있는 건지 의문이다. 원래 높은 곳을 좋아하는 사람이니 높은 곳에 올라가기에 적절한 복장을 한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현실도피를 잠시 하고 쿠로코는 눈을 감았다. 다시 뜬다. 정면에는 이젠 입을 다물어버린 수많은 사람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조금 불안한 표정의 아오미네. 중학교 때부터 생각했습니다만, 그런 표정 안 어울리네요 당신. 왼쪽으로 돌리면 어딘가 긴장한 듯한 카가미. 시합도 아니니 그렇게까지 긴장할 것도 없다고 생각합니다만.
조용히 한 번 숨을 고른다. 괜찮아. 휩쓸리지 않는다. 흔들리지도, 않는다.
“아오미네 군.”
이름을 부르자 그 몸이 긴장하는 것이 보였다. 조금 웃어 보인 것은, 그 긴장을 풀어주는 의미도 있었다.
“그렇게 불안해할 거 없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아오미네 군은 제 특별한 사람이니까요. 아오미네 군이 없었으면 저는 중학교 때 농구를 포기했을 겁니다. 저는 지금도 그 날 아오미네 군이 제4체육관에 와 준 건 운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제 고백을 받아준 건, 기적이라고 생각하지만요. 농구도 사랑도, 언제나 처음으로 겪는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에 함께한 건 늘 당신입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제가 떠난 것을 아오미네 군 탓이라고 생각해서 책임감을 느낀다면, 그럴 건 없습니다. 그 때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만, 아오미네 군이 제게 준 건 아픔보다 행복이 훨씬 컸으니까요. 제가 떠난 건 제 문제였습니다. 제가 싫었던 건, 어디까지나 농구로든 사랑으로든 가장 소중한 사람이 가장 힘들 때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저 자신입니다. 저는 그때의 아오미네 군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당신 때문도 아니고, 당신이 싫어져서도 아니었습니다.
때문에 아오미네 군이 아직도 저랑 함께 있고 싶다고 해줘서 정말 기쁩니다. 제멋대로 당신 곁을 떠난 저라도, 당신은 같이 있고 싶다고 해주는군요.”
“읏…… 당연하지……!”
한 순간 목이 막히면서도 아오미네는 거의 고함을 지르는 것처럼 쿠로코의 말에 대답했다. 키세와 모모이는 나란히 앉아 눈시울을 붉히며 감격스런 표정으로 아오미네와 쿠로코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쿠로코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이번에는 자신의 왼쪽, 카가미에게로. 가엾게도 이미 그는 고개를 숙여버리고 있었다. 어떤 표정인지 확인하는 것은 쿠로코에게도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로코는 “카가미 군.”하고 그를 불렀다.
“아니, 응……. 됐어. 괜찮으니까. 나까지 신경 안 써도…….”
“아닙니다, 카가미 군. 들어 주세요.”
“그치만…….”
“카가미 군.”
그제야 카가미는 고개를 들어 쿠로코를 보았다. 머리와 눈동자만이 아니라 눈가마저도 빨갛게 변해 있었다. 그는 지금 쿠로코가 아오미네에게 한 말을 자신에 대한 이별의 말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몇 분 되지도 않는 시간 동안 깊이 상처 받았겠지. 쿠로코는 절로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입을 열었다.
“울지 마세요, 카가미 군. 괜찮습니다. 저는 다른 누구의 믿음을 배반하는 일이 있더라도, 당신의 믿음만은 배반하지 않습니다. 배반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카가미 군은 제 운명의 빛이니까요.
카가미 군을 만났기에, 저는 테이코 시절에 계속 머물러 있던 쿠로코 테츠야에서 지금의 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무나 상관없으니 강한 사람과 한 팀이 되어 제 농구를 증명하려고 한 이기적이고 타산적인 저를 당신이 받아주었으니까요. 그리고 믿어주었으니까요. 언제나 제 목소리를 들어주고, 절망 속에서 혼자 일어서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까지 손을 뻗는 당신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제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카가미 군은 정말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당신과 함께하기에 저는 지금 매일이 행복하고, 충실하고, 살아있다는 것을 느낍니다. 제게는 아까운 사람이라고도 생각합니다만, 앞으로 평생을 걸고 당신이 주는 것에 조금이라도 되갚으며 살 생각입니다. 물론 카가미 군이 허락해준다면, 입니다만.”
“——당연히, 허락하지! 이 멍청아!”
코가 막힌 소리였지만 힘찬 대답이었다. 중간부터 다른 이유로 콧잔등을 시큰하게 만든 원인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닦고서 카가미는 웃었다. 그 표정에 새삼스럽게 그를 향한 애정을 느끼며 쿠로코도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사랑이 넘쳐나는 판에 미안하다만, 테츠야.”
“뭔가요? 아카시 군.”
갑자기 위에서 떨어진 목소리에 지금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며 따뜻한 마음에 젖어 있던 쿠로코가 (티는 나지 않지만)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걸 알 텐데도 무시한 아카시는.
