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6.16. 작성
긴토키가 이상하다. 빨래를 널며 신파치는 생각했다. 마츠리에 갔다온 날부터 죽 저기압인 것이다. 아마 모르는 사람이 보면 평소랑 전혀 다를 바 없겠지만 신파치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평소처럼 카구라랑도 잘 지내고 실없는 소리도 하고 빈둥빈둥 놀고 있지만, 다르다. 무엇보다 벌써 나흘째 오키타가 코빼기도 안 보인다. 싸웠나? 했지만 일전에 한 번 싸웠을 때는 상대방을 압도시킬 정도로 분노 오오라를 뿜었었다. 뭐, 싸웠다기보다는 오키타가 일방적으로 잘못했던 모양이지만. 그렇다면 이번엔 긴토키가 오키타에게 뭘 잘못한 걸까? 그래서 저렇게 풀이 죽어있는 건가? 아니, 풀이 죽어있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우울, 하다고 해야할까.
덕분에 이쪽까지 기분이 가라앉는다. 신파치는 한숨을 쉬며 긴토키의 잠옷을 탁탁 펴 널었다. 늘 달라붙어서 러브러브인 것도 그렇게 기분이 좋진 않지만 이렇게 저기압골을 몰고 와도 곤란하다. 얼른 화해 안 하려나…… 이 상태로 나흘이라니, 어지간한 일이겠지만……. 애초에, 카구라도 카구라다. 신파치는 집 보고 있었지만 카구라는 같이 마츠리를 갔으니 뭔가를 알 테고, 여자의 육감인지는 몰라도 신파치보다 더 긴토키에 대해 민감하니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충 감이 잡힐 텐데 신파치에겐 한 마디도 안 하고. 귀띔을 좀 해줘도 좋을텐데. 그야, 당사자들 문제고…… 프라이버시지만…….
그렇게 신파치가 조금 뾰토롱해있자, 초인종이 울었다. 얼른 고개를 돌려 시계를 보자, 의뢰인 미팅 시간이었다.
"네, 나가요-!"
월초부터 미팅 스케줄을 잡아둔 (오키타와 신파치의 증언을 종합하면)야쿠자 같은 의뢰인이 왔다.
過 : 지날 과
①지나다 ②들리다 ③지나치다 ④나무라다
⑤괘 이름 ⑥예전 ⑦허물 ⑧잘못
"사노 토우야(佐野統也)라고 합니다."
뒤에 덩치 좋은 남자를 넷이나 대동한 청년은 그렇게 자기소개를 했다. 지금까지 해결사에 연락을 취했던 그 '야쿠자 같은 사람'은 부하였던 건지, 청년은 단정한 생김새였다. 키는 긴토키와 조금 비슷한 정도. 덩치도 크지 않다. 굳이 야쿠자틱한 부분을 찾자면, 참모 역할이 어울릴 것 같은 긴 눈초리 정도. 해결사 식구들이 한쪽 소파에 죽 앉고, 그 반대편엔 청년이 혼자 앉았다. 남자들은 소파 뒤에 뒷짐을 지고 죽 서있었다. 솔직히, 무섭다. 서있는 남자들에게도 차를 내올지 고민하다가 청년 것만 내오고 긴토키 옆에 앉은 신파치는 식은땀을 흘렸다. 카구라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지만 긴토키도 근육이 긴장했는지 얼굴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 그래요. 해결사엔 무슨 일로……?"
"사람을 좀 돌봐주셨으면 해서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하는 토우야. 사람을 찾아달라는 의뢰는 가끔 받지만 사람을 돌봐달라는 의뢰는 또 처음이다.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지 뒤에 있던 남자 하나가 품 안에서 서류 봉투를 하나 꺼내 토우야에게 넘겼다. 그 속에서 나오는 사진 한 장. 토우야는 손 끝으로 사진을 긴토키에게 내밀었다.
"저희 형님으로, '히츠야(弼也)'라고 합니다."
긴토키와 같이 사진을 들여다본 신파치는 자신의 형님이라고 소개한 토우야의 말을 의심했다. 사진 속의 남자는 아무리 봐도 토우야보다 어려보였던 것이다. 피부도 하얗고, 몸집도 키도 작아 보인다. 무엇보다 사진 속의 남자는 크레파스로 커다란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그 표정은 마치 장난감을 갖고 노는 어린아이 같아서, 도저히 토우야의 형님이라고는 믿기지 않았다.
