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7.08. 작성
9시부터 시작한 케이블 채널의 북극 생태 방송을 눈물 지으며 시청하던 미츠바의 고개가 소고의 어깨 위로 툭 떨어진 것은 방송이 아직 1시간은 더 남았을 때였다. 펭귄들의 자식 사랑도 북극곰의 멸종 위기도 그녀를 수마의 손에서 지키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물론 소고는 지금까지 누이가 이 시간만 되면 찾아오는 수마에게 이기는 것을 본 적이 없기에 특별히 놀라지도 않고 비몽사몽한 미츠바를 겨우 걷게 만들어 그녀의 방까지 부축하며 데려갔다. 보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드는 걸음걸이로 미츠바가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졸려서 힘이 제대로 안 들어갔는지 불이 꺼진 후에도 방문이 조금 열려있기에 그 방문까지 닫은 후에야 소고는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전화가 걸려온 것은 소고가 무념무상의 경지로 게임을 하고 있을 때였다. 기말고사 때 벼르고 별렀던 ‘RPG 게임의 시크릿몹 퀘스트 수행’을 실행에 옮기고 있었다. 파티를 이끌고 무작정 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생각보다 레벨 차이가 컸는지 용사 소고와 그 일행들은 전원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이를 갈며 레벨업 노가다에 돌입한지 2시간째. 소고는 컨트롤러를 손에 쥐고 간간히 하품을 하며 화면을 보았다. 주의사항을 잘 따라서(안 따르면 하나 뿐인 누이가 필요 이상으로 걱정한다는 것을 동생은 잘 알고 있다.) 방을 밝게 하고 화면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장시간 혹사당한 눈은 피로를 호소했다. 그리고 마침 걸려온 전화에 소년은 눈을 한 번 꾹 감고서 다시 뜨고, 침대 위에 대충 던져놓았던 휴대폰을 손으로 더듬어 쥐었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전화를 걸어온 상대의 이름이었다. 무미건조하게 한자 4글자의 이름만이 표시된 디스플레이를 보고 소고는 잠시 굳었다. 기본 성능이 안 좋다는 소리는 좀 들어도 아직은 나이에 걸맞게 잘 돌아가는 그의 머리가 정확하다면, 이 사람은 자신에게 한 번도 전화를 한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자신의 휴대폰 번호조차 모를 것이다. 알려준 적도, 전화를 건 적도 없으니까. 소고는 같은 검도부 선배이자 이 사람의 친구인 타카스기 신스케에게 번호를 받아 알고 있었지만 직접 딴 것도 아닌 번호로 연락을 하는 건 왠지 반칙 같아서 보험 같은 걸로 생각하고, 등록한 후 한 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만 소고에게 고민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와중에도 휴대폰은 얼마 전에 콘도가 맘대로 바꾸어놓은 걸 그룹 노래를 연주하고 있었다. 가사에 거의 뜻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는 노래가 1절이 거의 끝날 때가 되어서야 소고는 황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오키타?」
목소리가 떨리진 않을까 걱정하며 말을 하자, 바로 기대를 배반하지 않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파를 통해 듣는 것은 처음이지만, 틀림없다.
“사카타 선배……?”
「아- 어. 네 번호는 그, 고릴라가 지 맘대로 등록해놔서, 저…… 미안.」
대체 뭘 사과하고 있는 건지 소고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할 말도 없었기에 “예에…….”라고 애매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것보다.
“무슨 일이세요?”
소고의 질문에, 이유는 모르겠지만 잠시 침묵이 수화기를 점령했다. 이어서 “저- 그, 게 말이야…….”라는 애매한 대답. 기본적으로 만사가 귀찮은 사람이긴 하지만 그가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것도 자기가 먼저 전화해 놓고서 그럴 리가. 하지만 입부 후 몇 달 동안 그가 몰아세우면 괜히 더 세게 튕겨 나오는 사람이라는 것을 학습했기에 소고는 말없이 대답을 기다렸다. 그 노력이 가상했는지 곧.
