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리하타 코우키에게는 쿠로코 테츠야와 카가미 타이가라는 친구가 있다.
유감스럽게도, 이젠 그들에 관해서 더 이상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지만.
후리하타가 정식으로 두 사람과 처음 만난 것은 세이린 고등학교 농구부 첫 소집에서였다. 그러나 사실 후리하타는 입학식 때부터 카가미를 알고 있었다. 다른 남학생들보다 머리 하나 더 큰 거구. 거기다 붉고 검은 강렬한 머리색과 입을 다물면 험악한 인상. 불량학생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 스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첫인상은 험악했지만, 사실 카가미 자신은 험악한 인간이 아니었다. 물론 재능의 차이에서 일방적으로 거리감을 느끼는 일이 없는 건 아니었으나 그는 재능과 노력을 겸비한 좋은 에이스였고, 장난을 치면 반응도 좋고 그걸 담아두는 타입도 아니라 친구로서도 꽤 괜찮은 축에 속했다. 자기 안에 들인 사람에게는 많이 무르기도 하고, 가사만능이라는 의외의 면도 있다.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는 게 아니라고 후리하타는 마음속으로 반성했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쿠로코 역시 겉모습을 배반하는 인간이었다. 조용하고 얌전한, 흔히 말하는 초식계남자일 것 같은 얼굴로 카가미에게 먼저 주먹을 날리는 게 쿠로코다. 문학소년 같은 분위기지만 실은 그들 중에서 가장 포기를 싫어하고 열정적인 스포츠맨이라고 하면 단연 쿠로코였다. 동갑인데도 존대를 쓰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거리를 느끼게 하는 건 아닌, 의외로 얘기가 잘 통하는 친구.
다시 말해서 후리하타와 쿠로코와 카가미는, 더 넓게 보아서 세이린 농구부 2기생 다섯 명은 동료이자 친구로서 꽤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고 2학년이 되어도 그것은 이어져왔다.
2학년이 되어 새로 붙은 학급 배정표는 올해 후리하타와 카가미, 그리고 후쿠다와 카와하라가 같은 반임을 알렸다. 쿠로코만 혼자 다른 반에, 그것도 제일 멀리 떨어진 교실로 배치되었지만 친한 친구가 다른 반이 됐다고 징징거릴 나이는 아니었다. 쿠로코 본인이 그런 성격이 아니기도 하고. 카와하라가 “카가미랑 떨어져서 섭섭하겠네.”하며 놀리자 “이제 칠판이 잘 보일 것 같네요. 속이 다 시원합니다.”라고 답해서 카가미와 틱틱거리기도 했다.
그뿐이었다. 가끔은 2학년들끼리 점심시간에 모여서 식사 겸 회의를 하거나, 준비물을 빌리러 교실을 찾아가는 일이 있기는 했지만 쉬는 시간마다 찾아갈 만큼은 아니었다. 각자 새로운 반에서 새로운 친구를 만들고, 하지만 방과 후가 되면 농구부에 모여서 예전과 다름없이 연습을 하는. 그뿐이었다. 같은 동아리고 같은 반인 친구라도 반이 갈리게 되면 으레 이렇게 되는 것이다. 사이가 멀어진 것도 아니고, 싸운 것도 아니다. 그냥 그뿐이었다.
“그야 사토 양하고 사귀고 있으니까요.”
그뿐임에도 불구하고, 쿠로코의 한마디에 카가미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표정이 된 것을 후리하타는 보았다.
발단은 후리하타 자신의 말이었다. 오랜만에 농구부 2학년 전원이 카가미와 후리하타 반에 모여 식사하는 점심시간. 카가미는 먹느라 정신이 없고, 카와하라와 후쿠다, 쿠로코와 후리하타가 제각각 떠들고 있을 때였다. 지나가는 말로 후리하타는 물었다. 올해도 도서위원인 쿠로코가 같은 반의 사토 양과 늘 같은 날 대출 업무를 맡기에, 혹시 같은 반이라서 같은 날로 맞추었냐고. 물어본 후리하타에게 별 뜻은 없었고, 대답하는 쿠로코 역시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폭탄을 투하했다.