"사진으로 아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형님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 마음에요. 3년 전 이와미자와의 보호소에서 찾았습니다."
"하아……."
"정신 연령이 8세 전후라고 하더군요. 기억 자체는 그것보다 더 이후의 일까지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아니, 저기…… 이런 건 그 뭐냐, 간병인이라든가 카운셀러라든가 그런 사람들 쓰는 게……. 해결사라고 해도 온갖 자격증을 다 갖고 있는 게 아니거든요? 아이 정도면 돌볼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진을 다시 토우야쪽으로 미는 긴토키. 토우야는 그 반응을 예상한 듯 별로 놀라지도, 불쾌해 하지도 않았다.
"보수라면 얼마든지 약속 드리겠습니다. 실제 정신 연령도 아이와 다를 바 없으니 아이를 돌본다고 생각해주시면 되구요."
"아니, 돈이나 뭐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러십니까."
긴토키의 말에 신파치는 내심 안심했다. 이번 달 해결사 사무소 사정이 어려운 건 사실이지만, 이 의뢰는 신파치도 내키지 않았다. 무엇보다, 의뢰인인 토우야. 입가는 가끔 웃었지만 눈초리가 긴 새카만 눈은, 한 번도 웃지 않았다. 묘한 느낌.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긴토키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처럼 토우야는 대답했지만 물러날 생각은 없는지 사진을 다시 긴토키 쪽으로 밀었다.
"그럼 혹시, 형님을 보신 적은 없으신지요?"
"하?"
"아주 옛날이라도, 스쳐 지난 거라도…… 기억에 없으신가요?"
"아니…… 없는데요."
즉답하는 긴토키. 그가 아는 한 사진 속의 남자, 히츠야를 본 일이 없다. 긴토키의 대답에 토우야는 다시 한 번 "그렇습니까"라며 사진을 치웠다.
"사실 형님은 원래 이러지 않으셨습니다. 자상하고…… 동생들을 생각하는 좋은 분이셨지요. 하지만, 제가 아는 한에서는…… 그렇군요. 오래 전에 있던 '어떤 전쟁'에 나가셔서 이렇게 된 모양입니다."
순간 귀에 들리지도 않을 만큼 높은 주파수의 무언가가, 귀를 치고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형님이 그 전쟁에 나간 게 벌써 12년 전 이야기입니다만…… 3년 전에 형님을 겨우 다시 찾았을 땐 이미 이런 상태셨습니다. 그 때는 아주 상태가 심각했었지요. 하루에도 몇 번씩 환각을 보고, 발작을 하고……. 그 때마다 형님이 찾으시는 분이 있더군요.
은색 머리칼에 피를 뒤집어쓰며, 전장을 달리는 상냥한 야샤가 있다고. 자신은 그에게 구원 받았다고."
긴토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반면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입을 벌리며 놀라는 신파치와 기분 나쁜 티를 역력히 드러내는 카구라.
"하지만 팬은 스타를 기억해도 스타는 팬을 기억하지 못 하는 모양입니다. 아쉽게 됐네요. 형님은 아직도, 그 사람을 찾고 있는데 말이죠."
"……그 의뢰, 받지."
"긴 상!"
"긴 쨩!"
카구라와 신파치가 동시에 외쳤다. 둘 다 느낀 것이다. 좋지 않다. 안 그래도 안 좋은 예감이 계속 들고 있는데, 양이 전쟁 얘기까지 꺼내고 긴토키가 시로야샤라는 걸 알고 찾아왔다는 것은…… 불안하다.
"승낙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럼 당장 출발하죠. 필요하신 물건은 저희 쪽에서 준비할 테니 짐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아."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두 사람. 하지만 긴토키는 그대로 멈췄다. 카구라와 긴토키가 각각 긴토키의 팔을 붙잡은 것이다. 불안한 눈. 토우야가 그 모습을 보더니
"차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먼저 나갔다. 토우야와 남자들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둘이 매달렸다.
"안 돼요, 긴 상! 지금이라도 좋으니까 의뢰 못 받겠다고 하세요!"
