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7.24. 작성
"……벌써 코타츠 내놨어요?"
"벌써라니, 소고 군. 달력 봐라. 이제 12월이야. 이제 조금 있으면 추워진다구. 블리자드가 온다구. 동장군이 블리자드와 인플레인자를 휘몰고 열도에 상륙한다구. 긴 상은 그런 녀석에게 당하지 않기 위해 일찍 대비하는 것뿐이다 이거야."
"좀 추워지니까 코타츠에 들어가서 뒹굴거리고 싶은 것 뿐이잖아요."
"알면 귤 사와, 귤. 달고 맛있는 걸로."
"그 정돈 못 사올 것도 없지만……."
소고는 벌써 코타츠 위로 머리를 숙이고 자고 있는 아이를 봤다. 장담하는데, 한 박스 사오면 그 중 몇 개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이 소녀의 위로 들어간다. 물론 긴토키는 거기에 크게 불만이 없겠지만 사온 사람 입장에선 먹이고 싶은 사람이 못 먹으니 기쁘지 않다. 귤은 포기하고, 나중에 데이트하러 나갈 때 다른 거나 먹여야겠다. 소고는 그렇게 결정하고 소파에 앉았다. 이 사무소 식구들처럼 벌써부터 코타츠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 아직 기온도 영상이고.
물론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그럼 귤 사다줄 테니까 내일은 이 꼬맹이 떼어놓고 좀 나와요."
"카구라? 응, 뭐…… 귤 준다고 하면 얌전히 있겠지만…… 언제 들어오는데?"
"글쎄요. 나도 모르겠어요. 잘 되면 일찍 들어올 수도 있고, 안 되면 자정 넘길 수도 있고."
"뭐 하는데?"
"데이트요."
데이트면 어느 정도 일정을 조정할 수 있으니까 '나도 모르겠어요'라는 대답은 나오기 힘든데……. 뭘 하려는 걸까? 긴토키는 센베를 뽀깍 소리 내며 깨물었다. 아- 너무 오래 내놔서 눅눅해졌다.
純 : 순수할 순
①순수하다 ②순박하다 ③밝다
④크다 ⑤좋다 ⑥오로지
"……소고 군, 긴상이 뭘 잘못했니? 뭐든 말만 해. 얼마든지 사과해줄 테니까. 원한다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줄 테니까 말해. 응?"
"별로 잘못한 거 없는데요."
그럼 이건 뭐냐. 이지메냐? 고문이냐? S냐? 응?
"뒷사람들 못 들어가고 있잖아요. 길 막고 서있지 말고 얼른 들어가죠."
"……왜……?"
"긴토키 씨, 빨리."
사복 차림의 소고가 멋대로 긴토키의 손을 잡더니 그를 질질 끌고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긴토키는 무저항. 여기서 죽어라 발악해봤자 결국 소고 뜻대로 된다는 것 정도는 학습했다. 긴토키는 다시 한 번 반으로 찢긴 영화표를 봤다. 대체 무슨 배짱으로 겨울에 개봉한 건지 종잡을 수가 없는 공포 영화의 타이틀이 새겨져 있었다.
이런 게 개봉한 줄 알았으면 영화관 같은 데 따라오는 게 아니었는데. 요즘 광고하는 영화라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영화적 감수성이 어쩌구 하는 멜로물,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던 극장판 애니메이션 애니메이션의 속편 정도라서 방심했다. 아니, 그치만 12월에 공포 영화가 개봉할 거라곤 보통 생각 안 하잖아?! 무슨 생각이냐, 감독. 실험 정신과 도전 정신이 투철한 건 조금 인정 해주겠지만 왜 그걸 이 녀석이 알게 하는 건데! 장담하는데 당신 영화보다 이 녀석 쪽이 억만배는 무섭다! 나한테! 아니, 영화도 무섭지만! 귀신 무섭지만! 왜 만드는 거야, 그런 거?! 악취미! 악마! 나쁜 놈!
"왜 혼자 중얼거려요?"
"……냅둬."
"그러지 말고 팝콘이나…… 아, 불 꺼졌다."
