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너머의 우리에게 if
쿠로코가 키세 집에 가지 않았을 경우.
개인적으로 저는 '쿠로코'를 하나도 안 불쌍하다고 생각합니다(야)
“쿠로콧치, 오늘 우리 집에 저녁 먹으러 안 올래요?”
먼저 옷을 다 갈아입은 듯, 벌써 가방을 챙기며 잔뜩 들뜬 표정으로 그렇게 묻는 키세에게 쿠로코는 “저녁이요?”라고 거의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네! 실은 어제 요리 프로그램에 나온 요리사를 카피해서 만들어봤는데 잘 됐거든요! 오늘은 더 어려운 거 해볼 생각이니까 쿠로콧치도 왔음 좋겠슴다!”
“요리인가요. 키세 군이 지금까지 했던 카피 중에 가장 쓸모 있는 카피네요.”
“엣, 농구 아니고?!”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사양하겠습니다. 오늘은 좀 피곤하네요.”
오늘 하루 종일 느낀 위화감 때문에 거의 답답하기까지 했던 쿠로코의 정신력은 방금 끝난 연습으로 정말로 한계를 맞이했다. 농구에서까지 느껴지는 위화감이라니.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는 것보다도 충격이 앞섰다. 이 이상 키세와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발하는 위화감과 더 이상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 모든 걸 덮어두고 침대에 누워버리고 싶었다. 죽은 듯이 자고 내일 일어나면 키세에게 느껴지는 위화감이 전부 사라져있을 거라는, 그런 기대와 함께.
피곤하다는 쿠로코의 말에 키세는 군말 없이 물러났고 옷을 다 갈아입은 쿠로코는 마치 도망치는 것처럼, 아니 실제로 도망쳐 집으로 향했다. 거짓말이다. 농구에서까지 위화감이 느껴진다니, 그럴 리 없다. 분명히, 그래 분명 몸 상태가 안 좋았던 거다. 아니면 수면 부족이든가. 그럴 리 없다. 자고 내일 일어나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괜찮아져 있을 것이 분명했다. 내일이 되면 거짓말처럼, 키세에게서 느낀 위화감을 사라져 있을 터였다.
분명, 그럴 것이었다.
체육관 지붕을 날려버릴 것 같은 환호성. 관객들이 전부 서서 환호와 박수를 보내는 관중석. 아쉬움이 섞여있기는 하지만 결과에 납득한 듯 후련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보는 상대팀. 귀가 다 먹먹한 승리의 함성 속에 쿠로코는 멍하니 서있었다. 스코어는 1점 차. 고교농구의 절대적 제왕이라고 불리는 테이코 고등학교를, 작년까지만 해도 전국대회도 나가지 못했던 세이린 고등학교가 제치고 고교 최강의 자리에 등극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쿠로코——!”
갑자기 몸에 가해지는 충격. 쓰러지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전력을 다했던 카가미가 마지막 힘을 짜내 자신에게 달려온 것이라는 건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팔을 전부 드러내는 농구 유니폼은 카가미의 뜨거운 살결과 쿠로코의 몸을 직접 닿게 만들었다. 데일 것 같은 열. 그렇게 움직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쿠로코 역시.
기쁨을 표현할 말도 떠오르지 않는 것처럼, 쿠로코의 몸을 껴안고 몇 번이나 이름만 부르던 카가미는 벅차오르는 숨과 함께 간신히, 성대가 아니라 심장이나 폐에서 소리를 끌어올린 것처럼 외쳤다.
“해냈어, 일본 제일……! 우리가 일본 제일이라고, 쿠로코!”
————일본 제일. 아아. 그래. 일본 제일. 나의 목표. 아니, 우리 모두의 목표. 그걸 위해서 이렇게 모두 땀을 흘리고, 가끔은 눈물을 흘리고, 피나는 노력을 해서, 겨우,
겨우 이 자리에,
모두와 함께,
나의 태양과, 함께
…….
…….
“아냐…….”
“……뭐?”
입술에서 굴러 떨어진 소리.
“……아냐…….”
“쿠로코……?”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그것은
“이게, 아냐…….”
“쿠,”
결국 바닥으로 떨어져서
“네가 아냐……!”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수많은 관중도, 분한 마음을 숨기고 유니폼으로 땀을 훔치던 테이코의 선수들도, 후보 선수들까지 전부 코트로 달려 나와 기뻐하던 세이린의 선수들까지 단 한 순간에, 그들 모두의 모습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뭐, 에, 하……?”
