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카가미는 눈에 띄는 녀석이었다. 190cm에 달하는 엄청난 키에 덩치, 거기다 어째서인지 중간에 색이 바뀌는 빨간 머리에 흉악하기 짝이 없는 인상. 그 압도적인 존재감은 좀처럼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당시엔 농구부라든가, 전혀 생각도 없었던 나도 입학식 때 스쳐지나간 카가미를 기억할 정도다. 선키고 앉은키고 주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위에 있었으니까 솔직히 같은 학년이 전부 카가미를 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전국 클래스에서 괜찮은 성적을 남긴 건 우리 농구부밖에 없다며 신문부에서 취재를 오기도 했고, 1학년 에이스인 카가미 사진을 잔뜩 찍어가 기사에 실은 것도 있으니 어쩌면 2학년을 포함한 전교생이 다 아는 게 아닐까? 선생님들 사이에서는…… 뭔가 좀 다른 의미로 유명할 것도 같지만.

   그리고 카가미와는 반대로…… 아니, 카가미까지 갈 것도 없고 나나 카와, 후쿠랑 비교해도 눈에 띄지 않는 사람도 있다. 2학기가 시작된 지금까지도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훨씬 많은…… 물론 그냥 조용히만 지내면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은 법이지만 쿠로코 양은 레벨이 다르다. 거기 있어도 있는지 모를 정도니까. 애초에 존재가 인식되지 않는다고 할까. 솔직히 카가미가 없었으면 같은 반인 사람들도 쿠로코 양이 있었는지도 모르고 1년이 지나갈 것 같은, 그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 카와가 전에 “우리가 졸업하기 전에 세이린에 7대 불가사의가 생기면 그 중 6개는 쿠로코”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걸 아무도 부정하지 못했을 정도로 존재감이 없다. 지각해도 선생님이 모르고, 수업 시간에 대놓고 자도 안 걸린다고 하니까 그 부분은 솔직히 부럽지만 아무래도 그만큼 존재감이 없다 보면 이런 저런 불편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카가미 군 말인데, 혹시 여친 있어?”

   그렇게 눈에 띄는 카가미랑 사귀는데도 농구부나 같은 반이 아니면 아무도 모른다던가.

   농구부야 뭐, 쿠로코 양이 처음 왔을 때부터 카가미 보러 왔구나 싶었고, 휴식 시간마다 둘이 얘기할 때의 거리라든가, 집에 같이 가는 걸 보고 있으면 모르고 싶어도 알게 된다. 같은 반 녀석들도 처음에는 존재조차 몰랐다가 카가미가 반에서 쿠로코 양에게 말을 거는 거라든가, 같이 밥 먹는 걸 보고 알게 됐다고.

   하지만 동아리도 반도 다르면 그런 걸 목격할 기회가 없으니, 카가미랑 사귀는 건 고사하고 애초에 쿠로코 양의 존재조차 모르는 것이다. 그렇게 사이가 좋은데도.

   쿠로코 양도 고생이네. 생각하며, 마시고 있던 우유팩 빨대에서 입을 떼고 대답해 주었다.

   “있어.”

   내 말에 나한테 말을 건 같은 반의 타나마치 양이 놀란 표정으로 “있어?!”라고 되물었다. 같은 중학교라며 꽤 자주 타나마치 양을 찾아오는 옆 반의 사쿠라이 양도 옆에서 눈을 크게 떴다. 그렇게 놀랄 일인가? 카가미한테 여친이 있어도 별로 이상하진 않을 것 같은데……. 쿠로코 양이랑은 봄부터 붙어 다녔고.

   “있어?! 누군데?! 2학년의 농구부 여자 매니저?!”

   ‘여자 매니저’는 맞지만 ‘2학년’이 붙은 시점에서 절대 쿠로코 양은 아니다. 농구부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이 저렇게 부르는 건 우리가 존경해 마지않는 농구부 유일의 여자 선배님이다.

   “아이다 선배님 말하는 거라면 매니저 아니고 감독님이야. 그리고 감독님, 카가미 여친 아냐.”

