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8.10. 작성
"모처럼 내가 히지카타 씨 구슬려서 오늘을 오프로 만들었는데 이번엔 당신이 의뢰라니, 이거 너무 하지 않아요?"
"어쩔 수 없잖아, 2주 전부터 들어와있던 의뢰니까."
"그럼 나한테 미리 말했어야죠. 그럼 어제 캠페인 땡땡이치고 당신이랑 노는 건데."
"어제는 하루종일 카구라랑 놀아준다고 약속한 날이었으니까 어차피 안 돼."
웬만하면 아량 넓은 남자로 있고 싶은데 정말 못 해먹겠다. 소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긴토키 말이죠, 우선 순위에서 나는 꽤 낮죠?"
"사다하루 산책 정도."
"……이럴래요?"
"어젯밤에 해줄만큼 해줬잖아. 그리고 넌 내가 우선 순위 높게 안 잡아도 알아서 우물 파면서 뭘 그래?"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요? 저쪽에서 먼저 주겠다고 하는 거랑 내가 졸라서 받는 게 같아요?"
"요는 받았으니까 된 거 아냐."
"당신 정말……!"
"아아, 정말 두 분 다 그만하세요! 왜 여기까지 와서 사랑 싸움이에요?!"
참다 못한 신파치가 소리질렀다. 타일로 되어있는 바닥과 벽에 그의 목소리가 가볍게 울렸다. 유치원 남자 화장실에서 들어주기엔 좀 벅찬 대화다. '해줄만큼 해줬잖아'부터 시작해서 듣자듣자 하니까 못하는 소리가 없어, 정말. 신파치는 화장실 칸의 문을 세게 열고 나왔다. 소고가 세면대에 뚱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긴토키는 아직도 옷을 갈아입고 있는지 옆 칸에서 부스럭대고 있다.
"별로 싸우는 데 이러쿵 저러쿵할 생각은 없는데요, 일 다 끝난 다음에 단 둘이 있을 때 하세요. 특히나 여기서 그러지 마시구요. 그러다 말실수라도 해서 애들이 물어보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연애 대상에 대한 고정 관념이 생기기 전에 평등한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
"오키타 씨,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이세요……?"
"반 정돈. 그리고 콘도 씨 처남, 그거 되게 안 어울린다."
"……냅두세요."
조금 입을 삐죽이며 대꾸한 신파치는 거울을 보며 자신의 순록 의상을 매만졌다.
聖 : 성인 성
①성인 ②맑은 술 ③거룩하다 ④뛰어나다 ⑤지존하다
성탄절이 되면 학교나 유치원 같이 아이들이 많이 있는 곳은 이벤트를 준비하기 마련이고, 그 중 하이라이트는 산타가 주는 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산타가 없다는 걸 알 만큼 큰 아이들이야 어쨌든, 아직 산타를 믿고 있는 어린 아이들의 꿈을 부서버릴 수는 없는 노릇. 따라서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에게 산타 할아버지에게서 받고 싶은 선물을 적어내게 해 부모에게 통보하고, 그것을 산타 할아버지(대역)에게 전달하게 했다. 그리고 남자 교사가 한 명도 없는 이 유치원에서 2주 전에 해결사 사무소에 의뢰를 한 것이다.
그리하여 긴토키, 신파치, 카구라 세 사람과 덤으로 낀 소고는 유치원 직원실에 모여있었다. 긴토키는 산타 복장, 신파치는 순록, 카구라는 산타걸이다. 물론 어제의 소고처럼 보기만 해도 닭살 돋는 추운 디자인이 아니라 치마는 짧아도 최소한 긴팔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일찍 야마자키가 갖다준 사복을 입은 소고는 구석 의자에 앉아 모여있는 세 사람을 밝지 않은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신입 교사라는 유치원 선생님 한 명이 소녀 같은 눈으로 자기를 보고 있지만 눈길 한 번을 주지 않는다.
세 사람에게 할 일을 설명한 원장과 각 담임 교사는 벌써 나가고 직원실에는 해결사 식구들과 소고, 그리고 보조 교사라는 신입 한 명 뿐이다. 긴토키네가 할 일은 시간이 되면 각 반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에게 한 명 한 명 선물을 주는 것이다. 선물을 줄 땐 이름을 꼭 불러야 하고, 내년엔 엄마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느니 친구랑 싸우면 안 된다느니 하는 소리를 적당히 해주면 된다고 한다. 쉽구만, 산타. 긴토키는 선물 목록과 아이들 이름, 그리고 실물을 다시 한 번 대조하고 있는 신파치를 보며 생각했다.