남겨진 것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고 그대로 주저 앉아버린 쿠로코와, 영문도 모르고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 카가미뿐이었다.
이게 아냐. 이게 아니다. 이것일 수가, 없었다.
주인공 쿠로코 테츠야가 속한 세이린 고등학교 농구부의 전국 대회 우승. 기적의 세대를 다 쓰러뜨린 끝에 도착한 그 종착점은 분명히 ‘쿠로코의 농구’의 올바른 결말일 터였다. 태양과 달이 힘을 모아, 팀원 모두와 힘을 합쳐 일궈낸 승리. 지금까지 쓰러뜨린 기적의 세대 모두가 축복하고 아쉽게 우승을 놓친 상대팀마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최고의 경기. 부족한 것 하나 없는 최고의 결말이다.
곁에 있는 것이 ‘카가미 타이가’가 아니었더라면.
……아니, 그것도 아니다.
이제 정말 솔직해질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제는 솔직해질 수밖에, 없지 않은가. 거짓말도 변명도 소용이 없다는 걸,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곁에 있는 것이 ‘오기하라 시게히로’가 아닌 이상 그 누구라도 의미가 없다는 걸, 인정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쿠, 쿠로코……. 사람들이…….”
“카가미 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부른 카가미의 말을, 쿠로코는 평소와 똑같이 평탄한 목소리로 가로막았다. 쿠로코가 고개를 들어 카가미를 올려다본 것과 정신없이 주변을 보던 카가미가 쿠로코 쪽으로 고개를 돌린 것은 정확히 동시. 두려움과 당혹을 잔뜩 담은 붉은 눈동자와 쿠로코는 마주했다.
농구의 신에게 사랑받은 것 같은 재능의 소유자. 인상이 험악하지만 실은 솔직하고 다정한 귀국자녀.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 요소만으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결국 자신들은 기호에 지나지 않으니까. ‘그’가 가지고 있던 기호를 전부 다 가진 카가미라면, 괜찮을 거라고. 분명히 아무렇지도 않게 ‘이쪽’에 녹아서 자신의 새로운 태양이 되어줄 거라고. 그러면 더 이상 아무도 사라지지 않고, 부족한 것도 없는, 그런 세상이, 그런 이야기가 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었다.
“미안해.”
착각이었다. 그렇게 쉽게 속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니, 전부 다 착각인 건 아니었으리라. 분명히 쿠로코의 ‘이야기’는 안정을 되찾았고 그 이후로 누구 하나 사라지는 사람도 없었다. 시간은 평화롭게 흘러갔고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카가미 역시 점차 ‘목걸이’가 있었던 곳에 손을 가져가는 일도 없게 되어, 쿠로코 곁에서 웃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다. 세계도 카가미도, 분명히 쿠로코는 완벽히 속여 넘겼다. 계획대로. 전부 계획대로, 너무나도 완벽하게 이루어졌다.
단 한 사람.
‘오기하라 시게히로’를 기억하고 있는 쿠로코 테츠야만을 속일 수 없었다.
자신의 앞자리에 앉던 게 카가미가 아닌 것을 알고 있는데. 자신의 옆에서 웃던 것도, 같이 연습하며 땀을 흘렸던 것도, 가장 처음 체육관에서 만나 태양과 달이 되겠노라 약속한 것도, 일본 제일을 약속한 것도, 전부, 전부 카가미가 아닌 것을 쿠로코 테츠야 단 한 사람만이 알고 있는데, 그만을 속일 수가 없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이젠 오기하라보다 카가미와 함께한 시간이 훨씬 길겠지. 그 시간 동안 그에게 어떠한 감정도 못 느낀 것이 아니다. 하지만.
“미안. ……미안해.”
“쿠로코……?”
“전부…… 거짓말이야.”
시작부터, 끝까지. 애초에 그 존재부터가.
쿠로코의 약속은, ‘오기하라’와.
카가미의 약속은, ‘쿠로코’와.
그렇다면 그 약속을 위해 노력한 시간에도, 간신히 이뤄낸 그 약속에도,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약속도 감정도 전부 서로를 향한 게 아니었는데. 아무리 오랜 시간을 함께 한다고 하더라도, 그 속에 어떻게 진실이 하나라도 있을 수 있다고.
