月のあおい 2013. 12. 22. 02:06

   반팔이었던 하복이 시원해 보이던 계절에서 춘추복 혼용 기간이 시작됐다 싶더니 어느 샌가 그것마저도 끝나서 세이린 고등학교는 긴팔 일색이 되어 있었다. 물론 남학생 교복은 가쿠란에 여학생 교복은 세일러복인 세이린에서 춘추복이라는 건 애초에 별 의미가 없는 것이긴 했지만. 블레이저였던 중학교 시절의 환절기 풍경을 잠시 떠올린 쿠로코였으나 곧 털어냈다. 당황스러울 때 금방 사고가 현실 도피하는 건 자신의 나쁜 버릇이다. 공부에 별 재능은 없는 머리지만 시합 때는 어떤 예측 불가능한 사태에도 비교적 착실하게 제 일을 하면서 왜 농구가 아니면 이렇게 쉽게 직무를 포기하는 건지.

   해서, 이 사태를 어쩌면 좋을까.

   쿠로코는 아래를 내려다보며 생각을 원래의 궤도로 되돌렸다. 오늘부터 혼용 기간이 끝나는데 그걸 잊어버리고 하복 차림으로 학교에 와 아침부터 교문을 소란스럽게 했던 범인이 누워 새근새근 자고 있었다. 아니, 이 키에 이 덩치에 ‘새근새근’은 좀 아닌가. 그럼 뭐라고 하지? 드르렁드르렁……이라고 하기에는 조용하다. 의외로.

   안 그래도 평소 수업 태도에 문제가 있다 보니 결국 오늘 아침의 하복 사건 때문에 카가미는 생활지도 담당 교사에게 호출을 받은 것이었다. 사실 의외로 카가미는 수업 태도는 착실하지 못해도 생활 태도는 착실한 편이지만, 염색한 게 아니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의혹을 거두지 않는 머리색이나 반항적으로 보이는 표정과 눈매 때문에 미운털이 박혀있었다. 그가 ‘불량 학생’으로 보이는 걸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조금만 더 잘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저 농구바보가 혹시라도 출장 정지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문제를 일으킬 리가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는 신뢰는 못하더라도 신용 정도는 해도 좋을 텐데. 물론 생활지도 담당 교사에게는 통하지 않는 변이었다.

   호출 시간은 ‘4교시 끝나고’, 즉 점심시간이다. 엄청난 양의 음식을 해치우는 카가미의 점심시간이 언제나 빠듯한 것을 생각하면 그가 얼굴을 찌푸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설교가 길어질 경우 매점에도 남는 빵이 없을 테고, 최악의 경우 카가미는 오늘 점심을 굶게 된다. 호출 소식을 들은 농구부의 다른 1학년들이 “카가미, 아사하는 거 아냐?”라고 걱정한 건, 뭐 조금 오버지만. 하지만 쿠로코라고 카가미가 걱정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렇게, 곧 5교시가 시작되는데도 교실에 나타나지 않는 그를 찾으러 학교를 돌아다닌 거였고. 설사 똑같이 자리에 없더라도 카가미가 없는 걸 모르는 교사는 없겠지만 자신이 없는 걸 아는 교사는 없을 터였다. 있는데도 출석이 안 불리는 건 불편하지만 없을 때 없는 걸 모르는 건 편하다고, 쿠로코는 조금 생각했다.

   물론 교실을 나온 시점에서는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만. 최악의 경우 아직도 설교 중이라든가, 아니면 직전에 해방되어 매점 아주머니께 매달려 있다든가, 하는 수 없이 학교 밖에 뭔갈 사러 갔다든가……. 그런데.

   “뭐가 어떻게 돼서 이런 데서 자고 있는 겁니까…….”

   어째서인지 카가미는 학교 본건물 뒤편의 벤치에 누워 자고 있었던 것이다.

   조금 지나치게 자유인 아닌가요, 카가미 군. 아오미네 군도 이런 짓은 안 하…… 지금은 할 것도 같습니다만, 최소한 좀 더 눈에 안 띄는 곳에서 잡니다. 왜 바보인데 높은 곳으로 안 가고 이런 데서 자고 있는 건가요. 숨으세요. 안 그래도 당신 눈에 띄니까 여러 의미로 엄청난 광경이 된단 말입니다, 이런 데서 자면.