   내 말에 두 사람이 또 깜짝 놀랐다. 응, 그렇지. 처음 들으면 놀라지. 우리도 제일 처음 갔을 땐 당연히 매니저일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실은 가끔…… 아니, 꽤 자주 악마보다 더 무서운 감독님이셨지만. 그렇다고 매니저가 무섭지 않냐면, 우리한테는 잘 안 그러지만 툭하면 카가미에게 철권 중재를 가하는 걸 보면 쿠로코 양도 꽤나…….

   그리고 카가미랑 감독님이라니. 머릿속에 잠깐 그림을 그려보고 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지. 물론 감독님은 꽤 미인이라고 생각하고, 연습 메뉴를 제외하면 성격도 좋으시고, 머리도 좋으시고, 요리와 특정 부위를 제외하면 흠잡을 데 없는 분이시지만 카가미랑은…… 글쎄……. 애초에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런 대상이 아니기도 하고. 그리고 역시 카가미 옆에는 쿠로코 양이다. 응. 느낌이 딱 오네.

   “그럼 누구야? 다른 학교야?”

   감독님이 후보에서 빠지자 곧장 세이린 여학생 전체가 후보에서 제외됐다. 아니, 왜?

   “리호 쨩이 카가미 군 좋아한다고 해서 며칠 지켜봤는데, 우리 학교에 특별히 친하게 지내는 여자애 없던데?”

   있어. 다만 앞에 있어도 앞에 있는 것 같지 않은 것뿐이야. 쿠로코 양이랑 말하고 있어도 유심히 보지 않으면 카가미가 허공에 대고 얘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뿐이야.

   분명히 카가미 옆에 붙어서 마크하고 있는데도 연적에게 인식조차 되지 않는 쿠로코 양을 생각하자 눈물이 다 날 것 같다. 힘내, 쿠로코 양.

   “있어. 같은 반의 쿠로코 양. 농구부 1학년 매니저.”

   “1학년-? 농구부에 여자는 그, 감독님 하나 아니었어?”

   “응. 쿠로코 양까지 해서 둘. 물어본 적 없으니까 잘은 모르지만 4월부터 쿠로코 양이 카가미 보러 견학 왔었고, 그래서 우리 부에도 들어온 거니까 최소한 1학기 때부터는 사겼을 걸?”

   내 말에 타나마치 양과 사쿠라이 양이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둘 다 표정이 별로 밝지 않다. 방금 사쿠라이 양이 카가미를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당연한 거겠지만.

   그런데, 있구나. 카가미를 좋아하는 여자애가. 아니, 이렇게 말하면 카가미에게 좀 실례인 것도 같지만 카가미는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덩치도 크고 인상도 험악해서 엄청 무서우니까 솔직히 쿠로코 양을 모를 정도의 거리인 사쿠라이 양 같은 사람이 카가미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야 카가미는 무서워서 그렇지 얼굴 자체는 못 생긴 편이 아니고, 키는 평균보다 한참 크니까 180cm 이상은 더 잘 생겨 보인다는 법칙을 적용하면 훨씬 더 멋있을 테고, 알고 보면 요리도 잘 하고 이것저것 잘 챙겨주는 녀석이고……. 물론 우리의 자랑스러운 에이스니까, 농구하는 모습이 최고로 멋있지만.

   “그 쿠로코 양은 어떤 앤데? 예뻐?”

   질문이 방향을 바꿨다. 일단 쿠로코 양의 존재는 똑바로 인지한 것 같아 다행이긴 한데, 으음…….

   예쁜……가? 글쎄, 처음부터 카가미 여친으로 생각하고 봤으니까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 전체적으로 하얗고 눈도 크다고는 생각하지만, 안 꾸며서인지 ‘예쁘다’는 생각은 잘 안 든다. 혼자 서 있으면 안 그래 보이지만 의외로 커서 키도 남자 평균은 될 정도고. 사복도 한 번도 못 봤고…….

   굳이 말하자면 중성적?이라고 할까. 말투도 그렇고, 행동도 그렇고. 특히 머리에 피가 몰려서 폭주 직전인 카가미를 막을 때의 쿠로코 양은 남자인 나보다 더 남자답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늠름하다. 나는 아무리 말리기 위해서라도 카가미에게 주먹은 못 날리니까. 그 외에는 물통 하나를 통째로 머리에 부어버린다든가, 기척을 감추고 뒤에 가서 오금 공격을 해 쓰러뜨린다든가……. 매니저로서 한없이 듬직하지만, 예쁜지는…… 글쎄다.