모르는 게 아니었다. 카가미를 데리고 와봤자 결국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 알고 있었다. 아마 ‘그쪽’에 가기도 전부터 오기하라가 아니면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어디에선가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다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태양이 없어진 자리에서부터 무너지는 걸 도저히 그냥 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어디에라도 손을 뻗고 싶어서. 아닌 걸 알면서도 도저히 매달리지 않고는 있을 수가 없어서. 설사 결국 이렇게, 마지막의 마지막에 무너진다고 하더라도.
“쿠로코, 뭐가…….”
“‘테츠야’야, 카가미 군.”
다시 한 번 카가미의 말을 가로막으며 쿠로코는 접고 있던 무릎을 펴 일어섰다.
“네 ‘쿠로코’는 내가 아냐.”
훨씬 가까워진 거리에서 올려다본 카가미의 얼굴은 여전히 당혹의 색만을 띠고 있었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만든 건 쿠로코다. ‘저쪽’의 주민인 그에게서 필요 없는 기호를 떼어내고 억지로 자신의 태양 자리에 끼워 맞췄다. 카가미로서는 민폐라고밖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겠지. 쿠로코만 아니었어도 카가미는 벌써 한참 전에 ‘저쪽’의 ‘쿠로코’와 새로운 미래를 개척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말려들게 해서 미안해.”
“대체 뭐가……. 설마 이걸, 네가 했다고?”
관객도 선수도 모두 사라진 체육관을 가리키며 카가미가 말했으나 쿠로코는 애매하게 끄덕였다. 뭐 그것도, 굳이 따지자면 쿠로코가 한 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쿠로코가 포기하지만 않았어도 '세상'은, '이야기'는 평화롭게 계속 이어졌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오기하라의 빈자리에 카가미를 채워 넣어 억지로 유지하고 있던 세계의 핵은 지금 막 다시 공동(空洞)으로 돌아갔다. 남은 일은, 무너지는 것뿐이다.
“정말 미안해. 지금의 너에겐 설명해봤자 모르겠지만, 미안하다고밖엔 할 말이 없어. 하지만.”
그 순간 그들의 발밑으로 굉음과 진동이 내달렸다. 깜짝 놀라 아래를, 그리고 위와 옆을 정신없이 보는 카가미. 하지만 쿠로코는 카가미를 보는 시선을 옮기지 않았다. 놀랄 것도 없다. 벌써 옛저녁에 끝났어야 했던 붕괴가 다시 시작된 것뿐이다.
“걱정 마.”
체육관의 모든 유리창이 차례로 소리를 내며 깨지기 시작했다. 심령현상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은 그 광경에 카가미의 낯빛이 종잇장으로 변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쿠로코는 말했고, 카가미의 시선이 소리가 난 쪽을 향했다. 그리고.
“넌 책임지고, 내가 되돌려 보내 줄 테니까.”
쿠로코는 이젠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한 체육관 바닥을 걸어 카가미의 손을 잡아챘다. 그가 놀라 눈을 크게 뜨고, 다음 순간.
두 사람은 새카만 공간에 있었다.
“어, 무…….”
“따라 와.”
너무 놀라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카가미의 손을 쿠로코는 무작정 잡아끌었다. 위도 아래도 알 수 없는 공간이었지만 쿠로코는 마치 지도라도 머릿속에 있는 것처럼 망설임이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앞장섰다.
“넘어가는 거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주인공 권한을 해킹하려면 한 번은 ‘쿠로코 테츠야’와 동기화를 해야 해서 말이야. 나도 사실 널 데려올 때 이후로는 처음이긴 한데, 그때는 화장실 거울에서 붙잡았지만 이번엔 어디 있을지…… 찾았다.”
쿠로코는 카가미에게 말할 틈도 주지 않고 평소의 그답지 않게 빠른 소리로 읊조렸다. 그것이 진실로 카가미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함이라는 것을 물론 카가미는 몰랐고, 직후 보인 것에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사라졌다.
공중에 떠있는 작은 창. 새카맣기만 한 공간에 하나 붕 떠있는 창은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이질적이었으나, 그 존재보다 카가미를 더 경악하게 만든 것은 그 창 너머로 보인 풍경이었다.
쿠로코. 부실의 락커를 배경으로, 농구부 저지 차림의 쿠로코가 지금 막 에나멜백을 어깨에 메고 걷기 시작한 참이었다.
“쿠로코, 지금 저기…….”
“네 쿠로코야.”
“……하?”