긴토키가 꾸물거리니까 벌써 시작하잖아요. 옆에서 소고가 불평했지만 긴토키는 이미 그런 것에 대꾸할 정신이 아니었다. 불이 꺼졌단 것은 이제 광고 몇 개 하고, 배급사라든가 제작사라든가의 로고가 뜬 후에, 영화가 시작한단 소리다.
"당신 아까 정신 없어서 못 들은 것 같으니까 다시 말하는데, 영화보는 도중에 비명……은 그렇다 치고, 뛰쳐나가면 안 돼요."
"아하하하하하하 걱정하지마 소고 군 긴 상이라면 괜찮으니까."
"……벌써 말이 국어책 읽기인데요."
소고의 말과 동시에 스크린에 영화 제작사의 로고가 떴다. 팝콘도 콜라도 사왔지만 물론 긴토키가 목으로 무언가를 넘길 정신이 있을 리 없다. 결국 소고는 팝콘도 콜라도 자기 쪽에 두고는 빈 손으로 손잡이를 있는 힘껏 잡고있는 긴토키의 손을 잡아주었다. 병주고 약주냐는 생각이 안 든 건 아니지만 지금은 이 손이 희망이요 구원이다. 긴토키는 소고의 손을 꼭 쥐었다.
차라리 스플래터면 나았다. 잔인한 거라면 젊은 날에 질리도록 봤으니 새삼스럽게 그것이 어떻게 조명되도 크게 감흥이 없는 것이다. 다만 무서운 것은, 알 수 없는 존재다. 유령 온천에도 다녀오고 미츠바까지 봤으면서 그렇게 무서워할 게 있는지 의문스럽지만 긴토키는 그렇지도 않은지 유령의 옷자락만 화면에 보여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고는 긴토키 옆에 앉아 귀신이 나올 때마다 그의 어깨가 흠칫흠칫 떨고 너무 무서워 비명조차도 되지 못하는 숨소리를 아주 즐겁게 감상했다.
영화가 끝나고 스탭롤이 내려가는데도 긴토키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하니 자리를 지키고 앉아있었다.
"긴토키 씨, 영화 끝났어요."
"……응……."
대답을 하는 건지 마는 건지 여전히 눈에 촛점이 없다. 소고는 긴토키 눈 앞에 손을 흔들어보고 반응이 없는 걸 확인했다. 확신컨데, 분명히 다리도 풀려서 자리에서 못 일어날 거다. 30 다 된 남자가 공포 영화 보고 넋이 나갈 정도라는 건 다른 사람이 들으면 웃을 얘기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눈엔 귀여워 보이니 문제 없다. 소고는 씩 웃고서 긴토키의 얼굴에 자기 얼굴을 가까이 했다.
입술이 닿는다. 반응이 없다. 하지만 소고에겐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 듯, 그는 망설임 없이 그의 입을 열고 억지로 혀를 감았다. 둔하지만 조금씩 그의 입맞춤에 응한다. 무의식적인 것인지 작게 콧소리가 났다. 거기에 신난 소고가 손으로 긴토키의 머리를 고정시키고 본격적으로 그를 농락하려고 했을 때, 긴토키의 손이 거세게 그의 어깨를 밀었다. 앞쪽 좌석으로 넘어갈 뻔 했다.
"그렇게 세게 밀 거 없잖아요."
"있다! 엄청 있다! 너 지금 내가 정신 없는 틈 타서 뭘……!"
"이제와서 키스 정도로 뭘 그렇게 째째하게…… 아야."
긴토키는 소고의 반론을 정수리에 손날치기를 먹이는 걸로 잠재웠다. 직후 몸을 홱홱 돌리며 주변을 살핀다. 다행스럽게도 수상한 눈으로 이쪽을 보는 사람은 없다. 스탭롤 나오고 있을 때였고, 애초에 사람은 별로 없었던 모양이다. 10년 감수했다……. 긴토키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그는 곧장 다시 소고를 노려봤다. 정신은 확실히 돌아왔는지 조금 무섭다.
"너 말이지, 경찰이면 미풍양속이라든가 공중도덕이라든가 지킬 게 많지 않니? 응?"
"여기서 공개 플레이 하는 것도 아닌데 뭘 그래요. 그 쯤 하면 경범죄니까 현행범으로 잡을 수 있지만. 계속 당신이 정신 놓고 있었으면 거기까지 가보려고 했는데, 아깝…… 이극!"