   “예쁜지는 잘 모르겠는데, 키는 커. 그리고 늠름하고, 듬직하고? 매니저……라기보다는 감독 보조 같은 건데, 일 되게 잘 해.”

   생각해 보니까 이건 타나마치 양과 사쿠라이 양이 원하는 정보는 아니다. 매니저로서 일을 잘 하는지 못 하는지 같은 건 관심이 없을 테니까. 음…….

   “그리고 존재감 없고,”

   이건 빼놓을 수 없지. ‘존재감 없고’를 빼고 설명하면 쿠로코 양이 아니다.

   “책 많이 읽어서 아는 것도 많고,”

   다만 여러 분야의 책을 읽어서 잡학다식하다기 보다는 문학 작품을 넓게 읽는 모양이었다. 캡틴이랑은 이번에 새로 시작한 사극의 원작 소설 얘기를 하고 있었고, 이즈키 선배님이랑은 추리 소설 얘기, 감독님이랑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판타지 소설 얘기도 했었다. 얼마 전에는 카가미 국어 공부용이라고 큰 판형의 동화책도 들고 다녔다. 쉬는 시간에 나란히 앉아서 카가미가 더듬더듬 읽는 걸 도와주고 있었는데, 190이나 되는 남고딩과 170 가까이 될 것 같은 여고딩이 나란히 동화책을 읽는다는 건 생각보다 꽤 엄청난 광경이었다. 카와가 구석에서 킥킥거렸으니까.

   “밥 엄청 조금 먹고,”

   평소엔 각자 자기 반에서 먹으니까 볼 일이 없지만, 주말이나 방학 때 농구부끼리 다 같이 먹을 때 볼 수 있는 카가미와 쿠로코 양의 공방전은 꽤 재밌었다. 먹다 중간에 포기하려고 하는 쿠로코 양과 그걸 붙잡고 끝까지 먹이려는 카가미. 여름방학 직전에 벌어진 대격론(“그렇게 저에게 밥을 먹이고 싶으면 카가미 군이 해주십시오! 카가미 군 밥이라면 먹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내가 포기할 것 같냐?! 도시락 싸오면 되잖아! 남기기만 해라, 너!”) 끝에 카가미가 도시락을 싸오게 된 이후로는 볼 수 없게 됐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보통 도시락 같은 건 여친이 남친에게 여성스러움을 어필하기 위해 싸오는 거 아닌가 싶지만, 쿠로코 양은 삶은 계란밖에 못 만든다고 하니까. 그리고 카가미는 요리 잘 하고. 결과적으로 쿠로코 양은 밥을 다 먹게 됐고 거기에 카가미는 만족하는 모양이니 만만세다.

   “표정 변화 없고,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고…….”

   다만 이건 카가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누가 커플 아니랄까봐 눈빛으로 의사소통한다든가, 이름만 불러서 의사전달 하는 일이 허다하다. 둘이 있을 땐 뭐라 안 하겠지만 제발 우리들까지 다 있는데 “카가미 군.”에 “어.”하는 것만으로 대화 종료하고 바로 행동으로 옮기지 좀 않았으면 좋겠다. 당황스럽잖아. 너희는 그걸로 모든 뜻이 전달됐을지 몰라도 우린 아니란 말이야. 그나마 쿠로코 양은 그 후에 우리에게도 똑바로 설명해 주지만 카가미는 아니다. 오히려 우리가 왜 당황하는지 이해를 못 하는 듯이 머리 위에 물음표를 띄우고 쓸데없이 맑은 눈으로 우리를 보는 것이다. 아니, 그것만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거 너뿐이야. 무리야. 우리한텐 무리야. 우린 텔레파시라든가 압축언어 같은 거 안 쓴다고.