쿠로코에 ‘너의’고 ‘나의’고가 왜 붙는단 말인가. 쿠로코는 쿠로코지. 아니, 물론 여기 쿠로코가 있는데 저 창밖에도 쿠로코가 있다는 건 이상한 일이지만…….
그런 카가미의 곤혹을 무시하고 쿠로코는 또 무작정 그의 손을 끌었다. 반사적으로 버티려고 했던 카가미가 하는 수 없이 쿠로코를 따라 한 발짝 내딛은 순간.
그곳은 익숙한, 자신의 방이었다.
카가미는 이제 무슨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만 있었다. 아까부터 이어지는 초현상 퍼레이드에 더 이상 놀랄 기운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분명히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했는데 갑자기 자신과 쿠로코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사라지질 않나, 체육관의 모든 유리가 깨지고 지진이 일어나질 않나, 쿠로코는 이상한 소릴 하질 않나, 갑자기 검은 공간으로 날아갔다 싶었더니 공중에 붕 떠있는 창문엔 또 다른 쿠로코가 보이고, 거기서 한 발짝 내딛었더니 도로 자기 집이었다.
전력투구한 결승전 40분보다 요 10분 좀 넘는 시간이 훨씬 더 지쳤다. 정신적으로. 아까부터 쿠로코는 뭔가 알고 있는 눈치던데 대체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목걸이는 침대 사이드테이블 서랍 안에 있어. 아마 보면 전부 다 기억이 날 거야.”
목걸이? 무슨 목걸이? 기억이 나다니, 뭐가? 그것을 묻기 위해 카가미는 어느 샌가 소리도 없이 이동해 자신의 뒤에 서있었던 ‘쿠로코’를 돌아봤다. 그곳에는 ‘쿠로코’가, 어째서인지 방 저편의 풍경이 조금 비쳐 보이는 쿠로코가 서있었다. 마치, 그의 몸이 투명해지고 있는 것처럼.
“쿠로, 코……?”
“생각보다 붕괴속도가 빠르네. 억지로 막고 있던 게 터져서 그런가?”
점점 반투명에 가까워지는——마치 유령이 되어가는 것 같은 모습으로도 쿠로코는 여전히 무표정이었다. 담담한 말투. 카가미는 너무나도 많은 정보가 쏟아져 들어온 탓에 거의 머리가 정지하기 일보직전이었다.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단 하나 확실한 것은, 이대로라면 아마 ‘쿠로코’는———.
“네가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뭐 근본적인 원인을 따지면 얘기가 좀 복잡해지지만, 반쯤은 자업자득이니까.”
희미하게 웃어 보인다. 무의식적으로 카가미는 ‘쿠로코’에게 손을 뻗으려고 오른손을 들었다가 “카가미 군.”이라고 마치 혼내는 듯한 그의 단호한 어조에 움직임을 멈췄다.
“앨리스도 도로시도, 이상한 나라에서의 모험을 마치면 집에 가야 하는 거야. 원래 자리로. 물론, 카가미 군도.”
말하면서 한 발 뒤로 물러난다. 그를 쫓으려 했던 카가미의 몸은 마치 구속이라도 당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괜찮아. 해킹도 수정도 벌써 끝냈으니까. 카가미 군이 목걸이를 다시 걸기만 하면, 모든 게 다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또 한 발, 뒤로. 입을 열었지만 카가미의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내 억지에 말려들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 고마웠어. 나, 카가미 군하고 하는 농구 꽤 좋아했어. 결국 마지막은 어떻게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좋아했어.”
마지막으로 한 발짝. 멈춰 선 그의 바로 뒤에서 장롱 문이 혼자서 덜컥 열렸다. 놀라 눈을 크게 뜬 카가미였으니 그것뿐. 무언가 소리를 지르려고 한 그의 성대는 여전히 떨릴 줄을 몰랐고, 다음 순간.
“바이바이, 카가미 군.”