다시 한 번 소고의 머리에 손날치기. 매를 번다.
영화관을 나와선 "배고프다"는 긴토키의 한 마디에 식당으로 직행했다. 소고는 스파게티, 긴토키는 파르페(에피타이저)와 오무라이스. 거기에 이따 또 파르페(디저트)를 시킨단다. 겨울인데 아이스크림을 저렇게 먹으면 안 춥나. 신나서 파르페를 먹는 긴토키를 보며 소고는 생각했다. 자기는 더위도 추위도 잘 안 타지만 긴토키는 그렇지 않다. 특히 더위는. 추위는, 조금 덜 타는 듯 하다. 그럼 오늘도 좀 괜찮으려나. 소고는 비워져가는 파르페컵 너머로 긴토키를 봤다. 기온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어쩌면 밤 늦게…… 최악의 경우엔 새벽까지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뭣하면 실내에 가도 되지만. 괜찮을 거다.
"왜? 먹고 싶어?"
한참이나 빤히 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생각한 긴토키가 물었다.
"어라, 주게요? 그럼 아-."
"……안 줘."
"그런 게 어딨어요. 준다고 했으면서."
"누가 언제? 먹고 싶냐고 물어본 거지."
그 타이밍에서 점원이 오무라이스와 스파게티를 들고왔다. 그 사이에 파르페컵을 완전히 비워버리는 긴토키. 그리곤 "이제 없다. 넌 네 거 먹어."라고 종결. 집에선 가끔 해주면서 밖에 나오면 안 해준단 말이야……. 소고는 포크를 집었다. 스파게티는 그의 기대보다는 맛있어 보였다. 미식가도 아니고 가리는 것도 없어서 맛에 연연하지는 않지만 맛없는 것보단 맛있는 쪽이…… 아.
"영화 같은 거 보면 말이죠."
"아?"
오무라이스의 계란부침을 조각내는 데 열중하던 긴토키가 고개를 들었다.
"스파게티 나눠먹으면 꼭 한줄이죠."
"……그래서?"
"해볼래요?"
"먹기나 해."
애교도 뭣도 없는 대답을 던진 긴토키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계란부침과 싸우기 시작했다. 포키 데이 때는 자기 쪽에서 열렬하게 졸랐으면서 내가 해달라고 하면 안 해줘요? 같은 불평을 한 소고는 자기 손을 노리고 달려든 긴토키의 포크를 간발의 차이로 피했다. 위험한 사람이다.
"식후 운동 겸해서 배팅 센터라도 가죠."
그런 소고의 말에 배팅 센터로 향했다. 둘 다 정식으로 야구를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순전히 신체 능력과 운동 신경만으로 야구 방망이를 휘둘렀지만 실력은 웬만한 프로 야구 선수를 웃돌았다. 야구계 인사들이 들으면 통탄할 일이다. 처음에는 연습을 겸해 적당히 치다가, 중간부터는 아무리 봐도 야쿠자로밖에는 안 보이는 남자 한 팀과 불이 붙어서 내기로 발전했다.
내기는 무난하게 오키타 부부의 승리로 끝났지만, 유감스럽게도 한 주먹 쓴다는 사람들이 대복을 안 입고 있는 소고와 의욕 없어 보이는 긴토키에게 순순히 패배를 인정하는 일은 없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럴 법도 한 것이, 수도 그들이 훨씬 많고 저쪽은 하카마 차림의 스무살이나 됐을까 안 됐을까 하는 남자애 하나와 눈이 반쯤 풀린 남자 둘 뿐인 것이다. 그들에게 통찰력이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결국 깡패처럼 두들겨 패고 강도마냥 전원의 지갑을 몰수한 후에 두 사람은 배팅 센터를 나왔다. 평소 같으면 뭐라 한 마디 하기라도 할 긴토키겠지만 먼저 싸움을 건 건 저쪽이고, 거기에 지갑도 꽤 두둑해졌으니 소고를 탓하지 않았다.
"부수입도 생겼으니, 계획을 좀 바꾸죠."
라는 소고의 말에 볼링장 내지는 당구장에 갈 예정이 백화점 지하의 아이스링크로 바뀌었으니 불평할 거라곤 눈꼽만큼도 없다.