"긴 상, 보고만 있지 말고 좀 도와주세요. 저쪽 꾸러미도 체크 해야 된다구요."
"어차피 선생들이 다 했을 텐데 뭐하러 또 하는 건데? 냅 둬, 냅 둬."
"그러다가 잘못 주면 어떡해요?"
"크리스마스 서프라이즈 이벤트라고 하면 되지."
또 저런 무책임한 소릴……. 신파치는 눈은 선물 목록을 훑으면서 인상을 찌푸렸다.
"애초에 크리스마스 선물을 물건으로 받겠다는 괘씸한 생각을 하는 꼬맹이들이 잘못된 거다 해. 난 크리스마스 선물로 어제 하루 종일 마미-랑 놀았다 해."
"맞아. 크리스마스니 생일이니 할 때마다 선물을 물건으로 주니까 황금 만능 주의니 하는 잘못된 인식이 어렸을 때부터 뿌리를 박는 거다. 요즘 애들은 선물은 마음과 성의란 걸 모른다니까, 대체."
"단순히 긴 상이 돈 없는 걸 다른 부모들 탓으로 돌리지 말아주세요."
신파치가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아아, 여기도 황금 만능 주의에 젖은 속물 안경이 하나 있구만"이라며 한탄하는 긴토키. 카구라가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시종을 지켜보던 소고가 흐-음하고 턱을 괴었다. 뭐야, 어제 논 건 크리스마스 선물이잖아. 그럼 그렇다고 처음부터 말하면 될 걸.
"저어…… 일행분이신가요?"
신입 보조 교사가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긴토키가 그녀를 돌아보고 이어서 소고를 봤다. 소고는 애초에 그녀는 보지도 않고 긴토키에게 시선 집중이다. 소고는 여전히 여교사 쪽은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네."
"선물 전달 때는 같이 반에 들어가시나요?"
어쩔까요? 소고가 눈으로 묻는다. 긴토키는 잠시간 반응이 없다가 아무 말 없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따라오란 소리는 아니지만 따라와도 좋다는 소리다. 소고가 다시 긍정의 대답을 하자 여교사는 조금 실망한 듯 "그러세요"라고 말했다. 그 말소린 긴토키에게도 들렸는지 그 뒷모습이 조금 기분이 나빠진 것처럼 보였다. 이야, 이 사람을 뒷모습만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다니 스스로가 대견하다. 소고는 입가가 웃으려는 걸 손으로 가렸다.
"어머나~ 밖에 산타 할아버지가 오셨대요. 여러분, 큰 소리로 한 번 불러볼까요? 산타 할아버지-!"
"산타 할아버지-!"
"산타 할아버지가 안 들리신대요. 자, 더 크게. 산타 할아버지-!"
"산타 할아버지-!"
시간이 돼서 교실 문 앞에 서있자 안에서 선생님과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파치는 그 목소리가 조금 낯간지럽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해서 가만히 미소지었다. 선두에 서있던 긴토키가 문을 열었다. 남자 아이 여자 아이 할 것 없이 귀가 따가울 정도로 높은 함성이 퍼졌다.
원장이 써준 대본("허허허~ 여러분이 올해 착한 일을 많이 해서 산타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러 왔어요."로 시작하는 듣기에도 민망한 대사였다)을 적당히 읽은 후 선물 전달이 시작됐다. 긴토키가 순서대로 이름을 부르면 신파치가 그 아이의 선물을 골라 카구라에게 주고, 카구라가 그 선물을 아이에게 주는 방식이다. 아이가 선물을 받아 들떠있는 사이에 긴토키가 적당히 한 마디씩 하고 끝. 소고는 나중에 콘도가 "어린이집에 봉사하러 간다!" 같은 소릴 꺼내지 않기만을 빌며 입구의 작은 의자에 앉아 안을 보고 있었다. 아, 하지만 히지카타 씨한테 순록 옷 입히고 괴롭히는 것도 재밌겠는데.
"다음은, 카나이 치카 쨩."
이름을 불리자 뒷줄에서 친구랑 이야기하던 여자 아이가 쪼르르 앞으로 달려나왔다. 어라, 어디서 봤는데……? 긴토키는 눈썹을 위로 치켜떴다. 아이도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어디서 봤더라…… 에…….