‘쿠로코’는 그대로 뒤로 몸을 던지는 것처럼 장롱 문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어디인지는 알고 있었다. 틈만 나면 보러 왔으니까. 그 소년 안에서 ‘그’의 모습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 ‘그’의 편린이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그’의 기호를 가장 많이 갖고서 태어난 것은 카가미였지만 ‘그’가 사라진 직접적인 원인이 그 소년이라면 ‘그’는 결국 그 소년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카가미를 데려오던 그 날까지 ‘그’의 편린 한 조각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그걸 알면서도 마지막까지 그 소년을 보러 오는 자신은 참 집념덩어리라고, ‘쿠로코’는 발을 바닥에 디디며 생각했다. 허공에서 갑자기 사람이 나타난다는 비현실적인 광경이 펼쳐졌음에도 조용하기만 한 주택가. 들리는 거라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서 공을 튀기는 소리뿐이었다. 이 시간이면 어김없이 이 주변에 울려 퍼지는 소리. 때로는 지나가던 중학생이나 다른 학교 학생들과 시합을 하기도 하지만 오늘은 그 소년 혼자인 모양이었다.
‘쿠로코’는 얼마 걷지 않아 자신의 키보다도 높이 쳐진 펜스에 도착했다. 펜스가 네모나게 빙 두르고 있는 것은 그나마 관리가 잘 되는 축에 속하는 길거리 농구코트. 그리고 그 안에서 한 소년이 정신없이 공을 튀기며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오기와라 시게히로.
카가미와 비슷한 투톤 머리색이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며 ‘쿠로코’는 기척을 내지 않고 코트 안으로 들어갔다.
원망하는 마음이 없는 게 아니었다. 아니, 처음엔 원망밖에 없었다. 너만 태어나지 않았으면 ‘오기하라’가 사라지는 일도 없었을 텐데, 하고 거의 살의에 가까운 마음을 품은 적도 있었다. 어떻게 하면 저 소년 안에서 ‘오기하라’를 끌어낼 수 있을까 고심하며, ‘오기하라’만 되찾을 수 있다면 저 소년이 어찌 되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를 보는 ‘쿠로코’의 마음은 평안하기만 했다. ‘오기하라 시게히로’의 이름을 이어받은 그가, 아마 속에 지금도 ‘오기하라’를 안고 있을 그가 농구를 하는 모습을 보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마지막이어서일까. 이제 곧 자신의 세계와,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사라져버릴 목숨이라서. ‘쿠로코’는 희미하게 웃었다. 하긴 아까 카가미에게도 놀랍도록 솔직하게 그에 대한 마음을 털어놨었다. 사죄와 감사를. 유언을 남기는 것 같은 기분으로. 아니, 실제로 유언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마지막으로 보는 광경으로 오기와라를 택했으니 이제 아마 입을 여는 일도 없다. 그냥, 그를 보는 것만으로도——.
오기와라가 덩크슛을 넣자 낡은 골대가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짧은 시간 골대에 매달려있던 그가 착지하는 소리. 초점이 흐려져 있던 것을 제대로 맞추자 이제야 흐릿했던 오기와라가 제대로 보였다. “후-.”하고 길게 숨을 뱉은 그는 셔츠를 붙잡고 몇 번 팔락거리더니 그 정도로는 안 되겠는지 팔로 땀을 닦았다. 발은 골대를 저버리고 ‘쿠로코’ 쪽으로, 아니 벤치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벤치에 올려놓은 에나맬 백에서 타월이나 스포츠드링크를 꺼낼 요량이겠지. 원래도 존재감이 없는 ‘쿠로코’다. 거기다 아마 아까보다 훨씬 더 투명해져 있을 자신을 그가 발견할 리가…….
“우와아아아아아아———?!”
하지만 그런 쿠로코의 예상을 뒤엎고, 에나맬 백 지퍼로 손을 뻗었던 오기와라는 자기 앞에 있던 ‘쿠로코’의 몸에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유, 유유유유, 유령?!”
그대로 뒤로 자빠져서 ‘쿠로코’에게 삿대질을 했다. 설마 그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 채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대체 어떤 상태기에 저렇게 당장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유령이라고 외치는 걸까. ‘쿠로코’는 복잡미묘한 기분이었으나 굳이 손을 확인해 자신의 투명도를 살펴보진 않았다. 유령이 아니라고 대꾸를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는데.
“아니, 에…… 쿠로코……?”
놀랍게도, 오기와라는 ‘쿠로코’의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쿠로코……? 쿠로코지……? 어라, 그치만 유령……. 헤…… 서, 설마…… 쿠로코 주, 주주, 죽었……?!”
“일단 난 네가 아는 그 쿠로코가 아니니까 좀 진정해, 오기와라 군.”
“말했……?! 쿠로코가 아니…… 내 이름은 어떻게……?!”