절기상 겨울에 해당하는 12월도 되기 전에 개장한 아이스링크는 주말을 맞아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왔는지 원복을 입은 아이들 그룹이 서너개, 가족으로 보이는 수많은 손님들과 그와 만만치 않게 많은 커플들. 옛날 같으면 저 많은 커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겠지만 지금의 긴토키는 걱정의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붙지마라. 덤으로 안지마. 키스도 하지마. 분명히 옆에 있는 꼬맹이가 자극받아서 승부욕에 불타 나한테 덤빌 거란 말이다. 긴토키는 스케이트 두 켤레를 들고 오는 소고를 흘끗 봤다. 가족 단위의 손님도 많고 아이들도 많아서 그런지 둘만의 세계에 빠져 미풍양속을 해치는 커플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피겨 스케이트하고 스피드 스케이트 두 종류가 있다는데 초보자는 피겨가 낫다고 해서 그걸로 빌려왔어요."
"피겨라고 하면 그거 아냐? 그 뭐냐…… 요전에 TV에서 중계한 거."
"맞을 거에요. 제대로 안 봐서 모르겠지만. 대원들이 그거 할 때마다 TV 앞에 모여 앉아 있더라구요."
물론 여자 경기 한정이다. 피겨 스케이팅에 관심은 없지만 매끄러운 바디라인을 자랑하는 여자 선수들이 노출이 많은 의상을 입고 빙판에서 춤추는 자태를 구경하기 위해서니까. 사내 자식들은 나이를 얼마나 쳐먹든 구제 불능이라니까. 긴토키는 소고의 말을 듣고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스케이트로 갈아신었다. 먼저 갈아신은 소고가 난간을 잡고 서서 바닥을 스케이트날로 툭툭 찍고 있었다. 날로 서있는 것이므로, 빙판 위에서 달리고 있지 않으면 맨땅에선 걷기가 힘들다. 긴토키는 소고가 뻗은 손을 잡고 의자에서 일어섰다.
나이의 앞자리수가 달라서인지 소고보다는 긴토키 쪽이 조금 더 고전했지만 둘 다 뛰어난 운동 신경으로 금세 어려움 없이 빙판을 달릴 수 있게 되었다. 긴토키는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 아이스링크를 도는 것만으로 이럭저럭 만족한 모양이었지만 소고는 아닌지, 피겨 스케이트가 너무 느리다며 중간에 나가서 스피드 스케이트로 갈아신고 왔다. 아이들과 그 보호자가 많아 전체적으로 흐름이 느린 아이스링크에서 유달리 눈에 띄는 젊은 남자에게 자극받은 게 틀림 없다고 긴토키는 생각했다. 스피드 스케이트를 신은 그 남자의 속도는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 이따금 그 남자가 애인으로 보이는 여자의 손을 끈다든가, 허리를 안고 함께 달린다든가, 그 여자의 앞에서 뒤로 달린다든가 하니 더하다. 쓸데없이 고생하는 건 싫어하면서 왜 굳이 싸우려고 드는 건지……. 긴토키는 스피드 스케이트에 적응하고 있는 소고를 봤다.
스피드 스케이트에 적응을 끝낸 소고는 본격적으로 빙판을 장악하고 나섰다. 아까 그 남자와는 댈 것도 없다. 정면 대결을 할 것도 없이, 남자가 한 바퀴를 돌고 있을 때 소고는 두 바퀴를 완주해서 긴토키에게로 돌아왔으니 말 다했다. 남자도 소고를 의식했는지 전력이었는데도.
"어땠어요?"
감속해서 긴토키와 속도를 맞춘 소고가 물었다. 아무래도 칭찬 받고 싶은 모양이다. 넌 투쟁심과 승부욕에 불타는 중2냐? 라는 게 솔직한 감상이지만, 여기서 그런 소릴 했다간 아까 그 남자처럼 손 잡고 달린다든가 허리를 안겠다고 나설지도 모른다.
"멋있었어."
결국 긴토키는 무난하게 칭찬하는 걸 택했다. 엄밀히 말하면, 거짓말은 아니다. 하카마 차림에 스케이트라는 언밸런스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는 멋있엇으니까. 잘생긴 녀석은 무슨 꼴을 하고 무슨 짓을 해도 그림이 되니 이쪽이 다 분할 정도다. 그것과 동시에 연인과 같이 온 여성들의 눈길을 한 번에 사로잡은 저 애가 자기 거라는 우월감도, 드러내진 못하지만 느낀 게 사실이다. 말해주진 않을 거지만.