   물론 우리도 쿠로코 양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때가 있다. 쿠로코 양이 카가미를 볼 때나, 카가미 얘기를 할 때다. 뭐랄까…… 뭔가, 뿜어져 나온다고 할까……. 응……. 애정 광선 같은 게……. 특히 한 번도 시합에 못 나가고 죽 벤치인 나는 자주 쿠로코 양 옆자리에 앉는데, 시합 때 카가미가 덩크라도 하면 옆의 쿠로코 양이 참……. 응…… 난 아무것도 안 했는데 괜히 피로가 몰려온다. 나도 시합 때의 카가미는 멋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래, 나한테 멋있어 보일 정도니 쿠로코 양에게는 오죽하겠어…….

   “……카가미 군, 정말 그런 애랑 사귀는 거야?”

   가만히 있으면 꽤 미인인 얼굴을 찌푸리고서 타나마치 양이 내게 물었다. 아- 하긴. 지금 내가 말한 쿠로코 양 얘기로는 이런 반응을 하는 게 당연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커플만큼은 눈으로 봐야 알 수 있다고 해야 하나……. 역시 말로는 나랑 후쿠, 카와가 몰래 ‘카가미 부부’라고 부르는 두 사람 특유의 분위기는 잘 전해지지 않는다. 하지만 쿠로코 양 존재감 때문에 우리 말고 다른 사람들은 아예 보는 것조차 힘들고……. 여러 의미로 난해한 커플이다, 정말.

   하지만 둘 다 소중한 동료니까, 응…… 어쩔 수 없지.

   “사귀는 거 맞아. 완전 사이 좋아. 거의 부부 같다니까?”

   내 말에 사쿠라이 양이 움찔한 게 보였다. 미안하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일부러 못 본 척했다.

   “아침에 같이 학교 와서 같은 반이니까 교실에도 같이 들어가고, 앞뒤 자리니까 교실에서도 둘이서만 얘기하던가 얘기 안 해도 꼭 카가미가 옆으로 앉아서 쿠로코 양에게 등 안 보인다 그러고, 점심은 카가미가 쿠로코 양 거까지 도시락 싸와서 같이 먹고, 끝나고 둘 중 하나가 청소 당번이면 따로따로 와도 될 것 굳이 기다렸다가 둘이 같이 오고, 연습 중에도 휴식 시간만 되면 둘이서 붙어있고, 끝나면 같이 집에 가고……. 그렇게 하루 종일 붙어있으면서 안 질리는 게 신기할 정도라니까? 그래서 부부 같다고 하는 거지만.”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도, 물론 무시하고.

   “아, 물론 안 싸우는 건 아냐. 오히려 우리 부에서는 이 둘이 제일 많이 싸운다고 할까……. 하루에도 서너 번은 싸울 걸? 쿠로코 양, 안 그래 보이면서 카가미 놀리는 거 엄청 좋아하거든. 일부러 2호 데리고 카가미한테 돌진하기도 하고. 말로 싸우다가도 먼저 주먹 나가는 것도 쿠로코 양이고. 카가미는 착하고 자기 덩치도 아니까 장난으로라도 안 때리지만, 남자였으면 쥐어 박히기는 했을 걸? 요전에 카와가 쿠로코 양 따라서 카가미 공격했다가 붙잡혀서 머리만으로 공중 부양을…….”

   음- 이 정도면 되려나.

   “아, 미안. 우리 부 얘기해도 재미없지?”

   내 말에 썩 좋지 않은 표정이었던 타나마치 양과 조금 울상인 사쿠라이 양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려는 걸 보고, 그 전에.

   “응- 무슨 소리냐면, 그러니까…… 이런 말 하는 건 좀 그런데, 카가미는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말이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지 이게 ‘포기해’랑 뭐가 다르냐고 스스로도 생각하면서, 난 다시 우유팩 빨대를 입에 물었다.

   팩 속의 흰 우유는 어느 샌가 미지근해져 있었다. 차갑지 않은 우유만큼 맛없는 것도 없단 말이야.


   “———라는 일이 있어서.”

   “GJ입니다, 후리하타 군.”

   오늘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을 보고하자 곧장 쿠로코 양의 치하가 날아왔다. 카가미와 같이 있으면 아무래도 꺼내기 조금 껄끄러운 이야기지만, 오늘 카가미는 감독님의 명령 하에 미토베 선배님, 키요시 선배님과 함께 DF 특훈 중이다. 아무래도 생각대로 안 되는지 쉬는 시간인 지금까지도 나머지 공부. 우리가 쉬고 있다는 건 선배님들도 쉬는 시간인데 자기 때문에 못 쉬게 된 게 미안한지 조바심이 난 것 같아서, 그게 더 악영향을 미치는 게 나한테도 보였다. 조만간 그렇게 조급해하지 말라고 감독님께 맞지 않을까, 카가미…….