놀랄 게 한두 가지가 아닌 모양이었다. ‘이쪽’의 쿠로코 테츠야가 유령이 되어 나타났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을 건 거였는데 역효과였다. ‘쿠로코’는 나오려고 하는 한숨을 겨우 삼켰다. 귀찮은데 그냥 이대로 소멸할 수 없을까.
“너, 너 정말 쿠로코 아냐……? 똑같이 생겼는데……?”
“유감스럽게도 아냐. 오기와라 군도 쿠로코 테츠야가 죽었단 소식은 들은 적 없잖아? 아무리 그래도 죽었으면 죽었다고 연락 정돈 오겠지.”
“그, 그런가……?”
‘오기하라’도 그렇고 카가미도 그렇고 쿠로코가 한 때 빛으로 삼았다던 아오미네도 그렇고, 왜 다들 이렇게 사고 능력이 많이 부족한 걸까. ‘쿠로코’는 잠시 고민했다.
“그럼 쿠로코랑 내 이름은 어떻게 알아?!”
“그야 귀신이니까. 원래 귀신은 뭐든 다 아는 거야. 몰랐어?”
“그래?!”
오기와라에게 있어서는 새로운 사실인 모양이었다. 귀신이라고 생각하는 상대에게 이렇게 솔직하게 놀라움을 표하는 걸 보고 있으면 뭐라고 해야 할까, 중학교 때 그런 일이 있었으면서 잘도 안 삐뚤어지고 이렇게 잘 컸다고 해야 할까…….
생각해보면 ‘오기하라’도 카가미도 이런 구석이 있었다. 덩치고 인상이고 절대 고등학생으로는 안 보이고 실제로 꽤 어른스러운 구석도 있으면서 마치 몸만 큰 어린애 같은. 오직 농구만을 바라보며 달려온 그대로, 순수하게.
눈부시게.
달로서,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빛을 발하는,
그런, 사람.
———그래.
“응. 한 번 맞춰볼까? 오기와라 군, 농구 좋아하지? 시작한 건 초등학교 때고, 중학교 때는 전국대회 결승까지 갔었고. 맞아?”
“지, 진짜 맞췄어……! 대단하다, 유령! ……어라? 근데 왜 농구 한정이야? 혹시 유령도 농구 좋아해?”
정말로 네가,
“——응. 좋아해. 농구.”
오기하라 군이구나.
“그래서 나 보고 있었던 거야?! 농구 하고 싶어서?!”
“응.”
“유령은 농구 못 해? 아, 공을 못 만지나? 그럼 어떡하지? 으음…… 농구를 좋아하는 유령이면 당연히 농구를 해야 성불한다든가, 그런 걸 텐데……. 으음…….”
정체불명의 농구 애호가 유령(?)을 성불시켜야 한다는 수수께끼의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엉뚱해서 소리를 내 웃으려고 한 ‘쿠로코’였으나 곧장 그는 이제 자신의 목이 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다는 걸 알았다.
정말로, 끝이, 가까이에.
“아, 맞아. 유령. 유령은 이름이 뭐야?”
내 이름.
내 이름은 있지, 오기하라 군.
“유령?”
———내 이름은…….
“……어라?”
오기와라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뭔가, 있었던 것 같은데.
“으응……?”
뭐였지? 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길거리 농구 코트에 자기 말고는 개미 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평일 이 시간대에는 보통 혼자다. 조금 더 기다리면 학원 끝나고 가는 길이라며 꽤 자주 보이는 중학생 서너 명이 오기는 하지만 아직 한참 남았는데…….
고개를 갸웃갸웃 하며 고민하던 오기와라였으나 곧 그는 생각하는 걸 포기했다. 애초에 뭘 그렇게 깊게 생각하는 게 성미에 안 맞기도 하다. 정말 중요한 일이면 나중에라도 생각이 나겠지. 머리를 벅벅 긁고서 그는 에나맬 백에 손을 뻗었다. 스포츠 타월을 꺼내 목과 얼굴을 닦고, 물통을 꺼내려고 한 순간 그것이 눈에 들어왔다. 휴대폰. 매일 보는 자신의 휴대폰은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그걸 본 순간 이젠 전파를 통해 이야기하는 게 더 익숙해진 친구 얼굴이 떠오른 건.
좀만 더 하고, 이따 쉴 때 쿠로코한테 전화나 할까. 세이린도 연습 끝났겠지?
오기와라는 물통을 반 쯤 비우며 생각한 후, 벤치에 타월을 적당히 던져두고서 코트로 돌아가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