돌발 상황은 그 때 발생했다. 치카가 갑자기 긴토키의 얼굴에 붙여놓은 수염을 잡더니 힘껏 당겨 떼어버린 것이다. 아프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에 다른 아이들은 물론 교사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데, 치카가 소리쳤다.
"아이스링크 오빠다!"
……헤?
"미에 쨩, 미에 쨩! 아이스링크 오빠야!"
치카가 뒤돌아보며 뒷줄에서 자기와 이야기하던 아이에게 소리쳤다. 치카의 말에 따라나온 미에라는 아이는 그녀의 옆에 서서 긴토키를 빤히 들여다보더니 똑같이 "아이스링크 오빠다!"라고 소리쳤다. 그치, 그치? 라며 맞장구 치는 두 아이. 이 교실 안에서 사정을 아는 두 사람을 빼놓고 나머지는 그저 서로 속닥이고 있었다. 아이스링크가 뭐 어쨌단 거야? 그 때 긴토키는 자신의 뇌를 풀가동시켜 아이스링크와 이 두 아이의 상관 관계를 찾고 있었다.
아이스링크라고 하면 얼마 전에 소고와 함께 간 그 아이스링크밖에 없는데, 이런 애들을…… 거기서…………… 아.
"뭐에요?"
입구에선 아무래도 안의 상황이 제대로 안 보이므로 결국 소고가 의자에서 일어나 들어왔다. 동시에 소고를 올려다보는 치카와 미에. 그리고 "아이스링크 오빠다!"라는 합창. 소고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고 긴토키를 봤다. 수염이 떨어져버려서 이제 산타 할아버지에서 그냥 산타다.
"왜, 아이스링크에서 애들 둘 구해줬잖아. 걔들인가봐."
"아아……."
"앗! 그 분들이셨어요?!"
아이들 뒤에 있던 담임 교사가 서둘러 앞으로 나왔다. 그 때 너무 놀라서 얼굴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긴토키와 소고의 얼굴을 번갈아 보고는 경황이 없어서 알아보지 못 했다느니 감사하다고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느니 하면서 얼른 허리를 숙인다. 긴토키 옆에 있던 카구라가 "뭐냐 해?"라며 질문을 던졌다. 그런 아이에게 간결하게 설명하는 긴토키의 얘기를 들으며 신파치는 생각했다. 선물 전달 어떡하지?
긴토키 수염을 떼버려서 산타가 아닌 것도 들통났겠다, 거기에 아이스링크에서 아이들을 구해줬다는 것도 있어서 결국 산타인 체 하고 선물 전달하는 건 파토났다. 담임 선생님의 기지로 "산타 할아버지가 너무 바쁘셔서 대신 온 오빠에요"라는 걸로 타협했지만 이제와서 애들이 그걸 믿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덕분에 가식적인 산타 말투는 관두고 평소 말투로 말할 수 있게 됐으니 긴토키로서는 편했다. 이런다고 의뢰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다만 하나 걸리는 것은…….
"오빠는 이름이 뭐에요?"
"그건 왜 물어봐?"
"알고 싶으니까요!"
아까부터 계속 소고 옆에 붙어있는 아이다. 여서일곱 번 쯤 전에 나와 선물을 받아간 나카사키 미에. 긴토키가 구해준 치카의 친구로, 소고의 품에 안겨 빙판을 일주한 그 아이다. 소고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아까부터 퉁명스러운 대꾸만 하고 있지만 아이는 거기에 굴하지 않고 계속 질문 공세다. 다짜고짜 긴토키의 수염을 떼버린 치카도 그렇고, 그 때는 너무 놀라 울기만 했지만 실은 매우 적극적인 성격인 듯 했다.
이름은 뭐냐느니 몇 살이냐느니 뭘 하냐느니 궁금한 것도 많다. 소고는 건성으로 대답하지만 마음 상하지도 않는지 열심히다. 자기가 알고 싶은 건 다 알았는지 이번엔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친구인 치카와는 어떻게 노는지, 다른 친구들이랑은 어떤지, 선생님은 누굴 좋아하는지 등등 조잘조잘 혼자서 잘도 떠든다.
"이 반은 이제 다 했죠?"
"응? 어, 어……."