우연히 카가미 표정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아있었을 뿐이었다. 후리하타는 카가미의 시간이 정지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을 보았고, 그 표정이 경악을 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것은 전부 일순에 지나지 않았고, 카와하라와 후쿠다가 입을 모아 “여친이 생겼다고?!”하고 소리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땐 후리하타 역시 쿠로코 쪽을 보고 있었다.
그 날 점심시간은 그대로 ‘설마 네가 그럴 줄은 몰랐는데 제일 먼저 여친이 생기다니 심지어 그게 모모이 양이 아니라니 대체 누구야 불어’라는 취지의 쿠로코 심문회로 이어졌다.
사토 양-사토 시오리라는 소녀를 후리하타도 일단 알고는 있었다. 1학년 때부터 연이어 도서위원을 하는 자신과 쿠로코처럼 올해도 함께 도서위원회에 속하게 된 소녀였다. 다른 반이고, 친한 건 아니지만 가끔 도서실 담당 날짜가 겹치면 이야기 정도는 하는 사이라고 할까. 조용한 편이긴 하지만 그 외엔 대체로 평범한, 특필할 만한 부분은 없는 여학생이었다. 그런데 쿠로코랑 사귄다고? 그 엄청난 스타일과 미모를 자랑하는 모모이 양을 제치고?
“절 좋아해 주신다고 해서 제가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잖습니까. 여자분을 더 예쁘다는 이유로 좋아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요. 모모이 양은 매력적이고 좋은 분이지만, 저랑은 연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모두의 공통된 의문에 쿠로코는 담담하게 답했다. 거기에 대해서 후쿠다와 카와하라는 할 말이 많은 듯, 그래도 모모이는 너무 아깝다느니 하는 말을 한참이나 떠들었으나 후리하타는 납득했다. 사람 마음은 ‘마음’이지만 마음대로 안 되는 거니까. 벌써 조금 지난 일이지만, 후리하타 역시 좋아하던 여학생에게 거절당했다. 바라는 대로 전국우승을 하고 왔는데, 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원망해봤자 소용없는 일이고, 마음이 오지 않는 것을 떼를 써서 어떻게 하랴. 쿠로코 식으로 말하자면 연이 아니라고, 그렇게 후리하타는 마음을 접었다. 접는다고 접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접는 수밖에.
정체불명의 성토대회는 후리하타가 “그만 하자. 사토 양한테 실례잖아.”하고 일갈을 넣은 후에나 끝이 났다. 두 사람은 겸연쩍게 미안하다는 말을 건넸고 쿠로코는 자기가 사과 받을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똑같은 일을 다시 하지만 않으면 된다며 끄덕였다. 어색함을 무마하려는 것처럼 카와하라가 쿠로코에게 그들의 교제에 대해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고, 쿠로코는 천천히 식사를 하면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사토 양과 친해진 건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온 다음 날, 그녀가 같은 책을 들고 있는 것을 본 게 계기라는 것. 그 이후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독서 취향이 비슷했다는 것. 실은 작년 문화제 때도 서로 시간을 내서 함께 구경을 했었다는 것. 연습이 없는 주말엔 도서관에서 만났다는 것. 2학년이 되면서 같은 반이 되고, 같이 있는 시간이 더 늘었다는 것. 고백은 사토 양이 먼저 했다는 것. 둘 다 연인이 생겼다고 해서 찰싹 붙어 있는 타입이 아니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게 당연했다는 것. 동아리 때문에 시간도 잘 나지 않고 사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아직 이렇다 할 진전도 없다는 것.
“교칙에 모범 사례로 등록해도 될 것 같은 ‘건전한 교제’네 그냥. 사귀는 거 맞아? 손은 잡았냐?”
“노코멘트입니다. 그리고 저는 저희의 페이스에 맞춰서 함께 지내는 게 좋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별로 그런 걸 신경 쓰고 싶지는 않네요.”
카와하라와 후쿠다가 한 손으로는 손나팔을, 한 손으로는 엄지를 아래로 내리고 야유했다. 정작 당하는 본인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커플을 향한 솔로들의 질투는 정말 보고 있기 안타깝군요.”라고 해서 야유 소리를 더 크게 만들었지만.
