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그래서 오늘은 「寝」자를 썼습니다.
2009.04.29. 작성
봄볕이 따뜻한 4월의 카부키쵸. 오키타와 함께 대로를 순찰하던 히지카타는 생각했다.
내 이 녀석이 데이트 있는 날은 절대 같은 구역 담당 안 할테다.
寝 : 잘 침
①자다 ②쉬다 ③그치다 ④눕다
⑤못생기다 ⑥방 ⑦잠 ⑧능침
적응이 안 된다.
"그런데 나리는 앞뒤 생각도 없이 초콜릿은 주는대로 다 넙죽넙죽 받아먹고, 그걸로 끝이면 또 모르는데 화이트데이에 또 사탕 주고…… 내가 진짜 방심할 틈이 없다니까요."
"헤에-."
"애초에 그 사람 분명히 그게 '의리 초코'가 아니란 거 다 알고서도 받는 거라구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히지카타의 대답은 누가 들어도 건성이었지만 오키타는 신경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지금 그에게는 제대로 보이는 것도, 제대로 들리는 것도 없는 모양이었다. 바로 옆에 있는 히지카타 표정이 썩 시원치 않고, 웬만해선 그러지 않는 그가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씹고 있는 것도 모를 정도니까.
정말 여러가지로 한계다. 히지카타는 큰 소리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걸 겨우 억눌렀다. 장담하는데, 평소의 오키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지금 그와 같은 기분을 느낄 것이다. 신문에까지 날 정도의 초S, 얼굴은 늘 속을 읽을 수 없는 포커 페이스, 무언가 생각하고 있다 하면 남 괴롭힐 생각 뿐. 얼굴이야 '왕자님' 소릴 들을 정도로 잘 생겼지만, 도무지 그걸 유효 활용하지 못하는 데에 정평이 난 오키타 소고가…….
"그치만 뭐, 그 날 나리가 여러가지 서비스 해줘서 봐줬지만요."
저렇게 행복하게 싱글벙글 웃으며 애인 자랑이라니,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아니, 이건 심장에 정말로 안 좋기 때문에 차라리 오래 안 사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콘도 씨, 살려줘. 난 더 이상 무리야. 도저히 이 녀석을 감당할 수 없어. 히지카타는 마음 속으로 지금쯤 스낵 스마일에 죽치고 있을 콘도에게 외쳤다. 오키타 키가 자기 허리밖에 안 됐을 때부터 봐온 히지카타였지만, 이 상황을 '소고도 어른이 됐다'라며 흐뭇해할 정도로 어른은 아닌 것이다. 대조적으로 콘도는 "가하하하하! 드디어 소고도 사랑의 즐거움을 알게 됐군!"이라며 호탕하게 웃었지만, 그 사람의 경우엔 어른이라기 보다는 단순히 생각이 없는 거다. 그리고 오키타가 사랑의 즐거움을 알게된 걸 기뻐하기 전에 본인 사랑부터 어떻게 할 생각을 해줬으면 한다. 부탁이니까. 콘도의 온갖 기행(奇行) 덕에 신센구미의 평판도 떨어질 때까지 떨어졌다. 물론 거기엔 대놓고 호모(정확히는 바이지만)라 광고하고 다니는 1번대 대장도 한 몫 했지만.
지금도
"아, 저거 새로 개봉한 영화 포스터네요. 봄인데 호러 영화 개봉이라니 감독은 돈 벌 생각이 있는건지 없는건지…. 나야 나리랑 보러 갈 거지만요."
이렇게 사람들 다 들으라는 듯이 데이트 계획 광고중이다. 부탁이니까 제발 그러지 마라. 듣는 내가 다 쪽팔린다. 히지카타는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너무 씹은 담배 필터가 슬슬 조각나서 식도로 들어올려고 하고 있었다. 빨리 뱉어야지.