하지만 그 말을 안 해도 소고는 충분한 모양이었다.
"진짜요?"
그냥 멋있다고 한 마디 했을 뿐인데 저렇게 좋을까. 물론 솔직하게 칭찬하는 데 인색하다는 자각은 있지만, 별로 그 정도까진…….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긴토키는 시야의 한 구석에 들어온 광경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아이가 넘어지고 있었다. 그것만이라면 아이스링크에 들어와서부터 몇 번이나 봤다. 아이들이 이렇게 많으니 넘어지는 일도 부지기수. 빙판에 무릎을 찍고 훌쩍이며 선생님의 인도로 밖으로 나가는 아이를 몇 명이나 봤다. 하지만 이번엔 경우가 다르다. 앞뒤로 손을 잡고 가던 여자아이 둘이 동시에 넘어지고 있었다. 팔이 자유롭지 못하면 중심을 잡기도 힘들다. 거기에 저대로는 확실하게 뒤에 가던 여자아이가 앞에 있던 아이의 스케이트날 위로 쓰러진다. 날카로운 건 아니지만, 저게 얼굴에라도 찍혔다간…… 상상만 해도 오싹하다.
상황은 순간이었다.
생각도 하기 전에 몸이 먼저 아이들을 향해 달린다. 그렇게 멀지도 않은데, 스케이트 날이 빙판 위를 미끄러지는 속도가 더디게 느껴질 정도로 아득하다. 가까이에 와서 손을 뻗는다. 뒤에 있던 아이를 잡아채듯이 끌어안고 긴토키는 억지로 몸을 돌렸다. 만약 사람들이 다니는 루트 위에 넘어지기라도 했다간 대참사다. 가속이 붙은 스케이트날은 그대로 그와 아이를 벽까지 밀고 갔다. 벽에 붙어있는 손잡이에 등이 세게 부딪친다. 그리고 그 순간, 그가 반사적으로 눈을 감기 직전에 그의 앞을 지나가는 것. 소고다.
다시 눈을 뜨자 순식간에 아이스링크를 반주해버린 소고가 보였다. 양손으로 넘어질 뻔한 앞의 아이를 안고 있었다. 어차피 가속 때문에 멈추기 힘들다면 긴토키처럼 벽에 부딪치는 것보단 그대로 일주해서 제자리로 돌아오는 쪽을 택한 듯 했다. 그리고 엄청난 속도로 나머지 반을 돌아 감속해 긴토키 앞에 섰다. 들려있다 싶이 안겨있는 아이는 갑작스러운 일에 멍해져 있었다. 그제서야 긴토키는 자기가 안고있는 아이를 내려다봤다. 이쪽도 너무 놀라 멍한 상태였다.
"치카 쨩! 미에 쨩!"
입구 쪽에서 인솔 선생님으로 보이는 여성이 그냥 신발을 신고 빙판 위를 서둘러 걷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치카와 미에라고 불린 아이 둘은 다친 곳 없이 무사했다. 치카 쪽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지만 아마 너무 놀라서일 것이다. 인솔 교사는 그런 치카와, 치카가 울어서 따라 울려고 하는 미에를 다독이며 긴토키와 소고에게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치카 쨩이랑 미에 쨩도.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해야죠?"
반쯤 우는 아이들이 두 사람에게 감사 인사를 하자, 교사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개를 숙이고서 아이 둘을 데리고 출구로 향했다. 교사와 아이들이 빙판 밖으로 나가는 걸 지켜본 후에 소고가 입을 열었다.
"당신 눈 좋네요."
"너야말로. 나야 바로 보였지만 넌 뒤돌아야 보이는데 빨리도 움직였네."
"표정 보고요."
물론 처음 넘어지려는 걸 보고 많이 놀라긴 했지만 그렇게 표정에 드러나는 타입이 아닌데….
"사실 나랑 얘기하는 도중에 다른 여자를 본 죄를 추궁해야 되는데 말이죠."
"아니, 여자랄까……."
"남잔 아니잖아요. 남자라도 안 되지만."
"……."