갑자기 신파치가 말을 걸자 긴토키는 깜짝 놀라 명단을 확인했다. 방금 부른 애 이름이 뭔지도 기억이 안 난다. 남자애였던 것 같긴 한데……. 신파치 쪽을 보자 텅 빈 꾸러미를 접고 있었다. 아이들 수에 맞춰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으니까 꾸러미가 비었다면 다 준 것이다. 긴토키는 얼굴을 찌푸리며 머리를 긁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옆에서 담임 교사가 "여러분- 오빠 언니들한테 안녕히 가세요- 해야죠?"라는 말을 아이들에게 하고 있었다. 그 말에 소고 옆에 딱 붙어있던 미에가 긴토키와 선생님 쪽을 봤다.
"오빠들 벌써 가요?"
"산타 할아버지가 우리 유치원 친구들 거 전부 다 대신 전해달라고 하셔서 다른 반에도 가봐야 해요."
친절하게 대신 설명해주는 선생님. 긴토키는 아직도 작은 의자에 앉아있는 소고를 봤다. 평소의 포커 페이스였다. 그런 그의 옷자락을 꼭 잡는 미에.
"소고 오빠도 가?"
……언제 봤다고 소고 오빠야? 아까부터 계속 옆에 붙어서 있는 얘기 없는 얘기 다 하더니 그새 정들었냐? 응? 빠르시구만, 요즘 애들은. 긴토키는 얼굴이 구겨지려는 걸 간신히 억눌렀다.
"넌 여기 있지 그래? 어차피 일은 우리끼리 하는데 뭐."
"그래요? 그럼 여기 있을게요."
얼굴은 일그러지지 않았을지언정 목소리는 기분 나쁜 티가 역력하다. 하지만 소고는 표정 하나 안 바꾸고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다. 옆에서 미에가 손뼉을 치며 기뻐한다. 긴토키는 성큼성큼 걸어 먼저 교실을 나가버렸다. 바로 뒤따라 나오는 카구라와 선생님과 인사라도 한 건지 조금 늦게 나오는 신파치. 소년이 나오자마자 긴토키에게 핀잔을 줬다.
"몇 살 상대로 질투하는 거에요?"
여기선 뭐라고 받아쳐도 질투했다는 걸 긍정했다는 말밖에 안 나올 것 같아서 긴토키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건 사드가 잘못한 거다 해. 긴 쨩이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데 다른 여자랑 놀아나다니 버릇을 고쳐놔야한다 해."
"아니, 다른 여자라니 카구라 쨩……. 미에 쨩 6살인데. 애잖아, 애. 단순히 나이 차이만 따져도 오키타 씨랑 12살 차이 난다구."
"지금은 6살일지 몰라도 10년 후면 16살, 20년 후면 26살이다 해. 남자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주책이 돼서 어린 여자만 보면 넋이 나가니까 잘 간수해야 된다고 마미-가 그랬다 해."
여기서 마미-란 카구라의 친엄마를 가리킨다. 카구라의 말을 듣고 평소에 마미-라 불리는 긴토키는 괜히 더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듣고보면 아주 틀린 말도 아니다. 10년 후에 미에가 16살이면 소고가 28살, 자신은 38살인 것이다. 정말 빼도박도 못하는 아저씨다. 반면 지금의 저 조그만 아이는 점점 여자가 되고, 소고는 여기서 더 성장한다고 생각하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우울하다. 긴토키의 뒷모습만 보고도 그의 기분이 더 가라앉은 것을 느꼈는지 신파치와 카구라가 황급히 뒷수습에 나섰다.
"그, 그치만 오키타 씨잖아! 한눈 팔 사람이 아니야, 그치?"
"맞다 해! 긴 쨩을 두고 한눈이라니, 말도 안 된다 해. 눈이 삔 거다 해."
"……다음 반 가자."
긴토키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음 교실을 향해 먼저 걷기 시작했다.
남은 두 반을 어떻게 돌렸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 나는데 일이 끝났다. 긴토키는 신파치의 말을 듣고 겨우 그것을 알아차렸다. 다시 직원실로 돌아와 원장과 인사를 하고 나머지 대금을 받고서 옷을 갈아입은 후 소고를 데리러 갔다. 신파치와 카구라는 긴토키를 배려한 건지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럴 것도 없을 텐데. 긴토키는 자기도 모르게 빨라지는 발걸음으로 교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벌써 종례를 마쳤는지 아이들이 가방을 매고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몇 명은 돌아갔는지 수도 아까보다 준 것 같다. 소고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교실 뒤편 의자에 앉아 여자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긴토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신파치의 "몇 살 상대로 질투하는 거에요?"란 말이 잠깐 뇌리를 스쳤지만 그것과 거의 동시에 카구라의 말도 재생됐다. 그나마 하나면 좀 낫지. 저게 몇이야. 눈짐작으로 열명이 조금 안 된다. 긴토키는 성큼성큼 걸어 소고에게 다가갔다.