호러 영화 포스터를 본 순간, "이거 DVD 빌려서 신센구미에서 다 같이 볼까요? 아, 히지카타씨는 무서운 거 못 보던가-?"라면서 히지카타를 갈굴 궁리부터 해야 그게 바로 오키타 소고인 거다. 그런데 히지카타의 히자도 안 꺼내고 바로 데이트 생각으로 직행이라니, 대체……. 그것만이라면 좀 낫지만, 그 얼굴이 생글생글 웃고 있다는 게 가장 안 좋다. 어지간히 오후에 있을 데이트가 기대되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수려한 얼굴의 소년이 상큼하게 웃고 있자 지나가는 여자들이 100이면 100, 얼굴을 붉히며 돌아봤지만 히지카타는 속으로 그녀들 한 마디 던졌다. 미안하지만 이 녀석 임자 있다. 유감스럽게도 나만한 사내 자식이.
이쯤 오자 히지카타는 잘못(이라고 하긴 좀 미묘하지만)이 오키타에게 있는 게 아니라 자기에게 있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오늘은 오키타가 오전 근무 뿐이라 혹시 그것마저도 땡땡이치고 긴토키에게로 달려갈까봐 자기를 같은 구역으로 돌린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잘못이었다. 오후부터 긴토키와 데이트라는 건 상정 범위 외였다. 그도 그럴 것이, 히지카타는 오키타가 긴토키와 교제하기 시작한 후 될 수 있는 한 두 사람에게 상관하지 않도록 나름 노력했던 것이다. 콘도마저도 둘의 교제를 응원했는데 자기만 반대해서 미안하다는 마음도 아주 없는 건 아니다. 결론적으론 그게 역효과였지만.
"아."
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던 히지카타는 갑자기 오키타가 낸 소리에 놀라 쳐다봤다. 오키타는 대복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여다보고 있었다. 전화? 문자?
"히지카타씨, 정오에요."
알람이었다.
"응? 아아……."
"그럼."
"……하?"
할 말은 그것 뿐인 듯 매정할 정도로 깔끔하게 돌아서는 오키타. 그리고 히지카타가 뭐라 말을 걸기도 전에 갑자기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신센구미에서 가장 빠르다는 밀정들에게조차 속도로 뒤지지않는 대장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남겨진 부장은 그저 멍하니 서있을 뿐. 꽤나 시간이 지나고나서야 히지카타는 깨달았다.
정오. 오늘 오키타는 오전 근무 뿐. 오후부터는 긴토키와 데이트.
"……그래, 가라."
그는 한숨처럼 말을 뱉고는 터덜터덜 둔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랑에 푹빠진 소년은 1분 1초라도 늦는 게 싫어서 오후가 되기가 무섭게 데이트하러 가버린 것이다. 차라리 이게 낫다. 어차피 녀석은 똑바로 일을 하겠다는 생각 자체가 없고, 들뜬 소고가 옆에 있어봤자 내 정신만 흐트러진다. 응. 이걸로 된 거다. 히지카타는 억지로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그렇게 바람처럼 사라진 오키타였지만, 그 마음이 꼭 결실을 맺는 것만은 아니었다.
"……."
십여분 뒤, 해결사 사무소 거실에 들어온 오키타는 흡사 귀신의 형상을 하고 자기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있었다.
신파치는 없었다. 아마 아직 출근 전이든가 장이라도 보러 갔겠지.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이 시간의 해결사 사무소에는 딱 두 사람이 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착 붙어있었다. 거기까진 별 문제도 아니다. 아니, 물론 열은 받지만 일상다반사다. 새삼스럽게 그걸로 틱틱거릴 것까진 없다. 하지만 긴토키가 소파에 앉아있고, 카구라가 그 무릎 위에 앉아있는 것도 모자라 잠들어 있으면 얘기는 조금 다르다.
"에…… 저기…… 그, 뭐냐……. 오키타군, 이건 있지 바다처럼 깊고 우주만큼 넓은 사정이……."
"알 바 아닌데요."
"아…… 그래."
곤란한 듯 시선을 피하는 긴토키. 오키타에게 변명하려고 입을 열었으면서도 손은 여전히 카구라 등을 두드리고 있다는 게 소년으로서는 매우 괘씸했다. 카구라만 자고 있으면 오히려 방해를 안 받으니 횡재지만, 저런 자세로 자고 있는 이상 긴토키가 할 말은 뻔하다.
"그래서, 데이트 하러 나가요? 안 나가요?"
"……못, 나가는, 데…… 요……."