"안 된다니, 뭐가 안 되는데?"
"뭔진 모르지만 안 된다 해! 예감이 안 좋다 해. 마미- 가면 안 된다 해!"
"니들 말이지……"라며 한숨을 쉬는 긴토키.
"의뢰잖아? 의뢰."
"그래도……!"
"형인지 뭔지 얼굴만 보고 올 테니까."
"안 된다 해!"
긴토키는 물러서지 않고 팔에 매달리는 둘을 번갈아 보더니 나직하게 한 마디 했다.
"내가, 가야만 돼."
한 동안 정적. 먼저 팔을 놓은 것은 신파치였다. 한쪽 팔이 해방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는 긴토키. 하지만 카구라는 손을 꼭 잡고 늘어졌다.
"팟쯔앙, 긴 상 없다고 자율 휴업 하지 말고 제대로 출근해서 의뢰 받아놓도록."
"……네."
"카구라."
"……."
"카구라."
아이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카구라 쨩, 이라며 신파치도 불러봤지만 그래도 여전히 침묵을 지키며 손에 매달렸다. 긴토키는 빈 손으로 카구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혼자 자기 싫으면 신파치네 집에 가서 자. 그리고…… 양치 하고, 머리 꼭 말리고. 알았지?"
"……."
"집 잘 보고 있어."
긴토키가 허리를 숙여 아이의 뺨에 입을 맞췄다. 천천히 손에서 빠져나가는 힘. 남은 한 팔마저 해방된 긴토키는 평소와 다름 없는 걸음걸이로 현관문을 나섰다. 거실에는 아이 둘과 개가 한 마리. 카구라는 쪼그려 앉더니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렸다.
"괜찮을 거야…… 긴상이니까."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몇 번이고 신파치가 중얼거린 말은 마치 자기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1층으로 내려간 긴토키는 차에 별로 관심이 없는 그도 단번에 브랜드명을 댈 수 있는 고급차가 서있는 걸 보고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를 인도하듯 차문을 열어놓고 서있는 남자. 긴토키가 뒷자리에 타자 밖에서 문이 닫혔다. 다른 차가 또 있는 건지 문을 닫은 남자는 차에 타지 않았다. 이윽고 차가 출발하고 나서야 옆자리에 있던 토우야가 입을 열었다.
"이야- 이거 영광입니다. 그 '시로야샤'님을 이렇게 가까이서 뵙게 될 줄이야."
"형이 뭐랬다구?"
인사치레든 뭐든 이제 들을 생각이 없다는 듯한 긴토키의 태도에 토우야는 가볍게 웃었다.
"글쎄요…… 저도 자세히는 모르겠습니다. 형님이 하시는 말씀은 상당히…… 논리적이지 못한 게 많아서요. 인과관계가 확실하지 않은 것이 대부분이라……. 그래서 제가 형님이 하시는 말씀을 듣고 짜맞춘 것에 불과합니다만, 그걸로도 좋다면 말씀 드리지요."
12년 전, 양이 전쟁도 막바지에 이르렀던 때. 14살의 히츠야는 토우야와 어린 여동생 둘을 두고 고향을 떠나 전쟁에 참가했다. 본래 머리도 좋은 편이 아니고 그렇다고 칼을 잘 쓰는 것도 아닌 그였지만 나라와 고향을 지키겠다는 친구들의 뜻에 함께 했다. 하지만 그 전쟁은 시작부터 이미 패배가 결정되어있던 전쟁. 함께 고향을 떠난 친구들은 천인의 손에 하나 둘 찢기고, 그와 행동을 함께 하는 사람은 그를 포함해서 채 10명도 되지 않게 됐다. 이젠 막부니 쇼군이니 하는 소릴 할 처지가 아니었다. 살아서 고향으로, 아니, 전쟁 한 가운데서 목숨을 부지하기만 해도 다행인 상황. 일행은 한 동굴에 자리를 잡고 부상자를 치료하며 쉬었다. 더 이상 싸울 여력도 없다. 그 가운데 히츠야는 물을 구하러 혼자 동굴을 나왔다.