“진짜 한 번 보고는 싶다. 농구부에 놀러 안 온대?”
“농구에 별로 관심이 없다는 모양이라…….”
“엑?! 우리 개교 이래 최초 전국우승 동아리잖아! 그런데 전혀 관심 없대? 진짜? 그래도 한 번 쯤은 보러 올만 하지 않나?”
“그러게요. 나중에 관심이 생기면 보러 오겠죠.”
“하~. 사귀는 거랑은 전혀 상관없다는 거 알지만, 쿠로코가 농구에 관심도 없는 애랑 사귄다고 하니까 뭔가 이상하다. 우리 중에 제일 농구바본데. 그럼 농구 얘기도 하나도 못 하겠네.”
“네. 하지만 책이나 작가 얘기는 정말 잘 통하고, 또 착한 사람이니까요. 농구는…… 관심을 가져주면 전 좋습니다만, 관심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그런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점심시간이 지나가고, 5교시 예령이 울리자 동기들은 각자 자기 반으로 돌아갔다. 도시락을 정리하고 교과서를 꺼내던 후리하타는 “후리.”하고 자신을 부르는 탁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아직 빵 봉지도 치우지 않은 카가미가 어딘가 허공을 보고 있었다. 왜 목소리가 탁한가 했더니 목이 잠긴 거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쿠로코가 말하는 내내 카가미는 한 마디도 안 했던 것 같은데……?
“여자친구 사귀면, 뭐 하는 거야……?”
“헤?”
순간 카가미의 질문을 후리하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은 벌써 고등학교 2학년이었고, 심지어 카가미는 미국에서 살다왔는데 ‘여자친구를 사귀면 뭐 하냐’니. 후리하타는 아닌 쪽이었지만 어떤 애들은 초등학생 때부터 사귀네 마네 하는 이야기가 나왔고, 요즘은 유치원생들도 손에 손을 잡고 크면 결혼할 거라고 한다는데.
하지만 뭘 그런 걸 묻느냐고 핀잔을 주기는 힘들었다. 카가미 표정이 마치 넋이 나간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른다고 해야 할까. 때문에 후리하타는 주저하면서도 순순히 입을 열었다.
“어……. 데이트하고?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 키스 말고 뭐…… 뭐 그런 것도 하고……?”
“……그럼 쿠로코도 해?”
쿠로코와 그 여자친구가, 라는 말이겠지만……. 후리하타는 잠시 고민했다. 아까 쿠로코는 손은 잡았냐는 질문에 노코멘트라고 했었지만, 자기들 페이스에 맞춰서 운운했던 걸 보면 아직인 것도 같고……. 하지만 뭐, 그 전에 헤어지지 않는 이상 사귀다 보면 언젠가는 하게 될 테니까.
“하겠지? 지금은 모르겠지만 앞으로는.”
후리하타의 대답에 카가미의 표정이 천천히 변했다. 입 꼬리가 더 내려가고, 눈과 눈 사이에 주름이 더 깊어지고. 찌푸린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불만이 있는 것만은 확실한 표정. 뭐가 불만인 걸까? 아니, 카와하라와 후쿠다도 불만이라면 불만이었다. 네가 제일 처음 여친이 생길 줄은 몰랐다느니, 나도 여친 있었으면 좋겠다느니. 후리하타도 거기에 조금은 동감한다. 하지만 카가미는 그런 뻔한 질투라고 하기에는, 여자친구가 생기면 뭘 하냐고 묻지를 않나…… 음…….
“카가미도 여친 있었으면 좋겠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닌데…….”
즉답이었다. 예상은 했었지만. 1학년 때부터 후리하타가 아는 것만 한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고백 받은 카가미다. 올해 발렌타인 데이에 가장 큰 수확을 거둔 것도 그였다. 여자친구를 만들고 싶었으면 벌써 만들었을 거다. 곧장 부정한 것치고는 카가미는 꽤 오랜 시간 망설이다 작게 말했다.
“그냥…… 이상해…….”
이상해? 하고 후리하타가 되묻자.