내가 휴대폰 없으니 망정이지, 있었으면 통화 기록에 문자 메시지함 뒤지는 건 기본이요 자기 외의 모든 등록 번호를 확인할 녀석이다. 긴토키는 먼저 다시 빙판 위를 달리기 시작했다. 속도는 빠르지 않다.
"아- 괜히 두근거렸네. 진심으로 멋있다고 잠깐 생각할 뻔 했는데 여전히 초딩이어서야……."
"진짜요?!"
뒤에서 얼른 소고가 따라오는 기색. 긴토키는 입가만 가만히 웃었다. 하지만 소고가 아무리 졸라도 긴토키는 그가 원하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아이를 구하는 모습이 진심으로 멋있었단 소릴 해봤자 괜히 기어오르기만 할 테니까. 조르고 조르다 못해 슬슬 실력 행사로 나가려는 소고를
"참 성가시네-. 됐어, 배고파. 나가서 밥 먹자, 밥."
이라는 말로 떼어내고 그는 먼저 출구로 향했다.
지하 아이스링크에서 지상으로 올라오자 창밖이 온통 캄캄했다. 벌써 저녁이라기엔 조금 늦은 시간이다. 배고프고 귀찮기도 해서 저녁 식사를 백화점 내 식당에서 떼우고 소고에게 다음엔 어디 갈 생각인지 묻자 "대기"라는 대답이 나왔다. 영문을 모르겠다. 하지만 긴토키가 물어도 소고는 제대로된 대답은 하지 않고 멋대로 커피 전문점으로 가더니 커피 두잔을 사서 돌아왔다.
"자요. 당신 건 초코 카라멜 어쩌구 하는 단 걸로 샀으니까 맛있을 거에요."
"아니, 그건 고마운데…… 뭘 대기하는데?"
"일단 나가죠."
대답해라, 대답. 긴토키는 얼굴을 찌푸렸지만 소고의 손에 이끌려 결국 백화점 밖 광장으로 나가게 됐다. 벤치에 앉는다. 차갑다. 그리고 춥다. 아직 가을에 더 가까운 초겨울이라지만 시간도 늦었는데 밖에 앉아서 대기라니. 하지만 긴토키가 재차 물어도 소고는 대답을 회피했다. "안에서 기다리면 안 돼?"라는 물음에도 부정적인 대답을 했을 뿐이다. 긴토키는 어쩔 수 없이 들고있던 커피컵에 입을 댔다. 달아서 맛있다. 당분을 섭취해서 그런지 기분이 좀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엄청 오래 기다려야 할지도 몰라요."
"얼마나?"
"글쎄요. 잘하면 새벽까지."
"뭐?!"
새벽이라니. 아직 자정까지도 두세시간 남았는데. 긴토키가 항의의 뜻을 담아 노려보자 "그래서 커피 사왔잖아요"라며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한가득인 긴토키였지만, 생각해보면 호텔에라도 끌려가서 새벽까지 당하는 것보단 훨씬 낫다. 최소한 체력 소모는 없으니까. 춥지만. 생각을 고친 긴토키가 다시 커피컵에 입을 댔다. 옆에서 소고도 커피를 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은 안 춥나. 여름에도 땀 한 방울 안 흘리더니.
"오늘은 재밌었죠?"
"글쎄다. 좀 더 지켜보고."
"그냥 재밌었다고 하면 어디 덧나요?"
"새벽까지 여기 앉아있게 될 줄 어떻게 알고."
뭐어…… 그건 나도 장담 못 해주지만요……. 옆에서 조금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좀 심했나. 생각해보면 오늘은 아침부터 지금까지 꽤…… 충실했던 것도…… 같고……. 긴토키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높은 백화점 건물과 나무, 그리고 지금은 틀지 않는 분수 쪽으로 조명이 켜져 있었다.
"……영화."
"네?"
"나 그런 영화 싫어한다고."
"알아요."
"알면 고르지마."
"당신 반응이 재밌는 걸 어떡해요."
"S놈."
칭찬으로 들을게요. 소고가 웃는다.
"스파게티는…… 나중에 내키면 집에서 해줄게."
"진짜죠? 꼭이에요?"
"아무도 없으면이야, 아무도 없으면."