그리고 그는 그 주위에 진을 치고 있던 천인 부대를 만나 쫓기게 되었다. 천인은 십 수 명. 달릴 힘이 없다. 번뜩이는 이빨. 손톱. 창. 칼. 친구들처럼, 갈기갈기 찢길 것이다.
"여기서 당신이 등장합니다. 드라마틱 하지요?"
눈 앞에서 펄럭이는 흰색. 그것은, 찰나. 한 손에 검을, 한 손에 검집을 쥔 새하얀 야샤. 그의 등장과 동시에 상황은 일변했다. 튀기는 피는 그의 것이 아니라 외부인들의 것. 대기를 흔드는 처절한 비명 역시 그의 것이 아니라 외부인들의 것. 붉게 물든 하얀 사람은 천인을 모두 베어버리고 딱 한 번, 돌아봤다.
그것을 잊을 수 없다고 히츠야는 말했다. 자기보다 기껏해야 한두 살 많을 법한 어린 얼굴에는 표정이 없고, 은발은 군데군데 피가 묻어있었다. 눈에도, 빛이 없었다. 하지만 빛나 보였다. 최소한 히츠야에게는, 찬란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것 뿐. 한 번 돌아봤을 뿐인 백색의 소년은 그에게 말 한 마디 던지지 않고 자기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히츠야 역시도 그에게 말을 걸 용기조차 없어서 그냥 보내고 말았다.
그것 뿐인 연이다. 하잘 것 없고, 하찮은 연이다.
"그런 옛날 얘기랍니다."
얘기가 끝났을 때 긴토키는 멍하니 창밖 풍경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익숙한 풍경인지 그렇지 않은 풍경인지도 지금의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이야기 속의 히츠야는 그냥 조금 운이 좋았을 뿐이다. 긴토키가 다른 양이지사를 구하는 건 가끔 있는 일이지만, 역으로 구하지 못한 적도, 또 구하지 않은 적도 있었으니까. 아마 그를 쫓는 천인이 조금 더 많았으면 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가 팔팔하게 뛰어다니며 도망치고 있지 않았으면 구해봤자 얼마 못 가 죽을 거라며 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냥 우연이다. 그것 뿐이다. 잔인하지만 그것 뿐이다.
그것 뿐이다.
"도착했습니다."
차에서 내린 긴토키는 눈 앞에 보인 어마어마한 일식 저택을 보고 기가 찼다. 야쿠자인지 뭔진 몰라도 돈이라면 썩을 만큼 있는 모양이다. 운동장으로 착각할 만큼 넓은 앞마당은, 정말 운동장으로도 쓰이는 건지 여기저기 운동 기구 같은 게 보였다. 건물도 여러 채로 나뉘어져 있어서, 본채로 보이는 가장 큰 건물 외에도 눈에 들어오는 것만 네다섯 채가 보였다.
"어이, 사노 토우야군. 너 무슨 일 하냐?"
"중개업자, 라고 해두죠."
뭘 중개하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토우야가 안내한 히츠야의 방은 별채 중에서도 가장 깊숙히, 그리고 가장 작은 건물이었다. 방이라고 해도 그 별채가 통채로 히츠야의 방이고, 넓이로는 해결사 사무소를 세개 정도 넣고도 남을 정도였지만. 별채 안은 조용했다. 소리라고는 긴토키와 토우야, 그리고 뒤를 쫓아오는 남자 둘의 발소리 뿐. 이윽고 남자 둘이 지키고 서있는 화실이 보였다. 장지문은 열려있었다.
안에는 남자와 소녀가 있었다. 남자는 문에 등을 돌리고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로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기 때문에 보이지 않았다. 곁에서 그런 남자를 지켜보던 소녀가 먼저 긴토키와 토우야가 온 것을 알아차렸다. 10살이나 됐을까. 아이는 토우야를 보고 화들짝 놀라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히츠야님, 토우야님이…… 오셨습니다."
"으응-? 토-땅?"
높은 목소리. 아무래도 '쨩'이라고 하고 싶은데 혀가 짧은 듯 했다. 그림을 그리던 남자, 히츠야가 돌아봤다. 아무리 나이를 높게 잡아도 신파치보다 한 두살 정도 밖엔 안 많아 보였다. 큰 눈에 색소가 조금 부족한 듯한 밝은 갈색 머리. 토우야랑은 별로 닮지 않았다. 토우야가 화실로 들어갔다.