거 봐. 그가 움직이면 카구라가 깨니까 못 움직이는 거다. 어젯밤 늦게도 의뢰가 있었단 얘길 들었으니, 또 카구라가 안 자고 그를 기다렸다가 이제 잠들었다든가 뭐 그런 거겠지. 상황 파악은 금방 끝났다. 하지만 그걸 마음이 납득하냐면, 절대 못 한다.
"나리, 잠깐 뒤로 붙어요. 지금 그 여자 목 떨굴 테니까."
"얘 지금 무슨 살벌한 소리 하니?!"
카구라를 감싸듯이 자기 옆으로 옮기는 긴토키. 아이는 깨는 일 없이 긴토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곤 여전히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그러면 검을 쥐고 있는 오키타의 손에 더 힘이 들어갈 거라는 건 긴토키도 알고 있었지만, 알면서도 회피할 수 없는 때가 있다. 비교적 자주.
"나리…… 내가, 얼마나……."
"아니, 잠깐 오키타군. 기, 긴상도 알아! 응. 오키타군 긴상하고 데이트하는 거 엄청 기대했지? 긴상도 그랬어. 그랬는데, 저기…… 어제 일이 좀 늦어져서 아침에 왔거든? 근데 카구라가 밤 새서 기다리고 있더라구……. 그래서 지금 잠든 건데……. 깨우기 미안하고, 저…… 깼는데 긴상 없다든가 하면……."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긴토키였다. 차가운 눈으로 그런 연인을 내려다보는 오키타. 남자는 입이 말랐다. 몇 번 경험해봐서 안 거지만, 오키타는 화났는데 아무 말도 안 할 때가 제일 무섭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단 점이 제일. 이번 건 꽤 크겠지…… 긴토키는 속이 다 쓰렸다. 이 데이트 약속은 며칠 전에 오키타가 긴토키 스케줄까지 물어보면서 잡은 것이다. 그런데 그걸 파토냈으니 절대 그냥은 안 넘어갈 거다. 그걸 알면서도 피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싫어진다.
"……나리."
"아- 네……."
존대말이 나오는 것도 어쩔 수 없다. 인간, 일단 궁지에 몰리면 그걸 피하려고 하는 게 당연한 거니까. 긴토키는 그렇게 자신을 정당화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발짝 다가오는 오키타. 남자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물론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카구라를 잘 받치면서. 그게 더 오키타의 신경을 긁는다는 건 긴토키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아- 정말, 알면서 하는 삽질만큼 허무한 것도 없다.
오키타는 그런 긴토키를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대뜸 소파에 누웠다. 긴토키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저기, 오키타군? 뭐하니?"
"나리한테 무릎베개 받고 있는데요. 왜요? 싫어요?"
"아니, 안 싫어. 전혀 안 싫어."
자기를 올려다보는 소년의 눈이 슥 가늘어지는 걸 보고 긴토키는 얼른 부정했다. 평소 같으면 사내 자식이 기분 나쁘게 무슨 무릎 베개냐고 뭐라 하겠지만 지금 그런 짓을 하기엔 목숨이 아깝다. 잠깐 기다려도 오키타는 비킬 기색이 없었다.
"안 불편해? 다리 소파 밖으로 나가있는데."
"괜찮아요."
"……나 다리 별로 안 부드러운데."
"알아요. 전에도 했었잖아요."
전에? 긴토키는 고개를 갸웃 했다. 전에……? 어라, 언제 오키타군한테 무릎 베개 해줬었나? 얼마 전에 경단집에서 갑자기 눕겠다고 덤비길래 지나가던 히지카타군한테 인계한 적은 있지만…….
"잊어버렸죠? 당신."
"에…… 응."
"차이나 없었을 때."
"아―…!"
있다. 작년 가을 일이다. 이럭저럭 벌써 반년 전 일이지만.
"그러고보면 그랬지."
"웃을 일이 아닌데요. 당신 그 때 날 완전히, 무슨 아들 취급하고……."
"카구라가 없어서 넋 나갔었으니까."
"그렇다고 날 차이나 대용으로 쓰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
"그걸 노리고 이용해먹은 네가 할 소리냐."
긴토키는 웃었다. 반년. 생각해보면 얼마 전엔 100일이었다. 벌써 반년. 겨우 반년.
"그 땐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말이야…."