   “응, 뭐…… 나도 쿠로코 양이랑 카가미 편이니까. 사쿠라이 양에게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지만 둘 사이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건 별로 보고 싶지 않고.”

   “감사합니다. 그런데 후리하타 군, ‘도’라면…….”

   “헤?”

   저도 모르게 시선이 체육관 정문 쪽으로 향했다. 츠치다 선배님과 카와, 후쿠가 셋이서 2호랑 놀아주고 있었다.

   “후쿠한테 얘기 안 들었어? 전에 후쿠도 이런 소리했었는데.”

   다시 쿠로코 양 쪽으로 시선을 돌리자,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다. 무표정이지만…….   “그거 참, 후쿠다 군에게도 민폐를 끼친 모양이라 죄송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만…….”

   ……우와아, 무서…….

   “쿠, 쿠로코, 양……?”

   “나름 전력을 다 한 제 디펜스가 하나도 효과가 없었다고 하니, 어쩔 수 없다는 건 압니다만 꽤 씁쓸하군요.”

   역시 여자친구로서 남자친구 가드에는 전력을 다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쿠로코 양, 그건 ‘디펜스’라고 안 하지 않을까? 아니, 농구부 매니저로서는 적절한 어휘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물론 이런 소릴 할 분위기는 아니기에 잠자코 있는다.

   “아니, 저기…… 그렇게 걱정 안 해도……. 나나 후쿠도 그렇고, 카와도 분명히 똑같이 할 거야! 선배님들도 그렇고!”

   “…….”

   효과는 없었다! 라고 속으로 포켓몬스터의 상태 이상 공격이 빗나갔을 때 나레이션을 외치며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물론 속으로).

   “중학교 때 키세 군의 짜증스러운 인기를 질리도록 봐서 이런 상황에 면역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습니다만, 설마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키세 군의 인기는 체육관 주변에 여학생들이 몰려들어서 연습도 하기 힘든 민폐형이었습니다만, 카가미 군은 그런 게 없는 대신 진지하게 교제를 원하는 여학생들이 많더군요. 1학기 땐 다들 무서워해서 인기는커녕 제대로 말 거는 여학생조차 없었는데, 아무래도 한 학기 보고 나니 다들 험악한 인상에도 익숙해져서 그럴 만한 사람에게는 카가미 군의 진가가 보이게 되었다고 할까요. 물론 카가미 군의 진가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건 저라고 자부합니다만, 2학기 시작한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이렇게…….”

   히이이이이이……!

   카가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카가미랑 이야기할 때와는 정반대의 무언가를 내뿜으며 중얼거리는 쿠로코 양. 작은 목소리로 엄청 빠르게 중얼거려서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안 들리겠지만, 바로 옆에 있는 나에게 집중공격형 호러다. 밤에 아무도 없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뒤에서 이렇게 중얼거리면 지리지 않을까. 나도 그렇고, 잘 보면 개만이 아니라 귀신도 꽤 무서워하는 것 같은 카가미도.

   물론 아무리 동지가 있다고는 해도 그 동지가 지금 감독님에게 얻어맞으며 DF 특훈 중인 이상 공포는 나에게 집중되기 때문에, 어떻게든 이 호러의 원인을 해결해야 한다. 도망치고 싶지만 솔직히 쿠로코 양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 그럼 그, 위로?를 해야 할 것 같은데, 그치만, 이럴 땐 뭐라고 해야…….

   “괘, 괜찮다니까! 만에 하나 누가 고백한다고 해도 카가미한테는 쿠로코 양이 있는 걸! 카가미는 착한 녀석 맞지만 그런 거 똑바로 거절 못해서 쿠로코 양에게 상처 줄 만큼 바보는 아냐! 아니, 바카가미지만! 에, 아니, 그게 아니라, 저기……. 어…… 아니…… 미안.”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나도. 요는 카가미가 의외로 인기 많은 것 맞지만 그래도 걱정하지 말라고,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건데…….