스파게티 면 하나를 같이 먹으면서 입맞춤이라니, 도저히 애들 앞에서 할 수 없다. 하지만 요즘 카구라나 신파치가 소고만 나타나면 자리를 잘 피해주는 걸 생각하면 금방 현실화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리냐면……."
"재밌었다구요?"
끄덕이자, 손을 잡고있는 소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따뜻하다. 겨울에도 손 따뜻하구나. 좋다. 시선은 여전히 하늘. 비출 것 없는 조명이 이따금 색을 바꾸며 왔다갔다 했다. 전력 낭비다. 하다못해 12월이니까 트리라든가…….
"아."
처음에는 눈치채지 못할 만큼 작게. 비로 오해할 만큼 조금씩. 차갑게, 내리기 시작했다.
"눈이다."
하얀 결정. 처음엔 물방울 같았던 그것이 점차 하얀 눈송이의 형태를 하고 쏟아진다. 옆에서 소고가 "새벽까지 안 기다려도 되겠네요." 긴토키가 그를 봤다.
"눈 기다린 거였어?"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첫눈이요."
소고가 손을 뻗는다. 손바닥에 닿은 차가운 것이 금세 녹아 사라졌다.
"사실 정확히 1년째 되는 날은 며칠 전에 지났는데, 내 감각은 몇 월 몇 일이라기 보다는 '첫눈 오는 날'이거든요. 이거 맞추려고 기상청에 얼마나 전화를 했다구요."
오늘 밤부터 새벽이라길래 새벽까지 안 오면 바주카 먹여줄 생각이었어요. 아무렇지도 않게 무서운 소리를 덧붙인다. 일기 예보 좀 틀린 것 갖고 포격이라니, 경찰이 할 짓이냐. 잠깐 생각했지만 곧 사라진다. 1년. 1년이라고 했다.
"엄청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1년밖에 안 됐네……."
"그러게요. 강산이 1/10밖에 안 변했는데 우린 그 사이에 만리장성 쌓아버렸고 말이죠."
"만리장성만 쌓았냐? 남자끼리 결혼이니 뭐니 하는 터무니 없는 짓까지 하고. 1년 전의 내가 들으면 기절할 거다."
"나도 1년 전엔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조명을 받은 눈이 색으로 물든다. 붉은 색이 마치 꽃이 내리는 것 같았다.
"그래도 난 1년 전보단 지금이 좋아요."
"……."
"당신은요?"
이번엔 긴토키가 손바닥을 뒤집어서 소고의 손과 깍지를 꼈다. 옆에서 작게 웃음 소리가 들렸다.
"내년에 이 질문 했을 땐 똑바로 대답할 수 있을 정도로만 솔직해졌으면 좋겠네요."
"내년엔 그런 질문 안 해도 내 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만 어른이 되도록."
"노력해 볼게요. 그치만 내가 좀 더 어른이 돼도 당신 반응이 그대로면 재밌으니까 또 할 걸요?"
"……나도 노력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내년 생일엔 뭐 해줄까요? 필요 없으니까 생일날 오기나 해. 그건 미안하다니까요. 꼭 갈게요. 아니, 전날부터 전야제 해줄게요. 필요 없어, 멍청아. 너 전야제라고 해놓고 밤새도록 할 생각이잖아. 말이지, 긴상도 슬슬 30대의 마경으로 내달리고 있거든? 이제 생일날마다 한 살 한 살 늙어가고 있거든? 남자는 서른부터라잖아요. ……누구야, 이 녀석한테 저런 쓸데없는 소릴 한 건. 조만간 서른인 콘도 씨에요. 남자는 서른부터라니까 서른이 되면 형수님이 뒤돌아봐줄 거라고 굳게 믿고 있던데요. 뭐니, 그거. 무슨 그런 자기 위로가 다 있어. 그 전에, 위로냐? 30살이라고 곱하기 100 해서 3000대 쯤 맞고 강에 멍석말이해서 던져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아- 왠지 진짜 할 것 같네요, 형수님. 할 것 같네요가 아니라 진짜 할 걸. 하고도 남을 여자야. 긴토키가 서른 되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서른번만 할까요? ……뭘? 그야 당연히……. 얘 지금 무슨 무서운 소리 하려고 이러니이이이이이?!
눈은 자정을 넘어서까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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