“그래서 결국 너는 어느 쪽을 택하겠다는 거지? 다이키가 같이 있자고 하는 것도 기쁘다고 하고, 카가미와 평생을 함께 하자고도 하면 어느 쪽을 선택했다고 보기는 힘들다만.”
모두가 느끼고 있는 의문을 대표하여 질문한 아카시에게 많은 사람들이 속으로 동의했다. 하지만 그 원인인 쿠로코는 뭐 그런 걸 묻냐는 듯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네, 뭐. 어느 쪽을 선택한 게 아니니까요.”
“……테츠야?”
“굳이 말하자면, 둘 다입니다.”
정적.
곧,
“하아아아아아—————————?!”
모두의 합창이 체육관을 쩌렁쩌렁 울렸다.
“엣, 잠깐, 쿠로콧치, 둘 다라니, 그건———.”
“네. 아오미네 군과 카가미 군, 두 사람 중 한 사람을 택하거나 버리지 않고 교제하겠습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키세의 말에도 망설임 없이 답한다.
“그, 그런 우유부단한 결정은 인정할 수 없는 것이야!”
“우유부단하지 않습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할 수 없어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 양쪽을 다 선택한 결과입니다.”
미도리마의 외침에는 조금 기분 나쁜 듯이 답한다.
“니 그기 참말로 하는 소리가? 말이 되나? 쿠로코 군, 내 험한 소리 안 한다. 하나 포기하고…….”
“포기하는 것만은 절대 싫습니다!”
“와 이기서 명대사를 갖다 쓰노?!”
이마요시의 말에는 강력하게 반대 의사를 표한다.
“쿠로코 군, 미안하지만 나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가는데 내가 쿠로코 군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고 싶지 않도록 설명해주겠어?”
“히무로 씨의 심경은 십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오미네 군은 물론, 카가미 군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두 사람을 향한 제 마음은 양쪽 다 진심입니다. 설사 지금은 믿기 힘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하더라도 두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저를 믿어달라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히무로 씨의 동생이 사랑한 남자는 믿어주십시오.”
웃는 낯으로 살기를 띄우는 히무로의 기백에조차 눌리지 않고 당당히 믿어 달라 청한다.
양쪽 진영의 네 사람은 각각 그들의 대표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자리에 앉아 사태의 추이의 지켜보는 두 소녀. 먼저 입을 뗀 것은 아까부터 입술을 꼭 깨물고 있던 모모이였다.
“다이 쨩. 다이 쨩은, 그래도 돼? 테츠 군이 카가밍이랑 다이 쨩 옆에 같이 있겠다고 해도, 괜찮아?”
어디까지나 아오미네의 의사를 존중하겠다는 모모이의 말에 키세와 이마요시는 동시에 아오미네를 보았다. 멍하니 쿠로코를 보고 있던 아오미네는 자신의 소꿉친구를 한 번 보고, 그리고 저편으로 시선을 던져 아직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라이벌을 보았다. 한참이나 무언이 이어진 후에, 천천히 아오미네는 입을 움직였다.
“테츠는, 뭐가 어쨌든 나랑 헤어지고 카가미랑 사귀고 있었던 거니까 내가 헤어지라 마라, 괜찮다 안 괜찮다 할 게 아니고……. 그리고 나는, 테츠가 카가미 옆에 있는 게 싫다는 게 아니고…… 오히려 테츠가 이제 와서 카가미랑 떨어져 버리는 것도, 싫고……. 그러니까 별로, 테츠가 카가미한테 가버리는 게 아니라 내 옆에도 있어주는 거면, 상관없어. 카가미도 농구는 한참 멀었지만, 포기 안 하는 거 하나만은 테츠가 고른 녀석답다 싶어서, 맘에 들고. 그러니까…….”
고개를, 끄덕이고.
“카가미가 상관없다 그러면, 괜찮아.”
담담한, 고요한, 확고한 의지가 깃든 눈으로 다시 카가미를 보았다. 공을 받아든 카가미는 아오미네의 눈을 마주보다 쿠로코를, 그리고 리코를 보았다. 언제나 듬직하게 그를 코트로 배웅하는 소녀는 늘 그렇듯이 믿음직스러운 목소리로.
“괜찮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다 해도 돼, 카가미 군. 우리는 전부 카가미 군 편이니까. 어떤 결정을 한다고 해도,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걱정할 거 없어.”
그녀의 말을 의심한 적은 없다. 설사 코트가 아니라고 해도. 때문에 카가미는 끄덕이고, 다시 쿠로코와 아오미네를 보았다.