   속으로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낸 쿠로코였지만 입 밖으로 내지도 않은 말이 자고 있는 카가미에게 들릴 리는 만무했다.

   아니, 이렇게 되기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이 아주 안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학생지도실은 별관, 그리고 카가미와 쿠로코의 학급인 1학년 B반 교실은 본관. 별관에서 본관으로 가려면 이쪽 길이 제일 빠르고, 간신히 점심시간이 끝나기 직전에 별관을 나와 본관으로 향하던 카가미가 공복에 져서 벤치에 앉았다가 에너지 고갈로 그대로 잠들었다던가, 뭐 그런 거겠지. 연비가 나쁜 사람이다, 정말. 무인도에 떨어지면 제일 먼저 죽……지는 않고 그곳의 동식물로 어떻게든 연명하겠지. 최소한 삶은 달걀밖에 못 만드는 자신보다는 훨씬 윤택한 식생활을 영위할 것이다. 빌붙을 거지만.

   사실 카가미가 자고 있는 것까지도, 뭐 좋았다. 당장 실력 행사로 깨워서 교실로 연행하면 되는 일이다. 다만, 다만…….

   왜 꽃잎 같은 걸 손에 쥐고 이렇게 행복한 표정으로 자고 있는 걸까.

   크고 긴 몸을 어떻게든 작게 움츠려 옆으로 누워있는 카가미의, 얼굴 앞에서 약하게 주먹을 쥐고 있는 큰 손. 그 안에 코스모스로 보이는 꽃이 아직 싱싱한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자고 있는 카가미는 꽤 자주 본다. 주로 수업 시간에. 일전에는 시합 직전에도 락커룸에서 잔 적이 있을 정도다. 다만 지금껏 본 카가미의 자는 모습은 모두 ‘농구에 전력을 쏟기 위해 힘을 비축하는 중인 호랑이’라고 형용해야할 것들이었다. 물론 이 사람의 파트너로서 그 모습이 싫은 건 아니지만, 이런 표정은, 호랑이 같은 게 아니라 아이 같이 이렇게 잠들어 있는 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대를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수업 시간에 엎드려 자고 있는 걸 보는 것처럼 조금 한심하게 생각하는 것도, 저래서 이번 시험은 또 어떻게 할 건지 걱정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그게 아니다. 다만 이 마음을, 어떻게 말로 해야 할지. 이름 한 번 부르지 않고 이렇게 우두커니 서서 내려다보는 마음을. 햇빛이 들지 않아 눈부시지 않을 테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걸. 하복인데 춥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걸. 환절기엔 몸 상태가 별로 좋지 않으면서 굳이 이 사람에게 자신의 교복 재킷을 벗어 덮어주고 싶은 걸. 뭐라고, 해야. 이걸 뭐라고, 해야.

   이르자면. 그래, 이르자면. 카가미가 지금 약하게 손 안에 쥐고 있는 꽃잎처럼. 살며시, 바스라지지 않게 가만히 쥐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게, 누군가의 발에 밟히지 않게, 하지만 이 손 안에 있도록, 놓치지 않게, 그렇게.

   그런 마음을, 이 사람에게.

   바람이 분다고 날아갈 사람이 아닌데. 누가 밟는다고 밟힐 사람이 아닌데. 손 안에 쥐고 있다고 계속 거기 머물러있을 사람이 아닌데. 그런데. 그런데도.

   “……교실에 그냥 있을 걸 그랬네요.”

   그러면 이런 마음을 알게 되는 일은 죽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말하면서 결국 재킷을 벗어 덮어주니까 정말로 구제할 도리가 없다고, 쿠로코는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었다.

 

   진상은 “에너지 고갈로 일단 벤치에 앉았는데 손이 닿는 곳에 코스모스가 있어서 이거 못 먹나 하고 들여다보고 있다 보니까 잠들었다”였다. 쿠로코는 저도 모르게 회전을 더한 패스 기술을 공이 아니라 카가미의 옆구리를 상대로 선보일 뻔했지만, “점심 못 먹은 만큼 저녁에 맛있는 거 할 건데, 와라 너.”라고 툭 던진 카가미가 “그…… 재킷, 그거도…… 있고…….”라며 뺨을 긁기에, 조용히 손을 내린 것이었다.