   “후리하타 군은,”

   “헤?!”

   “잘 보고 계시는군요.”

   괜한 말을 한 거면 어떡하나 하고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가 고개를 들자, 어느 샌가 평소 텐션으로 돌아간 쿠로코 양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도저히 알 수 없는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화……인지 불안인지 하는 건 해결된 모양이다.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다. 계속 그 상태였으면, 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하다.

   잘 본다는 건, 그러니까, 카가미를?

   “아니 그건…… 쿠로코 양도 알다시피 난 겁쟁이니까. 초식동물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주변을 잘 살피는 수밖에 없달까…….”

   “그런가요. 하긴 게임 메이크도 이즈키 선배님에 비해서 상당히 신중한 편이죠, 후리하타 군은.”

   “으, 응……. 이즈키 선배님 따라가려면 한참 멀었지……. 아니,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죄송스럽기도 하고…….”

   “이즈키 선배님이 뛰어난 정통파 PG인 건 맞지만 후리하타 군의 게임 메이크에는 후리하타 군의 장점이 있으니 그렇게까지 비굴하게 생각할 건 없다고 봅니다만.”

   “하하. 말만이라도 고마워, 쿠로코 양.”

   “저, 빈말이나 농담은 싫어합니다만…….”

   내 말에 불만스러운 듯 말하는 쿠로코 양이지만 표정은 여전하다. 카가미랑은 좀 다른 의미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사는 것처럼 보이는 쿠로코 양이지만(특히 카가미에게) 그렇다고 성격이 나쁜 사람이냐면, 그런 건 절대 아니니까. 오히려 동기인 것도 있어서 감독님이 주전력 멤버를 위주로 관리에 들어가면 우리를 제일 잘 봐주는 건 쿠로코 양이다. 나랑은 담당이 겹치는 일은 잘 없지만 같은 도서 위원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신경 써서 그런 소리를 해준 거겠지.

   카가미도 그렇고 쿠로코 양도 그렇고, 남 신경 안 쓰고 자기 할 말 다 하는 것처럼 보이면서 실은 남을 먼저 생각해주는 타입이다. 카가미는 무뚝뚝하고 인상이 험악해서, 쿠로코 양은 표정 변화가 하나도 없어서 알기 힘들지만. 묘하게 닮은 커플이라니까. 역시 카가미 부부.

   “……타의가 없다는 건 압니다만, 곡해입니다. 그거.”

   “에? 뭐라고?”

   “아뇨. 후리하타 군은 성과를 내기 전까지는 못 믿는 타입인 것 같으니까요. 나중에 다시 얘기하죠.”

   아무래도 쿠로코 양 안에서는 이미 끝난 이야기인 듯, 우리 부의 유능한 매니저는 쿨하게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버렸다. 다른 곳이라고 해봤자, 쿠로코 양이 어딜 보는지는 꽤 뻔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난 쿠로코 양은 다시 한 번 내 쪽으로 몸을 틀더니.

   “아마 겨울…… 늦으면 봄에 다시 한 번 신세를 질 것 같습니다. 그 때는 잘 부탁드립니다.”

   “에? 에?! 무슨 얘기야?!”

   갑자기 얘기가 튀었다. 고개를 숙인 후 다시 든 쿠로코 양은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는 표정. 대체…….

   “관찰력과 배려심을 함께 갖춘 후리하타 군이라면 든든한 아군이 되어주지 않을까 해서요. 나중에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고 자기 말을 다 한 쿠로코 양은 “그럼.”이라며 일방적으로 대화를 마치고선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갔다. 난 도통 여학생답지 않은 보폭으로 걸어간 쿠로코 양이 여전히 성과도 없이 초조해하기만 하는 카가미에게 농구부의 명물 쿠로코 양의 오금 공격을 먹이는 걸 멍하니 볼 수밖에는 없었다.


   쿠로코 양의 ‘잘 부탁드립니다’가 실은 농구부 공인 커플 ‘카가미 부부(夫婦)’가 실은 ‘카가미 부부(夫夫)’였다는 엄청난 사실에 관련된 이야기였다는 건, 그의 말대로 다음 해 봄에야 알 수 있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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