"끝났어요?"
"아아."
"그럼 가죠."
소고의 한 마디에 그를 둘러싸고 있던 아이들이 일제히 안타까움이 담긴 탄성을 질렀다.
"오빠 가?"
"가야 돼?"
"진짜 가?"
"가지마, 오빠."
저마다 소고의 옷자락이나 손을 붙든다. 뭐라 말하지만 목소리가 섞여서 뭐라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소고는 그런 아이들을 "비켜, 못 나가잖아"라는 냉정한 말로 내쳤다. 여자에 대한 배려가 눈꼽만큼도 없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아이들에 대한 배려도 없었을 줄이야.
"소고 오빠, 또 올 거야?"
"안 올 걸."
"또 오면 안 돼?"
"귀찮아."
……배려라곤 정말 눈 씻고 찾아봐도 없구나……. 긴토키는 질리다못해 감동에 가까운 느낌을 받았다. 소고의 냉정한 대답에 결국은 미에가 눈물을 보였다. 긴토키는 뭐라 한 마디 해야하나 망설였지만 소고가 그의 손을 잡고는 "가자구요"라며 끌었기 때문에 아무 말 않고 나와야했다. 친구들이 다 같이 "미에 쨩, 울지마"라며 위로하니 괜찮을 거다. 교실문을 닫고 나오자 소고가 머리를 손가락으로 긁으며 말했다.
"애들 상대하기 귀찮네요. 긴토키는 어떻게 매일 저런 거랑 놀아줘요?"
"저런 거라는 건 카구라냐? 앙? 맞을래? 그리고 카구라를 6살이랑 동급으로 두면 안 되잖아. 나이가 두 배도 더 되는데."
"쟤들이 나한테 오빠, 오빠 하면서 붙는 거랑 차이나가 당신한테 마미, 마미 하면서 붙는 거랑 뭐가 다른데요?"
다르다. 감정의 벡터가 다르다. 종류가 다르다. 근본부터 다르다. 긴토키는 인상을 팍 찌푸리더니 자기 손을 잡고있던 소고의 손을 떨쳐버렸다. 그리고 먼저 걸어나간다.
"최소한 카구라는 '커서 긴쨩의 신부가 될 거야' 같은 소린 안 할 테니까 다르지."
"별로 그런 소린…… 아- 했던가."
……한계다. 정말 웬만하면 아무 말 없이 넘어가고 싶었는데, 가둬두려던 말의 둑이 범람해버렸다. 이제 난 몰라.
"아아, 그러셔. 좋겠네, 인기 많아서. 카부키쵸의 누님들로 모자라 이젠 유딩이냐? 위아래로 족히 20살씩은 커버되는 것 같으니 수비 범위도 넓고 타겟도 많아서 아주 좋겠다? 작업할 것도 없이 알아서 줄 서주니 편하네. 긴 상이랑은 하늘과 땅 차이구만 그래. 하렘 건설도 꿈이 아니네. 어디 한 번 잘 해봐라."
아아, 유치하다. 정말 치가 떨릴 정도로 유치하다. 내가 한 소리지만 눈물나게 유치하다. 서른 다 돼서 그러고 싶냐? 사카타……………… 하아……. 젠장. 왜 내 성 오키타인 거야. 긴토키는 아플 정도로 세게 머리를 긁었다. 자기 혐오로 미칠 것 같다.
"당신 생각보다 유치하네요."
"익……!"
저절로 이가 갈린다. 긴토키는 기세에 맡겨 몸을 뒤로 틀었다. 자기가 싫어하는 부분을 스트레이트하게 지적받는 것만큼 화나는 일도 없다. 왜 지금 저런 소릴 하는 걸까. 알면서. 왜 이러는지, 지금 무슨 기분일지 다 알면서 뭐하러 더 긁는 소릴…!
"네가……!"