「너…… 생일…… 축하한다고…….」
마지막에는 귀를 바짝 대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였지만, 긴토키는 분명히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소고는 자기가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물론 그도 생일이 되면 축하해 주는 사람이 많지만 설마, 이 사람이…… 애초에 내 생일을 알 리가 없는데……. 너무 놀라 말이 안 나오는 소고는 그러나 그 때문에 생겨나는 정적을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별로 내가 네 생일을 엄청 축하한다는 게 아니라 그 뭐냐…… 고릴라! 고릴라가 네 생일인데 자기가 더 신나서 난리 부르스를 추니까! 나한테도 신입생들을 챙겨주라나 뭐라나……. 미츠바 쨩도 축하해주면 고맙겠다 그러고! 그러니까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생일 알고서 그냥 넘어가는 것도 좀 아닌 것 같고…… 그래서…… 그…… 그런 거라고! 이왕 축하해 주는 거 1등이 좋으니까 이 선배님이 친해 전화해 주신 거다! 감사한 줄 알아!
……1등, 맞지?」
한참이나 혼자서 변명인지 고백인지 자백인지 모를 소릴 늘어놓은 후 마지막에 묻는 말에 결국 소고는 웃어버렸다. 그 웃음소리가 거슬렸는지 수화기 저편에서 또 긴토키가 뭐라 소리 질렀지만 무시하고 입을 연다.
“1등 맞아요. 누님이고 콘도 씨고 다들 10시만 되면 곯아 떨어져서 아침이나 돼야 말하거든요.”
「새 나라의 어린이냐, 걔네…….」
참고로 둘 다 12시 되자마자 축하해 주려고 안 자고 버티다가 실패한 전적이 있다. 소고는 한 번 더 웃고.
“나야 그렇다 치고 선배 친구들 중에는 일찍 잘 것 같은 사람 카츠라 씨밖에 없으니까 1등으로 축하하려면 고생 좀 하겠네요, 10월 10일.”
「……왜 알고 있는 거야…….」
“선배가 내 생일 아는데 내가 선배 생일 모르면 안 되잖아요.”
히지카타와 함께 부실 정리를 하다가 찾은 긴토키의 입부 원서(개인 정보 보호란 대체 뭘까?)를 소고는 거의 외우고 있었지만 이 역시 본인에게는 할 필요가 없는 얘기다. 그보다 일단 지금 중요한 것은.
“선배 10월 생이니까, 아직 16살이죠?”
「응? 어…….」
“나 지금 막 16살 됐으니까 동갑이네요?”
수화기에서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확인하고, 소고는 입을 바싹 붙여 속삭이듯이 말했다.
“긴토키.”
알고 있을 뿐, 단 한 번도 입에 담아본 적 없는 이름을 부른다. 수화기너머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생일 축하해 줘서 고마워. 엄청 기뻐. 긴토키가 제일 처음으로 말해 줘서 되게 좋아. 12시 되자마자 전화할 정도로 긴토키가 내 생각 해줘서, 정말…… 기뻐.”
「―――――누, 가 네 생각을 했다고……!」
“나도 네 생각 엄청 많이 해.”
「――――――――――……!」
소고는 조용히 웃었다. 수화기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지만 그건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전혀 감이 안 잡히는 긴토키가 입을 열었다 닫았다만 하고 있어서이다. 얼마 전에 그가 먹던 아이스크림을 뺏어 먹었을 때 봤었다. 마치 그 광경이 바로 눈앞에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한참이나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조용히 내쉬는 소리만 나던 저편에서 겨우 짜낸 말이라고는.
「이…… 예의를 밥 말아먹은 놈이……. 누가 말 까래?!」
“동갑이잖아?”
「넌 1학년이잖아―――――!」
“의외로 꽉 막혔다, 긴토키.”
「왜 성 건너뛰고 바로 이름이야?! 급행이냐?!」
“긴토키도 이름으로 불러도 돼.”
「내가 미쳤냐?!」
“왜? 누님은 이름으로 부르면서. 불공평하게.”