긴토키의 손이 오키타의 머리칼을 쓸었다. 빛을 받으면 금색으로 반짝이는 곧은 머리카락. 생머리라고 괜히 심술부려 몇 번 잡아당긴 적은 있었지만 긴토키는 좋아했다. 그 아래로는 단정한 눈썹, 붉은 눈, 생각보다 선이 확실한 코, 늘 일자를 그리고 있지만 호를 그리면 홀려버릴 것 같은 입술. 긴토키의 손가락이 그 윤곽을 훑었다. 가만히 감기는 눈. 마치 잠든 것처럼, 무방비. 이 얼굴이 맘에 들었다. 좋다. 좋아졌다.
감겨있던 오키타의 눈이 반짝 뜨였다. 가늘게 구부러지는 눈. 웃는다. 이런식으로 웃는 건 긴토키 앞 뿐이란 걸 알고 있었기에, 그도 희미하게 따라 웃었다. 바닥을 향하고 있던 오키타의 손이 올라와선 자기 얼굴 위의 긴토키 손을 잡았다. 조금 끌어서 그 손목에 입술이 닿았다.
"나도 그 땐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요."
"헤에-. 그런 것치곤 그 이후로 맹렬한 대쉬였다만."
"그걸 알면서 무시한 나리는 진짜 너무한다고 생각 안 해요?"
"시끄러. 결과적으로 지금 이러고 있으니까 됐잖아."
"되긴 뭐가 돼요?"
아아, 정말. 긴토키는 자기 손을 잡고 있던 오키타의 손을 다시 잡아서 들어올렸다. 이번엔 긴토키의 입술이 그 손가락이 닿았다.
"됐지?"
"……봐줄게요."
"단순하긴."
"남잔 원래 단순한 생물이에요. 그러니까, 오늘 건은 밤에 4턴 정도로 합의 보죠."
"죽일 셈이냐……?"
"맘대로 데이트 파토낸 당신이 무슨 할 말이 있다고 그래요?"
"아니, 미안하다니까……."
긴토키는 손을 다시 오키타의 머리로 돌려놓고선 낮게 신음했다. 4번은 무리다. 그게 긴토키의 4번이면 그나마 좀 낫지만, 오키타를 기준으로 4번이면 지옥이다. 철야다. 이쪽은 이제 늙어가는 몸이라 밤 새도 멀쩡한 너랑은 다르단 말이다. 그는 대책이 시급했다. 냅두면 한다. 이녀석은 분명히 한다. 잠시 고민하던 긴토키는 "아"하고 작게 탄성을 질렀다.
"왜 그래요?"
긴토키는 대답 대신 손으로 오키타의 눈을 가렸다. 암전하는 시야. 오키타는 별 수 없이 일단 눈을 감았다. 오키타가 눈을 감은 걸 확인하고서야 긴토키는 손을 그의 머리로 옮겼다. 부드럽게 머리카락 사이로 들어오는 손가락. 손톱을 세우지 않고 가만히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그것이 기분 좋았다.
"이대로 한잠 자는 걸로 50% 삭감."
"너무 파격적이라고 생각 안 해요?"
"그럼-."
긴토키의 다른 손이 오키타의 가슴으로 가서는 규칙적으로 두드리기 시작했다. 가벼운 무게. 상냥한 손길. 확실히 이건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오키타는 눈을 뜨지 않은채 입으로만 웃었다.
"봐줄게요."
분명히 좋은 꿈을 꿀 수 있을거다. 깬 후에는 둔소로 돌아갈 일도 없이 긴토키랑 같이 있을테고, 밤까지 약속 받았다.
데이트는 조금 아쉽지만 좋은 날이다. 오키타는 규칙적인 리듬에 몸을 맡기고 정신을 천천히 수면 아래로 가라앉혔다.
한시간 쯤 후 장보고 돌아온 신파치는 진풍경을 보게 됐다. 긴토키의 어깨에 기대 자는 카구라, 무릎을 베고 자는 오키타, 그리고 한손을 오키타의 머리에, 한 손을 가슴에 둔 채 잠들어있는 긴토키. 저 셋이 사이좋게 봄볕을 받으며 낮잠이라니 진풍경도 이런 진풍경이 없다.
하지만 이 사실은 가장 먼저 일어난 긴토키가 오키타에게 들켜서 큰일로 번질 것을 걱정해 신파치한테 입단속을 시키면서 어둠에 묻히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