"형님, 저 왔어요."
"응-. 토-땅 안녕-."
토우야가 허리를 숙이자 목에 매달리는 히츠야. 형제가 아니라 부자, 그것도 히츠야 쪽이 아들 같다. 긴토키는 문에 기대 서서 둘을 보고만 있었다.
"형님, 귀한 손님이 오셨어요. 누가 왔는지 보세요."
"손니임?"
토우야가 손을 뻗자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히츠야. 그 눈이 긴토키를 비쳤다. 그가 숨을 들이쉬었다. 아주 잠깐의 정적. 입모양이 무언가를 말했지만 긴토키에게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자리를 박차고 달려왔다. 중간에 한 번 넘어질 뻔 하면서도 히츠야는 긴토키에게 달려와, 그를 덥썩 안았다.
"잠……!"
"시로야샤……!"
입에서 나오는 것은 소리가 아니라 공기 뿐.
"살아, 있었어……."
그 팔이, 긴토키를 꼭 죄었다.
"살아있었어…… 살아있었어…… 살아 있어, 줬어……."
목소리에 울음 소리가 섞인다.
"고마워……."
긴토키는 천장을 봤다.
"살아 있어줘서, 고마워……."
숨이 막힌다.
히츠야가 긴토키에게서 떨어진 건 한참이나 후였다. 사실 떨어졌다고 하기엔 어폐가 있는데, 포옹은 그만 뒀지만 손을 잡고 놓지 않는 것이다. 놓으라고 몇 번 말해도 듣지 않자 긴토키도 포기했다. 긴토키 옆에 히츠야, 그 옆에 소녀가 앉고 맞은 편에 토우야가 앉아 있었다. 어지간히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긴토키 손을 가지고 노는 히츠야. 토우야의 형이면 자기보다 몇 살 안 어릴 테니 기분이 묘하지만 일단 그냥 두었다.
"좋으세요? 형님."
"응- 좋아-."
"잘 됐네요. 시로야샤 님께서 죽 형님이랑 같이 있어 주신대요."
"뭐?! 어이, 난……."
"진짜?!"
팟 고개를 들고 긴토키를 보는 히츠야. 그 표정이 너무 기뻐 보여서 긴토키는 말문이 막혔다. 가만히 웃는 토우야의 입가엔 만족이 엿보였다.
"사무소의 직원들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연락도 저희 쪽에서 해두고, 수고비도 선불로 보내놓겠습니다."
"수고비라니, 난 아직……."
"그럼, 형님과 사이좋게 지내주세요. 필요하신 건 뭐든 사용인들이나 사츠키(五月)에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럼 전 일이 있어서 먼저 실례하죠."
'사용인'이라고 할 땐 문 밖에 서있는 남자들에게, '사츠키'라고 할 땐 소녀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기를 소개한 걸 알았는지 얼른 긴토키에게 고개를 숙이는 아이. 토우야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대로는 저 남자 생각대로 모든 일이 굴러가버린다. 긴토키는 얼굴을 찌푸렸다.
"어이!"
"……시로야챠? 화났어?"
"아…… 아니……."
몸을 웅크리는 히츠야. 얼굴에 명백히 공포의 색이 서려있었다. 토우야는 그 모습을 조금 굳은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사츠키에게 지시했다.
"사츠키. 시로야샤 님께 주의 사항을 일러두세요."
"아, 네! 토우야 님."
"그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토우야는 남자 둘과 함께 화실을 나갔다. 남겨진 건 긴토키와 사츠키, 히츠야. 문 앞에 서있던 남자 둘이 조용히 장지문을 닫았다. 여전히 히츠야가 자기를 두려운 눈으로 보고 있다는 걸 알고, 긴토키는 머리를 긁적였다.
"화난 거 아니야. 괜찮아."
"그래……?"
"아아."
"응……."
작게 대답하는 히츠야. 정말로 화가 안 난건지 확인하는 것처럼, 히츠야는 한참이나 긴토키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다가 빙긋이 웃었다.
"시로야챠 그려줄게!"
"하?"
"내가, 시로야챠 그려!"
"아, 응……."