콘도가 “미츠바 쨩”이라고 부르는 것이 다른 부원들에게까지 옮아서 그렇게 된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말해 본다.
「그, 건……. 이, 이름에 공평이고 뭐고가 어딨어?! 됐어. 네놈 생일 같은 거 축하해 주려고 한 내가 병신이지. 끊어!」
“응. 잘 자, 긴토키.”
수화기에서 기어들어갈 것만 같은 목소리가「………………어.」라고 대답하는 것이 들리고 통화가 끊어졌음을 알리는 무기질한 소리만이 남았다.
통화 중이던 화면에서 대기화면으로 넘어가고도 소고는 한참이나 휴대폰을 붙잡고 있었다. 그가 만약 지금의 자기 얼굴을 봤다면 혼자 씩 웃고 있는 게 기분 나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방에 거울이라곤 옷장 문 안쪽에 붙어있는 전신 거울 하나뿐이었다. 때문에 소년은 아주 유쾌한 기분을 망치는 일 없이 다시 컨트롤러를 잡았으며, 어느 샌가 용사 소고를 비롯한 자신의 파티가 전멸한 것을 확인하고도 담담하게 가장 최근의 세이브 파일을 열었다.
한편 긴토키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붉어진 얼굴을 베개에 박아 숨기는 데 아주 필사적이었다. 사실 보는 사람이 있었다면 하얀 머리카락 사이로 새빨간 귀가 보여서 전혀 소용 없는 일이었지만.
하여튼 이 꼬맹이는 조금만 틈을 보이면 기어오른다. 기본적으로 꽤 건방진데다 선배를 선배 취급 안 하는 건 자기 누나를 제외한 모든 연상에게 공통된 사항이었지만, 긴토키에게는 특히나.
입부 첫날부터 건방지게도 “제일 센 사람이랑 붙게 해 줘요.”라고 하기에 그 배짱이 맘에 들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서 소원대로 대련해 주었다. 그 이후로 조그맣고 꽤 예쁘장하게 생긴 게 “선배, 선배”하고 꽁무니 쫓아다니는 게 귀여워서 한 번이라도 더 눈이 가는 게 없다고는 말 못하지만. 들고 있던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기에 어떻게 선배의 신성한 당분을 뺏어먹을 수가 있냐고 으르렁거렸더니 “간접 키스가 무슨 느낌인가 해서요.”라며 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답해서 말을 잃은 적도 있지만. 그 후로 괜히 입술에 눈이 가서 속으로 반야심경을 왼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지만. 생일이라는 소리에 괜히 싱숭생숭해서 요 며칠 안절부절 못 한 것도, 그야,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래도…….
“누가 이런 반칙 기술 쓰고 그러래…….”
그렇게…… 귓가에서, 이름으로, 부르면…….
한참이나 지금 막 동갑에 된 후배에 대한 말도 안 되는 매도를 베개에 쏟아낸 긴토키는 마지막으로 비명 같은 것을 한 번 빽 지르고 몸을 일으켰다. 자자. 이럴 땐 자는 게 최고야. 매우 단순한 결론에 도달한 그는 불을 끄고 자리에 누웠지만 방금 들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윙윙거려 한참이나 고생해야 했다.
다음 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인사한 소고가 단둘이 되기가 무섭게 도로 반말을 써 대서 긴토키는 똑바로 대답도 못 하고 어물거렸고, 기어코 소고를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강요당했으며, 그게 입에 붙어서 다른 부원들이 있을 때도 무심코 이름으로 불렀다가 타카스기에게 살의를 느낄 정도로 놀림당해야 했다. 겨우 생일을 맞아 17살이 되어 다시 연상으로 돌아갔는데, 바로 그 날 “긴토키가 나보다 나이 많아도 이름으로 부르고 반말할 수 있는 관계가 되고 싶어요.”라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 바로 다음날부터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는 소고 때문에 이제는 타카스기를 믹서에 넣어버리고 싶다는 충동을 참아야 하게 됐지만, 지금의 긴토키에게는 3달이나 미래의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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