“중학교 때부터 타츠야한테 Girlfriend가 계속 있었으니까 사귄다는 게 어떤 건 줄은 아는데…… 그걸 쿠로코가 한다고 생각하니까, 이상해.”
복잡한 표정으로 카가미는 계속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은 그 움직임에 후리하타는 가만히 기다렸다. 곧, 아주 작은 목소리로 한 마디 더.
“……왠지, 싫어.”
…….
친구한테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이 내 일처럼 기쁠 필요까지야 없지만, 별 이유도 없이 싫다는 것도 좀……. 후리하타는 몸을 뒤로 젖히고서 잠시 고민했다. 일단 자기도 여자친구가 생겼으면 좋겠는데 쿠로코한테 먼저 생겨서 질투난다는 건 확실하게 아닌 것 같고…….
“카가미 있지, 히무로 씨한테 여친 생겼을 때도 그랬어?”
“타츠야? 음…… 방해된다고는 생각했었는데. 괜히 응원 와서 시끄럽게 하고, 농구 더 하고 싶은데 빨리 가자고 계속 타츠야한테 들러붙고.”
후리하타는 젖히고 있던 몸으로 바로 해서 카가미를 똑바로 봤다.
“카가미는 쿠로코를 되게 좋아하는구나.”
말없이, 카가미가 입을 떡 벌렸다. 거기에 후리하타는 조금 웃으며.
“아니야? 내가 볼 땐 맞는 거 같은데. 쿠로코 여친한테 쿠로코 뺏길까봐 싫다는 거잖아. 히무로 씨 때도 그랬다고 했으니까, 최소한 쿠로코를 의형제인 히무로 씨 만큼 좋아한다는 거 아냐?”
“아니, 타츠야 때는…….”
말끝을 흐리고서 카가미는 잠시 주저하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하고 중얼거리며 끙끙대는 카가미를 두고, 후리하타는 혼자 괜히 훈훈한 마음이 되어 교과서를 펼쳤다. 농구에는 정열적이면서 평소엔 의외로 드라이하고, 또 중학교 때부터 혼자 살아서 그런지 어딘가 달관한 구석이 있는 카가미다. 친구에게 여자친구가 생겨서 뺏길까봐 질투한다는 건 고등학교 2학년 남학생이 하기엔 많이 유치하고, 누군가는 남자끼리 소름 돋는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후리하타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괜찮지 않은가, 카가미에게 조금 유치한 구석이 있어도. 항상 친구들과 다 함께 가니까 안 그래 보이지만, 매일 혼자 그렇게 큰 집으로 돌아갈 카가미가 친구의 여자친구에게 조금 질투하는 것 정돈 괜찮지 않은가. 뭘 어떻게 하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그 만큼 쿠로코를, 친구를 좋아한다면 그 정도는.
“안 익숙해서 그래. 금방 괜찮아질 거야. 뭣하면 카가미도 여친 만들어 보지 그래? 얼마 전에도 1학년한테 불려나갔었잖아?”
후리하타의 말에 카가미는 “응…….”하고 낮은 소리를 냈지만 대답을 한 것 같지는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짐승이 끙끙 앓는 소리 같은 걸 내면서 그는 곧 커다란 몸을 웅크려 책상에 엎드렸다. 예전에 쿠로코가 했던 말이지만, 가끔 카가미가 안 쓰던 머리를 써보겠다고 끙끙 앓는 건 보기에 꽤 재미있다. 1년 동안 뒷자리에서 카가미를 지켜봐온 쿠로코에게 크게 동감하면서 후리하타는 의식을 5교시 수학으로 돌렸다.
농구부는 세이린의 모든 동아리 중에서 가장 늦게 끝나기 때문에 쿠로코는 여자친구를 부른 적이 없다고 했는데, 사토 양이 한 번 놀러 와서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걸 보면 카가미도 괜찮아질 거다. 사귀는 줄은 몰랐지만 후리하타는 도서실에서 이미 몇 번이나 두 사람을 본 적이 있다. 분위기도 그렇고 쿠로코가 하는 말도 그렇고, 조용하고 말이 잘 통하는 그런 커플이겠지. 나도 그런 여자친구가 생기면 좋겠다고, 후리하타는 생각했다.
그것뿐이었다. 이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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