뜬금없이 그렇게 선언하더니 히츠야는 크레파스를 쥐고 스케치북에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다. 시로야챠, 라는 건…… '시로야샤'가 발음이 제대로 안 되는 것 같았다. 긴토키는 무언가 걸리는 게 있었지만 사츠키가 말을 걸어 그것을 잊었다.
"저어…… 사츠키라고 합니다. 히츠야 님을 모시고 있습니다."
"모신다니…… 네가? 몇 살이야?"
"지난 달에 10살이 됐습니다……."
10살. 카구라보다 4살이나 어리다. 간병인 자격증이 있을리는 없고, 몸종 정도일까. 아까 발작이 일어난다고도 했으니 밖에 있는 남자 둘은 그런 때를 위해서 대기하고 있는 거겠지. 긴토키는 사츠키에게서 히츠야로 시선을 돌렸다. 유치원에나 걸려있을 법한 그림을 즐겁게 그리고 있었다.
"히츠야 님께선 돌발적인 행동이나 말씀이 잦으시니, 이해해 주시고 따라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 그 정도야 뭐. 돌발적인 행동이고 뭐고 그림 그리든가 노는 거 정도잖아?"
"예……. 그리고, 분노나 공포 같은 감정에 민감하시니까 되도록이면 소리를 지르거나 하지 않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아."
발작이란 건 그걸 가리킨 걸까?
"주의 사항은 이 정도입니다. 더 물어보실 거라도?"
"그러니까 난 여기서 이 녀석이랑 놀아주고, 얘기 해주고…… 그 정도만 하면 되는 거지?"
"예. 히츠야 님의 수발은 제가 담당하고 있으니 시로야샤 님께서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수발. 식사……는 이렇게 큰 집이니까 아마 부엌에서 일괄적으로 나올 거다. 그렇다면 먹이는 것 정도. 그리고 아마, 목욕. 아무리 정신연령이 어리다지만 성인 남자를 10살 짜리 여자애가 목욕 시킨다니……. 긴토키는 절로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시로야샤 님……?"
"아- 너…… 사츠키? 라고 했나? 10살 치고는 꽤 말을 얌전하게 쓰네."
"4년 전부터 저택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말씨는 그 때부터 교육 받은 것입니다."
"그 때부터 이 녀석 수발이라고?"
"아뇨. 히츠야 님을 모신지는 반년 정도 됩니다."
이거, 미성년 노동 어쩌구 하는 법에 걸리지 않나……? 뭐, 생업이 불법 관련일 것 같은 녀석이니까 그런 거 신경 안 쓰겠지만. 6살부터 저택 일에, 10살에 환자 수발이라…….
"고생이다."
긴토키는 사츠키에게 손을 뻗었다. 움찔하더니 눈을 꼭 감는 사츠키. 그 손이 멈췄다. 손 아래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아이.
"……어이?"
긴토키의 목소리에 아이가 놀라 눈을 떴다. 긴토키를 올려다보는 눈에는 두려움. 이상하다.
"아, 저어……. 죄, 죄송합니다! 남자분께 닿는 것은…… 저기, 무서, 워서……."
"……."
남자는 말없이 아이를 내려다 보다가, 그 손을 머리에 얹고 쓰다듬었다. 작게 떠는 사츠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손은 계속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주 천천히, 긴 시간이 걸려서 사츠키 몸의 떨림이 사라졌다. 그제서야 긴토키는 아이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저어……."
"히츠야, 다 그렸어?"
"으응-. 조금만 더-."
밑그림은 다 그리고 색칠을 하는 중인지 형형색색의 크레파스를 바꿔들며 분주히 스케치북 위를 왔다갔다 하고 있었다. 긴토키는 무릎을 세우고 앉아 그런 히츠야의 스케치북을 들여다봤다. 소리 없이 옆으로 오는 사츠키. 가만히 긴토키의 옷소매를 잡은 아이는 오랫동안 망설이다가, 들릴듯 말듯한 소리로 "고맙습니다……"라고 감사 인사를 했다. 뭐에 대한 감사인지 몰라서 긴토키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다 됐다! 시로야챠! 봐!"
자랑스럽게 스케치북을 내미는 히츠야. 밑그림의 수준이 채색에서 갑자기 비약적인 발전을 이룰 리도 없이, 결국 완성품도 유치원생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긴토키는 스케치북을 들고 "오-"라고 탄성을 질렀다.