"나보고 애라고 그러면서 당신도 꽤 유치하네요. 그것도 어중간하게. 기왕 유치해질 거면 나 정도로 유치해지지 그래요?"
"하?!"
"예를 들어 나 같으면, 당신이 같은 상황일 때"
소고가 다가온다. 긴토키의 바로 앞에 선 그는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내 꺼니까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말라고 그 꼬맹이들 다 쫓아버릴 텐데요."
그렇게 말하고선 웃는다. 긴토키는 할 말을 잃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한 번 해보지 그래요?"
소유권 주장. 그렇게 한 마디 덧붙였다. 진짜, 추월 당하는 거 금방이겠구나. 긴토키는 맥이 빠져 한숨 같이 숨을 뱉어버리며 생각했다. 조금 아래에는 씩 웃고있는 소고의 얼굴. 저 소리까지 듣고 빼는 건 소고도, 그의 자존심도 용납치 않는다. 긴토키는 눈을 감고 조금만 고개를 숙였다. 익숙한 숨소리. 익숙한 감촉. 부드럽게 입술이 닿고 잠시 있다 떨어졌다. 그리고 조금 붉어진 얼굴을 감추듯이 끌어안는다. 품속에서 소고가 작게 웃는 기색. 그의 귓가에, 숨소리만으로 속삭이는 한 마디. 내 꺼. 대답은 긴토키의 등에 팔을 두르는 것으로 돌아왔다.
"뭘 새삼스럽게 쑥스러워하고 그래요? 너무 멋있어서 다시 한 번 반했어요?"
"시끄러."
"아니란 소린 안 하네요."
얼굴을 감추려고 했지만 다 들통난 듯 했다. 긴토키는 소고를 안는 팔에 힘을 줬다. 품 안의 소고가 크게 숨을 들어쉬었다. 달콤한 향기가 기분이 좋다. 같은 향인데도 어떨 땐 마비될 것처럼 아찔하고 어떨 땐 너무나도 마음이 편해지게 하니 신기하다. 긴토키도 그럴까? 그러고보면 그에게서 자기가 어떤 향이 나는지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 냄새도 안 난다고 하면 조금 섭섭할 것 같은데. 소고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질투하는 건 환영이지만 걱정은 말아요.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안 일어나니까."
"너 책임져라, 그 말."
"책임 질게요. 내가 나중에 딴짓하면 인정사정 없이 두들겨 패든 거꾸로 매달든 해서 정신 차리게 하세요."
위에서 작게 긴토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소고가 손으로 그의 등을 톡톡 두드렸다. 긴토키가 떨어진다.
"좀 늦었지만 점심 먹으러 갈까요? 내가 살게요."
"넌 오프인데 우리 일 쫓아온다고 기분 별로인 거 아니었어? 서비스 좋네."
"덕분에 좋은 구경 했잖아요. 질투하는 긴토키는 레어니까요. 귀여워서 난 자주 보고 싶지만요. 내일부터 매일 같이 여자 끼고 다닐까요?"
"야."
"농담이에요."
소고가 손을 뻗는다. 긴토키가 잡는다. 동시에 걷기 시작했다.
"다음 일은 뭐에요?"
"4시부터 7시까지 광장에서 판촉 행사."
"그걸로 끝이죠? 저녁은…… 둘이서 오붓하게 먹고 싶지만 안 될 것 같고……."
"큐베네에서 크리스마스 파티 있다고 거기 오라던데."
"당신은 빠져도 되죠?"
"얼굴만 비추고."
"잘 됐네요. 호텔 예약해뒀으니까 저녁은 거기서 먹죠. 크리스마스 이벤트로 특별 디저트 메뉴가 있대요."
"예약이라니, 너……. 내가 일 있었으면 어쩌려고……."
"납치해야죠."
뒷문 밖에서 어째서인지 신파치가 카구라에게 맞고 있었다. 긴토키는 피식 웃었다. 문을 연다. 카구라가 긴토키를 보곤 "마미-!"라고 외쳤다. 얼른 다가와 반대쪽 손을 잡는다. 안경을 고쳐쓰고선 다가오는 신파치. 그는 소고와 잡은 긴토키의 손을 보고선 "삐친 건 좀 풀렸나 보네요"라고 웃었다. "누가 삐쳤다고 그래." 그렇게 대꾸한 긴토키는 벌써부터 호텔의 크리스마스 특별 디저트가 뭘까 생각하며 패밀리 레스토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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