“나는 너희가 옛날에 어땠는지 모르니까, 이 덩치에 안 어울리지만 하나도 안 불안한 건 아니고…… 조금은, 부럽기도 하고. 과거보다는 현재가 더 중요하다고는 생각하지만, 내게 타츠야가 있었고 지금도 있는 것처럼 그냥 다 버리고 가는 게 맞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아……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면……. 나는, 쿠로코를 믿는다. 그리고 지금의 쿠로코를 만든 시간도, 사람도, 믿어. 전부. 아오미네는 솔직히 가끔 엄청 열받게 만들지만, 농구는 진짜 굉장한 녀석이고, 나쁜 놈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무엇보다 쿠로코가 포기하지 않게 해줬고, 쿠로코가 좋아하는 녀석이니까. 질투, 안 하는 건 아니고…… 조금 무섭기도 하지만…… 그래도, 믿고 싶으니까, 믿을래. 쿠로코도, 아오미네도.”
그렇게 말을 마친 카가미는 천천히 발걸음을 뗐다. 멀지 않은 거리다. 겨우 세 발짝.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그것을 지켜보는 가운데 그는 걸어 가, 쿠로코 앞에 섰다. 손을 뻗는다.
“네가 말한 거니까, 책임지고 행복하게 해 줘.”
“물론입니다.”
망설임 없이, 자기보다 큰 손을 쿠로코는 잡았다.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아오미네를 보았다.
“아오미네 군.”
“아오미네.”
겹치는 목소리.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자신의 이름을 듣고만 있던 아오미네는 곧 조금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 나쁜 그것이 아니라, 울기 직전처럼. 큰 보폭으로 두 걸음. 카가미 옆에 나란히 선 그는 자신을 향해 뻗은 쿠로코의 손을 힘을 주어 잡았다. 곁눈으로 아오미네의 표정을 본 카카미는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웃어 버렸다. 아오미네가 말없이 발로 카가미의 다리를 툭 찼지만 웃음기가 떠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앉은 채로 그런 두 사람을 올려다보는 쿠로코.
“이게 네 결론이니? 테츠야.”
셋을 잠시 지켜보던 아카시가 던진 질문에 쿠로코는
“네.”
단언하고, 두 사람의 손을 꼭 쥐었다.
“당신들이, 제 양날개입니다.”
그 대답에 아카시는 만족스럽게 웃고 다시 의사봉을 들었다. 세 번 크게 둔탁한 소리가 나고.
“이상으로 제5회 쿠로코 테츠야 배우자 쟁탈 회의 및 쿠로코 테츠야 배우자 결정 최종 재판을 마치는 바이다.”
아카시의 낭랑한 목소리가 그치자마자 체육관을 우레와도 같은 박수 소리가 채웠다. 그리고 그 가운데서 축복을 받으며 웃고 있는 세 사람. 마치 결혼식장을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그래서, 이제 나 태클 걸어도 되냐?”
“별 의미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하고 싶으면 해도 돼, 휴우가.”
“아니, 응. 태클 걸고 싶은데 40쪽 동안 가만히 있어서 지금 미칠 것 같으니까 안 된다고 해도 해야겠어. 그냥 들어라, 이즈키.”
“심정은 이해하는데…….”
“이게, 어디가, 법정이야?! 법정이라는 거 뜻은 알고 있냐?! 그리고 왜 우리 체육관?! 허가는 어떻게 받았어?! 저 단은 어디서 가져왔고?!”
“아카시가 어떻게 하지 않았을까?”
“무적이냐, 아카시! 치트냐, 아카시! 아니, 물론 결승 때 좀 많이 치트기는 했지만 그 치트가 이 치트가 아니잖아! 그리고, 근본적으로 대체 왜 저 녀석들 치정싸움에 이 많은 사람들이 동원 돼야 하는 건데?! 당사자들끼리 해결하라고! 호모 치정극에 전국의 농구 강호고를 말려들게 하지 마! 난 카가미 편이지만!”
“휴우가, 말이 앞뒤가 안 맞아.”
“왜! 후배 편 좀 들면 어때서! 안 되냐?! 그리고 양날개는 무슨 놈의 양날개?! 어이, 그거 완전 어딘가의 은하의 요정적인 썸씽이잖아! 키랏☆ 같은 거 하시는 대선배님이시잖아!”
“아- 걸리면 혼날 거 같지? 어디에서 혼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다 필요 없고! 당당하게 양다리 선언 같은 거 하지 마————! 그리고 거기에 박수치지 마————! 이게 대체 어떻게 돼먹은 대단원이야?! 난 대체 앞으로 아오미네를 어떤 얼굴로 봐야 하는 거야?! 후배 애인?! 후배 라이벌?! 뭐야, 대체?! 뭐인 거야, 대체?!”
“그건 뭐, 양자가 납득한 거니까……. 쿠로코도 말했잖아. 둘 다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둘 다 운명이라잖아.”
“운명이란 새끼 주소지 알아와——! 직무태만이든 직무유기든 뭐든 붙여서 소장 보내줄 테니까!”
“그럼 진짜 법정이…… 핫! 법정이 법ㅈ…….”
“이즈키, 닥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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