"굉장하네. 그림 잘 그리네, 히츠야."
"응! 흐흥-. 토-땅도 그림 잘 그린다 그랬다? 이거, 토-땅."
히츠야가 스케치북을 몇 장 넘겨서 그림 한 장을 보여줬다. 까만 머리에 눈초리가 긴 까만 눈. 그림 자체의 수준이야 어쨌든 특징을 잘 잡은 그림이었다. 이번에도 긴토키의 탄성. 거기에 더 신이 났는지 히츠야가 아예 스케치북을 자기가 들고 한 장 한 장 넘기며 긴토키에게 자랑하기 시작했다.
"이건 있지, 삿치-."
"접니다."
"이건 이건, 아-야."
"아-야?"
긴토키가 자기보다 조금 뒤에 앉아있는 사츠키를 돌아봤다. 사츠키가 입을 손으로 가리고 긴토키에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2년 전에 돌아가신 히츠야 님의 둘째 동생분, 아야카(彩香) 님이십니다."
아아, 그러고보면 여동생이 둘 있다고 했었지.
"이건… 응… 소-카땅!"
"히츠야 님의 셋째 동생분, 소우카(早香) 님이십니다.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종합하자면, 토우야를 제외한 히츠야의 동생 둘은 다 죽었다는 얘기가 된다. 첫째는 이런 상태에, 둘째는 수상한 중개업자라니 박복한 집안이구만. 긴토키는 계속 팔락팔락 넘어가는 히츠야의 스케치북을 보며 생각했다. 아직 넘어갈 페이지가 1/3이나 남았는데 갑자기 히츠야가 스케치북 넘기는 걸 멈추더니, 바닥으로 툭 떨어뜨렸다.
"히츠야?"
"배고파. 삿치-."
"아, 네. 그럼 바로 저녁 준비를 하겠습니다."
얌전히 대답하며 일어서는 사츠키. 히츠야는 "응-"이라고 대꾸하고는 다시 긴토키 옆으로 와 붙었다. 자기 그림 자랑은 이제 됐는지 긴토키에게 크레파스를 쥐여주더니 "시로야챠도, 그려"라고 권유해왔다.
확실히, '돌발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제가 궁금한 건 수고비가 얼마인지가 아니라 긴 상이 언제 돌아오는지라구요!"
저녁, 해결사 사무소. 웬만해서는 화를 내는 일이 없는 신파치가 전화에 대고 기분 나쁜 티를 내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서 그런 신파치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 카구라. 그녀 역시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딨어요? 지금까지 저희랑 연락한 건 당신인데 이제와서 그런 건 모르단 게 말이…… 여보세요? 이봐요!"
전화기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지른 신파치였지만 수화기는 전자음만을 들려줄 뿐이었다. 신파치는 거칠게 수화기를 돌려놓고는 카구라쪽으로 몸을 돌렸다.
"'자세한 건 저도 모릅니다'래."
"……."
무거운 침묵. 신파치가 한숨을 쉬었다. 괜찮겠지, 괜찮겠지 생각하면서도 불안한 마음이 진정 되지를 않아서 의뢰인 쪽에 전화한 결과가 이거다. 계좌로 어마어마한 돈을 입금했다는 통보.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원하는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 녀석, 왜 안 오냐 해?"
"……."
"그 녀석, 평소에는 질릴 정도로 긴 쨩한테 붙어서 안 떨어지면서 왜 이럴 때, 없냐 해?"
으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여기에 없다. 신파치는 한 번 더 한숨을 쉬고, 앞머리를 한 번 걷어올렸다가 내렸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시간도 늦었고.
"카구라쨩, 오늘은 긴상 말대로 우리 집에서……."
"여기서 잔다 해."
"……그럼 나도 여기서 잘래."
이번엔 오타에에게 해결사 사무소에서 잔다는 걸 통보하기 위해 수화기를 든 신파치를 보고, 카구라는 고개를 뒤로 젖혔다. 천장. 비가 올 것 같았다. 일기 예보에선 그런 얘기가 없었는데도 막연히 그런 기분이 들었다.
사다하루가 구석에서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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